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화 〉그래도 꽤나 귀여운 구석이 있지
세희가 연락한다는 말을 하루도 안 돼서 실천할 줄은 몰랐다. 오늘 아침 8시부터 보내온 문자는, 마치 기계처럼 30분 간격으로 보내왔다. 그렇게 보내진 문자는 간단했다. 지금 뭐 하냐, 나중에 어디 같이 가 달라, 그런 내용밖에 없었다.
침대에 앉아 대학 구경시켜달라는 세희의 문자에 알았다며 대충 답장하고, 폰을 던지듯이 옆에 내려놨다. 이제 한숨 돌린 나는 문자 오기 전 꺼냈던 양말을 신기 시작했다.
그런데 세상은 그 잠깐만의 여유도 가지게 두지 않았다. 한 짝을 신자마자 바로 현관문 쪽에서 비밀번호 입력되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삐삐삐삐, 삐리릭!
내가 주변에서 이렇게 말없이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올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마왕이 온 줄 알고 양말 한 짝만 신은 채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자물쇠 풀리는 소리가 났음에도 문이 열리지 않았다. 아니, 열리긴 했는데 조금만 열린 채 움직이지 않았다. 복도에 무슨 일이 생긴 줄 알고 현관으로 향하며 물었다.
“야, 무슨 일 있냐?”
“……택배 왔습니다. 지헌씨.”
문틈 사이로 낮게 말하는 그녀 목소리가 들렸다. 남자 성대모사 하는 것처럼 들렸지만, 엄연한 마왕이 내는 음성이었다. 애초에 진짜 택배기사였으면 비번을 누르는 게 아니라 초인종을 눌렀다.
또 날 골탕 먹이려는 줄 알고 난 그 장난을 받아 주었다.
“그 앞에 두고 가세요.”
“음? 이거, 사인받아야 되는 겁니다.”
“무슨 사인이요. 회사가 어딘데요.”
“우, 우체국에서 왔습니다.”
“우체구욱? 그럼 기사님이 해주세요. 제가 낸 세금이 얼만데.”
벌컥!
“에잇! 그만하게!”
더 이상 못 받아주겠는지 마왕이 현관문을 열어 재꼈다. 어제와 달리 후줄근한 녹색 추리닝 차림인 그녀는 내게 장난을 치지 못해 뾰로퉁한 표정을 지었다.
“뭔가! 왜 진짜 택배 기사처럼 대하는 겐가!”
“네가 기사라며? 그럼 기사 아저씨 대할 때처럼 해줘야지.”
“자네는 기사분께 그런 갑질을 하는 겐가?”
마왕은 현관문에서 신발을 벗으며 투덜댔다. 그녀는 평소처럼 추리닝 차림이었지만 손에 하얀 종이가방을 들고 있었다.
나는 방으로 들어오는 그녀에게 물었다.
“그건 뭐냐?”
다시 침대에 앉아 양말을 신는 사이 마왕은 종이 가방을 들어 보였다.
“이것 말인가? 어머니께서 자네 갖다주려고 보낸 것이라네.”
“그러니까 그게 뭐냐고.”
“그냥 밑반찬들일세. 김치나 나물, 그런 거 말일세.”
“나 냉장고에 반찬 있는데?”
“짐도 그걸 말했지만 듣질 않으시더군.”
그녀는 냉장고 문을 열어, 가방 안에 있는 반찬통을 하나둘씩 넣기 시작했다. 난 그런 모습을 보고 재차 말했다.
“아니, 나 이미 있다니까!”
“싫어하는 척하지 말게. 좋아하는 거 다 알고 있네.”
“아니거든?”
“그리고 짐이 만든 것도 있으니, 한 번 찾아보게.”
“……거기 한쪽 구석에 몰아놔! 안 섞이게!”
“훗, 알았네.”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마왕이 코웃음을 치며 종이 가방을 완전히 비웠다. 그녀는 가방을 납작하게 접어, 현관문 쪽으로 날렸다.
쟁반처럼 회전하며 날아가는 종이가방을 보고, 나는 마왕에게 따졌다.
“그걸 날리면 어떻게 하냐?”
“이따 나갈 때 버리면 되지 않나. 뭘 그리 신경질적인가.”
