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화 〉좀 더 깊게 물 걸 그랬군?
삑!
“아.”
슬리퍼가 대리석과 마찰하며 새소릴 내고, 마왕은 탄식에 가까운 단말마를 질렀다. 그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놀란 그녀 얼굴이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그리고,
딱!
“으읍!”
“큭!”
내 입술은 마왕의 얼굴 중 단단한 부분에 부딪혔다. 아픈 와중에도 일단 그녀 몸을 잡아서 넘어지는 걸 막아줬다. 생각보다 자그마한 그녀가 내 품 안에 들어왔지만, 난 그 감촉보다 통증을 더 우선시했다.
그건 마왕도 마찬가지였는지, 우리 둘은 누가 뭐라 할 사이도 없이 서로 떨어져서 아픈 부분을 손으로 감쌌다.
“아야야……!”
아픈 입술을 손으로 덮으며 마왕을 쳐다봤다. 그녀는 몸을 돌린 채 허릴 굽힌 상태로 얼굴 부분을 손바닥으로 감싸고 있었다. 꽤 아픈지 어깨까지 떨고 있는 마왕에게서 고개를 돌린 뒤, 아까 회색 후드티를 발견한 곳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이때 입을 감싼 손바닥에 미끈하고 축축한 감각이 느껴졌다. 손을 떼어 보니 손금 위에 붉은 피가 흥건하게 고여 있었다.
“조심 좀 해라, 좀!”
칠칠하지 못한 마왕에게 소리치며 다시 그녀를 쳐다봤다. 그러자 그녀도 반박하며 날 돌아봤다.
“자네야말로 제대로 잡지 그랬나!”
“네가 제대로, 어?”
“음?”
적반하장인 태도를 보고 뭐라 말하려 했지만, 붉어진 그녀 입술을 보고 할 말을 잃어버렸다. 연분홍빛으로 벚꽃을 연상시키던 입술이 지금은 틴트를 바른 것처럼 붉었기 때문이었다.
주륵
조금 벌어진 마왕 입가에서 피 한줄기가 흘러내렸다. 그걸 보고 아까 그녀 얼굴에서 딱딱한 무언가에 입술이 부딪힌 걸 떠올랐다. 게다가 아깐 몰랐지만 내 아랫니도 그때 부드러운 무언가와 충돌했다.
나와 똑같은 걸 생각했는지, 마왕이 피를 흘리는 입술로 웃으며 말했다.
“짐이 칠칠맞지 못해서 다행이었군?”
내 첫키스는, 비릿한 쇠맛이었다.
……가 아니라!
“왜 그런 걸로 웃어넘기려는 거야!”
“에에, 들켰나?”
“당연히 들키지!”
“그래도설렜잖나.”
“시끄러워!”
말대로 두근거린 걸 들키기 싫어서 서둘러 편의점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 마왕이 물었다.
“왜 들어가려는 겐가?”
“연고나 그런 거 사야지. 네가 피 뚝뚝 흘리면서 집에 들어가면 내가 뭐가 되냐?”
말을 마치며 바로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자 바로 직원의 힘없는 목소리가 들렸다.
“어서오세요오…… 풉.”
왜 웃지? 설마 밖에서 그러던 거 다 봐서 그러는 건가?
아까와 다른 의미로 얼굴을 붉히며 안을 걸어갔다. 혹시라도 바닥에 피가 묻을까 싶어서 입으로 손을 가렸다. 마치 자체 모자이크하는 것 같았지만, 직원에게 얼굴을 가리는 것 같아 마음이 조금은 편해졌다.
“음.”
곧이어 마왕도 나처럼 입을 가린 채 들어왔다. 입가를 가렸어도 미인은 미인이었다. 은발을 한 백인 미녀가 나와 같은 행동을 하며 들어오자, 직원은 놀란 얼굴로 나와 그녀를 번갈아 봤다.
하지만 나는 그걸 무시하며 빠르게 사야 할 물건들을 골랐다. 먼저 음료수 진열대에서 생수를 하나 고르고, 카운터로 와서 그 밑 부분에 진열된 연고를 집었다.
그 두 물건을 카운터에 올리는데, 마왕은 말없이 밑을 내려보고 있었다. 나도 시선을 내려 뭘 보는 건지 확인했다. 그녀가 보고 있는 곳은 연고와 소독약 같은 의료 약품이 있는 곳이었다. 아니, 거기서 좀 더 왼쪽, 얇은 사각형 박스가 진열된……
“뭘 보는 겐가!”
“억!”
그게 뭔지 알아차리기도 전에 마왕이 내 뒤통수를 때렸다. 그녀는 붉어진 얼굴로 카운터 너머에서 썩은 표정을 짓는 점원을 가리켰다.
“이분께서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빨리 계산하게!”
