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68화 〉망치 (68/72)



〈 68화 〉망치

하루만 지나면 괜찮을  알았다. 항상 밝고 조금 뻔뻔한 모습만 보여줬던 마왕이라, 다음날이면 “자네! 짐일세!” 하며 전화 걸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녀는 이틀이 지나도 회복하지 못했다.


토요일 오전,  마왕네 집 앞에 서서 초인종을 눌렀다. 누르고 얼마 안 돼서 누군가 답장했다.


-누구세요?

이렇게 도도한 목소리는 세희 거였다.


“어, 나야, 세희야.”

-오빠예요?


“응, 문  열어줄래?”


-잠시만요.

곧이어 대문이 열리고,  이제는 익숙해진 넓은 정원으로 들어갔다. 현관문으로 천천히 걸어가자 세희가 마중 나왔다.

“안녕하세요.”

집에서 편하게 있었는지, 널널한 회색 면바지와 목이 좀 늘어난 검은 반팔 티셔츠 차림이었다. 만약 나였다면 추레하게 보였을 차림이 흑발 미소녀가 입으니 이렇게 예뻐 보였다.

“어, 안녕.”


고개 숙여 인사해준 그녀에게 대답하며 다가갔다.

“안 나와도 되는데. 그래도 고마워.”

“오빠 때문에 그런 게 아니에요.”


“뭐?”


“시간 좀 끌라고 해서요.”

무슨 소리인지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그래도 일단은 그녀가 말한 대로 여기 서서 시간을 때우기로 했다.

“그런데 세희야.”


“네?”


난 그녀 차림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너 집에선 이러고 다녀?”


“……네.”

세희는 부끄러운지 볼을 살짝 붉히며  팔로 반대편 팔뚝을 쓰다듬었다. 은근히 건강미 넘치는 마왕과 달리 빈약한 팔뚝이라 보호 욕구가 솟아났다.

자기가 얼마나 매력적인지 모르는 그녀가 부끄러워하며 대답했다.

“죄송해요, 이런 꼴을 보여서요.”

“아니야. 귀여워.”

“거짓말이라도 고맙네요, 오빠.”


그대로 부끄러워할 줄만 알았던 세희가 날 보고 옅게 웃었다. 하지만 그녀 얼굴은 여전히 붉어진 채였다. 아니, 좀 더 붉어진 거 같은데…….


“어머나, 지헌씨!”


갑자기 세희 너머로 청아하고 신성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 어깨 너머로 시선을 돌려보니, 주말인데도 청초한 흰 원피스를 입은 어머니께서 현관문 앞에 서 계셨다.


난 서둘러 그 여신님께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어머니!”

“네, 안녕하세요 지헌씨.”

그녀는 두 딸의 엄마라고는 전혀 생각되지 않는 미모를 내게 향했다.

“이런 주말에 어쩐 일이세요?”

“아, 네. 실은 소희랑 데이트하러 왔습니다.”


“그래요? 그런데 어쩌죠?”


곤란하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린 어머니께서 입술을 귀엽게 내밀었다.


“지금 우리 소희 기분이 안 좋은 거 같아서요.”

“그 기분 풀어주려고 온 겁니다.”

“우리 소희는 좋겠네요, 이런 좋은 남친이 있어서. 아, 근데 혹시 지헌씨와 싸운 건 아니죠?”

“아닙니다. 싸워서 그런 건 아니에요.”


“그럼 어쩌다 이렇게 됐나요? 그제 저녁에 들어오고는 밥 먹을 때나 그럴 때 말고는 1층으로 안 내려왔거든요. 소희가 이러는  처음 보네요.”


“어, 그거요?”


목요일에 있었던 일을 생각했다. 아이스크림. 수갑. 열쇠는 집에. 거기다 배탈. 물론 이걸 말할 순 없었다.


“그, 말씀드리기 좀…….”


“어머나, 제게도 말  할 건가요?”

“네. 죄송합니다.”

“죄송할 거까진 없죠. 우리 딸 사생활도 있는 건데. 그나저나 우리 딸이 남친이랑 비밀도 만들고, 좀 질투 나네요? 호호호.”