뻔뻔하게 대답한 그녀는 냉장고 문을 닫고 내가 앉은 침대로 다가왔다. 그리고 굳이 책상 의자도 있고 침대 다른 공간도 있는데 내 옆에 붙듯이 바싹 앉았다. 옆으로 움직여도 그만큼 따라와서 허벅지와 허벅지가 맞붙을 만큼 딱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달달한 향기가 풍기고, 점차 내 몸에 기대려는 마왕에게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돌리기 직전 봤던 그녀의 미소가 머릿속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걸 떨쳐내기 위해 최대한 퉁명스러운 말투로 외쳤다.
“아, 아니, 야! 좀 떨어져!”
내 말에도 마왕은 연기하는 것처럼 과장된 움직임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도대체 어디로 가야 하는 겐가?”
“옆으로 가라고! 책, 책상 의자나 바닥에 앉던가.”
“에이, 자네 방이 너무 좁지 않나. 너무 좁아서 붙어 있을 수밖에 없다네. 자네가 이해하게.”
무조건 거짓말이었다. 저번에 이 방에 누워서 같이 잠(만) 잔 적도 있으면서!
그래도 그날을 떠올리니 마음이 어느 정도 진정됐다. 마왕이 변기에 토하느라 발생한 소음을 생각하며 요동치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들키지 않을 만큼 작게 심호흡하는 가운데, 마왕이 날 불렀다.
“자네.”
“왜.”
지금은 그녀가 어떤 말,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태연하게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 결심은 생각보다 쉽게 깨지고 말았다.
“지금이 전에 말했던 그 순간이 아닌가?”
“무슨 기회.”
마왕은 내 귓가로 다가와 속삭였다.
“짐을 이름으로 불러보게.”
“!”
그녀가 속삭인 귀에 오싹, 하고 소름이 돋았다. 소름 돋은 귀를 손으로 덮으려 놀란 눈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마왕은 내 빨개진 얼굴을 보고는, 계획이 성공했다는 듯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우하하하! 무슨 사내놈이 그리 간이 작은 겐가?”
나는 부끄러운 걸 숨기기 위해 일부러 화내며 따졌다.
“아니, 너도 속삭이면 놀랄 거잖아!”
“짐이 말인가?”
“그래! 저번에도 놀랐으면서!”
옷가게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내가 귀에 속삭이자, 마왕은 평소답지 않게 귀여운 비명을 질렀다. 꺗! 하고.
자기도 그런 걸 기억하고 있을 텐데도, 마왕은 오히려 당당하게 웃었다.
“오, 그럼 지금 시험해 볼 텐가?”
그렇게 말하더니, 고개를 돌려 자신의 귀를 내밀었다. 손으로 가지런한 은발을 젖히면서까지 하얀 귀를 드러낸 그녀가 말을 이었다.
“짐은 이제 준비됐네. 자, 이름을 불러보게나.”
“너……!”
모든 게 마왕이 계획한 거란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다. 내가 자신의 이름을 부를 수밖에 없도록 날 도발했고, 멍청한 나는 그 도발에 넘어가고 말았다.
“어서 하게. 짐이 기다리고 있지 않나.”
그녀의 옆얼굴에 입꼬리가 올라간 게 보였다. 영악하게 웃음 짓는 걸 보며, 난 최후의 저항을 펼쳤다.
“안 해!”
“뭣이?”
내 대답에 그녀는 파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난 그런 그녀를 보며 퉁명스러운 말투로 대답했다.
“나 이제 학교 가야돼!”
“에이, 한 번쯤은 빠져도 되지 않나.”
“이미 한 번 빠졌, 어엇!”
말하는 도중 그녀가 내 쪽으로 상체를 기울여, 두손으로 가슴팍을 밀어 날 쓰러뜨렸다. 침대 위라서 아프진 않았다. 바로 일어나려는데, 그러지 못하도록 마왕이 내 몸 위에 엎드렸다. 양옆에 발꿈치와 무릎을 대고 엎드린 그녀를 보고 난 당황하고 말았다.
“엇! 야!”
“이러면 쉽게 도망가지 못할 테지?”
마왕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반짝이는 파란 눈으로 날 내려봤다. 이때 그녀의 은발이 흘러내려, 은색으로 가득 찬 세상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자, 이제 불러보게.”
