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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화 〉자네 처음이 짐이라서 기쁠 뿐이라네. (62/72)


  • 〈 62화 〉자네 처음이 짐이라서 기쁠 뿐이라네.

    강의 끝나고 자취방으로 돌아가려는데, 마왕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통화버튼을 누르고 그녀가 말한 건 단 한마디였다.


    “여보세요.”

    -자네!


    “왜.”

    -자네자네자네자네자네자네!

    “왜왜왜왜왜왜.”

     부른 회수에 맞춰서 대답해주자, 전화기 너머에 있는 마왕이 소리 내서 웃었다. 그렇게 한동안 웃던 그녀는 전화 받고 날 부를 때처럼 밝은 목소리로 질문했다.


    -오늘  하는가. 예정이라도 있나?


    “없,”

    -없는 거 아는데 예의상 한 번 물어본 걸세.

    “……있어.”


    순간 짜증 나서 무의식중에 있다고 거짓말해버렸다. 마왕도 그걸 아는지 놀리는 듯한 말투로 물었다.


    -오오, 친구 하나 없는 자네가 약속이 있다고? 어서 말해보게. 누구와 만나는 겐가?


    고민 끝에 MT에서 친해진 사람을 댔다.

    “선아 만나기로 했는데.”

    -어디인가.


    갑자기 그녀 목소리가 낮아지고 말투도 짧아졌다.


    -어디서 만나는 겐가.

    “어, 피, 피시방?”


    -흐음, 피시방인가. 선아와 만나기로 했다고.

    “그런데 왜?”


    -흐으으음.

    “왜 그러냐니까.”


    -흐으으으으으으음.


    그녀가 내는 소리라곤 간단한 신음밖에 없었다. 하지만  울리는 소리가 내게 이유 모를 압박감을 느껴지게 했다.

    -흐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음.

    계속되는 압박감에, 난 그만 진실을 말하고 말았다.

    “아니, 사실 그냥 자취방에 갈 거였는데.”


    -그런 거였나!


    기분 나빠질 때와 마찬가지로, 좋아지는 것도 한순간이었다. 진실을 들은 마왕은 기분이 한껏 고양된 목소리로 외쳤다.

    -왜 짐에게 거짓말 따윌 하는 겐가! 쫄았잖나! 하하핫!


    질책하는 것치곤 꽤 기쁜 것 같았다.

    -하핫! 자네 그럼 오늘 약속 없다고?


    “응.”


    -그럼 짐과 어디 갈 데가 있네!

    “어딘데.”


    난 여기서 그녀가 “가서 알려주겠네!”라고 할 줄 알았다. 지금까지 마왕과 만나면서, 어디론가 데려가려고 하면 항상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만화 카페일세!

    “뭐?”

    -모르는가? 만화 카페 말일세. 만화 볼 수 있는 카페잖나.


    “알고 있어! 내가 모를 것 같았냐?”


    -자네 같은 히키코모리는 모를 줄 알았다네.


    “뭐 임마?”

    -혹은, 지식으로는 알고 있더라도 가 볼 용기는 없을 줄 알았지.


    “그건 아니야!”

    -호오, 그럼 가본  있는가? 만화 카페.


    무척이나 거짓말을 입에 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없어.”


    “그렇다면 짐과 함께 가세!”


    이번에 난 목소리는 핸드폰이 아닌 바로 뒤에서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니, 오늘도 어김없이 녹색 추리닝 차림이 마왕이 서 있는  보였다.

    북유럽 미녀 같은 외모에 화려한 은발, 거기다 푸른 바다 같은 눈동자를 가진 그녀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마왕은 귀에서 핸드폰을 떼고, 그 손으로 날 향해 흔들었다.

    “이리 오게!”

    “네가 와.”

    그렇게 말하면서도 내 발은 그녀에게 향하고 있었다. 통화를 끓고 마왕에게 걸어가며 물었다.

    “너 나 따라다녔냐?”

    “음! 그렇다네!”

    “스토킹이 가슴 피면서 말할 거냐. 언제부터 따라다녔어?”

    마왕은 폰을 추리닝 바지 주머니에 넣으며 대답했다.

    “그리 오래 따라다닌 거 아닐세. 자넬 발견하고 바로 전화 걸었으니.”


    “전화 걸 때부터 따라다녔냐. 그럼 전화하지 말고 바로  걸지 그랬어.”

    “음, 알고 있을 줄 알았네만.”

    “뭘 아는데.”


    “거 참, 일부러 그러는 겐가?”

    불만스럽게 미간을 찌푸린 그녀였지만, 곧이어 얼굴을 풀고 장난식으로  때렸다.

