〈 8화 〉8화-이세계에서의 첫 캠핑
“안 그래도 술도 좀 준비해왔어요. 아까 먹은 맥주도 있고 우리만의 소주도 있고 막걸리라는 것도 있는데 각각의 맛이 다르죠. 섞어 먹어도 또 다른 술도 있고.”
“뭐라고? 아까 먹은 그 맥주가 더 있나? 그리고 술을 섞어 마신다니? 생전 처음 듣는 발상이군. 돈 주고도 못 마실 귀한 술 같아서 아까 마신 맥주를 내 감히 다시 먹을 수 있겠냐면서 청하질 못했어. 정후 군, 내게 그 술들을 맛 볼 기회를 줄 수 있겠나? 내 이 은혜는 꼭 갚겠네.”
“엘프는 은혜도 원한도 잘 안 잊어.”
“일단 아까 먹던 맥주들부터 이어 마실까요?”
아까 샤워하는 동안 소주와 함께 냉동실에 넣어서 냉각시켜 놓은 맥주의 온도가 마시기에 딱 좋게 느껴졌다.
셋 앞으로 싸우지 말라고 똑같이 2캔씩 꺼내줬더니 마치 양손의 과자를 쥐고 먹는 아이들처럼 각자 한손씩 캔을 챙기고 마시기 시작했다.
‘햄스터같기도 하고.’
“어때요? 시원하죠?”
“우리 드워프들이 먹는 맥주도 내 입맛에는 미지근하더라도 맛있는데 이건 또 다르군. 목 넘김이 정말 부드럽고 몸 속 깊은 곳까지 시원해지는 것 같아.”
“어떻게 이렇게 시원하게 보관할 수가 있는 거지?”
“크으으으으.또 없어? 이거 진짜 내 스타일이다."
‘이 남자 진짜 뭐지?’
‘우리가 마시는 술과는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진 것 같군.’
‘맛있다.’
음미하면서 마시는 버크 아저씨와 다르게 코엘 누나와 에디나 누나는 좀 달리는 스타일인지 벌써 2캔을 다 마셔서 비웠고 먹고 싶은 만큼 편히 마시라고 추가로 남은 캔들을 다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니까 둘은 번개같이 달려들어 반씩 나눠서 자기 쪽으로 챙긴 뒤 의자에 앉았다.
세 사람이 술을 마시는 동안 나도 못 먹은 고기쌈을 먹고 나니 배도 부르고 취기도 살짝 올라서 기분이 좋아졌다.
‘이야, 이게 사람 사는 맛인데 말이지. 그동안 방구석에 처박혀서 고생 많았다. 이정후. 음악이나 틀어볼까.’
아까 공기계에 넣어둔 음악 중에 분위기에 어울릴 법한 클래식 음악을 블루투스 스피커에 연동해서 틀어주니 캔맥주를 우악스럽게 입 안으로 쏟아 넣던 코엘 누나는 마시던 맥주를 내려놓고 눈을 감은 채로 음악에 빠지는 것 같았다.
반대로 아저씨는 클래식은 자기 취향이 아니었는지 처음엔 스피커로 나오는 음악소리를 듣고 있다가 공학도마냥 음악보단 음악이 나오는 기계인 블루투스 스피커를 더 신기해하며 어떻게 여기서 음악소리가 나는지에 더 집중하며 이것저것 물어봤다.
‘제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아냐, 뭐 알려주기 시작하면 끝도 없을 것 같아. 그냥 대충 모른다고 얼버무릴 거야.’
“버크, 잡소리 좀 그만 해봐. 나 지금 기분 너무 좋으니까.”
하늘에 밝게 뜬 2개의 달 아래로 캠핑용 체어에 비딱하게 옆으로 앉은 코엘 누나와 에디나 누나의 모습은 패션 화보의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지금 모습은 너튜브 썸네일 각이네. 한쪽은 걸크러시 넘치는 여전사 느낌이고, 한쪽은 건강미 넘치는 긴 생머리의 아가씨가 취한 게.’
그렇게 음악을 듣다가 지구에서 보던 것과 다르게 밤하늘에 떠 있는 2개의 달을 보니 궁금한 점이 생겨서 버크 아저씨에게 조용히 물어봤다.
"버크 아저씨, 여기선 저 하늘에 떠 있는 것들을 뭐라고 불러요?“
"우리는 저 두개의 달을 '스포보(sphobo)'와 '모스다(mosda)'라고 부르지."
"무슨 의미로요?"
"스포보는 공포, 모스다는 낭패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지. 왜 그런 이름이 붙었는지는 나도 잘 몰라. 그저 먼 과거로부터 이어져 온 이름이라."
