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화 〉오빠는 작은 게 취향인가요?
“아무래도, 저…… 오빠 좋아하게 된 거 같아요.”
그 고백을 듣고 가장 먼저 든 건, 또 거짓말이 아닐까 싶은 마음이었다. 저번에도 나한테 반한 것처럼 행동하다 날 함정에 빠뜨리려 했다. 이번에도 그러지 않을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런 내 생각을 읽었는지 세희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오빠가 절 믿지 않는 것도 괜찮아요. 한 짓이 있으니까요. 그래도 그냥 알아주셨으면 좋을 거 같아서요.”
다시 내게 얼굴을 보인 세희는 평소와 다를 것 없어 보였다. 방금 전 고백할 때처럼 얼굴을 붉히지도 않고 차가운 무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이제 내려가죠. 지금쯤이면 언니라도 준비가 다 끝났을 거예요.”
그렇게 말하더니, 내가 물을 틈도 없이 방문을 열었다. 그녀가 방을 나가는 사이 난 그 고백에 대해 생각해 봤다. 고백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내게 접근해서 날 마왕과 떨어뜨리는 게 세희의 목적이었다. 그런데 정체가 탄로 났으니 또 고백하는 건 별다른 의미가 있어 보이진 않았다.
그런데 만약 진짜라면?
이게 또 문제였다. 세희가 반한 건 흔들다리 효과로, 위험한 상태에 있을 때 자신을 도와준 사람에게 반했다고 착각하는 거였다.
“오빠.”
생각하고 있는 도중, 세희가 열린 문 너머로 나타났다. 그녀는 내게 고백한 것치고는 평탄한 어조로 말했다.
“언니가 내려오래요.”
“어, 응! 알았어!”
일단 그녀가 말한 대로 1층을 향해 걸어갔다. 세희 뒤를 따라가 주방까지 가면서 나온 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어차피 착각은 쉽게 깨지기 마련이었다. 그녀가 내게 멋대로 환상을 품는 동안, 난 평소대로 행동해서 그 환상을 깨뜨리면 되는 거였다.
“왔는가!”
주방에 도착하니 마왕이 인덕션 앞에 서 있는 게 보였다. 그녀는 프라이팬 손잡이를 잡으며, 다른 손으로 국자를 넣어 떡이 눌어붙지 않도록 젓고 있었다. 마왕은 날 향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자네는 치즈 좋아하나? 넣어도 괜찮겠는가?”
“치즈? 좋아하지. 많이 넣으면 더 좋고.”
“알았네.”
마왕은 젓다 말고 옆에 있는 양문형 냉장고로 걸어갔다. 냉장고 문을 열고 치즈가 든 거로 보이는 봉투를 잡고, 다시 인덕션 앞으로 돌아왔다. 나중에 넣을 생각인지 봉투를 옆에 두며 또 물었다.
“라면사리도 넣는 편이 좋나?”
“좋지.”
“햄은 좋아하나?”
“당연히 좋아해.”
“계란은?”
“좋아하지.”
“그럼 짐은 어떤가?”
“좋아한다고! 그냥 나한테 묻지 말고 너 하고 싶은, 아.”
그만 마왕의 유도신문에 넘어가고 말았다. 그녀는 자기 책략이 성공한 게 기분 좋은지, 입꼬리를 올린 옆얼굴을 보여줬다.
“자네가 좋아 죽는 짐이, 자넬 위해 특별한 토핑을 추가해야겠구먼?”
“그렇게까진 말 안했거든?”
“그럼 좋아하는 건 맞나보군?”
또 넘어가고 말았다. 요망하게 날 두근거리는 마왕을 쳐다보다, 옆에서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려봤다. 옆엔 세희가 무표정으로 날 지긋이 바라보고 있었다.
“어, 세희야, 왜?”
“……오빠.”
나는 그때 내게 소리 질렀던 그녀를 잊지 못했다. 발작이라도 하는 것처럼 또 욕을 퍼부을까 봐, 마음의 각오를 다졌다.
하지만 그녀가 말한 건 전혀 다른 말이었다.
“하실 땐, 저도 끼워줘요.”
“뭐를?”
“그런 거 있잖아요. 언니와 오빠가 나중에 할 거요.”
“그러니까 뭔데?”
