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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4화 〉너랑 있을 때 제일 두근거려 (44/72)



〈 44화 〉너랑 있을 때 제일 두근거려

“유리가 보낸 거 아닌가?”

“뭐?”

예상외의 말을 한 마왕을 쳐다봤다. 그녀는 심각한 표정을 한 채 날 올려보고 있었다. 내가 놀란   사진 자체도 있었지만, 유리가 날 쫓아다니고 있다는 걸 마왕이 눈치채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너 알고 있었어?”


“그럼 자넨 모르고 있었나?”

오히려 마왕이 이상한 듯이 물었다.

“며칠간 유리가 미행하지 않았나. 설마 진짜로 몰랐던 겐가?”

“네가 알고 있는 줄은 몰랐지!”


“짐은 자네가 일부러 모른 척하는 줄 알았네만. 이리 줘보게.”

마왕을 그렇게 말하며 사진을 가져갔다. 지문이 묻지 않게 모서리를 손끝으로만 잡은 그녀는 같은 방법으로 편지 봉투를 집고 거기에 종이를 넣었다.

“뭐하게?”

“당연하지 않나. 경찰에 제출해야지. 잠깐  좀 돌아보게.”


“신고할 거냐?”

그렇게 말하면서도 일단 그녀가 시키는 대로 그녀에게 등을 보여줬다. 마왕은  가방을 열어 편지를 넣었다.

“당연하지 않은가. 지금까진 그저 미행에 그쳤지만, 이렇게 편지를 보냈잖나. 분명 편지만으로 끝내지 않을 테니, 미리 증거를 수집해 두어야지. 다 넣었네.”

마왕이 지퍼를 올리고 가방을 약하게 두드렸다. 몸을 돌려 다시 그녀를 보는데, 마왕은 두 손을 들어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마치 우는 것 같은 모습에 난 당황하고 말았다.


“야, 너 우냐?”


“까꿍!”

갑자기 그녀가 재롱을 부렸다. 꽃이 활짝 피는 것처럼  손을 치우고 내게 미소를 보여준 것이다.


그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사랑스럽기도 해서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그런 편지를 받은 것치고는 상당히 이상한 태도였다.

“뭐야, 너 왜 그래.”

“자네가 너무 긴장한 것 같아서 말이지.”


마왕은  가슴팍을 약하게 쳤다.


“너무 긴장하지 말게. 생각이 깊어지면 오히려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네. 나머진 가면서 이야기하지.”

나와 마왕은 건물 출입구로 나가, 학교로 향했다. 그녀는 옅게 웃으며 정면을 바라보고 걷고 있었다. 평소와 다르지 않은 모습에 방심하고 있다가, 마왕이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물었다.

“자네는 어찌하고 싶은가?”


“뭐?”


“유리를 어찌하고 싶은지 물었네만. 경찰에 넘기고 싶나? 아니면 자네가 알아서 타일러 볼 텐가.”


“잘, 잘 모르겠어.”


“그런 우유부단한 대답은 듣고 싶지 않네. 어서 대답하게. 경찰에 넘기겠나? 아니면 알아서 해볼 겐가?”

“아니, 그런 걸 벌써 정해야 돼?”

“당연하잖나.”


마왕은 걸음을 멈추고 날 진지한 얼굴로 쳐다봤다. 낯설게 느껴지는 정색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광기엔 가속력이 붙네. 며칠 동안은 미행에 그치고, 오늘은 이렇게 편지를 부쳤지. 그건 언제 자넬 습격할지 모른다는 뜻일세. 뭐, 짐도 덮칠 수 있겠지만 말일세.”

산뜻하게 말을 끝낸 그녀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나도 따라 걸으며 황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너도 덮친다고?”

“그렇네만. 사진엔 짐도 찍히지 않았나. 목적이 자네라면 자네 혼자 있을  찍었겠지. 그 칼집을 보니 자네 먼저 덮칠 가능성이 크지만 말일세.”

“나를?”

“그리 걱정 말게. 싸우면 자네가 이기지 않나.”

