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화 〉얘가 사극으로 한국말 배워서 그래요!
지금부터 진행되는 이야기는 someday 이후의 시간대입니다. 읽으실 때 주의바랍니다.
나는 나뭇가지에 매달린 채, 있는 힘껏 소리쳤다.
“소희야! 사랑해! 나랑 사귀자아아아!”
“자네 부탁을 수락하지! 짐도 자넬 사랑한다네!”
타앙!
꿱!
총성이 울리고, 멧돼지가 단말마를 질렀다. 그것은 나무에서 몇 걸음 떨어지더니, 그대로 쓰러져서 움직이지 않았다.
쓰러진 멧돼지를 본 나는 마왕이 있는 방향을 쳐다봤다. 그녀는 한 손에 총을 든 채 비탈을 미끄러져 내려오고 있었다.
은발을 휘날리며 다가오던 마왕은, 고개를 들어서 나와 눈마주쳤다. 그녀는 살짝 붉어진 얼굴로 당당히 웃으며 말했다.
“오늘부터 1일일세!”
“……무슨 고백이 이따위야!”
이 말을 마지막으로 나는 잠에서 깼다. 눈을 떠서 주위를 둘러보자, 운전석에 앉아 자동차 핸들을 잡고 있는 마왕이 보였다.
평소대로 녹색 추리닝 차림인 그녀는 전방을 주시한 채 곁눈질하며 물었다.
“깼는가?”
이제 막 일어난 터라 난 머리를 작게 흔든 뒤에 대답했다.
“아, 응. 근데 여긴 어디냐?”
차창 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나무로 가득한 산길이었다. 아니, 땅이 평평하니 숲길이 더 맞는 말이었다.
밖을 쳐다보는 내게 마왕이 어이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사격장 가고 있잖나.”
“사격장? 무슨 사격장?”
“그렇게나 푹 자고 있던 겐가?”
그녀 말이 끝난 직후, 우리가 탄 차는 밖에 큰 간판을 지나쳤다. 속도도 빠르지 않고 간판이 커서 뭐가 쓰여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관광 사격장
간판을 보니 내가 왜 마왕이랑 사격장에 가고 있는지 기억났다. 그녀는 내가 수렵 면허를 따기 전에, 먼저 클레이사격을 하는 게 좋다며 주말에 잘 쉬고 있는 날 끌고 왔다.
고개를 돌려 다시 마왕을 쳐다봤다. 그녀는 심심한지 창틀에 팔꿈치를 걸치고 턱을 괸 상태였다. 가만히 바라보자, 눈길을 알아챘는지 내 쪽으로 힐끔거리며 물었다.
“왜 그런가. 짐이 넋 놓고 바라볼 정도로 예쁜가?”
만약 2주 전이었다면 주저하며 말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었다.
“응. 너무 이뻐.”
저번주부터 사귀는 사이였으니까.
내 대답을 들은 그녀는 입꼬리를 올리며 흐뭇해하는 모습을 보였다. 괴고 있던 손으로 핸들을 잡고, 오른손 손바닥이 위로 향하게 내려서 내게 내밀었다.
난 바로 왼손을 들어 서로 손을 맞잡았다.
“후훗.”
마왕은 작게 웃으며 맞잡은 손에 깍지를 꼈다. 나 또한 손가락을 움직여서 빈틈없이 맞잡았다. 우리는 사격장에 도착할 때까지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손바닥에 땀이 찰 때 즈음, 차는 사격장에 도착했다. 주차장에 진입하자 기어 변속을 위해 마왕이 손을 놓았다.
“내 이따 금새 잡아줌세.”
“싫거든?”
“뭣이?”
“내가 잡아줄 거거든?”
“훗, 기대하겠네.”
그런 대화를 나누는 동안, 마왕은 회색 자갈이 깔린 주차장 한적한 곳에 차를 멈췄다. 열쇠를 뽑아서 시동을 끄는 걸 보고 나서야, 난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렸다.
주말이라 그런지 우리 말고도 다른 차들이 많이 보였다. 도시처럼 차가 많아도, 산속이라서 산림욕 하는 것처럼 공기가 신선했다. 하지만 근처에서 들리는 총성이 여기가 사격장이란 사실을 알려줬다.
