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61화 〉자네가 부탁한 대로 치마를 입어 봤네만, 어떤가? (61/72)


  • 〈 61화 〉자네가 부탁한 대로 치마를 입어 봤네만, 어떤가?

    똑또도, 똑똑!

    “나랑 눈사람 만~”


    “하지마 이 미친년아!”

    마왕이 하면  되는 말을 입에 담기 전에 문을 열어젖혔다. 창문을 통해 내리쬐는 햇빛 아래 마왕과 세희가 서 있는 걸 발견했다.


    언니는 챙이 넓은 밀짚모자와 검은색 민소매 원피스 차림이었다. 자칫하면 장례식에서 볼 수 있는 차림이었지만 원피스 안에 하얀 반소매 티셔츠를 입고 있어, 정숙하면서도 화사한 분위기를 풍겼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마왕은 반가운 듯이 입꼬리를 올렸다. 그녀는 웃는 얼굴로 밀짚모자를 벗으며 물었다.


    “짐과 동료가 되겠나?”


    “안 해!”

    또 만화를 따라 하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줘.”


    “훗, 역시 자네일세.”


    “빨리 주기나 해.”


    일부러 퉁명스럽게 대답하며 마왕이 건넨 비닐봉지를 받았다. 오늘 소풍에서 먹을 도시락 재료가 들어 있어서 꽤 무거웠다. 받아 든 다음 그들이 들어올  있게 실내로 들어갔다.

    “들어와.”


    내가 들어가자 미인 자매가 한 명씩 자취방으로 들어왔다. 마왕은 익숙한 듯이 신었던 운동화를 아무렇게나 벗으며 들어왔고, 세희는 조신스럽게 신고 있던 캔버스화를 벗어 가지런히 두었다.


    “스마트폰은 잘 바꿨어요?”


    내 안부를 물어보기는커녕 폰에 관해 묻는 세희. 하지만 그녀를 나무랄 순 없었다. 덕분에 어제 싸고 좋은 폰으로 바꿀 수 있었으니까.

    자취방으로 들어오는 세희는 자기 언니처럼 비슷한 검은색 옷을 입고 있었다. 다른 점이라면 치마가 아닌 바지라는 점이었다.

    저런 걸 뭐라고 하지? 점프수트?

    대충 검은색 멜빵 바지 같은 옷에, 마왕과 같은 흰색 반소매 티셔츠를 입고 있어 어깨가 드러나는 걸 가렸다.


    중3이라는 나이에 맞게 귀엽게 보이다가도, 묘하게 성인 여성처럼 느껴지는 복장이었다.
    방에 들어온 세희는 등에 메고 있던 작은 배낭을 벗었다. 그러자 윤기가 흐르는 검은색 장발이 물처럼 부드럽게 휘날렸다. 그녀는 이 예쁜 머리가 귀찮은 듯이 파리 쫓는 것처럼 손으로 쳐내며, 가방 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여기요.”

    “이게 뭔데?”

    비닐봉투를 바닥에 내려놓고 그녀가 내민 걸 받았다. 투명한 비닐로 포장된 그것은 흰색으로 된 옷감이었다.


    그걸 받아 든 채 살피는 나에게, 세희가 평소처럼 무감정하게 느껴지는 말투로 말했다.

    “언니랑 제가 입은 거랑 같은 거예요. 언니가 커플룩 입고 싶어 하시는 거 같아서요. 세명이서 입으니까 트리플룩이겠지만요.”


    소소한 농담에 웃으며 선물과 비닐봉지를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니, 마치 자기 집인 것처럼 침대에 드러누워 있는 마왕이 보였다.


    무거운 봉투를 싱크대에 올려놓고 마왕에게 따졌다.

    “비번 치고 문 열었으면 들어와야지, 안 들어어고 이상하게 노크하는  뭐냐?”


    “그냥 들어가면 자네가 심심해할 것 같아서 말이지.”

    “그냥 들어와도 돼!”

    구시렁거리면서 뒤를 돌아봤다. 세희는 자기 언니와 다르게 침대가 아닌 책상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명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여자들이었다. 마왕은 어머니를 닮아 은발과 푸른 눈동자를 가져 북유럽 인형 같은 얼굴이었다. 세희도 아버지를 닮긴 했지만, 자기 언니와는 다른 타입의 미녀였다. 검은 머리칼과 냉철한 미모는 나이에 걸맞지 않은 품위가 느껴졌다. 물론 중학생이라 손대면 범죄지만.

