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화 〉자칫하면 못 돌아오게 될 수도 있다네
“이 캐색휘보돠 좔해두릴게요오! 줘, 좌신있슴미당! 글고 눠!”
동기는 다가와 내 멱살을 잡았다. 정확히는 내 멱살을 잡고 쓰러지지 않도록 기댄 거였다.
나는 취한 그의 행태에 어이가 없기도 했고, 술도 들어가서 그런지 화가 치밀어 올랐다. 마지막 남은 이성을 쥐어 잡고, 그만하라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그가 한 말을 듣고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눠, 유뤼랑 사기는데 그러면 안되짐, 마! 너 때뭄헤 유리곽, 얼머나 힘드러하는쥐 알아!”
뜬금없이 내가 유리랑 사귄다는 말에 어이가 없었다.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것 같던 분노가 사라지고 황당함만이 남았다.
“뭐?”
“한결아!”
무슨 이야기인지 제대로 들으려고 할 때 다른 테이블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한결아! 너 너무 많이 마셨어. 좀 쉬자! 응?”
다가온 건 아까 내게 사과했던 조장이었다. 그녀는 노란색으로 염색한 머리를 휘날리며 태한이라고 부른 동기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동기는 팔을 휘두르며 그 손을 쳐냈다.
“이고 놔!”
“너 많이 취했다니까?”
“나 하나도 안 취해써!”
누가 봐도 취한 거 같은데.
한편 조장은 그를 말리다가 나와 마왕에게 말했다.
“미안해요, 소희 언니. 금방 데려갈게요.”
“괜찮네. 선아. 잠깐 일어나겠네.”
마왕은 아무렇지 않은 말투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만취해서 풀린 두 눈은 그녀와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
“자네.”
가까스로 눈을 마주친 마왕은 침착하게 그를 진정시켰다.
“짐은 취하는 걸 좋아하는 편이긴 하나, 술에 먹히는 사람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네.”
“조 하놔도 안 치해써여!”
“그런가? 짐의 눈엔 만취한 거로 보이네만. 지금 말도 제대로 못 하고 있지 않나.”
“으음……”
정곡에 찔렸는지 그는 낮게 신음했다.
“자네 고백이 기쁘지 않은 건 아니나, 가능한 자네가 맨정신일 때 듣고 싶네. 고백의 대답은 그때 듣도록 하지.”
“……눼.”
태한은 “줴성함미다! 눼일 봐호요?”하며 고개 숙인 뒤,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떠나갔다. 선아라는 이름을 가진 조장도 따라가려 했지만, 난 그녀를 불러 세웠다.
“잠깐만, 세아야.”
“응?”
“방금 태한이가 이상한 소릴 했는데 무슨 얘긴지 알려줄 수 있을까?”
“아 그거? 별거 아니야. 신경 안 써도 돼.”
“신경 써야 하는 이야기 같은데.”
그 말을 한 뒤 가만히 그녀를 바라봤다. 선아는 도와줄 사람을 찾는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마왕과 눈을 마주쳤다. 하지만 마왕은 도와주지 않았다.
“짐도 너무 많이 마신 거 같군. 잠깐 숨 좀 돌리고 오겠네.”
한숨 쉬며 어딘가로 걸어가는 그녀였다. 자길 도와줄 줄 알았던 마왕이 자리를 피하자 선아는 체념한 듯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알았어. 말해줄게.”
선아는 가볍게 심호흡한 뒤 마왕이 앉았던 자리를 가리켰다.
“앉아도 될까?”
“어, 앉아.”
내게 조금 떨어져 앉은 그녀는 손을 뻗어 과자를 집었다. 과자 먹으면서 진정하더니, 이내 말하기 시작했다.
“나도 이게 거짓말인 건 알아. 그건 다른 얘들이나 선배도 마찬가지고.”
“알았으니까 어서 말해줘.”
“그게, 사실, 얘들이랑 노는데 유리가 왔어. 우린 그냥 친해지려고 같이 술도 먹고 놀았지. 근데 걔가 사실 네가 자기랑 사귀고 있는데 소희 언니랑 바람피고 있다고 하는 거야.”
내 짐작이 맞았다. 유리는 나와 마왕 사이에 끼어드는 대신 주변인들에게 거짓 정보를 퍼뜨리고 있었다.
아파지는 관자놀이에 손을 올려 지긋이 눌렀다. 그 사이에도 선아는 계속해서 말했다.
“우리도 그게 거짓말인 건 알아. 너랑 언니랑 같이 있는 모습보면 다 사귀는 거 알거든.”
“잠깐.”
듣다가 못 넘길 말이 있어서 끼어들었다.
“나랑 걔랑 사귀는 사이 아닌데?”
“뭐?”
선아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럼 썸이야?”
