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49화 〉레즈가 아니라 바이인 거 같네요 (49/72)


  • 〈 49화 〉레즈가 아니라 바이인 거 같네요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초인종을 눌렀다.

    딩동~! 탈칵!

    누른지 얼마 안 돼서 누군가 인터폰 받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저번과 달리, 이번에 들리는  세희 목소리였다. 자취방에서 쏘아대듯이 말했던 그녀가 떠올라 말을 조금 더듬었다.

    “아, 나야. 세희야.”

    -오빠?

    “응, 문 좀 열어줄래?”

    -잠시, 자네 왔나!

    세희 특유의 차가운 목소리가, 갑자기 마왕의 활기찬 음성으로 바뀌었다. 아무래도 동생 통화하는 그녀가 도중에 끼어든 모양이었다.

    조금 어색한 동생 쪽보다는, 익숙한 언니 쪽과 이야기하니 긴장이 풀렸다.

    “응. 나 왔으니까. 문 좀 열어줘!”

    나는 마왕네 집 인터폰에 대고 물었다. 일주일도  돼서 또  이유는, 바로 세희가 초대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자신이 했던 일에 대해 사과하고 싶다면서 또  번 와 달라고 부탁했다.

    문 열어 달라고 부탁하니 다시 활기찬 마왕 목소리가 들렸다.

    -알았네! 바로, 탈칵!

    그런데 열리기는커녕, 전화가 끊겨 버렸다. 그렇게  초가 지나고, 다시 인터폰이 연결됐다.

    -탈칵, 오빠?

    무감정한 세희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 돌아가 주세요. 지금 바로요.

    “왜!”

    -그냥요. 어, 언니? 밀지 마세, 자네! 지금 열어주겠네!

    지이잉! 철컥!

    둘이 다투는 듯한 소리가 들리고, 대문에 걸린 잠금장치가 풀렸다. 들어가도 되는지 몰라서 일단 문을 열어 안쪽을 살폈다. 햇살이 내리쬐는 마당 너머로 열리고 있는 현관문이 보였다.

    “자네! 왔는가!”

    현관문을 연 건 마왕이었다. 그녀는 평소 외출복처럼 녹색 추리닝을 입은 채  반갑게 맞이했다. 하지만 나온 건 그녀만이 아니었다.

    “어서 오세요, 오빠.”

    학교 체육복 반바지와 헐렁한 남색 티셔츠라는 편한 차림을  세희도 나왔다. 집에서도 깔끔하게 입고 다닐 것처럼 생긴 그녀가 그렇게 입고 나오자 친근감이 느껴졌다.

    마음이 놓인 나는  마중 나온 자매에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굳이  나와도 되는데. 들어가 있어.”

    “그럼 짐은 들어가도록 하지. 들어가자꾸나, 세희야.”

    “네, 알았어요.”

    예의로 한 말에 둘은 짜기라도 한 것처럼 실내로 들어갔다. 나는 놀라 소리치면서 현관문 쪽으로 달려갔다.

    “야! 진짜로 들어가냐!”

    “당연히 농담일세!”

    마왕이 현관문을 닫다 말고 웃으며 소리쳤다. 하지만 내가 거기에 도착하기 직전, 그녀는 세희에게 속삭였다.

    “다음부턴 진짜 들어가자꾸나.”

    “네. 언니.”

    “다 들었거든?!”

    “어이쿠, 들었는가?”

    “다음엔 좀  작게 말하죠. 들어오세요, 오빠.”

    “하핫! 들어오게!”

    두 미녀 자매의 안내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실내는 저번에 왔을 때와 그렇게 다르지 않았다. 다른  하나 있다면, 냄새였다. 처음 왔을 땐 향긋한 아로마향과 고급 음식 냄새가 풍겼다면, 지금은 분식집에서 맡을 수 있는 떡볶이 냄새였다.

    나는 앞장서서 들어가는 마왕에게 물었다.

    “떡볶이 하고 있냐?”

    그녀는 돌아서서 자랑스러운 듯이 웃었다.

    “음, 그렇다네. 자네가 왔는데 배달 음식을 시켜줄 순 없지 않나.”

    “어머니는?”

    그러고보니 여신님께서 보이지 않았다. 내가 이 집에 온 이유  59%가 어머니 뵈러 온 건데.

    내 질문에, 이번엔 세희가 설명해줬다.

    “어머니께서는 회사 가셨어요.”

    주말에?

    의아한 표정을 짓자 세희가 감정이 보이지 않는 기계 얼굴로 대답했다.

    “보내신 글에 문제가 있었나 봐요. 단순한 오탈자 문제 같으니 걱정 안 하셔도 돼요.”

    “글이라고? 어머니께서 작가셔?”

    “그렇다네. 몰랐는가? 그것도 모르니 서운하네만.”

    “알려줘야 알지!”

    “그건 그렇지! 하하핫!”