그나저나, 몇 시간 동안 차 안에만 있어서 피곤하네에에엑!
기지개를 펴서 차에만 있느라 찌뿌둥해진 몸을 깨웠다. 그 사이 반대편에서 마왕이 내리며 소리쳤다.
“자네! 손잡아준다고 하지 않았나?”
“내가 안 잡아준다고 했냐?”
나는 차 문을 닫고 보닛 방향으로 돌아서 그녀에게 다가갔다. 마왕은 나와 마찬가지로 차 문을 닫은 채 날 기다리고 있었다.
“자, 이제 잡아주게.”
새침하게 말하며 내민 그녀 손을 잡아주었다.
이제 연인 사이가 돼서 그런지, 평소 잡던 손보다 부드럽고 연약하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굳은살이 안 느껴지는 건 아니었다.
마왕은 웃으며 빈손으로 운전석 문을 닫았다. 차 키를 꽂아 돌려서 잠그는 동안, 내게 말했다.
“먼저 사무실에 가서 안전수칙을 알아야 한다네. 삼촌 말씀으로는 군대 때 배우는 것과 별 차이 없다고 했네.”
군대라는 키워드가 나오자 기분이 급격하게 낮아졌다.
함께 사격장 건물로 가다가 내가 침울해진 걸 본 마왕이 물었다.
“왜 그런가. 설마 군대 때문에 그러는 겐가?”
“아 뭐, 그렇지…….”
이제 슬슬 1학년 2학기도 끝나갔다. 지금즘이면 웬만한 또래 남자애들은 슬슬 입대를 준비할 시기였다.
“아니, 군대는 이세계에서 7년 동안 있었는데! 또 2년을 있어야 한다고?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하지 않냐?”
“그럼 병무청에 가서 말하지 그랬나. 이세계에 다녀왔으니 면제로 바꿔 달라고 부탁하면 되는 일 아닌가.”
“그랬다간 정신병으로 공익 갈걸?!”
“그편이 더 낫잖나.”
“정신병으로 갈 바엔 그냥 현역으로 가는 게 낫지! 얘는 남친한테 못하는 말이 없어!”
“여친으로써, 남친이 가까이 있길 바라는 마음이었네만.”
그렇게 말한 마왕은 잡고 있는 손에 힘을 더하면서 날 올려봤다. 눈웃음 사이로 보이는 보석같이 푸른 눈동자가 사랑스럽게 반짝였다.
“그러냐?”
이때 나는 머리가 뜨거워진 걸 느꼈다. 하지만 그저 부끄럽기만 한 건 아니었다. 가슴 속에도 따뜻한 무언가가 차오르며 그녀를 잡고 있는 내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 허나 자네 군대 가면 헤어질 거네.”
“야!”
“농담일세, 농담.”
“안 헤어질 거지? 그럴 거지?”
“당연하잖나.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말일세……”
“아 좀!”
그녀가 의미심장하게 말하며 말끝을 흐렸다. 난 헤어지지 않을 걸 알면서도 괜히 불안해졌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 마왕이 걷는 발을 멈췄다.
“아하핫! 걱정 말게! 짐은 절대로 자네와 헤어지고 싶지 않다네.”
나와 눈을 마주치며 마왕이 올려봤다. 날 바라보는 눈동자엔 절대 부서지지 않을 것 같은 마음이 담겨 있었다.
“게다가, 마왕과 용사면, 절대로 헤어지지 못할 조합이지 않나?”
그 말에 난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난 웃으며 빈손을 들어 그녀 머리를 쓰다듬었다.
“맞긴 하네, 네 말이 맞아.”
“자……!”
함께 있으면서 알게 된 약점이 있었다. 마왕은 머릴 쓰다듬는 행동에 면역을 갖고 있지 않았다.
“…….”
이렇게 머리를 쓰다듬어주면, 얼굴을 붉힌 채 아무것도 못했다. 마왕은 고개를 푹 숙인 채 귀를 붉게 달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부탁했다.
“이제, 이제 그만 하게…….”
“좀만 더하고.”
“……정말, 조금만일세?”
“응.”
매끄러운 은발을 충분히 쓰다듬었다.