“아니, 싸우면 내가 이기긴 한데!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나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졌다. 하지만 이건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좋아했던 사람이 내 스토커가 된 것만 해도 어지러운데, 그녀가 나나 마왕을 덮칠 수도 있다는 말에 머리가 아파졌다.


그런  반응을 보고도 마왕은 웃음을 지었다. 오히려 까치발을 들고는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옳지, 옳지, 진정하게.”

내 머리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손길에 잠깐이나마 포근함이 느껴졌다. 그 포근함에 기분이 좋아져 빠질 뻔한 나는 급하게 머리를 빼며 편안한 함정에서 벗어났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자네가 너무 흥분하여 진정시키는 거다만?”

“아니, 내가 애야?”

“짐의 눈엔 애기나 다름없다네. 냉정히 생각하지 못하고 화내는 모습 말일세. 그것이 아이가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나?”


그녀 말이 맞았다. 여기서 흥분하는 건 그저 감정의 낭비였다. 무조건 화내는 것보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지가 중요했다.


그렇게 머리가 식자, 난 마왕에게 사과했다.

“미안, 내가 너무 흥분했어.”

“괜찮네. 자. 옳지, 옳지.”


마왕은 다시 손을 들어, 내 머릴 쓰다듬으려 했다. 하지만 난 바로 뒷걸음질 쳤고, 그녀에게 따졌다.


“이번엔 또 뭐 하는 거야!”


“뭐긴 뭐겠나. 올바르게 행동한 자네에게 포상을 주려는 것이지.”

“포상 줄 거면 돈으로 줘!”

“자네는 마음보다 돈을 더 우선시하는 자인가?”


“아니거든!?”

“그럼 다행이네. 일단 마저 걷지.”

우리는 다시 학교를 향해 걷기 시작했고, 마왕은 평소와 다름없이 활기찬 목소리로 대화를 이어 나갔다.


“일단 다시 묻겠네. 자네는 유리를 어찌하고 싶은 겐가? 경찰에 신고할 겐가, 아니면 자네 선에서 알아서 처리할 것인가?”


“음……”


나는 걸으며 생각에 빠졌다. 1분 조금 넘게 생각하면서 나온 결론은 단순했다.

“신고 안 하는  나을 거 같은데.”


“음? 왜 그런가? 설마, 자네 첫사랑을  잊어서 그런 건 아닐 테지?”

“무슨 소리야.”

딴죽 걸며 마왕을 쳐다봤다. 하지만 그녀는 얼굴을 보여주고 싶지 않은지,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려 걷고 있었다.

그녀는 날 보지 않으며 말을 이었다.

“말해보게, 자네 첫사랑인 유리를 난처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 그러는 겐가?”

이때 들리는 목소리는 일부러 활기차게 말하는 것 같았다. 특히 유리의 이름을 언급할 땐 목소리가 조금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난 그런 걸 신경 쓰지 않고 대답했다.


“뭐, 대충은 맞긴 한데.”


“……그런가. 그렇다면”

“말 좀 끝까지 들어.”

실망한 듯한 마왕의 이야기를 끊고 하던 말을 시작했다.


“걔가 내 첫사랑이긴 해도, 그 이전에 몇 년 동안이나 만났던 친구니까. 게다가  부모님을 만난 적도 있고 아는 사이기도 하고. 일이 커지면 걔네 부모님까지 곤란하게 되잖아. 게다가 이제 더 이상 유리를 생각해도 가슴이 떨리진 않아. 오히려……”


너랑 있을 때 제일 두근거려, 라고 말할 뻔했다. 겨우 이 말을 꺼내지 않았지만, 마왕은 히죽거리는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오히려? 오히려 그 다음에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겐가?”


“아무것도 아니야.”

“에이,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지 않나. 어서 말해보게.”


“별  아니라니까!”

“거 참! 알았네! 알았어! 비밀로 해줄 테니 짐에게만 살짝 말해보게나.”