    “그럼 재미가 없지 않은가.”


    재미없다는 말이 이해되진 않았다. 그래도 장난스럽게 웃는 얼굴을 보고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지금은 재미있고?”


    “음, 재미라기보단…….”

    말끝을 흐린 그녀는 날 위아래로 훑어봤다. 그러더니 다시 웃으며 말했다.


    “조금 다른 감정일세. 지금은 말해주긴 어렵지만 말일세.”

    “뭔데, 그게.”


    “궁금한가? 무슨 감정인지 알고 싶나?”

    대답하기도 전에 날 올려보는  푸른 눈동자를 보고 얼굴이 뜨거워졌다. 차마 계속 보고 있을 용기가 나지 않아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별로.”

    “에이, 궁금한   알고 있네.”


    “아니라니까.”

    마왕은 내가 고개 돌린 쪽으로 움직여, 억지로 눈을 맞췄다.


    “언젠가 솔직해질 날을 기다리지. 짐도 솔직히 말해줄 날도 기다리고 말일세. 그리고 지금은,”


    그녀가  손목을 잡아 이끌었다.


    “만화 카페로 갈 시간일세!”


    “야! 당기지마!”


    “그럼 빨리 오게!”

    “넘어지, 어엇!”

    철퍼덕!

    “넘어졌잖아!”

    “그러니까 빨리 오라고 하지 않았나!”








    그렇게 두 번 더 넘어지고 나서야 만화 카페에 도착했다. 처음 본 만화카페 입구는 생각보다 깔끔했다. 언젠가 어렸을 적에 봤던 만화방은 담배 냄새가 반기는 반면, 여기는 작은 라커룸이 먼저 보였다.

    “신발 안 벗고 뭐 하는 겐가?”

    “지금 벗잖아, 지금.”

    투덜거리면서 신발을 벗었다. 이제 벗은 신발을 어디에 두면 되는지 고민했다. 결국에 개인석 하나를 고르자, 마왕이 날 막았다.

    “여기에 넣게.”


    개인 신발장보다   넓은 신발장 안엔 이미 마왕이 신던 운동화가 들어가 있었다.  옆으로는 같은 사이즈인 신발장이 줄지어 있었는데, 위로는 커플이란  글자가 적힌 게 보였다.

    “거기에?”

    만화 카페에 간 적은 없어도 인터넷에서 본 적이 있었다. 인터넷 사이트에선 주로 인싸 커플들이 데이트하러 가는 곳이라고 했다.

    내가 우물쭈물하며 넣지 않자, 마왕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왜 그런가?”

    “아니, 거기 넣어도 돼?”

    “당연히, 아아!”


    그녀는 내가 왜 그런지 알겠다며, 눈웃음을 짓고 바라봤다.

    “자네는 뭘  이런 거에 부끄러워하는가.”


    “내가 언제 부끄러워했어.”

    “지금 하고 있네만. 이리 주게.”


    달라고 했으면서 멋대로 내 신발을 빼앗아, 커플 신발장에 넣었다. 그리고 신발장 문을 닫고 열쇠 뽑으며 말했다.

    “커플을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겐가. 커플엔 연인 말고  명이란 말도 있네.”


    “!”

    “그 부끄러운 모습이 자네 매력이긴 하지만, 공부  하게.”

    “시끄러워!”


    “하핫! 이제 들어가기나 하세!”


    약간의 소동 끝에 나와 마왕은 만화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 가장 먼저 보이는 카운터에서 직원이 우릴 반겼다.

    “어서 오세요.”


    신발장에서부터 계속 보고 있던 그는 상냥한 얼굴로 마왕에게 물었다.

    “일행분이시죠?”

    “그렇네. 비록 ‘연인’은 아니지만 말일세.”


    “야, 그건  강조하는데.”


    “짐이 그랬나? 미안하군.”

    사과하면서도 마왕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동시에 아까 뽑은 열쇠를 점원에게 건네며 말했다.


    “3시간으로 부탁하겠네. 커플로.”

    “알겠습니다. 잠시만요.”


    열쇠를 받은 그는 카드키 2개를 마왕에게 건넸다.

    “이거 받으시고, 아메리카노 받아 가시면 됩니다. 어디서 받는지는 아실까요?”

    “음, 알고 있네.”

    “음식 주문도 거기서 받는 거 아시죠?”

    “당연하지 않나.”


    “네, 알겠습니다.”

    “수고하게.”

    그 말을 끝으로 마왕은 날 만화 카페 내부로 데려갔다. 아무 계산도 하지 않은 걸 보고, 걸어가면서 그녀에게 질문했다.