“그런 걸 제가 말하게 시키시는 건가요. 성희롱으로 신고할 거예요.”
“도대체 그게 뭐냐고!”
영문모를 말을 해대는 세희와, ‘그것’을 물어보는 나 사이로 마왕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자, 다 됐네! 모두들 자리에 앉게!”
고개를 돌려보니 마왕이 속이 깊은 프라이팬을 드는 게 보였다. 그녀는 후라이팬 손잡이를 한 손으로 잡은 채 식탁으로 가져갔다. 그 뒤 한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거기 앉게.”
“저기를?”
그녀가 말한 곳은 저번에 어머니가 앉았던 자리였다. 그곳은 상석으로, 집주인이나 그와 비슷한 사람이 앉지, 나 같은 손님이 앉을 자리가 아니었다.
내가 망설이자 마왕은 그 자리 의자를 뒤로 빼며 다시 말했다.
“여기 앉게나. 괜찮네. 어차피 어머니도 집에 안 계시고, 계신다 하더라도 신경 쓰지 않을 것이네.”
“그래도……”
“그냥 앉게! 우유부단하게 서 있지 말고! 어차피 자네가 손님이지 않나!”
그렇게 말하며 마왕이 내 소매를 잡아 상석에 앉혔다. 날 반강제로 앉힌 그녀는 내 왼편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의외인 건, 자기 언니 옆에 앉을 줄 알았던 세희가 내 오른편에 앉은 것이다.
“여기가 원래 제 자리예요.”
“그, 그래?”
“뭐 하는가! 어서 들지 않고!”
마왕이 끼어들며 내 자리에 놓인 개인 접시를 가져갔다. 그녀는 국자를 집고 내 접시에 떡볶이를 푼 뒤 내 앞에 두었다. 그 뒤엔 살짝 일어나 세희 걸 잡고 퍼주더니, 자기 건 가장 마지막에 담았다.
그사이 난 마왕이 만든 떡볶이를 살폈다. 아까 그녀가 물었던 토핑이 전부 추가된 떡볶이는, 내가 알던 것보다 시뻘겠다. 아니, 검붉은 색이라고 하는 게 더 맞는 말이었다. 자취방에서 마왕과 그 고생을 하면서 먹었던 떡볶이를 떠올리니 식은땀이 저절로 흘렀다.
“왜 그러는가?”
그 모습이 불안했는지 마왕이 물었다. 항상 당당한 표정을 짓던 그녀와 다르게, 이번엔 눈꼬릴 내리며 날 쳐다봤다.
기죽은 강아지 같은 얼굴을 보고, 못 먹겠다고 말할 순 없었다.
“아니, 맛있어 보여서 그랬지.”
“그런가!”
내 대답에 만족했는지 그녀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맛있는 건 외향만이 아닐세! 자넬 위해 특별한 걸 추가해봤다네! 먹어보게!”
떨리는 손으로 젓가락을 집었다. 떡볶이 떡을 집으니 검붉은 양념이 개인 접시 속으로 걸쭉하게 방울지며 떨어졌다. 그리고 에라 모르겠다는 마음으로, 눈을 감은 채 입에 넣었다.
검붉은 색에 비해 그렇게 맵진 않았다. 보통보다 살짝 더 매운맛에, 은은한 단맛과 쫄깃한 떡, 뒷맛으로는 그윽하게 올라오는 쓴맛까지…… 어?
탄 음식을 먹은 것처럼 쓴맛이 올라오자, 마왕에게 물었다.
“이거 탄내가 좀 나는데?”
그러자 그녀는 당당하게 웃으며 말했다.
“음! 불맛을 좀 추가해 봤다네!”
“떡볶이에 무슨 불맛이야!”
“그렇다고 맛없는 건 아니지 않은가.”
“기름떡볶이도 아니고 그냥 떡볶이에 무슨 불맛이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렇다고 맛이 없는 건 아니었다. 평범한 떡볶이엔 맛볼 수 없는 불맛이 신선하게 느껴졌다.
생소하지만 맛있는 떡볶이를 먹고 있는데, 마왕이 흐뭇하게 쳐다보며 물었다.
“맛있나?”
“맛있지, 그럼.”
“그렇게 맛있으면 자네 자취방에서 또 해주겠네.”
“또?”