그렇게 말하더니 마왕은 내게 은발을 열어젖히며 하얀 귀를 들이댔다. 난 거기서 한 발짝 떨어져 걸었다.

“그게 뭐가 너한테만 말하는 거야!”

“뭔가, 그럼 이 세상 모두에게 자랑하듯 떠벌리고 싶은 겐가? 짐과 있을 때가 제일 설렌다고? 그렇게 말인가?”

“그렇겐 안 했거든?”


“대충은 맞나 보군?”

유도신문을 성공시킨 마왕이 눈웃음을 지으며  흐뭇하게 바라봤다. 난  속마음을 들킨 거 같아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그건 그렇고! 난 내 선으로 끝낼 거야!”


“뭐, 그런 거로 넘어가 주지.”


그렇게 말한 그녀는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다시  쳐다보며 당당하게 웃어 보였다.


“자네 선으로 넘어간다고?”


“그래!”

“정답일세, 연금술사!”


“……뭐냐 그건.”

내 대답에 마왕은 눈을 커다랗게 뜨며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뭔가! 자네는 ‘강연’을 보지 못한 겐가? ‘강연’의 멋짐을 모르는 자네가 정말 불쌍하구먼.”


“시끄럽고,  정답인지나 말해.”


“아 그거 말인가?”

마왕은 검지를 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유리가 한  그저 미행과 도촬한 것에 불과하네. 경찰에선 그런  가지고 함부로 처벌할 순 없다네.”


“그럼 경찰에 신고해도 소용없다는 거네?”


“그렇다네. 반면 그녀가 우리에게 직접 해를 가한다면 처벌은 가능할 걸세. 뭐, 우리가 안 다치면 그저 훈방으로 끝나겠지만 말일세.”


“무슨 법이 그따구냐.”

“어쩔 수 없지 않나. 악법도 법인 걸세. 이제 유리를 어떻게 설득하는지가 문제일세.”


그녀는 양손을 추리닝 상의 주머니에 넣고 칠칠하지 못한 모습으로 걸어갔다. 그러면서 여전히 시선은 앞으로 둔 채 말을 이었다.

“자네는 요즘 유리와 대화한 적이 있었나?”

“없지. 내가 말하려 해도 무시하고. 아니면 쳐다보지도 않아.”

“짐이 듣기론 강의는 꾸준히 나온다고 하는데, 맞나?”

“그렇긴 하지. 맨날 와서 내 옆자리에, 아니 너 그걸 어떻게 알았어?”

“자넨 짐을 무시하는 겐가?”

마왕이 눈살을 찌푸리며 날 올려봤다.

“짐이 비록 친구 하나 없는 몸이긴 하나, 보는 눈과 듣는 귀 정도는 있다네. 뭐, 남들이 멋대로 떠드는 대화를 엿듣는 것에 불과하지만 말일세.”


다시 앞을 보며 걷는 그녀의 말 중에 뭔가 꺼림칙한  느껴졌다.

“잠깐만. 왜 친구가 하나 없어? 난 친구 아냐?”


“뭣이?”


내 말을 들은 그녀는 아까보다 인상을 구기며 발걸음을 멈췄다. 그러더니 덩달아 멈춘 날 무섭게 노려봤다.


“자넨 짐을 친구라고 생각했는가?”

“아니었어?”

“당연히 아니잖은가!”


그렇게 같이 다니고 같이 밥도 먹었는데 친구가 아니었다니. 꽤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충격받은 얼굴을 봤는지 마왕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니! 짐과 자네가 친하긴 하지만! 친구는 아니라는 말이었네!”


“그럼 지인에 불과한 거였냐?”

“그것도 아닐세! 거참!”

갑자기 큰 소리를 낸 그녀는 손을 들어 내 멱살을 잡았다. 강한 힘으로 손을 당겨 내 상체를 숙이게 만들고는, 자신의 파란 눈동자를 강제로 마주치게 만들었다. 마왕은 기묘한 박력을 흘리며 내게 물었다.


“짐과 자네 사이가 정녕 어떤 사인지 듣고 싶은 겐가?”