“그, 그건 아니고……”
“뭐야 그럼.”
“그냥, 그냥 같이 노는 거지.”
내 말에 그녀는 날 가만히 바라봤다. 그러더니 뭔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너 대학생 맞지?”
“맞는데.”
“왜 이렇게 순수해? 아니면 멍청한 건가?”
“아니거든? 그냥 이야기나 계속해주면 안 돼?”
“되긴 되는데……. 언니가 많이 힘드시겠다.”
세희와 비슷하게 말한 선아는 하던 이야기를 계속했다.
“대충 너랑 언니가 사귀는 사이가 아니더라도, 너랑 유리가 사귀는 사이가 아닌 건 알고 있거든. 게다가 걔 이상한 건 다 알고 있으니까.”
역시 유리가 불안정하다는 게 학교에 퍼진 모양이었다. 사람들 앞에서 그런 난리를 했는데 안 퍼지는 게 이상하겠지만.
그간 유리가 했던 일을 떠올리며, 궁금한 게 생겼다.
“그럼 그놈은 왜 믿었는데.”
“아, 태한이? 너무 많이 마셔서 그래.”
“하긴 그렇게 보이긴 하더라.”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바라봤다. 선아도 술이 들어가서 붉어진 얼굴로 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녀 얼굴을 보면서 거짓말을 한 게 아닌지 말없이 시선을 고정했다. 내 눈길이 부담스러운지 눈동자가 요동쳤다.
“고마워, 말해줘서.”
“어? 아니, 아니야. 말 안 하려고 해서 미안하지.”
선아가 당황한 듯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더운지 손으로 부채질하며 말했다.
“아 덥다. 나 이제 가도 될까?”
“응. 붙잡아서 미안해.”
“괜찮다니까. 그리고 있잖아, 지헌아.”
“왜?”
“유리 좀 케어해줘. 선배들이 펜션 밖으로 산책 나가는 걸 봤대.”
“알았어.”
내 대답을 들은 선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원래 있던 테이블로 가기 전 다시 내게 말 걸었다.
“저기, 지헌아.”
대답하지 않고 그녀를 올려 봤다.
“유리 괜찮은지 확인하면, 우리가 있는 데로 올래?”
“나 가면 선배도 같이 오니까?”
“아니, 너만 와도 돼.”
“어?”
선아는 그렇게 말한 직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기가 왔던 테이블로 걸어갔다.
뭔가 이상했지만 멀리 서 있는 마왕이 볼 수 있도록 손을 들었다. 그 손으로 내 옆자리를 가리키고 얼마 안 되서 그녀 목소리가 들렸다.
“이야기는 잘 끝났는가?”
“대충은.”
“이 금태양 같으니라고.”
“갑자기 그게 왜 나와!”
“방금 저 처자를 꼬시지 않았나.”
“내가 언제!”
“얼굴 붉어진 것이 누가 봐도 반한 게 아니겠나.”
“술 마셔서 그러는 거잖아!”
그래도 어이없는 농담에 어지러웠던 머리가 좀 풀리는 듯했다. 그런 날 보고 마왕이 가볍게 웃으며 옆자리에 앉았다.
“이제 어찌 할 텐가.”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당연히 말려야지.”
“말린다고 끝이 나는가?”
“모르지.”
“이미 알고 있잖나. 이대로 두면 나중에 어떻게 될지.”
“…….”
그녀가 말한 대로 여기서 끝이 나야 했다. 지금 유리는 나 때문에 과에서 고립되고 있었다. 그렇게 된 건 자기 선택이었지만, 택한 건 내 책임이 어느 정도 있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던 핸드폰을 바지에 넣었다. 그런 날 보며 마왕이 물었다.
“결정했는가?”
“했지.”
“제대로 끊어야 하네. 그렇지 못하면 사태만 악화할 뿐일세.”
“나도 알아, 좀.”
그만하라는 뜻으로 그녀를 내려봤다. 마왕은 알았다는 듯이 눈을 가볍게 감으며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러다 내가 떠나는 걸 보자, 내게 말했다.
“어디 있는지 알고 있나?”
“산책 나갔다는데, 밖에 있겠지.”
“혹시 모르니 바다 먼저 가보게.”
“그건 왜.”
“이제 좀 있으면 밀물 때라서 그렇네. 자칫하면 못 돌아오게 될 수도 있다네.”
“야! 그걸 왜 지금 말해!”
“지금 말하지 않나?” 하며 얄밉게 말하는 마왕을 뒤로하고 펜션 마당을 뛰어갔다. 누가 쳐다보든 말든 펜션을 벗어나고 주위를 둘러봤다. 한적한 시골이라 주변엔 아무것도 없었다. 가로등이 줄지어서 차 없는 도로를 밝히고, 그 도로 옆엔 민가나 밭도 없이 잡초만 무성했다.