    앉아 있는 둘을 보고 있자니 어색함이 느껴졌다. 그들이 내 방에 있는 게 낯설어서 그런  같았다. 재료 사  자매가 가만히 있는 걸  뒤, 비닐봉투 안에 담긴 내용물을 확인했……다?

    “잠깐만! 이거 너희들이 사 온 거잖아! 왜 내가 확인하는 거야!”


     말에 마왕이 싫은 소리를 냈다.


    “에엥? 그럼 짐들이 하란 소린가?”

    “당연하지! 살 때 만들고 싶은 음식이 있었을 거 아니야! 아니면 적어도 레시피라도 보내주던가!”

    “그럼 레시피 보내 드릴게요, 오빠.”

    “보내지 말고 너네가 하라고!”

    “보냈어요.”


    “아 좀 보내지 말라니까!”


    투덜거리면서 바지 주머니에 있던 스마트폰을 꺼냈다. 잔 흠집 하나 없는 화면을 만져서 세희에게 문자가 온 걸 발견했다. 앱을 열어보니, 그건 수상한 주소가 적인 문자였다.


    “오빠. 거기로 들어가시면 레시피 나와요.”

    “내가 속을 줄 알았냐!”

    “아깝네요.”

    “흥! 아깝기는!”

    어차피 또 해킹 사이트일 게 뻔했다. 어제도 나한테 스팸 메일처럼 이런 문자를 보냈던 세희였다. 안 그래도 새로 바꿔서 감시당할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녀가 이렇게 끈질긴 줄은 몰랐다.

    가차 없이 전원 버튼을 눌러 화면을 껐다. 새로 산 폰을 옆에 조심스레 내려놓은 후, 다시 비닐봉지를 뒤졌다. 뭘 사 왔는지 알면, 뭘 만들려고 했는지 알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야. 맥주를  이렇게 많이 사 왔냐?”

    가득 찬 봉투 중 절반이 맥주였다. 한두  정도라면 음식에 넣어 먹으려고  걸 수도 있었다. 하지만 캔맥주 6개들이가 두 개나 있는  이상했다.

    “당연하지 않나.”


    내 말을 들은 마왕이 누운 채 대답했다.

    “나들이엔 당연히 술 아니겠나!”

    “아니, 중학생도 있는데 술 마실 거였냐!”


    “중학생이 있으니 맥주만 샀네만.”

    “아직 미성년자잖아!”

    “괜찮네, 괜찮아. 다 그렇게 배우는 걸세.”

    “응? 잠깐만.”

    도저히 놓칠 수 없는 말이 들렸다.


    “너 중학생 때부터 술 마셨냐?”

    “……”

     방에 들어온 마왕이 처음으로 말이 없었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으려는 듯이 내게 등을 보이며 몸을 뒤집었다.

    “……아닐세.”

    “누가 봐도 먹은 거잖아! 누구랑 먹었어? 혼자? 아니면 아버지?”


    “도, 독학이었네만.”


    “자랑이다, 아주!”


    그렇게 외치며 봉지 안에 있는 반지 모양 사탕을 던졌다. 사탕은 허공을 가르며 날아가 마왕 등 부분에 약하게 부딪혔다.

    툭, 바스락!

    “……”


    사탕이 침대에 떨어지며 비닐 포장지가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걸 들었는지 마왕이 등 뒤로 손을 짚으며 내가 던진 걸 찾았다. 결국 그걸 잡아내더니 집어서 가져갔다.

    바스락, 바스락.


    그거 네가 먹으려고  거였냐?

    사탕을 먹기 시작한 마왕을 한심하게 바라보자, 말없이 있던 세희가 말했다.

    “괜찮아요, 오빠. 저  쎄요.”

    “뭐!”


    “머히!”

    그 말에 마왕이 빠른 속도로 몸을 일으켰다. 사탕 때문에 어눌한 발음이 나오자, 그녀는 반지 사탕을 손가락에 꿰고는 세희를 타일렀다.


    “그러면  되네, 세희! 어릴 적부터 술 마시는 버릇은 안 좋단 말일세!”

    “네가 할 말이냐! 어쨌든 세희야. 이번만큼은 언니 말이 맞아. 중학생이 술 마시면 안 돼.”

    “이번만큼은 뭔가! 이번만큼이!”

    우리가 이렇게 격한 반응을 보일 줄 몰랐는지, 세희가 보기 드물게 눈썹을 올리며 당황한 모습을 보여줬다.