“……아니요.”

“훗. 좀 아쉽긴 하지만,”


묘한 박력에 존댓말을 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 말에 만족했는지 그녀는 손을 풀며 날 놓아주었다.


“이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마저 하도록 하지. 어쨌든, 자네. 자네는 유리가 대충 언제 오는지 아는가?”


“대충, 강의 시작 몇 분 전에 오던데. 항상.”

“그런가? 그럼 어쩔  없지.”

“뭐가 어쩔 수 없는데?”

“자네 말일세.”

“내가 뭐 어째서.”


마왕은  쳐다봤다.


“역시 한 번쯤은 빠져야겠군.”

“뭘. 강의를?”

“함정을 파야 하지 않겠나.”

마지막 말을 내뱉는 그녀의 입가엔, 내게 장난칠 때 짓던 미소가 걸려 있었다.





아까 마왕이 말했던 것과 달리, 난 오늘도 강의실에 앉아서 강의가 시작되길 기다렸다. 평소와 다른 게 하나 있다면, 내 옆자리엔 유리가 아닌 마왕이 앉아 있다는 점이었다.

“뭐야.  선배 왜 여기 있어?”

“둘이 사귀는 거야?”

“사귀는 거라도 이건 이상하지 않냐?”


의문 섞인 웅성거림을 듣고도 마왕은 뻔뻔하게 앉은 자리를 유지했다.


난 그런 그녀에게 주변에 들리지 않도록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  진짜로 강의 시작할 때까지 여기 있을 거냐?”

“당연하지 않나. 유리가 강의 시작 몇 분 후에 온다고 했잖나.”


“그러긴 했는데, 그럼 너 강의는 어쩌고.”

“빠져야지  어쩌겠나. 대신 자네도 빠지게. 자네도 같이 잡아야 하니.”

“나 이거 전공이야!”

“짐이 짼 강의도 전공일세!”

작은 목소리로 다투는 도중, 누군가 문을 열고 강의실로 들어왔다. 나는 그게 교수님인 줄 알았지만, 들어온 사람은 교수님이 아닌 유리였다.


“어?”

청바지에 후줄근한 후드티를 입은 유리는 내 옆에 앉은 마왕을 보고 몸을 멈춰 세웠다. 마왕은 방금 들어온 유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고, 유리와 눈이 마주쳤다.

“에이씨!”

마왕의 푸른 눈과 잠깐 마주 보던 그녀는 급격히 몸을 돌려 강의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우리는 그걸 보고 바로 일어나 유리를 뒤쫓았다.


복도로 나온 우리들은 그녀가 향하는 곳으로 뛰어갔다. 평소 운동을 자주 하는 데다 전직 용사와 전생 마왕 출신인 우리는 쉽게 유리를 따라잡을  있었다.

“유리야! 잠깐만!”


내가 먼저 달리고 있는 유리를 멈춰 세우려 했다. 그런데 예상 외로 그녀는 달리던 걸 멈췄고, 잠시 거친 숨을 쉬면서 우리들을 쳐다봤다.

“유리야. 우리 잠깐만 이야기 좀 하자.”


“맞네. 그저 이야기만 할 뿐이네. 진정하게.”

“……미안해!”

그렇게 외친 유리는, 갑자기 다리를 들어 내 가랑이 사이를 발로 차고 말았다.


퍼억!


“……어허억.”


내장이 튀어나올 거 같은 고통에 나는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쓰러졌다.

“미안해! 지헌아!”

내가 가랑이 사이를 감싸고 쓰러지는 사이, 유리는 다시 도망치기 시작했다.

“자네!”


그런 유리를 마왕이 다시 쫓아갔고, 그녀는 머리 위로 양손을 올려  형태를 만들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양손 손가락을 교차 시켜 8기통 엔진을 연상시키는 제스처를 취했다.
“기억하겠네!”


어떤 액션 영화를 따라하면서 달려가는 그녀에게, 내가 할 말은 별로 없었다.

“빨리, 가서…… 잡기나 해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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