    “계산 안 해도 돼?”


    “그렇네. 나갈 때 계산하면 되네. 후불제지.”

    “그렇구나.”

    “자네 정말,”


    갑자기 그녀가 하던 말을 멈추고 날 바라봤다.  차이 때문에 날 올려보는 시선엔 의아함이 가득했다.

    “정말 만화 카페가 처음인가 보군?”

     ‘처음’이란 단어이 이유 모를 열등감이 느껴진 나는, 그녀에게 퉁명스러운 말투로 대하고 말았다.

    “그게 왜, 나쁘냐?”

    “아닐세.”


    하지만 마왕은 오히려 기쁘다는 듯이 웃었다.


    “자네 처음이 짐이라서 기쁠 뿐이라네.”

    “뭐?”


    “자리는 이곳으로 하세.”

    내 질문을 무시하면서까지 고른 장소는 복층처럼 이루어진 작은 방들이었다. 귀가 빨개진 그녀는 위층과 아래층을 번갈아 가리켰다.

    “자넨 어디가 좋은가. 위? 아니면 아래?”

    “그냥 들어가도 돼?  따로  내고?”


    “당연하지 않나. 고르기나 하게.”

    “어, 응.”


    선택한 곳은 위층이었다.

    “위로 하자.”

    “흐음, 처음인데 위로 골랐다라.”


    “왜, 하면 안 돼?”

    “짐이 위인 것도 나쁘진 않네만.”

    “뭔 소리야.”


    “아무것도 아닐세. 일단 들어가고 보세나.”

    마왕은 옆에 놓인 작은 계단을 타려 했다. 하지만 뭔가 떠오른 듯이 작은 감탄사와 함께 몸을 멈췄다.

    “아! 그러고 보니 음료수를 깜빡했군!”


    그러더니 계단에 올린 다리를 내리고, 내게 말했다.


    “자네 먼저 올라가 있게. 책은 보고 싶은  고르고. 그동안 짐은 아메리카노를 가져오겠네.


    “어, 야.”

    “금방 오겠네!”

    마왕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여길 떠났다. 난 흔들리는 은발을 보면서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다 시킨 대로 기다리는 동안 만화책이나 고르자는 생각이 들었다.


    만화카페 내부는 생각보다 넓었고, 그만큼 책도 많았다. 일본 만화책은 물론이고 웹툰, 인터넷 소설, 심지어는 저 구석엔 보드게임도 놓여 있었다.


    어쨌든 재밌어 보이는 책 서너 권을 집고 아까 골랐던 자리로 돌아오자, 그 안엔 금세 돌아온 마왕이 책을 보고 있었다.

    그녀는 거기에 올라가려는 날 발견하고는 물었다.


    “이제 왔는가?”

    “넌 이제 왔냐?”

    “짐은 진작 왔네만? 책 고르는데 왜 그리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겐가?”

    “처음 온 거라 그렇지. 그런 너는 왜 그리 빨리 왔는데?”


    “짐이야 처음이 아니라서 그렇네.”

    그렇게 보이긴 했다. 마왕은 여길 여러 번 와 본 것처럼 거리낌없이 행동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물론 원래 거리낌 없는 성격이긴 했지만, 그녀 자체가 여기에 익숙해 보였다.


    거기서  마음 쓰이는 건, 커플 신발장을 쓰는 거였다. 아무렇지 않게 사용하는 모습이 둘이서 자주 온 것 같았다.

    갑자기 무거워진 마음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너, 여기 자주 왔어?”

    “그렇네만?”

    “혼자…… 온 거야?”

    “여길 혼자 오면 무슨 재미인가?”


    “!”

    혼자 오지 않았다는 말을 듣자, 심장이 멈춘 것 같은 충격이 느껴졌다. 그런 내 상황은 알지도 못한 마왕은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작년까진 자주 왔지. 운 좋게 같은 시간에 학교가 끝나면 둘이서 왔다네.”


    “둘이서?”


    “그렇다네. 이 시간대에 와서 저녁까지 있다가, 저녁도 같이 먹었네.”

    “저녁을?”


    내 반응이 심상치 않자 마왕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왜 자꾸 그렇게 되묻는 겐가?”


    “내가 뭘.”

    “지금 기분 안 좋아 보이네만. 짐이 세희와   잘못이라는 겐가?”

    “뭐? 세희?”

    “맞네, 세희.”


    그녀가 자기 동생이랑 왔다는 말에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런데 마왕은 지금에야 내 기분을 알아챘는지, 장난스럽게 웃어댔다.


    “왜 그런가, 질투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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