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5화 〉자네 방금 금태양같았네 (55/72)


  • 〈 55화 〉자네 방금 금태양같았네

    MT를 가기로 한 날 아침, 난 조원들과 장을 보기 위해 학교 근처 마트로 나왔다. 거기엔 어제 만났던 어색한 과동기들 4명과 익숙한 사람 1명이 보였다. 그들보다 선배인 그녀는 후배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선배, 그……”

    “음?”


    “그게요, 있잖아요.”

    난 어색해 하는 동기를 대신해 마왕에게 물었다.

    “야, 너  여기 있냐?”

    그녀는 밝게 웃으며 내 쪽을 쳐다봤다.


    “왔는가! 왜 이리 늦었는가!”

    “뭘 늦어. 아직 2분 밖에 안 늦었구만. 근데 네가 여기 왜 있냐고.”

    “자네가 보고 싶어서 왔다네!”


    그렇게 외치며 마왕은 두 팔을 좌우로 펼쳐 날 반겼다. 그 후 두 팔을 추리닝 상의로 되돌린 그녀는 종종걸음으로 내게 다가왔다.

    “짐이 와서 문제되는 건 아니지 않는가.”


    “당연히 문제되지! 너네 조에 가라고!”


    오늘 저녁엔 과 학생들이 조를 짜서 요리 콘테스트를 열기로 했다. 학생들은 가기 전, 요리 재료를 준비해야 했고, 여기엔 MT가는 마왕도 마찬가지였다.

     말을 들은 그녀는 오히려 곤란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으음, 그것 말인가.”


    잠깐동안 신음하더니 말을 이었다.


    “짐도 도와주려 했더니, 자신들이 알아서 한다며 가만히 있어도 된다고 하더군. 그래서 여기 왔네만. 혹시 여기 오면 안 되는 거였나?”


    마지막 질문은 뒤에서 듣고 있던 동기들에게 하는 거였다. 그걸 들은 동기  남자애 2명은 흔쾌히 괜찮다 했고, 여자애 3명은 내키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거나 퉁명스러운 말투로 동의했다.


    남자들은 당연히 마왕이 예뻐서 동의한 게 뻔했다. 여자애들은 그녀가 오는 게 싫었지만, 나쁜 사람이 되기 싫어서 억지로 동의한 것처럼 보였다.


    그래도 다른 사람들이 괜찮다고 하니 내가 뭐라   아니었다. 나는 동기들에게 다가가며 자포자기한 마음으로 말했다.


    “알았어. 이상한 말하지 마라. 알았지?”

    “짐이 언제 이상한 소릴 했는가.”


    “항상!”


    “자네는 항상 호들갑이 거하단 말이지.”


    “내가 언제!”

    “지금도 그러고 있지 않나?”

    “저, 저기요……”

    동기 남자애  한 명이 대화 도중에 끼어들었다. 기가 약해 보이는 그는 자기 뒤에서 기다리는 다른 동기들과 마트 입구를 한번씩 가리켰다.

    “이제 장 봐야  거 같은데요. 가도 될까요?”

    나도 모르게 마왕과 나누는 대화에 집중한 모양이었다.


    “아 미안. 이제,”


    “미안하게 됐군. 들어가세.”


    내 말을 끊은 마왕이 앞장서서 마트 입구로 향했다. 나는 투덜거리면서도 그녀를 따라갔고, 동기들도 별말이 없을 뿐이지 나머진 나와 마찬가지였다.


    마트 안으로 들어간 우리 중 가장 먼저 입을 연  마왕이었다.


    “자, 이제 뭘 사야 하는 겐가?”

    “그걸 왜 네가 말해! 우리 조장이 말해야지!”

    어느새 조장처럼 행동하려는 마왕에게 한소리하고, 고개를 돌려 동기 중에서 조장을 찾으려 했다.


    “근데 우리 조장 누구야?”

    “아, 나야!”


    손을  사람은 눈썹화장이  진하게  여자애였다. 노란색으로 밝게 염색한 것도 그렇고, 화장이 서툰 걸 보니 대학에 와서 급하게 이미지를 바꾼 것 같았다. 그녀는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읽었다.


    “오늘 우리가 하려는 게 불고기거든? 그러니까 소 목살이랑, 야채나 불고기 소스만 사면 될 거야. 그리고  먹을 사람?”

    “나! 나나나나, 나!  먹을래!”

    가벼워 보이는 남자애가 손들어 자기를 어필했다. 조장은 눈만 움직여 힐끔 쳐다보고는 다시  화면에 집중했다.


    “작년에 선배님들이 사고 치셔서 소주는 안 되고 맥주만 된다고 하셨거든? 그러니까,”


    “선배도 마실 거죠!”

    조장 말을 무시하며 그 남자애가 마왕을 쳐다봤다.

    “우리 같이 마셔요, 선배!”