    “아, 아뇨, 농담이었어요.  술 안 마셔요.”


    “정말인 겐가?”

    “정말이지?”

    “네……. 죄송해요.”

    너무 당황했는지 사과까지 했다. 그 모습에 난 농담에 너무 정색한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니, 그, 죄송할 필요까진 없고. 내가 미안해. 농담인데 그렇게 반응해서.”

    “짐도 사과하지. 짐이 자넬 너무 아끼는 나머지 그런 반응을 보이고 말았군.”

    우리 사과를 듣고 세희가 희미하게 웃었다.

    “언니, 절 아끼신다고요?”

    “그렇네만.”

    “오빠는요? 오빠도 저 아끼죠?”

    “응?”


    갑자기?


    너무 뜬금없어서 대답하지 못하고 당황했다. 그걸 보고 세희가 입꼬리를 내렸다.

    “오빠는 절 아끼지 않는 모양이네요.”


    “자네!”

    마왕이 속삭이는 목소리로 날 불렀다. 고개를 돌려보니, 그녀는 소리는 내지 않고 입만 움직여 뭔가를 말하려 했다.

    자네도 아낀다고 하게! 어서!


    대충 이런 말이었다. 그렇게 말하며 눈을 부라리는 그녀를 보고, 난 바로 세희에게 말했다.


    “나도 아끼지, 당연히!”


    “그래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세희가 입꼬리를 올렸다.

    “그럼 다행이네요.”


    아무래도 속은 모양이었다. 그녀는 희미하게 웃으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저는 잠깐 나가 볼게요.”

    “뭐? 어디 가게?”

    “그냥 여기저기요. 아 언니.”

    “음?”

    “이따 차에서 기다릴게요.  키  주세요.”


    “여기 있어도 괜찮네만. 정말 가겠나?”


    “괜찮아요. 주세요.”

    “음……. 알았네.”

    마왕은 괜찮다고 생각했는지, 원피스 앞부분에 달린 주머니에서 차 열쇠를 꺼냈다. 열쇠들이 주렁주렁 달린 꾸러미를 받은 세희는 차분한 걸음걸이로  앞을 지나갔다. 그러더니 나만 들릴 소리로 작게 중얼거렸다.

    “지금이에요.”

    응? 뭐가 지금인데?

    묻기도 전에 세희는 현관에 도착해서 신발을 신었다. 현관문을  그녀는 나가기 직전, 실내를 향해 몸을 돌렸다.

    “저 대충 3~4시간 정도 기다릴 수 있거든요? 그러니까, 좋은 시간 되세요.”

    “뭣, 야!”

    쾅!


    의미심장한 말만 남긴 채 세희가 나가버렸다. 마왕은 침대에 앉아서 자기 동생이 왜 저러는지 바라보다가,  향해 시선을 돌렸다.


    “자네.”

    조금 전 세희가 있을 때와는 조금 다르게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자네가 부탁한 대로 치마를 입어 봤네만, 어떤가?”


    “응?”

    “저번 MT에서 부탁하지 않았나, 짐의 치마 차림이 보고 싶다고.”

    아 그거! 근데 그거……  다른 건데?


    MT에서 세희에게 이상한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언니는 남자가 치마 입는 게 취향이라고. 그게 진짜인지 묻다가 얼버무리던 결과가 이거였다. 마왕의 치마 차림이 보고 싶다고.
    거기까지 생각하자 아까 세희가 말하던 게 무슨 말인지 이해하고 말았다. 나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고, 마왕은 붉어진 날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으음? 그렇게나 짐이 매력적인 겐가? 흐으으으음?”


    신음에 비슷한 콧노래를 부르는 마왕의 눈빛이 장난스럽게 빛났다.


    “이렇게 하면 자네, 아주 좋아 죽겠구먼?”


    팔락!


    갑자기 그녀가 치맛자락을 들췄다.


    “야!”


    황급히 고개를 돌렸지만, 그 직전 봤던 풍경을 잊을  없었다. 검은 장막에 가려져 있던 하얀 종아리 두 개가 눈앞을 아른거렸다.

    “고개 돌리지 말게! 그렇게 보고 싶어 했잖나! 에잇! 에잇! 에잇!”

    팔락! 팔락! 팔락!

    들추는 소리가 연속해서 들려왔고, 계속해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러다 낯선 물건이 방에 있는 걸 발견했다.


    “어, 야. 잠깐만.”


    “에잇, 에, 뭔가?”