‘스포보와 모스다라...우리는 그냥 달이라고 하는데 여긴 달에도 이름이 있네.’
우리가 달을 보면서 낭만적으로 달토끼를 떠올리는 것과 다르게 이들의 달은 특이하게도 무척이나 암울한 느낌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달의 이름도 모른다 이거지?’
‘달이 두 개라는 걸 신기해하는 것 같았는데 착각인가?’
내가 두 개의 달의 의미를 떠올리는 동안 코엘과 버크는 나를 의미심장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에디나는 알딸딸하게 취기가 오르는지 음악과 술에 취해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다리를 까딱거리고 있었다.
원래는 천체나 이런 쪽은 관심이 없지만 지구에서 보이는 하나의 달과 다른 2개의 달이 신기하게만 보여서 질문했던 거였다.
음악이 끝나고 나서 우리는 넷만의 먹자 파티를 계속했다. 원래는 고기를 먹고 나서 비빔면까지 맛보게 해주려고 했는데 세 사람은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나중에 먹고 일단 술이나 더 마시자고 해서 소맥을 말아줬더니 세 사람 다 환호성을 지르면서 화로대를 몇바퀴나 뛰며 돌았다.
그 모습을 보고 텐션도 올릴 겸 음악도 빠른 박자의 음악을 틀어줬더니 각자 자기들 마을의 춤이라며 춤을 추는데 좋게 말해도 그냥 막춤 같았다.
“이 음악 정말 신나는데? 좋은 술도 마시고 맛있는 고기도 먹고, 이번 모험 정말 최고다!”
신나하는 코엘 누나와 에디나 누나와 다르게 버크 아저씨는 코엘 누나와 같이 돌다가 멈춰서 잠시 누군가에게 미안해하는 것 같았다.
“우리끼리 이렇게 좋은 거 먹으니까 요크도 그렇고 다른 단원들한테 미안한 감이 있군”
갑자기 멈춘 버프 아저씨와 부딪힌 코엘 누나는 멍청한 소리 그만하라고 하며 나에게 한가지 부탁을 해도 괜찮겠냐면서 주문을 했다.
“정후야, 너 오늘 우리가 먹은 거 한 3명이 더 같이 먹을 만한 양 있어? 내가 값은 톡톡히 치를게.”
잡화상에서 그치지 않고 노점상까지 하게 생겼다.
'금은방을 차려야 되나?'
“그럼 되겠군. 정후군 이 막걸리 좀 더 줄 수 있나? 내 입맛에는 이것도 맛이 괜찮군 그래.”
취업 생각이 사라지고 갑자기 창업 의지가 솟아오른다.
‘어머니, 이 아들은 취업보단 창업 체질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서로 각자의 이유로 신이 나서 밤늦게까지 음악을 틀어놓고 술도 마시고 주변 신경 쓰지 않고 춤을 추고 소리도 지르며 마음껏 놀았다. 앞에 있는 것은 바다고 뒤에 있는 것은 숲이라 보통 캠핑장 가면 지켜야 하는 매너같은 건 딱히 신경 쓸 사람들도 없었으니까.
처음 맞이하는 해방감이었다.
한참을 술을 마시고 뛰었더니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내가 그렇게 의식을 잃을 즈음에 두 사람이 대화하는 것 같았지만 뭐라는지 잘 안 들렸다.
“신기하군. 이 남자가 꺼낸 물건들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물건들이야.”
“술도 그렇고 음식도 그렇고 먹는 방식부터가 완전히 달라. 철저히 다른 문화의 기반 위에서 만들어졌다고 볼 수밖에 없어.”
“주량은 에디나랑 비슷한 수준인가?”
“되도록 오래 옆에서 지켜봤으면 좋겠어. 이 세상에 해가 될 존재인지 아닌지 정확히 판단하기 위해선.”
“이번에 엘프에게 내려진 신탁에서 전설 속 바닷가를 찾아가라는 말이 나온 게 이 남자와 만나는 걸 암시하는 것 같지?”
“내 생각에도 그런 것 같군.”
“어우....죽을 것 같다. 소주, 막걸리, 맥주 다 섞어 마셨더니 죽을 것 같네.”
일어나자마자 카메라에 기록된 내용을 저장하여 엘리스에게 전송하고 밤사이 줄어든 배터리를 충전하기 위해 휴대용 태양열 충전 패널을 꺼내서 충전시켜 놨다.
