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6화 〉계속해서 트림이 나오는 구으으으으으억! (56/72)


  • 〈 56화 〉계속해서 트림이 나오는 구으으으으으억!

    아싸는 본디 외로운 존재다. 홀로 살아남는 치타와 같아서, 무리 짓지 못하면 도태되는 사자들을 비웃을 수 있다. 또한 타인의 방해 없이 조용히 바다를 감상할 수 있는 건 아싸의 특권임이 틀림없다.

    “어이! 우리 찐따 지헌은 거기서 뭘 하는 겐가!”

    “넌 내가 사색에 빠져 있는데 꼭 끼어들고 싶나?”

    “그럼 자네는 짐이 이렇게 다가가는 것이 싫은 겐가?”

    굳이 대답할 필요를 못 느껴서 입을 다물었다. 그러는 사이 마왕은 바다가 보이는 전망대에 선 내게 다가왔다.


    “여기서 뭐 하는 겐가? 그것도 혼자서.”


    “바다를 감상 중이었잖아. 그러면서 내 존재에 대해 생각했지.”

    “그럼 짐은 생각하지 않았나 보군?”

    마왕은 전망대 난간에 등을 기대며 중얼거렸다. 난간에 팔을 걸치자, 그 타이밍에 맞춰 바닷바람이 강하게 불었다. 바람에 등까지 가는 긴 은발이 휘날리며 내 얼굴을 간질였다.
    그때 내가 무슨 생각인지 몰라도, 평소라면 머릿속에 담아뒀을 말을 입으로 꺼내고 말았다.

    “지금은 네 생각밖에 안 나.”


    “!”

    바람이 멎고 은발이 가라앉았다.  말을 들은 마왕은 눈을 크게 뜨며 말없이 날 쳐다봤다. 놀란 그녀 얼굴을 보자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생각해냈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마왕은 내 반응을 보고 슬며시 입꼬리를 올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뺨에도 홍기가 돌면서, 옆으로 움직여 나와 가까이 붙었다.


    “그런가. 지금은 짐밖에 생각하지 않는 겐가.”


    “말이 잘못 나온 거야!”


    “짐만 생각하느라 그런 말이 나온 거겠지, 음.”

    나는 고개를 돌려 아까처럼 바다만 바라봤다. 하지만 그럼에도 은발이 아름답게 휘날리던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자네.”


    마왕이 난간 너머로 몸을 약간 기울이며, 머리를 내 눈앞으로 내밀었다. 바다처럼 푸른 눈동자를 지닌 그녀에게서 눈을  수 없었다.

    “참고로 말하자면, 짐도 지금은 자네밖에 생각하지 않는다네.”


     말을 듣자 놀라서 나도 모르게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러자 진한 바다 냄새와, 달콤한 마왕의 향기, 그리고 알코올 향이 코로 들어왔다.


    나는 반걸음 정도 뒷걸음치며 물었다.


    “너  마셨냐?”


    “안 되는가?”


    마셨다는 소리였다.


    “자네 마실 것도 제대로 가져왔다네. 짐만 먹는다고 뭐라 하지 말게나.”

    마왕은 추리닝 상의 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무언가를 꺼내고 그걸 내밀었다. 그건 작은 플라스틱병에 담긴 소주였다.

    “안 먹어!”


    “에이, 술 마시려고 MT 온 게 아니었나?”

    “아니거든! 그럼 넌 술 마시려고 왔냐?”


    “짐은 자네와 함께 있으려고 왔네만.”


    “뭐?”


    “아아, 설마 안주가 없어서 못 먹는 겐가?”


    마왕은 난간에서 떨어져서 해상공원에  길을 걸어갔다. 아마 우리가 타고 온 버스가 있을 방향으로 가면서 내게 말했다.

    “짐이 안주를 가져올 테니 거기서 조금만 기다리게!”


    “안 먹는다니까!”

     말을 듣는지 안 듣는지, 그녀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항상 제멋대로인 마왕에게 눈길을 돌려 다시 바다를 바라봤다. 하지만 이번에도 날 방해하는 자가 있었다.

    “지헌아. 방금 선배랑 무슨 이야기 했어?”

    마왕이 향했던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유리가 보였다. 그녀 또한 맥주병과 과자봉지를 들고 있었다.

    나는 언제라도 그녀가  병을 거꾸로 잡을지 몰라 몸을 긴장시켰다.


    “어? 아니 그냥 별 얘기 안 했어. 같이 술 먹자고 하던데.”


    “그게 아니었던 거 같은데.”


    갑자기 유리 눈에 어둠이 감돌았다.

    “키스한  아니야?”

    “아니야!”

    “한 거 맞잖아. 했지? 했잖아. 왜 했는데 나한테 안 했다고 그래? 응? 말해줘. 지헌아.”


    점점 맥주병을 잡고 있는 손이 병 입구로 향하기 시작했다. 유리가 아닌 플라스틱이라도 맞으면  아플 거였다.


    “안 했어!”