“아니면 자네가 만들어주겠나? 하루씩 번갈아서 하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네만. 역시 여자로서의 로망이……”
“무슨 떡볶이 가지고 여자의 로망이야.”
“자네 같은 남자는 이해하지 못할 걸세. 남자의 로망은 알몸 에이프런이지 않은가.”
“컥!”
너무 놀란 나머지 사레에 들리고 말았다. 게다가 매운 양념이 코로 역류하는 바람에 콧속이 불에 타버리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날 이렇게 만든 범인인 마왕이 당황하며 물었다.
“왜 그런가. 너무 매운 겐가? 우유 먹으면 괜찮아질 걸세.”
그렇게 말하며 우유를 가지러 일어나려는 마왕에게 소리쳤다.
“매워서 그런 게 아니라, 콜록! 네가 그런 말을 해서 놀라서 그런 거야!”
무슨 여동생 앞에서 못하는 말이 없, 맞다!
황급히 고개를 돌려 세희를 쳐다봤다. 하지만 내 예상과 달리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떡볶이를 먹는 중이었다. 부드러운 젓가락질로 어묵을 집던 그녀는, 내 시선을 알아채며 말했다.
“오빠. 셋이서 안 된다면 촬영이라도 부탁드릴게요.”
“안 해! 그게 뭔지 모르겠지만 안 해!”
“……언니, 오빠는 사실 큰 게”
“생각해볼게! 생각해본다고!”
사이즈가 마왕답지 않은 그녀가 알아채지 못하도록 재빨리 끼어들었다. 세희는 만족했는지 말을 멈췄고, 호명 당한 마왕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음?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이지? 자네.”
마왕은 날 쳐다봤다.
“큰 게 취향이라니, 무슨 말인지 알려줄 수 있겠나?”
“큰 거? 그러니까…… 떡볶이는 좀 더 크게 써는 게 취향이라서 말이야!”
“그런 겐가? 미안하군. 알았으면 더 크게 자르는 건데 말이지.”
다행히도 그녀가 내 말을 믿어주는 모양이었다.
“……라고 말할 줄 알았나?”
“윽.”
그녀는 눈을 빛내며 세희와 날 번갈아 쳐다봤다. 세희는 의심으로 가득 찬 눈초리를 받는 데고 얌전히 떡볶이를 먹었고, 나는 그 시선을 피하며 젓가락을 들었다. 그런데 집요하게 캐낼 것이라는 내 예상과 달리, 마왕은 쉽게 포기했다.
“뭐, 나중에 말하고 싶을 때 말해주게.”
“진짜로?”
“석연찮은 건 사실이지만, 짐은 자네와 세희가 비밀을 공유할 정도로 친해진 게 기쁘다네.”
내 취향에 관한 건데, 마왕은 눈이 멀 것 같은 밝은 미소를 지었다. 그 신뢰의 빛에 더러운 내가 부셔져 바스라질 것 같았다.
“그러니 굳이 중대한 사실 아니면 말하지 말게.”
“으, 응……”
“세희도, 굳이 말할 필요는 없네.”
“알았어요, 언니.”
뻔뻔한 걸 닮았는지, 세희는 얼굴 하나 변하지 않고 떡볶이를 입에 넣었다. 마왕은 그 모습이 마음에 드는지 호쾌하게 웃었다.
“핫핫핫! 그렇게 맛있는 겐가, 세희?”
“네, 언니가 해준 거면 다 맛있죠.”
“그렇게 칭찬하지 않아도 된다네! 자네도 어서 들게! 세희도 저렇게 맛있게 먹는데 자네도 먹어야 하지 않겠는가?”
말을 마친 그녀는 그제야 젓가락을 들었다. 저렇게 밝고 당당한 그녀라도, 음식을 대접해 주는 건 꽤나 긴장된 모양이었다.
“아 참!”
그런데 뭔가 생각났는지, 마왕이 작은 목소리로 날 불렀다.
“자네, 혹시 그거라면 미리 말해주게.”
“뭐가.”
“이거 있잖나. 이거.”
그녀는 젓가락을 놓고 왼손 약지 부분을 가리켰다.
“잘못하면 심장이 멎을 수도 있으니, 미리 언질 바라겠네.”
“그게 뭔데.”