총소리를 배경음으로 약 5분이 흘렀다. 우리는 다시 걷기 시작했고, 잡은 손은 여전히 꽉 쥔 채였다.
사람들과 총성이 가득한 야외사격장을 구경하며 사무실로 들어갔다. 거기 먼저 사격 수칙 서명란에 사인을 쓰고, 결재를 위해 접수처로 걸어갔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접수처엔 4~50대로 보이는 아저씨가 앉아 있었다. 그는 여길 들어올 때부터 마왕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였다. 외국인 외모보다는 그녀의 미모 때문인 것 같았다.
나는 마왕을 뒤에 세우며 서명한 걸 내밀었다.
“여기요.”
“하아…… 뭐로 하시겠어요? 클레이 사격이랑 권총 사격, 공기총 사격이 있는데.”
반의 반말을 하는 아저씨를 무시하며 뒤에 있는 마왕에게 물었다.
“뭐로 할래?”
“자네는 뭐로 하고 싶은가?”
“네가 정한 거 아니었어?”
“자네가 하고 싶은 거로 정했네만.”
“안 정한 거잖아!”
“저기요.”
우리가 이야기하는 사이 아저씨가 끼어들었다. 그는 나와 대화할 때와 다르게 친절한 톤으로 말했다.
“사격이란 게 생각보다 많이 힘들어요. 그러니까 일단 클레이사격 해보시고, 그 다음에 다른 거 할지 정하셔도 될 거 같은데요?”
내 여친한테 친절하게 대하는 모습이 괘씸했지만, 사격에 대해 잘 아는 건 마왕이었기에 그녀를 바라봤다.
마왕은 입술을 오므리며 고민하더니, 이내 경쾌하게 대답했다.
“음! 그럼 클레이사격 먼저 해보지!”
“네?”
그가 되물은 이유는 못 들어서가 아니었다. 바로 그녀의 고풍스러운 말투 때문이었다. 평소대로라면 평범하게 대화하던 마왕이었지만, 이렇게 갑작스레 원래 말투가 나올 때도 있었다.
나는 상황이 꼬이기 전에 마왕 앞을 막아서며 해명했다.
“얘가 사극으로 한국말 배워서 그래요! 그래서 이런 말투예요.”
“아, 아아, 그래요?”
납득한 직원이 마왕을 바라봤다. 난 그녀가 눈치채도록 눈짓으로 신호 줬다. 그러자 마왕이 외국인처럼 어색한 말투로 말했다.
“음, 아! 재송함미다! 한쿡말, 초큼, 힘두러요!”
어색하게 말하는 마왕을 보며 아저씨가 흐뭇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렇구나! 어때요, 한국 좋아요? 김치 먹어봤어요?”
“눼! 킴치, 마시써효! 붓코기, 마시써효! 살앙해요, 연애가중,”
“그만해, 멍청아!”
그녀가 돌이키지 못할 말을 하기 전에 작게 소리쳐서 말렸다. 날 당황하게 만든 마왕은 날 보며 웃어댔다.
나도 따라 웃으면서 앞에 있는 아저씨한테 말했다.
“죄송해요. 평범하게 말하면 좀 어색해서요. 아까처럼 말해도 될까요?”
“그럼요! 그럼요! 편하신 대로 하세요!”
그는 흔쾌히 대답하며 손을 내밀었다.
“클레이사격은 25발 해서 인당 22000원이거든요? 신분증이랑 결재 부탁드릴게요.”
“짐이 계산하지!”
마왕이 당당히 말하며 지갑을 꺼냈다. 그녀는 체크카드와 함께 주민등록증을 내밀었다.
“!”
내가 뭐라 하기도 전에 아저씨가 먼저 받고 말았다. 카드를 리더기에 꽂으며 신분증을 확인하던 그는 미간을 미세하게 찌푸리며 마왕을 올려봤다.
그렇겠지! 외국인이 민증 가지고 있는 게 이상하겠지!
의심이 커지기 전에 난 한 번 더 끼어들었다.
“사실 얘가 귀화했어요! 그래서 민증 가지고 있는 거예요.”
“그래요? 한국 많이 좋아하시나 보네!”