    “괜찮아. 키스 별거 아니야. 근데 나한테 거짓말은 하지 말아줘.”

    “키스한 거 아니라니까?”


    반박하면서도 그날 밤에 봤던 걸 떠올렸다. 하준 그놈과 키스하는 유리는 행복해 보였다. 만약 지금 나도 그녀처럼 보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지금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라는 마음에 아까 마트에서 했던 전술을 펼쳤다.

    “안 했어, 유리야.  안 믿어?”

    “믿지. 근데 네가 이렇게 거짓말하면 못 믿어.”

    “네가 지금 믿는 건 내가 거짓말했다는 생각이잖아. 나 자체가 아니라.”

    “응?”

    마음에 찔렸는지 유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 기세를 몰아서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네가 믿든 말든 난 상관없어. 그래도 이것만큼은 확실하게 말하고 싶어.”


    눈에 힘을 줘서 그녀의 눈을 바라봤다.

    “난, 키스하지 않았어.”


    “정말로?”


    “응, 정말로.”

    아직도 믿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유리였다.  그런 그녀에게 결정타를때렸다.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못 믿어주면, 실망이야.”

    “아니야! 믿어!”

    실망이란 단어는 그녀에게 극적으로 느껴진 모양이었다. 유리는 얼굴을 창백하게 만들며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믿어! 믿을게, 지헌아! 그러니까 버리지 말아줘!”


    “아니,  버려!”

    “진짜로? 진짜로 나  버리는 거지?”

    마치 여자를 가지고 노는 한량이 된 기분이었다. 오늘 아침 마왕이 말한 대로 여자를 농락한다는 금태양이란 캐릭터가 떠올랐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유리가 들고 있는 맥주병을 가리키며 물었다.


    “근데 그건 왜 가져왔어?”


    유리는 이게 내 신뢰를 되찾아올 거라 생각했는지 과장스럽게 밝은 얼굴로 말했다.


    “내가 너랑 마시려고 가져왔어! 나 잘했지?”

    “아니, 지금 술 마셔도 돼? 오늘 저녁에 마시기로 한 거 아니야?”

    “교수님께서 조금은 마셔도 된다고 하셨어. 버스가 한시간 뒤에 떠난다고 했으니까 시간은 충분할 거야.”


    그렇게 말하며 그녀가 내게 다가왔다. 맥주병을 내게 내밀었다.

    “잠깐 마실래? 응? 마시자.  잔만이라도 괜찮으니까.”

    나는 알았다고 하기 전에 아까 안주 가져오겠다며 말한 마왕을 떠올렸다. 만약 내가 유리와 한 잔하고 있다면 그녀는 좋게 보지 않을 게 뻔했다.

    “지헌아! 이리 와!”


    하지만 유리는 이미 근처 벤치에 앉아, 나와 마실 준비를 끝내고 있었다. 항상 불안정해 보이는 그녀였기에 나는 어쩔  없이 벤치에 앉았다.

    “자!”


    유리는 맥주가  종이컵을 내게 내밀었다. 그걸 받아 들자 그녀도 종이컵을 내밀었다.

    “짠! 하자. 짠!”

    잔을 가만히 들고 만 있었는데 그녀가 멋대로 잔을 부딪혀왔다. 유리는 그대로 종이컵을 들어 맥주를 마시고, 나도 따라 한모금 마셨다.


    꿀꺽


    맥주 맛은 평소보다 맛이 없었다. 종이컵에 따라서 캔맥주보다 탄산이 빠진 느낌이었고, 실온에 오랫동안 놔두었는지 미지근했다. 하지만 그걸 포함해서라도 자취방에서 마왕과 마셨던 맛과는 현저히 달랐다.

    “꿀꺽, 꿀꺽, 푸후!”


    한번에 잔을 비운 유리는 종이컵을 내리고 과자를 집어 먹었다. 나도 하나 집어먹는데 그녀가 물었다.


    “지헌아.”


    “응?”


    “너 왜 선배랑 같이 다니는 거야?”

    “콜록! 콜록!”


    놀라서 과자 먹다가 사레에 들리고 말았다. 올라오는 기침을 뱉으며 되물었다.


    “콜록! 그건, 왜? 콜록!”

    “말하는 것도 이상하고, 너 운동시켜서 힘들게만 만들잖아.”


    지금 말하는 유리는 이상해지기 전 모습과 비슷하게 보였다. 근처에 마왕이 없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그냥  들어가면 정상으로 돌아가는 건지  모르겠다. 그래도 옛날처럼 부드러워진 모습에 나도 따라 마음이 진정됐다.


    긴장이 풀리고, 과자 하나 집어 먹으며 대답했다.


    “아니, 그냥 걔가 일방적으로 끌고 다니는 거지.”


    “그럼 그냥 안 만나면 되잖아. 설마…… 그 년이 예뻐서 그래?”

    다시 그녀 눈빛에 어둠이 감돌았다.

    괜찮아졌다고 생각하니 바로 이러기냐.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부정했다.

    “그건 아니야.”