“그렇게 시치미 떼다가 짐이 놀라 죽어버릴 수 있다고 방금 말하지 않았나.”
“아니 그러니까 그게 뭔데.”
마왕은 대답 대신 내 얼굴을 자세히 살펴봤다. 내 마음속을 읽으려는 것처럼 바라본 그녀는, 이내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뭔가, 아닌 겐가?”
“뭔데. 뭐길래 아닌 건데.”
“아무것도 아닐세. 어휴, 짐이 바랠 걸 바래야지.”
자매 둘 다 영문 모를 소리만 하는 식사였다. 어쨌든, 마왕이 만든 떡볶이는 꽤 맛있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여기서 그녀들의 가족과 고급스러운 식사를 했는데. 지금은 분식집에서나 볼 법한 떡볶이를 먹고 있다는 게 좀 색다르게 다가왔다. 그때는 손님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이 집의 구성원인 된 듯한 느낌이었다.
그렇게 떡볶이를 비운 우리는 거실로 향했다. 사실 마왕이 하고 싶은 게 있다며 나랑 세희를 끌고 간 거지만.
마왕이 소파를 가리켰다.
“자네와 세희는 여기 앉아서 기다리게. 짐이 재밌는 걸 가져오지!”
그 뒤, 우리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바로 계단을 올라갔다. 또다시 세희와 단둘이 남게 된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어, 세희야. 일단 앉을까?”
“좋아요. 오빠는 가운데에 앉으세요.”
나는 그녀가 말한 대로 소파 정중앙에 앉았다. 그러자 세희는 식탁에서 그랬던 것처럼 내 오른편에 앉았다. 그것도 딱 붙어서.
“세희야?”
“오빠.”
그녀는 내가 부르는 걸 무시하고 내게 손을 내밀었다.
“오빠 폰 좀 주세요.”
“그건 왜?”
“해킹 어플 깔아 놓은 거 지워드리게요.”
“언제 깔았어!”
“저번에 번호 교환할 때요.”
“그때였냐! 그렇게 내가 뭘 좋아하는지 알아낸 거였냐!”
“일단 줘보세요. 지워 드릴 테니까.”
지워 준다길래 순순히 폰을 건넸다. 그녀는 폰을 받은 뒤, 자기 것도 꺼내서 내 번호로 문자를 보냈다. 내 핸드폰에 문자가 도착하자, 내 폰 화면을 형광등 불빛에 비춰봤다. 그러더니 내가 알려주지도 않는 패턴을 입력해서 화면을 열었다. 거기서 자기가 보냈던 문자를 확인하고, 거기에 있는 링크를 눌렀다.
“어, 지우는 거 맞냐?”
세희는 내 핸드폰을 돌려주며 말했다.
“이제 진짜로 뭐 보시는지 알 수 있어요. 그러니까 조심하세요.”
“뭐! 너 지금 뭐 한 거야!”
“해킹 어플 깔았는데요. GPS추적도 되니까, 혹시 모를 일이 있더라도 걱정 마세요.”
“그 혹시 모를 일이 지금 일어났잖아!”
“무슨 일인가요. 제가 처리할게요.”
“너라고! 그런데 해킹한 거 아니었으면 내 취향은 어떻게 안 거야!”
“남자는 다 큰 게 취향이잖아요. 아니면 오빠.”
세희는 미간을 좁히며 경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오빠는 작은 게 취향인가요?”
“아니야! 아니니까 빨리 지워!”
“음? 뭘 지우는 겐가?”
뒤를 돌아보니 보드게임 상자를 든 마왕이 있었다. 그녀는 애니메이션 미소녀들이 그려진 종이상자를 가지고 오며 물었다.
“지헌이여, 뭐 지운다는 겐가?”
나는 바로 그녀의 동생이 무슨 짓을 했는지 떠벌리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세희가 중얼거렸다.
“……취향.”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마왕은 내 말을 듣고 혼란스러운 얼굴로 바라보다가, 멋대로 결정지었다.
“아. 또 자네와 세희만의 비밀인가. 그럼 짐이 모른 척해주겠네.”
그렇게 말한 그녀는 박스를 든 채 소파 앞 탁자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이제 내 왼편에 앉으려는 순간, 세희는…… 자기 언니가 앉는 걸 가만히 지켜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