    마왕은 호쾌한 웃음을 지으며 내게 걸어왔다.

    “그런데 그건 왜 묻는 겐가?”

    거의 껴안을 듯이 다가온 마왕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계시면 못하는 일이라도 하려 그랬나?”

    귀에 닿는 숨결과  내용 때문에 머리가 뜨거워졌다. 황급히 뒷걸음질치려는 그때 세희가 끼어들었다.

    “너무 가까운 거 같은데요. 떨어져주세요, 언니.”

    세희는 나와 마왕 사이 난 틈에 손을 밀어 넣어서 떨어뜨렸다. 우리 둘은  의외의 행동에 놀라 쳐다보는데, 마왕이 호쾌하게 웃어넘겼다.

    “핫핫핫! 우리 세희가 짐을 질투하는 모양이구먼!”

    언니가 그렇게 말하며 머릴 쓰다듬자, 세희는 고개 숙이며 뺨을 붉혔다.

    네가 아니라 날 질투하는 거 같은데……

    한동안 동생 머리를 쓰다듬던 마왕이, 뭔가 떠오른 것처럼 눈을 커다랗게 뜨며 소리쳤다.

    “아! 그걸 깜빡했군!”

    그러더니 그녀는 주방 쪽으로 걸어갔다. 잰걸음으로 빠르게 걸어간 그녀는 뒤도  돌아보며 말했다.

    “짐은 요리하고 있을테니, 자네와 세희는 잠깐 시간 좀 때우고 있게!”

    마왕은 주방으로 들어갔고, 거실에 나와 세희만 남았다. 이제 소파에 앉아  보면서 기다리려는데 세희가 날 불렀다.

    “오빠. 제 방 구경하실래요?”

    “뭐?”

    그녀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소매를 잡고 계단으로 이끌었다. 마왕 여동생 방에 가면 안 된다는 생각에 반항을 조금이라도 해봤다.

    “어어, 잠깐만.”

    “네, 잠깐만이면 돼요.”

    “아니 그게 아니라!”

    계단을 오르던 도중, 잘못 뿌리치면 그녀가 넘어질까봐 가만히 걸어갔다. 2층에 도착한 뒤 그녀는 내 손을 놓고 보이는 문 중 하나를 열었다.

    “자, 들어가세요.”

    “들어가야 돼?  들어가면 안 될까?”

    “당연히 안 되죠. 안 들어가시면 오빠 인터넷 기록 언니한테 다 말할 거에요.”

    “네가 그걸 어떻게 아는데!”

    “다 방법이 있죠.”

    얘가 무표정이라 거짓말을 하는 건지 진실을 말하는 건지 잘 분간이 되지 않았다. 혹시 몰라서  들어가고 있는데, 세희가 입을 열었다.

    “오빠는 큰  좋아하시죠?”

    “들어갈게! 아니, 들어가게 해주세요!”

    진실이었다.

    그녀가 내 취향을  말하기 전에 서둘러 방으로 들어갔다. 세희 방은 자기 언니 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수많은 여자 사진들로 가득했지만, 사진  주인공이 마왕 단 한 명이라는 점에서 차이 났다.

    “이, 이건……!”

    “제가 언니를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죠.”

    너무 놀라 말문이 막히고, 그 사이 세희가 방문을 닫으며 들어왔다. 그녀는 방안을 가리키며 자랑스러운 듯이 말했다.

    “지금까지 언니가 자라온 기록이에요. 오빠는 이런 거 없죠?”

    “있겠냐!”

    세희가 말한 대로 사진 속 마왕은 많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내가 보지 못했던 어린아이 모습과 더불어, 교복을 입은 사진, 단발머리를 한 사진, 원피스 형태 수영복을 입은 사진, 칠칠찮게 자는 사진까지도. 그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야산에  있는 사진이었다. 사진  마왕은 은발을 휘날리며 목검으로 남자애 여러 명과 싸우고 있었다.

    “그거요?”

     시선이 그 사진에 멈춰 있자, 세희가 설명하기 시작했다.

    “언니는 저 사건 때문에 대회 출전 정지를 받았죠.”

    “뭐라고?”

    그녀는  말을 무시하며 다른 사진들을 가리켰다.

    “저 사진은 언니가 중학교 수학여행에 가서 찍은 거고요. 저건 하와이로 여행 갔을 때예요. 저기 있는 건 운전면허   찍은 거죠. 저 때 언니가 얼마나 떨었는지 몰라요.”

    계속해서 사진을 설명하던 세희는 날 부르며 나와 눈을 마주쳤다.

    “오빠. 저는 오빠보다 언니와 함께한 시간이 훨씬 많아요. 지금도 오빠는 집에 가면 그만이지만 저는 언니와 함께 살고요. 그런데 나중으로 가면 오빠랑 함께할 시간이 더 많겠죠.”