    “잠깐만 있어 봐. 잠깐만.”

    같은 말을 반복하며 책상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렇게 도착한 책상 위엔, 내 물건이 아닌 스마트폰이 세워져 있었다.

    뒷면에 달린 카메라가 방 전체를 비추는 것처럼 비스듬히 세워진 폰을 들었다.

    -뚝


    그러자 뭔가 끊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마치 통화하던 게 끊어진 거 같은…….

    더 이상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폰을 그대로 내려놓고, 마왕을 쳐다보며 말했다.

    “야, 그냥 만들지 말고 가서 시켜 먹을래?”

    “음? 왜 그런가?”

    “그냥 시켜 먹고 싶어서 그래. 요즘은 밖에서 시켜도 배달 다 되잖아?”


    “그건 그렇네만, 이유를 말해주지 않겠나?”


    “나가서 먹으면 맥주 한 잔은 봐줄게.”


    “알았네!”


    마왕은 용수철 튕기듯이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러더니 침대 발치에 있는 옷걸이에 걸려있는 내 블레이저와 슬랙스를 들고 내밀었다.


    “자! 이걸로 갈아입게! 세희가 가져온 티셔츠와 잘 어울릴 걸세!”


    맥주 한잔에 저렇게 좋아할 줄은 몰랐다.


    여자 보는 앞에서 갈아입을  없었기에, 세희가  티셔츠와 마왕이  옷을 들고 화장실에 들어갔다.

    갈아입고 나오니 마왕은 자기가 사 온 식재료들을 냉장고에 넣고 있었다.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는 모습은 정말 신나 보였다.

    “한 잔이 두 잔을 부르고♪ 두 잔이 세 잔을 부른다네♬”

    “너 가서 술 처먹을 거지!”

    “아니, 아닐세! 그저 흥얼거린 거에 불과하다네!”

    “그걸 믿겠냐!”

    당황한 그녀에게 일침을 날리며 물었다.


    “근데 그건 왜 넣는 거냐?”


    “가서 배달시킬 건데, 밖에 그냥 둘 순 없지 않은가. 돌아가기 전에 한 번 들러서 회수할 생각일세.”

    하긴, 들러야 하긴 하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책상 위에 놓인 핸드폰을 쳐다봤다. 처음 보는 거지만 주인이 명확한 폰을 보고 있을 땐, 마왕이 냉장고 문을 닫은 참이었다.


    “자, 이제 가세. 세희가 기다릴 걸세.”


    그녀는 일어나더니, 활짝 웃으며  가슴팍을 쳐다봤다.


    “자네.”


    “어, 왜.”

    “그건 마음에 드는가?”


    보고 있던 건 그들이 선물한 티셔츠였다. 그런데 마음에 들고 말고 할 게 아니었다.


    “간단한 무늬도 없고 그냥 밋밋한 셔츠인데 마음에 들고 말고가 어딨냐?”

    “자넨 선물 내용보단 그걸 선물한 마음에 대해 감사하란 말도 모르는 겐가?”


    “알지! 그래도 선물해줘서 고마워.”

    “훗! 그건 세희한테도 말해주게. 그리고 자네……”


    갑자기 그녀가 가까이 다가왔다. 내 셔츠 밑자락을 검지와 엄지로 잡고 비비며, 한쪽 어깨를 들이댔다. 짧은 흰색 셔츠 소맷자락을 보여주면서 마왕이 밝은 미소로 물었다.


    “커플룩일세! 좋은가?”

    어떤 남자가 이걸 보고  웃을 수가 있을까.

    “좋지. 이제 가자. 세희 기다리겠다.”

    “알았네.”

    서로 마주 보며 웃은 뒤, 함께 현관으로 향했다. 난 먼저 신발을 신으며 물었다.


    “근데 어디 갈 거냐?”

    “이 근처 차로 30분 걸리는 곳에 소풍 가기 좋은 공원이 있네. 아는 사람만 가는 곳이라 주말에도 크게 붐비지 않을 걸세.”

    “그래? 좋겠네, 잠깐만! 너 운전할 건데 술 마시려고 한 거냐?”

    “어엇, 자네! 그 티셔츠는 바지에 넣어 입는 편이 더 이쁘다네! 다리 길어 보여서!”


    “말 돌리지 말고!”


    “요즘엔 낮에도 대리 부를 수 있단 말일세!”

    평소대로 티격태격하며 자취방을 나갔다.

    ……이따 엘리베이터에서 넣어 입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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