그녀가 기품 있게 웃었다.  모습을 황홀하게 감상하는데,



세희가 내 정강이를 발로 찼다. 마왕한테 맞을 때처럼 아프진 않았지만, 그래도 그녀한테 맞은 건 꽤 드문 일이었다.


“왜?”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러면서 날 떠나 여신님 옆을 지나치며 안으로 들어갔다.

“이제 안으로 들어가야죠, 어머니.”


“아, 제가 깜빡했네요. 지헌씨. 이만 들어가죠.”


“네!”

활기차게 대답하며 어머니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도 여러  왔었기에 화려한 실내를 보고도 크게 놀라지 않았다.

“여기요.”

“감사합니다, 어머니.”

어머니께서 내주신 슬리퍼를 신고 거실로 들어갔다.


아이보리색 소파와 그 너머에 있는 유리 탁자. 거기로 향하던 세희가 날 돌아보면서 말했다.

“오빠, 과자  드실래요?”

“응?”


“여기 과자 있거든요. 드시고 싶으시면 오세요.”


“알았어.”

어차피 예약 시간까지는  남았고, 어차피 권한 김에 생각 없이 수락했다. 이제 세희한테 가려고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그런 내 앞을 어머니께서 막으셨다.

“지, 지헌씨?”

“네,  그러세요?”

“우리 소희 먼저 봐주지 않을래요?”


항상 보여주시면 차분한 모습과 다르게, 내 앞을 가로막은 어머니는 당황한 모습을 보여주셨다.


“아니, 뭐, 소희가 저러는 게 처음이라 걱정되기도 하고요.”

“그렇긴 하죠.”


“게다가 지헌씨는 우리 소희 달래 주러 오셨잖아요. 소희도 지헌씨가 오시길 기다렸을 거예요.”

“온다고 말  하고 왔는데요.”

“어머나, 서프라이즈 이벤트 하려고 오셨나 봐요? 그럼 빨리 가 봐야지요.”

“아뇨, 그냥 연락이 안 돼서 온 거라서요.”

“그래도요, 우리 소희가 지헌씨를 많이 보고 싶어 할 거예요!”


어머니께서 날 막아서는 사이, 세희는 아까 보이지 않던 과자봉지를 들어서 내게 보여줬다. 누가 이미 먹고 있던 것처럼 뜯어진 봉지에 과자를 꺼내 먹으며 물었다.

“아작아작, 오빠 이거 좋아해요?”

“어? 좋아하긴 하지.”

“그럼 와서 좀 드세요. 여기 다른 것들도 많아요.”

그녀는 말하면서 탁자와 소파 사이로 몸을 숙였다. 상체를 들었을 때 그 가녀린 손엔 이미 뜯어진 과자 봉지들이 더 들려 있었다.


여기서 대답한 건 내가 아니라 어머니셨다.

“세희야, 오빠 올라가신다잖니.”

“네? 제가 언제요?”


“지헌씨도 그만 올라가셔야죠. 소희가 기다려, 욧!”

말씀하신 어머니는 날 밀친 손에 힘을 줬다. 마치 어린아이가 미는 것처럼 약했지만, 일단 그녀 의도대로 계단을 올라갔다.

올라가면서 어머니가 나에게 속삭였다.


“저기, 지헌씨?”


“네?”


“세희는 한동안 2층에 안 올라올 거거든요?”

“그게 무슨,”

“그러니까, 어느 정도는 소리 내도 괜찮아요.”


“뭐가요?”

“있잖아요, 그런 거.”

그녀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쳐다봤다. 왠지 모르게 낯설지 않은 눈웃음에 인상을 찌푸렸다. 가능하면 뭘 말하는지 더 묻고 싶었지만, 이미 2층에 도착한 상태였다.


“저기 어머니, 죄송한데 자리 좀…….”

“괜찮아요. 아까 말했잖아요. 세희 말고 저도 안 올라올 거니까요.”


“네? 네, 감사합니다.”