    불린 그녀는 날 잠깐 쳐다봤다. 날 바라봤을 때 푸른 눈에 담긴 막연한 기대를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무슨 뜻인지 몰라 눈을 피하지 않으니, 마왕은 시선을 돌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 뭐, 기회가 된다면 말이지.”


    그 사이 조장은 각자 사람을 갈라 재료를 사오기로 결정했다.


    “지헌아?”


    그녀는 나와 마왕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네가 소희 선배랑 같이 고기 좀 사올래? 우리는 다른 거 사고 있을게.”


    “알았어. 가자.”

    아까 들었던 것중 마음에 걸린 게 있던 나는 바로 수긍하고, 마왕을 데려갔다. 적당히 동기들과 떨어지자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작년에 사고친 거, 너지?”


    “자넨 짐이 술 먹고 사고칠 인간으로 보이는가?”

    “저번에 내 방에서 한 게 있으니까 묻는 거잖아.”

    퇴원 기념일 날, 나와 마왕은 내 자취방에서 술을 마신 적이 있었다. 그때 그녀는 완전히 이성을 놓아버린 채 깽판을 처놓았다. 특히 영화 따라한다며 소주병으로 ‘꼬탄주’를 만들려고 했을 때는 진짜……!


    마왕도  날을 떠올렸는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 아니 그때는 자네밖에 없지 않았나. 주위에 다른 사람이 있으면 적당히 조절해가며 마신다네.”


    “나 있을 때도 해주라, 좀.”

    “그럼 자네는 왜 그러는 겐가.”


    “내가 뭘.”

    “조금 전 남자애가 짐과 같이 술 먹자고 하지 않았나.”

    “그게 왜?”

    “뭣이?”


    내 질문에 날카로운 목소리를 냈다.

    “자네는 그 자와 짐이 같이 술 마셔도 괜찮다는 겐가?”


    “나도 같이 마시는데 뭐가 나쁜 건데?”

    “음?”

    그녀가 내 대답을 듣자 눈을 크게 뜨며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걸 보고 난 이유를 몰라 질문했다.


    “아니, 걔는 우리 조가 술 마실 때 오라고  거잖아. 아니야?”


    “……”


    마왕은 내 질문을 듣고도 답이 없었다. 그러다 한 번 코웃음을 치더니 되려 내게 물었다.

    “자네는 짐이 방금 그 자와  둘이 술을 마신다고 하면 어떻게 할 겐가?”

    둘이 술을 마신다고?

    생각할 틈도 없이 바로 대답이 튀어나왔다.

    “절대 안 되지.”

    “왜지?”

    “왜라니. 네가 깽판칠까봐 그러는 거지.”


    “에이, 그게 아니지 않나.”


    “맞다니까.”


    “그렇다면 왜 그렇게 화난 얼굴을 하고 있는 겐가?”


    그제야 나는 얼굴 근육이 굳은 걸 알아차렸다. 게다가 가슴이 젖은 솜으로 가득 찬 것처럼 무거웠다.

    놀란 날 보며 마왕이 능글맞게 웃었다.


    “왜 그런지 아는가?”

    “……몰라!”


    “알면서두.”


    “모른다니까! 어서 고기나 사러 가자!”

    나는 속도를 높여서 정육점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마왕은 지지 않고 끈질기게 이유를 물어댔다.

    “왜 그런 겐가? 응?”

    “모른다고 했잖아!”


    “그 반응을 보니 이미 알고 있지 않나.”


    “몰라! 알아도   해!”

    정육점에 도착해 고기를 주문했다. 그 사이에도 마왕은 질문을 멈추지 않았고, 나도 청문회에 온 높은 사람처럼 모른다는 말을 반복했다.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모른다니까!”

    “뭘 모르는데?”

    고개를 돌려보니, 그곳엔 유리가 있는  발견했다. 그녀는 마트에서 빌려주는 플라스틱 바구니를 들고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갑자기 나타난 유리에 의해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어쩌면 그녀의 등장은 당연한 일일 수도 있었다. MT에 가는 건 마찬가지였고, 우리 조만 장보러 온 것도 아닐 터였다.


    “지헌아. 뭘 모른다는 거야? 응?”

    채소와 상품으로 가득한 바구니를 든 채 유리가 천천히 다가왔다. 그 안엔 유리로 된 소주병도 있었기에 심박수가 높아졌다.

    그녀가 천천히 다가올 동안,  최대한 머리를 굴려 최선의 대답을 도출해냈다.


    “첫템! 클래드 첫템을 뭘로 가야 할지 모른다고!”

    “응?”

    “음?”

    “아니 내가 탑을  번 해보려고. 클래드로. 그걸 모른다고  거지, 다른 뜻은 전혀 없었어!”

    내 변명을 듣고 마왕이 내게만 들리는 목소리로 작게 말했다.