너무 섞어 마셨더니 골이 울려서 말할 기운도 없었다. 어떻게 알아서 텐트로 들어왔는지 기억도 제대로 안 났다. 인벤토리에서 물 한 페트를 꺼내어 캠핑 체어에 겨우 몸을 기대고 마시고 있는데 옆에서 좀비소리가 들려왔다.
“나도..무....물 좀 줘...”
옆에 세워진 삼각텐트 입구에 널브러져 있는 코엘 누나가 좀비처럼 기어 오며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해서 살짝 섬뜩함을 느끼고 인벤토리에 넣어 둔 시원한 생수병 하나를 꺼내서 줬다.
“꿀꺽 꿀꺽 꿀꺽.....꺼억.....어우....엘프주랑은 술 마시고 다음날이 조금 다르네...”
‘와...저걸 한번에 다 마시네.’
"많이 마시기도 했고 뭣보다 맥주랑 소주랑 막걸리까지 섞어 마셔서 그래요."
“그래도 이렇게 시원한 물을 가지고 다니면서 마실 수 있다니, 이번 여행은 축복받은 여행이 맞네.”
“버크 아저씨랑 에디나 누나는 어디 있어요?”
“크크크크, 니 어제 텐트에 기어 들어가고 니가 꺼내 둔 술 이것 저것 전부 큰 그릇에 담아서 섞어서 나눠 마시다가 나도 기억을 잃어서 잘 모르겠다. 뭐, 여기 근처에 있겠지.”
물 한통씩 챙겨 마시고 각자 캠핑체어에서 반쯤은 누운 자세로 있으니 버크 아저씨가 풀밭에서 뒹굴었는지 엉망이 돼서 나타났다.
“아......이거 이렇게 마신 건 정말 오랜만이군. 오늘 하루는 그냥 어디 가지 말고 텐트에서 쥐죽은 듯이 쉬어야겠어.”
“그래도 주무시기 전에 해장도 할 겸 라면 좀 드셔볼래요?”
라면이라는 이야기를 꺼내자 에디나 누나가 귀신같이 그걸 듣고서 텐트에서 튀어나왔다.
“라면? 먹는 거야? 어떤 음식인데?”
“한번 먹어 보시면 압니다.”
어제 청양고추를 넣은 쌈을 한 번 시험 삼아 줘봤더니 너무 매워하는 것을 보고 혹시 몰라 준비해온 순한 맛 라면을 꺼내서 5개를 전부 냄비에 넣어서 끓였다.
“후루루룩...후루루룩. 와 이건 또 신세계가 따로 없네.”
“국물 맛을 봐봐. 아주 깊은 맛이 느껴져.”
‘현대의 기술력이 담긴 조미료의 맛입니다.’
MSG의 파괴적인 맛은 엘프, 드워프, 드루이드와 인간을 모두 하나로 통합하는 물질이었다.
그렇게 4명이 라면 5개를 다 먹고도 부족해서 어제 남은 햇반 4개까지 모두 털어서 국물에 말아 먹었다. 그리고 우리는 숙취와 식곤증을 느끼며 뒷정리도 하지 않고 각자 텐트에서 잠들었다. 깨고 나니 아저씨랑 코엘 누나는 어디 갔는지 안 보이고 저녁노을이 지고 있었다.
“이렇게 술 많이 마시고 하루를 날린 건 오랜만이네. 이런 풍경을 나 혼자 즐기다니 너무 아깝다. 영상으로 좀 찍어놔야겠어.”
노을을 보고 있자 주변 풍광이 너무 멋있어서 스마트폰으로 동영상 촬영 기능을 활성화하고 찍고 있는데 멀리서 코엘 누나와 버크 아저씨가 뭔가 소리를 지르면서 뛰어 오는게 보인다.
‘뭐...뭐지?’
언제 저기까지 뛰어 갔지 싶어서 멍하니 보고 있는데 뒤에서 어떤 근육질의 거구의 남자 한명과 작은 키의 여성이 뒤따라 뛰어오는 게 보여서 순간 도망쳐야 하는지 대응해서 싸워야 하는 것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리고 아저씨한테 받은 마체테를 꺼냈다.
‘하아, 두 사람이 도망칠 정도면 나도 도망쳐야 하는 거 아닌가. 곰도 때려잡는 사람들이 피하는데...검의 기역도 모르는 내가 뭘 어떻게 한다고...’
두 사람을 쫓아서 달려오는 정체불명의 2인을 보고서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하는 동안 거리는 점차 가까워 지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총이라도 구해서 오는 건데..."
이곳에서 있는 것을 너무 안일하게 생각한 것은 아닌가하는 때늦은 후회가 피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