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63화 〉가란 말은 안 했잖아. 이리 와. (63/72)


  • 〈 63화 〉가란 말은 안 했잖아. 이리 와.

    “뭔가, 질투했는가?”

    “질투는 무슨…….”


    일부러 그 말을 무시하며 복층으로 된 공간에 올라갔다. 그리고 마왕과 최대한 떨어진 모서리에서 만화책을 펼쳤다.

    “에이 참. 왜 그리 멀리 가는 겐가?”

    그런데 마왕이 웃으며 앉은 채로 내게 다가왔다. 난 부끄러운 걸 숨기기 위해 책에 시선을 고정하며 물었다.


    “너  와.”

    “좋으면서 왜 그러는가?”


    “하나도 안 좋거든?”

    “그런 겐가? 그럼 짐은 멀리 가겠네.”


    진짜 가려는 것처럼 그녀가 다시 멀어졌다. 그걸 보고 부끄러운 걸 무릅쓰며 말했다.


    “……마.”

    “자네 뭐라고 했나?”


    “가지 말라고.”


    “으으음?”

    “가란 말은 안 했잖아. 이리 와.”


    “아핫핫! 알겠네! 그리 가도록 하지!”


    “시끄러워. 주위 사람들한테 들리겠다.”


    “그래, 조용히 가겠네!”

    마왕은 함박웃음을 지은 채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 기뻐 보이는 얼굴로 다가온 그녀는 내게 플라스틱 컵에 든 아메리카노를 건넸다.

    “이거 받게.”


    “응.”

    시선을 마주치지 않고 잔을 받아 들었다. 잔에 꽂힌 빨대를 빨아보니, 씁쓸하면서도 시원한 커피가 입안으로 들어왔다.

    “쭈우우웁”

    “맛이 어떤가.”

    마왕이 그새 참지 못하고 싱글벙글 웃으며 물었다. 난 차가운 커피가 들어가 어느 정도 진정된 기분으로 대답했다.

    “커피가 커피지 뭘. 써.”

    “쓰다고? 그럼 짐이 시럽 좀 넣어주겠네!”


    “뭐?”


     말에 이 작은 공간을 살펴봤다. 허리조차 제대로 펴기 어려울 정도로 작은 이곳엔, 쿠션 몇 개와 책상으로 쓸  있는 작은 선반밖에 없었다. 그녀가 말한 시럽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시럽이 어디 있,”




    “!”

    묻고 싶었던 말은 마왕이 내게 기대는 바람에 마치지 못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라서, 나도 모르게 몸이 굳어졌다. 그러자 그녀는 푸른 눈을 올려보며 장난스럽게 미소 지었다.


    “어떤가. 달달한가?”

    황급히 시선을 돌려 만화책에 집중했다. 하지만 두근거리는 심장소리로 가득한 머리에 만화 내용은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고, 손에 난 땀으로 페이지가 젖어갔다.

    “흐으음.”

    가까이 붙은 그녀에게서 비음 섞인 숨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마왕은 잠시 내게 떨어지더니, 자기 몫으로 보이는 아메리카노를 들었다.

    “쭈우웁”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가장  말은 이거였다.


    “짐은 좀 달달해진 것 같네만.”


    그러더니 잔을 내려놓고 만화책을 읽기 시작했다. 마치 여기서 조금도 안 움직이려는 듯이.


    계속해서 두근거리는 가슴 때문에 뭐라도 말하려 그녀 쪽을 쳐다봤다. 하지만 마왕이 보고 있는 만화책을 보자 마음이 차가워졌다.

    “아니, 너 그거 재밌어?”

    “재밌네만.”


    “그거를? 네가?”


    “짐이 본다고 문제될 건 없지 않나. 짐도 엄연한 성인이거늘. 정 그러면 자네도 보게. 저기 1권 있네.”


    확실히 마왕은 나보다  살 많은 성인이니, 성인 만화를 봐도 문제가 되진 않았다. 내가 신경 쓰는 건 그 성인 만화의 제목이었다.

    베르세르●

    중세 판타지 세계관에서 현대로 전생한 마왕이, 중세 판타지로 유명한 만화를 보는 모습이 생소하게 보였다.

    이걸 그녀에게 말해주자 무슨 소리냐며 핀잔했다.


    “이 만화 속 세계와 짐이 살던 세계는 완전히 딴판이잖나.”

    “그건 맞는데.”


    “애초에 그곳은 자살이 행복할 정도로 암울하지 않네만. 아니면 자네는 이렇게 살아왔던 겐가?”


    “사람들은 좀 개새끼였지만, 그렇게까지 개새끼들은 아니었어.”

    “하핫! 자네 말이 맞네. 비슷해 보이다가도, 이곳보단 그곳이 더 나은 곳이긴 하지. 음.”

    마왕은 웃으며 책 페이지를 넘겼다. 하지만 그다음 장엔, 이 만화가 그저 잔인해서 성인 만화가 아니라는 그림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

    팔락!