고개를 돌려 이번엔 산책로를 쳐다봤다. 해안가를 따라 난 산책로는 관리가 안 되어 있어 개펄과 그대로 연결되어 있었다. 난 거기서 휘청거리며 걷는 그림자를 발견했다.
일단 혹시 모르니 산책로로 가서 자세히 살펴봤다. 아직 유리인지 확실하진 않았다. 그래도 야간에, 그것도 밀물 때 바다에 있는 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산책로에서 잡초밭을 걸쳐 개펄로 내려갔다.
가로등도 없는 개펄은 상당히 어두웠다. 달빛에 의해 반짝이는 뻘은 어디가 바다인지 구별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유리를 두고 갈 수 없었던 나는, 한 번 디딜 때마다 발목까지 파고드는 펄밭을 걸어갔다.
“유리야!”
강한 바람과 파도 소리 때문에 내 목소리가 묻히고 말았다. 다시 한번 힘주어 그녀를 불렀다.
“유리야아!!”
그제야 그 그림자가 멈추었다. 이윽고 내가 볼 수 있도록 한 손을 들어 흔들었다.
“……!”
잘 들리지 않았지만, 유리 목소리 같았다. 나는 유리라는 확신에 서둘러 걸었다. 한 번 걸으면 발이 파고들고, 그 위를 진흙이 덮었다. 한걸음 디딜수록 체력이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쉬지 않고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10미터 정도로 가까워졌을 때 또 이름을 불렀다.
“유리야!”
“지헌아! 어서 와!”
그녀가 맞았다. 거의 뛰듯이 걸어가 유리의 어깨를 잡았다.
“여기서 뭐해! 빨리 나가자!”
“에이, 나간다고오?”
강한 술 냄새와 함께 늘어지는 목소리가 들렸다. 어두워서 얼굴이 보이진 않았지만, 많이 취한 것 같았다.
나가자는 내 말에 유리는 몸을 돌려 어둠 속으로 걸어가려 했다.
“시러어! 나 갈 거야아!”
“가면 안 돼! 지금 물 들어오고 있다고!”
여기까지 오는 사이 물은 발목까지 들어온 상태였다. 개펄은 물이 빨리 들어온다고 하니, 조금이라도 빨리 나가야 했다.
“가면 너 죽어!”
“에이~!”
“그러지 말고 빨리 따라와!”
“시러!”
“싫은 게 문제가 아니라 어서 오라니까!”
“그럼, 나랑 사귈 거야?”
그 말을 듣자 머리가 급속도로 식어갔다.
“뭐?”
“네가 시킨 대로 할 테니까, 나랑 사귀자.”
“아니, 이게 지금,”
“싫어? 그럼 나 죽을래!”
그렇게 외친 유리는 바다로 뛰어가려 했다. 하지만 난 그녀 손목을 잡아당겨, 가지 못하게 만들었다.
“가지마!”
“가지마? 그럼 나랑 사귀는 거야?”
“그건 아니야!”
“왜애애!!”
내 말에 그녀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옷이 더러워지는 것도 신경 쓰지 않는지, 철퍼덕! 하며 진흙이 튀었다. 유리는 장난감을 사달라며 떼쓰는 것처럼 진흙을 튀기며 떼썼다.
“나랑 사귀자고오. 내가 너 첫사랑이잖아아. 근데 왜애.”
이 정도 되니 안 지칠 수가 없었다. 그냥 걷기도 힘든 개펄을 뛰어온 데다, 술까지 마셔서 체력적으로 한계가 느껴졌다. 나는 어린아이 달래는 말투로 그녀에게 말했다.
“일단 나가자. 응? 나가서 얘기하자.”
“싫어! 싫다고!”
“여기서 이러면 안 돼. 위험하다고.”
“나랑 안 사귀면 나 그냥 죽을 거야! 죽을 거라고!”
“그러면 안 된다니까?”
“싫어!”
유리가 갑자기 팔을 휘둘렀다. 그 직후 내 얼굴에 진흙 덩어리가 날아왔다.
철퍽!
펄이 내 얼굴과 가슴팍에 튀면서 천천히 흘러내렸다. 이걸로 인해 난 이성의 끈을 놓아버렸다.
“이제 그만 좀 해!”
그렇게 외치며 빈 손을 유리에게 휘둘렀다. 그녀 머리가 있는 곳으로 날아간 손바닥은 부드러운 부분에 부딪쳤다.
찰싹!
따귀를 맞은 유리는 더 이상 떼를 쓰지 않았다. 그때 난 폭력이라는 엎지른 물 때문에 참지 않았다.
“내가 그런다고 널 좋아하게 되진 않아!”
“……왜? 지헌아, 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그녀가 물었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유리에게, 난 그동안 참았던 말을 퍼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