    “아무리 바보라도 그건  믿겠네만.”


    시끄러워!

    “아닌  같은데, 지헌아?”


    마왕이 말한 것처럼, 유리는 내 말을 믿지 않았다.

    “왜 나한테 거짓말한 거야? 왜?”


    “진짜야. 진짜로 게임 모른다고 한 거라니까. 근데  거기로 손이 가!”


    바구니에 담긴 소주병으로 손을 뻗는 유리에게 외쳤다. 하지만 그녀는 소주병을 잡은 채 물었다.

    “왜 그럴까? 이번엔 네가 대답해볼래? 내가 왜 이걸 잡았을까?”

    네가  내리치려고 그러는 거겠지! 하며 말하려다 그만뒀다. 말했다간 진짜로 내리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때 나는 유리가 평소 했던 말투를 떠올려 그녀를 설득했다.


    “너만은 믿어줄 줄 알았는데! 너만은!”

    “……”


    “선배는 몰라도 넌 믿어줄 거라 생각했어!”

    “……실망했어?”

    유리는 오던 발걸음을 멈추며, 기어들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소주병을 놓더니 다시 빨리 다가와  옷자락을 잡았다.


    “내가 못 믿어줘서 실망했어? 응? 그랬어? 미안해. 내가 믿어줬어야 했는데!”


    점점 언성이 높아지자, 난 그녀를 진정시켰다.

    “어어, 실망 안 했어. 괜찮아, 괜찮아!”


    “진짜로? 실망한 거 아니야?”


    “진짜라니까. 네가  믿어줬는데 내가  실망해.”

    “진짜지? 응?”


    “응. 근데 너네 조원이랑 만나야 되는 거 아니야? 가야   같은데.”


    “맞아!”

    유리는 과하게 밝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 가볼게! 늦으면 안 되니까!”

    그러더니 뒷걸음치며 나와 멀어지기 시작했다.


    “이따 내가 맛있는 거 해줄게! 기대해!”

    그 말을 남기며 그녀는 매장 진열대 사이로 사라졌다.  그때까지 거짓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한편 유리가 사라지자 마왕이 날 불렀다.


    “자네.”

    “응?”

    고개를 돌려 마왕을 쳐다보니, 아연질색한 표정으로  올려 보고 있었다.

    “왜 그래.”

    “자네 방금 금태양같았네.”

    “금태양? 그게 뭔데.”

    “금발 태닝 양아치일세. 여자 꼬시는데 능숙한, 성인인증이 있어야 볼 수 있는 캐릭터지.”


    “날 왜 그런 걸로 비유해!”


    “저기 학생.”


    고기 진열대 너머로 점원이 부르자,  따지는 걸 그만뒀다.

    “아 네.”

    “고기 안 가져가요?”

    유리 때문에 고기 가져가는 걸 깜빡하고 말았다. 손을 들어 고기를 집으려는데 마왕이 먼저 그걸 채갔다. 불고기용 고기가 들어간 봉투를 들며 마왕이 말했다.

    “어서 가서 합류하세. 금태양이여.”


    “그렇게 부르지마!”

    마왕은 내 말을 무시하며 상품 진열대 사이로 걸어갔다. 내가 쫓아가서 함께 계산대로 가는 동안, 그녀가 중얼거렸다.

    “어쩌면 유리 입장에선 짐이 금태양일지도 모르겠구먼……”

    “뭐?”

    그 말에 아까 들었던 금태양의 의미를 기억해냈다. 여자 꼬시는데 능숙한 사람. 마왕은 여자니까 남자 꼬시는데 능숙한 사람? 근데 자기는 전생이랑 현생 통틀어서 남자랑 만난 적 없다고 했는데?


    여자를 꼬신 건가. 세희 꼬신 거 보니까 맞는 거 같기도 한데.


    떨리는 마음으로 물어봤다.


    “야,  여자랑 사귄 적 있냐?”

    “무슨 개소린가, 그건.”

    대답과 함께 날 한심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돌아왔다. 그녀는 시선을 앞으로 돌리더니,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며 말했다.

    “지금 짐이 연애대상으로 생각하는  자네,”


    “선배! 여기 계셨네요!”


    그녀가 무언가를 말하려고  때  가벼워 보이는 놈이 갑자기 끼어들었다. 그가 큰소리로 말하는 바람에 마왕이 말하던 걸 제대로 듣지 못했다.


    “너 방금 뭐라고 했어?”

    “아무 것도 아닐세! 그냥 홧김에 말한 거니 마음에 담아두지 말도록!”

    그녀는 서둘러 자길 부른 후배에게 다가갔다. 가면서 휘날리는 은발 사이로, 붉게 달아오른 귓바퀴가 보였다.

    무슨 말을 한 건지  모르겠지만, 이거 하나만은 확실했다. 마왕은 동성애자가 아니니 세희에겐 희망이 없다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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