    나는 진지한 그녀의 표정에 대답하지 않고 듣기만 했다.

    “오빠는 알겠지만, 저 언니 좋아해요. 언니는 제가 여동생으로서 좋아하는 줄 알지만요.”

    세희는 말하다 말고 벽에 걸린 액자를 쓰다듬었다.

    “그렇다고 언니를 좋아하는 마음을 멈추진 않을 거예요. 언니가 제 마음을 안다고 해도 안 멈출 거고요. 그러니까……”

    말을 흐리더니, 다시 날 바라봤다. 언니와 다르게 갈색 눈동자인 그녀는 눈도 깜빡이지 않은 채 말했다.

    “언니 울리면 가만 안 둬요.”

    저렇게 진지한 대답에 ‘뭐?’라며 얼빠진 대답을 할 순 없었다. 나도 세희처럼 눈을 피하지 않고 대답했다.

    “알았어.”

    “그럼 다행이네요.”

    하지만 세희는 말을 끝내며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더니 방 안에 있는 책상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책상 서랍을 열어 무언가를 꺼내더니, 내게 다가와 그걸 내밀었다.

    “여기요.”

    건넨 건 작은 메모리칩이었다. 일단 그걸 받아들이면서도 물었다.

    “이게 뭔데?”

    “지금까지 찍은 언니 사진이에요.”

    “!”

    “이걸로 오빠한테 진 빚은  갚은 거예요?”

    “사생활 침해잖아!”

    나중에 경찰에 제출하기 위해 주머니에 넣었다. 그래도 그녀가 진실을 말하는 건지 판단하기 위해 컴퓨터로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게다가 세희가 몰래 침입해서 증거 인멸을 시도할 수 있으니 백업 파일도 만들고.

     사이 세희는 내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아, 그리고 오빠. 고마워요. 언니한테 말 안 해주셔서.”

    “뭐가?”

    “제가 학교 선배 고용한 거요.”

    “아 그거?”

    저번에 세희를 양아치들에게 구했을 때부터 뭔가 이상하긴 했다. 손을 좀 꺾었다고 물러나는 거나, 그 놈이 진짜 했다며 할  몰랐다는 말투도. 게다가 세희가 그 양아치 중 한 명을 선배라고 부를 때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잘못하면 마왕에게 상처 줄 것 같아서 일부러 입 다물고 있었는데, 세희가 그걸 알아챈 것 같았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손짓했다.

    “신경 쓰지 마. 그런데 걔네들이 너한테 다가가진 않고?”

    “네. 그런 대비책은 항상 만들어 두니까요. 설마 학교에서부터 따라올 줄은 몰랐지만요.”

    마왕 동생다운 말이었다.  말에 내가 웃는데, 세희가 말을 이었다.

    “그게 사실 제가 오빠한테 반했다고 착각하게 만들려고 한 상황이었는데요.”

    “그래? 난  네가 진짜  좋아하는  알았잖아.”

    “거짓말해서 죄송해요.”

    “괜찮아. 괜찮아.”

    역시 나한테 반할 리가 없지.  정도로 반했다면 경찰은 다 커플이겠지. 젠장!

    “그리고, 그때 도와주러 오셔서 감사해요. 제가 어떤 여자애인지 다 알고도 와주셨잖아요.”

    다시 돌아온 양아치들 속에서 구해줬을 때 말하는 모양이었다. 그때 일은 나도  그런지 모르겠다. 확실히 그녀가 날 누명 씌워서 마왕과 떨어뜨리려 했다. 그런데 세희가 위험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난 바로 튀어 나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그런 건지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마왕이 세희에게 날 소개했을 때가 떠올랐다.

    “그거는, 내가 용사라서 그런 게 아닐까?”

    “……”

    내 농담에도 그녀는 눈을 조금 크게 뜨기만 하고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농담이 실패한 줄 알았지만, 세희가 입꼬리를 올리기 시작했다.

    “그게 뭐예요. 용사라니.”

    그녀를 만나고 처음 보는 행복한 웃음이었다.  날, 날 함정에 빠뜨리려 할  짓던 웃음과 전혀 다른 미소였다.

    세희는 입꼬리를 올리고 흐뭇한 시선으로 날 바라봤다.

    “이것까진 말 안하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죠. 흠흠!”

    헛기침하고, 긴장한 듯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온 그녀는 말을 이었다.

    “제가 사실, 제가 레즈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아무래도 레즈가 아니라 바이인 거 같네요.”

    “뭐, 뭐?”

    “남자한테 두근거리는  처음이라서 잘 모르겠지만. 오빠가 그렇게 말씀하시는  보고 확신했어요.”

    머릿속이 새하얘져서 어떤 말을 해야 할지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그녀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세희는 맨발로 구해주러 갔을 때와 같이 얼굴을 붉히며 말을 마쳤다.

    “아무래도, 저…… 오빠 좋아하게 된 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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