    확실히 마왕이 예쁘긴 했다. 한국에서 쉽게 볼 수 없는 백인에, 거기다  보기 드문 은발이었다. 인형 같은 이목구비와, 항상 짓고 있는 당당한 미소는 그녀 자신을 빛나게 만들었다. 하지만 내가 그녀와 같이 다니는  그런 이유가 아니었다.

    유리는 빈 잔에 맥주 따르는 것도 잊은 채 물었다.

    “그럼 뭔데?”

    “그건……”

    나도  모르겠다. 마왕이 날 물리적으로 힘들게 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상한 장난을 자주 치기도 했고, 저번 랭크전엔 쓰레쉬로 여눈을 가는 둥 이상한 짓을 많이 벌였다. 그래도 그때마다 항상 즐거웠다.


    “그건  자체가 지헌을 행복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라네!”


    등 뒤에서 마왕의 기운찬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육포 봉지를 들고 있는 마왕이 보였다.

    “기다리랬더니 자네는 유리와 한 판 먼저 벌이고 있었나?”


    “선배.”


    다시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유리는 다시 불안정한 얼굴로 내 뒤에 있는 마왕을 올려봤다.


    “선배 지금 저랑 지헌이 얘기 중인데요.”


    “아아, 그런가?”


    마왕은 뻔뻔하게 웃으며 나와 유리 옆으로 돌아왔다.

    “그럼 짐이 좀 합석해도 되겠지?”


    “아니, 여기 자리가,”

    “뭔 상관인가. 짐은 서서 먹어도 상관없다네.”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육포 봉지를 뜯고 과자 봉지 옆에 두었다. 그러더니 유리 앞에 보인 맥주를 보며 비웃었다.


    “맥주우? 유리 자네는 맥주를 술이라고 마시는 겐가? 이런 음료수를?”

    “네?”


    유리는 황당한 얼굴로 마왕을 올려봤다. 그리고 날 잠깐 곁눈질하더니 선배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이게 어떻게 음료수예요. 술인데.”


    “이렇게 도수가 낮은 건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는다만. 자넨 취하는가?”


    “아무리 마셔도 안 취한다고요?”


    “음! 그렇지!”


    “그럼 이걸 원샷하실  있나요?”


    “뭣이?”


    유리가 한 말에 놀란  나뿐만이 아니었다. 마왕도 파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유리를 내려봤다. 하지만 유리는 그 반응을 기다렸다는 듯이 맥주 페트병을 들어 보였다.


    “방금 선배님께서 이게 음료수랑 다를 게 없다고 하셨잖아요. 그럼 한번에 다 마실  있겠죠?”

    “그렇긴 했네만.”

    “지헌이는  잘 마시는 여자라 취향이라던데요.”


    “내가 언제!”


    유리는  말을 무시하고 내가 마시던 잔을 가져갔다. 그러더니 마왕이 보는 앞에서 일부러 잔을 비웠다.

    “유리야!”

    “괜찮네. 지헌 자네는 걱정말게.”


    유리를 말리려는 날, 오히려 마왕이 말렸다. 그녀는 당당한 웃음을 지었다.


    “좋네, 그 도전 받아들이지!”

    유리가 든 맥주병을 받아 들고, 지체없이 병입구를 입에 꽂았다.

    “꿀꺽, 꿀꺽, 꿀꺽, 꿀꺽, 꿀꺽, 꿀꺽.”


    마치 구멍 뚫린 항아리처럼 술이  새 없이 들어갔다. 갈색 페트병 너머로 출렁거리는 수위, 아니 주酒위가 낮아졌다. 그렇게 병이 완전히 비어지자 마왕이 페트병을 내리며 소리쳤다.

    “푸하핫! 콜라로 바꿔친 건 아니겠, 음?”

    그런데 말하다 말고 그녀가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히힛.”

    유리가 그걸 보고 웃음 지었다. 그리고 얼마 안 되어 마왕이 가스를 분출했다.

    “끄으윽.”

    자기도 모르게 트림이 나왔는지 그녀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걸 보고 이게 유리가 노린 거라는 걸 깨달았다. 내 앞에서 트림하게 만들어 추태를 보이는 게 그녀의 계획이었다.


    그 계획대로 마왕은 트림을 멈추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거로 부끄러워할 그녀가 아니었다.

    “꺼억! 거 참, 꺽, 콜라를 마셔서 그으윽, 런가, 계속해서 트림이 나오는 구으으으으으윽!”

    이젠 하는 말에도 트림을 섞는 그녀였다.


    유리는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 마왕을 보고 얼굴을 굳혔다. 마왕은 당당하게 숨기지 않고 말했다.

    “꺼어억, 보게에엑, 술이 아니지 않는가아아으으으으으으어어어어어억!”


    지금껏 가장 긴 트림과 함께, 마왕은 승자의 미소를 지었다. 유리는 그런 그녀를 보고 얼굴이 썩어갔지만, 난 웃느라 죽는 줄 알았다.


    “꺽!”

    그 트림은 숙소에 가는 동안에도 멈추지 않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