“……”
“짐이 보고 있어서 부담스러운가? 그럼 이렇게 하지.”
그녀의 얼굴이 천천히 다가왔다. 키스할 것처럼 다가온 마왕은 왼쪽으로 비껴서, 자신의 귀가 내 입에 닿도록 만들었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안 부르면 정말 실망일세.”
이때 나는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내 얼굴을 뒤덮은 그녀의 은발에 향기가 콧속에 진동했고, 귓가에 들리는 목소리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소”
머리가 멍한 와중에도 입에선 그녀 이름이 자동으로 흘러나왔다.
“그래, 말해보게.”
“소, 희야.”
“좀 더 명확히!”
“소희야.”
“으으으음……!”
그녀는 고양이처럼 가르랑거리며 내 위에서 비켜났다. 동시에 옆에 있던 내 베개를 잡고 두 팔로 꼭 껴안으며 침대를 굴렀다.
“으음! 컥!”
그렇게 구르다 결국 침대에서 떨어졌다.
마왕이 그 기행을 벌이는 동안 나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상체를 일으키며 침대에서 굴러떨어진 그녀를 쳐다봤다.
“하! 짐이 너무 신났나 보군!”
여전히 내 베개를 손에 쥐며 마왕이 일어났다. 그녀는 벌게진 얼굴로 내게 웃어 보였다.
지금까진 내가 그녀에게 두근거리는 건 그녀가 내게 들이댈 때였다.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응석 부리는 듯한 그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하지만 저렇게 평소처럼 당당하게 웃는 모습을 보고 설레는 건 처음이었다.
“자네 얼굴이 꽤나 빨갛네만?”
“너도 그렇거든? 이제 만족했냐?”
얼굴은 참을 수 없이 뜨거웠지만, 나도 그녀처럼 당당하게 있고 싶었다. 침대에서 일어나며 마왕에게 다가갔다.
“어, 엇, 왜 오는 겐가?”
“가방 가지러 간다, 가방!”
이제 좀 있으면 강의가 시작할 시간이었다. 얘가 온 바람에 평소 나가던 시간보다 조금 늦고 말았다.
마왕 옆을 지나 책상으로 가서 학교 갈 때 가지고 다니던 가방을 집었다. 가방을 등에 메며 다시 그녀를 지나치고 현관으로 향했다. 이제 신발 신고 나가기만 하면 당황한 걸 티 내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런데 문을 열기 직전, 마왕이 웃는 목소리로 날 불렀다.
“잠깐 기다리게, 자네!”
“왜. 나 나가야 돼.”
“이걸 깜빡한 거 같네만?”
고개를 들어 방안을 바라봤다. 침대 옆엔 입꼬리를 올린 채 웃고 있는 마왕이 보였다. 그녀가 내게 내민 건, 아까 침대 위에 던져둔 내 폰이었다.
“……갖다줘.”
“자. 여깄네. 당황하지 말고 잘 받게.”
“시끄러워.”
그녀는 현관까지 와서 폰을 건넸다. 그런데 거기서 돌아가지 않고 날 멀뚱하게 쳐다보는 것이었다.
“왜, 뭐 있어?”
“비키게. 짐도 나가야 하지 않겠나.”
“놀러 온 거 아니었냐?”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문을 열어 복도로 나가, 그녀가 편하게 신을 수 있게 현관을 비웠다. 기다리는 사이 마왕은 운동화 뒤꿈치를 접어 신고 서둘러 방을 나왔다.
문을 닫고 도어락이 잠기는 소리가 들리는 와중에, 마왕이 왜 그러냐는 듯이 물었다.
“자네는 짐이 매일 놀기만 하는 줄 아는가?”
“그럼 여기 왜 왔냐?”
“자네와 같이 학교 가러 왔네만. 게다가 짐이 자네 반찬도 갖다주지 않았나.”
나랑 같이 학교 가려고 했다는 그녀 말에 저절로 웃음이 지어졌다. 나는 웃으면서 엘리베이터로 향해 복도를 걸어갔다. 가면서 농담을 건넸다.
“왜, 잘생긴 내 얼굴이 그렇게 보고 싶었냐?”