    놀란  나만이 아니었다. 마왕은 몸을 움찔거리고 순식간에 페이지를 넘겼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독서를 계속했다. 아니, 계속하는 척했다.


    “…….”

    그러지 않았다면 그녀 귀가 이렇게까지 붉어지진 않았다.

    몇 평도 되지 않는 이 공간은 아까와 다른 두근거림으로 가득 찼다. 나와 마왕은 의미 없이 만화책만 뚫어져라 쳐다보기만 했다.

    “…….”


    “……저기,”

    어색한 공기를 깬 사람은 마왕이었다.

    “자네, 배 안 고픈가?”

    “어?”


    그러고 보니 강의 끝나고 바로 여기로 끌려왔다. 시간도 거의 5시였고, 고프진 않더라도 슬슬 출출했다.


    아니, 확실히 배고프다!  고픈 것 같아도 배고픈 게 맞아!

    “어! 배고파! 뭐 먹을까?”

    “좋네! 어서 주문하러 가세!”

    우리 둘은 일부러 활발한 척 행동하며 복층에서 내려갔다. 서로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음식 주문하는 곳까지 도착했다.


    “어서 오세, 요?”


    카운터와 다르게 여기 직원은 여자였다. 그녀는 마왕의 미모에 흠칫 놀라다가, 이내 평정을 유지하며 비즈니스적인 미소를 지었다.

    “뭐로 주문하시겠어요?”


    “잠시만 기다리게.”

    “네? 아, 네. 천천히 고르셔도 괜찮아요.”


    이번엔 그녀 말투 때문에 평정을 잃었다. 그래도 마저 대답한 뒤, 편하게 고르라는 건지 주방으로 들어갔다.


    난 그걸 구경하다가, 위쪽에 달린 메뉴판을 자세히 올려봤다.


    “생각보다, 많네?”


    만화 카페라고 해도 기껏해야 라면이 끝인  알았다. 하지만 메뉴판에 적힌 음식들은 라면만 있는 게 아니었다. 볶음밥은 물론이고, 떡볶이, 덮밥, 심지어는 돈까스까지 있었다.

    멍하니 메뉴판만 올려보자, 어느새 어색한 기운이 없어진 마왕이 다가왔다.


    “어서 고르게. 아니면 짐이 골라주는 게 낫겠나?”

    “추천할 거 있어?”


    “여긴, 으으음.”

     초동안 신음하던 마왕이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가 사실 짜파게● 맛집이라네. 짐은 그걸 추천하지.”


    “무슨 라면에 맛집이 있어.”


    “자네는 짐이 하는 말을  믿겠다는 겐가?”

    “방금  말은 좀…….”


    “그렇다면 먹어보면 되지 않나! 여기 주문하겠네!”


    “잠깐만!”

     만류에도 불구하고 마왕은 멋대로 짜파게●를 주문했다. 그러면서 정작 자기는,

    “짐은 대패삼겹볶음밥으로 주시게.”


    “야! 왜 너만 맛있어 보이는 거로 시키는 건데!”

    “왜겠나. 짐이 먹고 싶어서 시켰네만.”

    “나도 먹고 싶다고! 대패 삼겹!”


    “자네는 짐이 추천한 거로 먹겠다고 하지 않았나.”

    “그러긴 했는데!”


    “저기, 손님?”


    “나도 그런 걸로, 네?”

    그제야 여직원이 우리 주문을 기다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미세하게 미간을 찌푸리며 재차 물었다.

    “그럼 짜파게● 하나, 대패삼겹볶음밥 하나로 괜찮을까요?”


    “아니요! 대패삼겨헉?!”


    퍽!

    마왕이 내 옆구릴 때리는 바람에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내가 맞은 옆구리를 붙잡고 아파하는 사이, 마왕은 뻔뻔한 얼굴로 직원에게 말했다.

    “이 자는 신경 쓰지 말게. 짐이 시킨 대로 주게.”

    “네, 네, 알겠습니다아…….”


    그녀는 아파하는 날 힐끔 쳐다보고, 다시 마왕에게 물었다.

    “그럼 마실  어떻게 하실 건가요?”


    “미숫가루, 그거 하나면 충분하네.”

    “미숫가루라떼 하나. 알겠습니다. 카드키 주실래요?”

    “음.”


    마왕이 여기 들어올 때 받았던 카드키를 건네자, 직원은 그걸 기계에 찍고 진동벨과 함께 돌려줬다.


    “이게 울리면 받으러 오시면 돼요.”


    그리고 우리가  주문을 처리하러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쯤 되니 마왕에게 맞은 아픔이 어느 정도 사라졌다.

    “아니, 같은 거 두  시켜달라니까  따로 시키는 거야?”

    “당연하지 않나. 자네가 가르쳐 놓고선 그것도 모르는 겐가.”


    “내가 뭘 가르쳐 줬는데.”


    “서로 다른 음식 시켜야 나눠 먹을 수 있지 않나.”