“감사는요. 그래도 우리 딸 아직 21살인 거 잊지 마요? 지헌씨도 아직 20살이잖아요.”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뭔지 몰라도 일단 맞장구쳤다.

“전 지헌씨가 배려해 줄 거라 믿어요.”


그러면서 어머닌 계단을 내려갔다. 자기 딸처럼 은발을 영문 모르겠다는 얼굴로 내려보고, 마왕 방으로 향했다.


방문 앞에 도착하고, 손을 들어 노크했다.

똑똑똑


“소희야.”


“돌아가게.”

이름을 부르자마자 바로 대답이 들려왔다. 며칠 만에 듣는 그녀 목소리는 평소보다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마치 오랫동안 운 것처럼  목소리에 걱정스러운 마음을 품으며, 다시 마왕을 불렀다.


“소희야, 놀러 가자.”

“가라고 하지 않았나.”

“너랑 같이 안 가면 안 나갈 거야.”

“그냥 가게. 지금 자네와 놀 기분 아니네.”


“넌 내 기분 고려해줬냐? 지금까지?”

“…….”


그래도 찔리는지 대답이 없었다. 그래도 난 웃음 섞인 목소리로 문 너머 침울해져 있을 마왕을 달랬다.

“그렇게 신경 쓰지마. 하고 싶어서 한  아니었잖아.”

“그걸 왜 말하나!”


쾅!


목요일에 있었던 일을 말하자, 그녀가 외치며 뭔가를 문에 집어 던지는 소리가 났다.


“함부로 말했다가 어머니나 세희가 알아채면 어떻게 할 겐가!”


“못 알아채지, 당연히.”


“그걸 어떻게 장담하는가!”

“세희는 그제 열쇠만 건네주고 바로 갔잖아. 그리고 어머니는 나랑 너랑 싸운  아셔.”


“시끄럽네!”

아무래도 생각보다 많이 상처받은 모양이었다. 사귀기 전엔 자기 토한 것도 보여주고 마음껏 트림했던 그녀였지만, 이러는 게 이해되지 않는  아니었다.

그  마왕은 나랑 함께 즐기려고 수갑과 재갈을 가져왔을 거였다. 그 의도대로 우린 서로에게 수갑 채우며 재미있게 놀고 있었다. 하지만 열쇠를 집에 놓고 온 걸 시작으로, 마구 퍼먹은 아이스크림
때문에 배탈까지 났다.


열쇠를 잊어버린 자기 탓에 놀지도 못하고, 심지어 볼일 보는 소리를 바로 옆에서 들려줬으니, 멘탈이 깨질 만했다.

그래도 이렇게 방구석에 틀어박혀서 안 나오는  마왕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그녀를 밖으로 끌어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소희야, 나가서 놀자. 응?”

“싫네.”


“저번에 네가 가고 싶다고 했던 데 있잖아. 거기 가려고 예약했단 말이야.”

“어딜 말하는 겐가.”

“궁금해? 그러면  열고 얼굴 마주보고 하자. 그럼 말해줄게!”

“……”

처음엔 대답이 없어서 실패한  알았다. 하지만 몇 초 뒤, 문이 열리며 어두운 방 안을 보여줬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엔 푸석푸석한 머릿결을 가진 마왕이 퀭한 얼굴로 서 있었다.

“……됐나?”

이틀 만에 본 그녀는 몸이 많이 상한 것처럼 보였다. 항상 장난스럽게 반짝이던 파란 눈은 빛을 잃어버렸고, 바람에 흩날리며 눈부시게 아름답던 은발도 푸석푸석하게 헝클어졌다.

“소, 소희야.”


처음 보는 모습에 내가 당황하자, 마왕이 울상을 지었다.

“왜 그런가, 짐이 더럽다 생각하는 겐가? 훌쩍.”

“아니! 아니야! 절대 아니야!”

“그럼,  당황한 겐가.”


“반가워서 그렇지! 이틀만에 봤는데! 너무 예뻐서 당황했어!”


“거짓말하지 말게.”