“자네는 자신이 잘생겼다고 생각하는가?”
“야.”
“그래도 꽤나 귀여운 구석이 있지.”
“……”
대답하지 못하고 말없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오늘 운이 좋은지 엘리베이터가 금방 도착했다. 나는 들어가며 머리가 뜨거운 와중에도 물었다.
“어디가 귀여운데.”
왜 이걸 물어봤는지 전혀 모르겠다. 전처럼 그런 헛소리는 무시하면서 가도 되는데, 왜 굳이 물어봐서 어색한 분위기를 만드는지.
문이 닫히고, 마왕은 손을 뻗어 1층 버튼을 누르며 말했다.
“음, 가끔씩 이렇게 어리바리한 점이 귀엽다네. 그리고,”
버튼을 눌렀던 손을 이번엔 내게 뻗었다. 그 손으로 엘리베이터 벽을 바라보고 있는 내 턱을 밀었다.
“잠깐 짐을 바라봐주지 않겠나?”
손길에 푸른 눈동자와 눈을 마주치고 말았다. 블루 사파이어 같은 눈을 보다 보니, 부끄러운 감정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계속 보기 부끄러워 시선을 돌리니 그녀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렇게 마주칠 때마다 눈 돌리는 점이 제일 귀엽네.”
“……손 치워.”
참을 수 없어서 고개를 뒤로 빼며 마왕의 손길에서 벗어났다.
“또 이렇게 부끄러워서 빼는 것도 귀엽고 말일세.”
“이제 그만해.”
“자네가 물어봤으면서도 그만하라는 점도 귀엽고.”
“아 닥치라고.”
“그걸 숨기려고 입이 거칠어지는 것도 귀엽다네.”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할 때까지 그녀는 귀엽다는 말을 반복했다.
“자, 도착했다네. 이제 내리세!”
“크윽……!”
문이 열리고 마왕은 활기찬 기색으로 걸어 나갔다. 그런 반면, 난 고온 사우나에 하루 동안 갇혀 있던 사람처럼 붉어진 얼굴로 땀을 흘리고 있었다.
계속해서 귀엽다는 소릴 들으니 부끄럽기도 하고 덥게 느껴져서 미치는 줄 알았다. 그래도 시원한 바깥바람을 쐬면서 가는데, 마왕이 출입구 쪽에서 날 불렀다.
“자네, 이리 와보게!”
순간 또 나한테 귀엽다고 말할 줄 알았다. 하지만 언제 귀엽다고 말할지 경계하면서 천천히 다가갔다.
“뭔데.”
“자네에게 편지 보낸 사람이 있다네!”
“그럼 없는 줄 알았냐?”
“있는가?”
“……없지.”
굳이 있다면 병무청이겠지.
마왕이 건넨 편지를 받아들였다. 그런데 이 편지 봉투엔 우표는 물론이고, 보내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 주소도 없었다. 마치 사고 바로 넣은 것처럼 입구엔 풀칠도 되어 있지 않았다.
“이게, 뭐지?”
잡은 감촉을 보니 비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의심쩍은 심정으로 안에 담긴 편지를 꺼내 봤다.
편지 봉투 안에 담긴 건 접힌 A4용지 한 장이었다. 그 종이엔 사진이 인쇄되어 있었는데, 그 사진의 주인공은 바로 나와 마왕이었다. 카페를 배경으로, 마왕이 맞은편에 앉은 내게 손을 뻗는 장면이 찍혀 있었다. 그런데,
“이건……!”
내 얼굴 부분이 칼집으로 심하게 훼손되어 있었다. 내 외모가 칼질이 필요한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그어진 걸 보니 가슴이 섬뜩했다.
나만 집중적으로 훼손된 사진을 보낸 사람. 그럴 만한 사람을 알고 있었다. 이럴 만한 사람은 바로 유리밖에 없었다.
“유리가 보낸 거 아닌가?”
“뭐?”
예상외의 말을 한 마왕을 쳐다봤다. 그녀는 심각한 표정을 한 채 날 올려보고 있었다. 내가 놀란 건 이 사진 자체도 있었지만, 유리가 날 쫓아다니고 있다는 걸 마왕이 눈치채고 있었다는 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