아저씨는 신난 듯이 말하며 마왕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음! 한국만큼 좋은 나라가 없지! 게다가 이 자가 있는 게 제일 큰 장점이라네!”
그녀는 당당하게 말하며 나와 맞잡은 손을 들어 보였다. 그걸 본 직원은 조금 당황한 눈치였다.
“어, 어…… 좋겠네요. 어디서 만났어?”
“대학교일세!”
“그렇구나아. 잠시만.”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안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더니 작은 종이박스 2개를 들고 찾아와, 그것들과 함께 민증과 카드를 돌려주었다.
“여기요. 여기 엽탄 각각 25발. 해서 50발이고. 저기 나가셔서 사대 있거든. 클레이사격장. 오면서 봤지? 거기 의자 있으니까 거기 앉아서 기다려. 근데 지금 주말이고 동호회도 와서 시간이 좀 걸릴 거야.”
“음, 그런가?”
“그리고 거기 귀마개 있으니까, 그거 끼면서 기다려요. 기다리면 안전요원 와서 도와줄 거야.”
“알았네! 그럼 이만 실례하지!”
마왕은 카드와 민증을 추리닝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은근슬쩍 말을 놓는 아저씨에게 인사하고, 우리는 총알이 든 박스 하나씩 든 채 사격장으로 향했다.
사무실에서 나가자마자 바로 사격장이 보였다. 칸막이 뒤로 계단처럼 2단으로 쌓인 의자가 있었다. 그 옆엔 헤드셋처럼 생긴 귀마개가 있었는데, 그게 하나밖에 없었다.
“저건 짐의 것일세!”
“야!”
마왕이 내 손을 놓더니, 달려가서 하나밖에 없는 헤드셋을 잡아챘다. 난 그녀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한발 늦고 말았다.
나는 항의하려 그녀에게 따졌다.
“야! 갑자기 그렇게 가져가면 난 어떻게 하냐!”
뻔뻔한 마왕은 헤드셋을 쓰며 이렇게 말했다.
“빨리 오지 그랬나?”
“그게 할 말이냐?”
“아니면, 자네는 연약한 짐에게 요란스러운 총성을 노출시킬 셈이었나?”
“너 나보다 세잖, 억!”
말하려는 순간, 갑자기 마왕이 내 배에 주먹을 내질렀다. 그래도 장난식이라서 조금 욱신거리고 말아서 다행이었다. 만약 진심이었다면 배에 과일 배만 한 구멍이 났겠지.
한편 날 때린 그녀가 주먹을 들어 보이며 협박했다.
“짐이 귀마개를 껴서 잘 못 들었네만, 다시 말해보겠나?”
“아, 아니, 내가 양보할 셈이었지…….”
“역시! 역시 기사도 정신의 표본인 남친이로세!”
젠장! 전직 용사인데도 전생 마왕한테 꼼짝도 못 하는 꼴이라니!
할 수 없이 나는 손가락으로 귀를 막았다. 하지만 이 악마 같은 마왕은 그걸 가만히 보고 있지 않았다. 탄이 든 상자를 자기 옆에 있는 의자에 내려놓았다. 그다음, 내 양손을 잡고 귀에서 떨어뜨렸다.
“야!”
“대신 이렇게 하면 되지 않나.”
그녀는 자신의 손바닥으로 귀를 막아주었다. 그러자 사무실에 가서도 들리던 총성이 거의 들리지 않게 되었다. 마치 이 주변에 나와 소희 밖에 남지 않은 것처럼.
나는 여기서 눈을 돌려 주위에 누가 없는지 둘러봤다. 의자엔 아무도 없었고, 사격장에선 총 쏘느라 여길 신경 쓰지 않았다.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자, 나도 그녀처럼 총알이 담긴 상자를 의자에 두었다.
그리고 손을 들어 그녀 머리를 귀마개와 함께 감싸 쥐었다.
자기가 생각한 대로 됐는지, 마왕이 푸른 눈으로 눈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인형같이 아름다운 외모로 날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귀가 막혀서 들리진 않았지만, 대충 이런 말이었다.
괜찮네.
허락도 받았겠다, 난 그녀를 내게 끌어당겼다. 그녀도 눈을 가볍게 감으며 내 행동에 맞춰줬다. 그리고, 천천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