    현대로 돌아와서 그녀와 처음 만났던 날, 마왕은 같이 점심 먹자며 날 학생 식당에 데려갔다. 그때 그녀가 나와 같은 메뉴를 고르길래 한 말이었다.

    “그건, 그랬는데.”

    내가 했던 말이라 차마 반박할 수 없었다. 마왕이 쥐고 있는 주먹이 두렵기도 했고..

    어쨌든,  주먹이 휘두르기 전에 바로 주제를 바꿨다.

    “근데 왜 마실 건 하나만 시킨 거야?”


    “아직 커피도  안 마셨잖나.”


    “아 맞다.”

    작은 방에서 몇 모금밖에  마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떠올렸다. 그 몇 초 안 되는 시간에 마왕이 만화 카페 내부에 있는 무언가를 가리켰다.


    “자네, 밥 먹고 나면 저거나 하세.”

    “뭔데.”

    “잘 보게. 저기 보드게임 있잖나.”

    그녀가 가리킨 선반엔 보드게임으로 보이는 작은 상자들이 여럿 있었다.

    “하고 싶어? 아니, 만화 카페에 저런 것도 있어?”


    “자넨 만화 카페를 정말 만화만 보는 데로 생각했나?”

    “당연하지! 괜히 ‘만화’ 카페겠냐?”

    “이렇게 순진해서야. 어떻게 진도 나갈 생각인가?”


    와장창!

    그녀가 말을 끝낸 직후 주방에서 뭔가 엎지른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걱정됐지만, 덜그럭거리며 정리하는 소리가 들린 걸 보니 다치진 않은 모양이었다.


    주방에서 고갤 돌리고 다시 마왕을 쳐다봤다.

    “진도라니?”

    “자넨 짐이 무슨 생각으로 말했는지 모르는가?”


    “모르겠는데.”

    와장창창!

    또다시 주방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 하지만 아까와 다르게, 뭔가 황당한 것처럼 들려오는 소리였다.


    한 번 더 마왕을 쳐다봤는데, 그녀는 눈썹을 찌푸리며  한심하게 보고 있었다.  표정에 대고 억울함을 담아 물었다.


    “왜?”


    “자네, 그러는 것도 죄일세.”

    “내가 뭘 어쨌는데?”

    “어휴, 됐네. 됐어. 일단 어떤 게임 할 건지나 정하세.”


    포기한 듯이 고개 저으며 걷는 마왕 뒤를 따라갔다. 그녀는 보드게임 여러 개가 쌓인 선반 앞에서 멈췄다.


    “뭐, 하고 싶은 게임 있나?”

    “뭐가 뭔지 몰라서. 추천해주라.”

    “알겠네.”

    “아니! 그냥 내가 고를게!”

    방금전 추천한다며 짜파게●로 주문했던  떠올리며, 마왕과 함께 선반 앞에 섰다. 많은 게임 중에 가장 눈에 띄는 걸 하나 골랐다.

    “이건 뭐야?”

    “오! CLU●를 골랐구먼! 생각보다 게임 고르는 눈이 있는 모양일세.”

    “크, 클루? 이게 뭔데.”


    “추리게임일세. 살인범을 추리로 잡는 게임이지. 하지만 지금은 할 수 없다네.”

    “왜?”

    “아무리 적어도 3명은 돼야 플레이할 수 있는 게임이네. 정 하고 싶다면 이건 다음에 세희라도 불러서 하지.”


    “세희?”

    그녀가 자기 여동생을 언급하자, 세희와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세희는 자기 언니를 병적으로 좋아하면서, 동시에 나도 이성적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내가 안 좋아하는  표정에 드러냈는지, 마왕이 왠지 기쁜 얼굴로 물었다.

    “뭔가. 자넨 짐과 단둘이 있고 싶은가?”

    “뭐?”


    “그래서 그렇게 싫은 얼굴한 거잖나.”


    “아, 아닌데?”


    “아닌 척하지 말게. 다 티나니. 아하핫!”

    조용한 만화 카페 안에 마왕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으음…… 뭐야?”

    “깼는가? 일어나지 말고 그대로 누워있게.”


    “나, 자고 있었냐?”


    “먹고 배부른지 바로 졸더군.”

    “그래? 근데 왜 나 네 다리 베고 있냐?”


    “자네가 이리 왔잖나.”


    “뭐?!”


    “하핫! 농담일세! 짐이 이리 눕혔지.”


    “아니, 이게,”


    “자네도 그리 싫은 눈치는 아니었네만, 깨고 나니 다른 겐가?”

    “…….”

    “왜 그런가. 부끄러운가?”


    “……아니.”


    “거짓말하지 말게. 자네 얼굴 빨개진 거 다 보이네.”

    “……아래에서 보니까.”


    “더 예쁜가?”

    “못 생겨보,”

    “어이쿠! 손이 미끄러졌구만!”


    “아악!  치워!”


    “알겠네. 어이쿠! 미안하네!”

    “야!”


    “만화책이 왜 이리 미끄러운지 모르겠네! 어이쿠!”

    “책 좀 떨어뜨리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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