그녀는 퉁명스럽게 말하면서도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 그 모습에 난 희망을 느끼며 예약했다는 것의 정체를 알려줬다.


“너 저번에, 중간고사 보기 전에, 학교 근처에 클라이밍 하는 곳 새로 열었다고 했잖아. 거기 예약해 뒀어.”

“거기 말인가?”

“응, 너 거기 가고 싶어 했잖아. 내가 초보자 코스로 예약했어. 두 명으로.”


“으음…….”


고민하면서 신음한 마왕은 답을 내놓았다.


“싫네.”


“왜!”

“그자들이 짐을 더럽다 생각하면 어떻게 할 겐가.”


“아무도 안 그래! 누가 그런다고!”

“자네가 그렇게 생각하잖나.”


“내가 언제! 난  그래!”

“그럼 그날 왜 그랬나. 왜 인상 쓰면서 짐을 쳐다본 겐가.”

“내가? 내가 그랬다고? 나 안 그랬어!”


“거짓말하지 말게. 짐이 기억하네.”

“그 기억이 잘못된 거겠지. 난 냄새 안 난다고 했잖아.”


“말로는  못하겠나. 어차피 짐을 더럽게 생각하면서.”

“아니야! 절! 대! 아니야!”

내가 ‘절대’라는 말에 힘주며 단언하자, 날 바라보는 푸른 눈동자에 빛이 돌기 시작했다.

“정말인가?”


“정말이지!”

“짐을 더럽다고 생각  하는가?”


“정말이라니까? 너 깨끗해! 그리고 예쁘고!”

“그럼 먹을 수 있는가?”

“그건 아니지!”


쾅!


아, 실수했다.

하지만 난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굳세게 닫힌 문을 두드리며 외쳤다.

“소희야! 손손손손! 손 끼었어!”

“거짓말하지 말게.”

“진짜야! 진짜로 손 끼었다고!”


“한 번만 더 거짓말하면 말도 안 할 걸세.”


……안 속네


공갈작전을 버리고, 다시 차분한 말투로 문 너머 마왕에게 말했다.


“소희야, 미안. 말이 헛나왔어.”


“먹을 수 있다는 겐가?”

“그러면 너는 먹을  있어?”

“…….”

잠시동안 말이 없었다. 약 1분도 안 되는 시간이 지나고, 겨우 대답이 들려왔다.


“알겠네. 그건 넘어가지.”

그녀가 뻔뻔하게 느껴져도,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이게 마지막이라 생각하며 진심으로 물었다.


“그러면 같이 갈 거야? 클라이밍?”

“안 되네.”

“진짜로? 진짜  갈 거야?”


“그렇네. 가는 건, 다음으로 미루지.”

“그래, 알았어.”


난 간다는 걸 알리는 겸해서 문을 두드려서 경로를 확인했다.

“나  게.”


“……잘 가게.”

힘없는 배웅을 뒤로하고 계단을 내려와 1층으로 향했다. 1층 거실에 도착하자 여기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했다.  혹시 들을까 싶어서 어머니를 불렀다.

“저기, 어머니? 어디 계세요?”


 번 더 부르고 나서야 어머니께서 모습을 드러내셨다.

“네, 네? 지헌씨?”

아까 봤던  흰색 원피스 차림인 그녀는 안방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나오셨다. 내가 부를 줄 몰랐는지 당황하시면서, 이유 모르게 입가를 닦았다.

어머니께서 입가를 다 닦자 물었다.


“무슨 일 있나요?”


왼편 입가에 묻은 과자 부스러기를 애써 모른척하며 물었다.

“저기 혹시, 소희 방문 열쇠 있을까요?”


“문, 따시게요?”


“네. 망치로 깨부수면 오래 걸릴 거 같아서요.”

“네, 네?”

어머니는 표정을 당황과 황당으로 일그러뜨렸다. 이걸로 그녀 안에서 내 평가가 내려갔을 거라고 짐작했다. 하지만 이건 충분히 각오했다.

마왕은 첫사랑에 빠져 허우적대는  구원해줬다. 그 은혜를 갚는데 이 정도면, 싼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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