그럼, 말로 하지 굳이 때리기는.
싸우면 지기에 말로 내뱉지 않고,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체크카드를 뽑아 내밀었다.
“네에, 8400원입니다아…… 하아.”
한숨 섞인 대답을 내뱉으며 의외로 비싼 연고와 생수를 계산했다.
그가 돌려준 카드를 받고, 우리는 편의점 내에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곳으로 갔다. 거기에 비치된 테이블에 물건들을 내려놓은 뒤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자, 여기 있네.”
뭘 하려는 건지 눈치챈 마왕이 테이블 위에 있는 티슈를 여러 장 뽑아 건넸다.
“아, 응. 잠깐만.”
나는 생수통을 딴 뒤에 티슈를 받았다. 그다음 거기에 물을 부어 물티슈처럼 적당히 물을 머금게 했다.
이세계에 가서 얻은 것 중 실생활에 쓸 수 있는 건 얼마 없지만, 이거 하나만큼은 유용했다. 바로, 막 흘린 피는 찬물에 쉽게 지워진다는 것이다.
찬물로 적신 티슈를 들어 입술에 묻는 피를 지우려 했다. 하지만 그때 마왕이 키스하듯이 눈을 지그시 감고 입술을 내밀었다.
귀엽기도 하고 두근거리기도 한 마음에 손을 멈추며 물었다.
“뭐, 뭔데.”
그러자 마왕은 눈을 뜨며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닦아주지 않을 겐가?”
“네가 알아서 닦아!”
무심코 큰소리를 내고 말았다. 고개를 돌려 점원을 쳐다보니,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날 쳐다보고 있었다.
이유가 살짝 다른 것 같진 했지만, 어쨌든, 마왕에게 목소리를 낮춰서 대답했다.
“네가 직접 닦아. 네가.”
“왜 짐이 해야 하는 겐가. 자네 때문에 다쳤으니 자네가 닦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네만.”
“너 때문에 다친 거잖아!”
또 큰소리를 내고 말았다. 다시 점원을 쳐다보니, 그는 아까보다 더 험악한 표정을 지은 채 노려보고 있었다.
짧게 묵례해서 죄송하다는 행동을 남기고 마왕을 바라봤다. 그녀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입술을 내밀며 눈을 감고 있었다.
마왕은 눈을 뜨지 않은 채 말했다.
“어서 하게, 안 하면 자네 입술로 닦겠네만.”
“뭐?”
“뭔가. 그런 걸 원하는 겐가? 그럼 안 할 수가 없잖은가.”
“아씨, 알았어! 할게! 하면 되잖아!”
나는 자포자기한 마음으로 손을 들었다. 찬물에 젖어 축축한 티슈를 내밀어 그녀의 입가를 닦아줬다. 그녀의 입술 마디마다 낀 핏덩어리들을 섬세하게 지웠다.
“훗!”
그런데 그녀가 배시시 웃는 바람에 입술이 조금 움직였고, 그 바람에 부드러운 입술이 내 손가락에 닿고 말았다.
언젠가, 팔뚝 살을 손가락으로 모아서 입을 맞추면 그 감촉이 키스와 비슷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물론 한심하다고 생각해서 뽀뽀해보진 않았지만, 그래도 한 번 모아서 만져보긴 했다. 하지만 그 감촉은 지금 만지고 있는 마왕의 부드러운 입술과 확연히 달랐다.
그 기억에 아까 입 맞췄던 기억까지 합해지니 갑자기 부끄럽다는 감정이 올라왔다. 그래도 그녀가 눈을 감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랬다면 붉어진 내 얼굴을 봤을 게 뻔했으니까.
난 부끄럼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퉁명스러운 말투로 다그쳤다.
“엇, 움직이지마! 닦기 힘들잖아!”
“미안하네. 너무 간지러워서 그랬다네. 다음부턴 조심하지.”
“……아 진짜!”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다시 그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웃지 말라니까?”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닐세. 짐도 어쩔 수 없단 말일세.”
눈을 살포시 감은 그녀는 말하면서도 입은 이미 활짝 웃고 있었다.
“그게 떠올라서, 도저히 참을 수가 있어야지. 후훗!”
“뭐가 떠오르는 건데.”
“짐의 입술을 닦아주며, 얼굴 붉힐 자네 표정이 떠올라서 말일세.”
들켰다는 생각에 닦아주던 손을 멈췄다. 설마 실눈이라도 뜨고 있는 건가, 싶어서 감은 그녀의 눈꺼풀을 자세히 봤다. 그러더니 마왕은 눈꺼풀을 약하게 떨며 웃어댔다.
“그걸 굳이 봐야 아는 겐가?”
말을 마치며 그녀가 눈을 뜨며 푸른 눈동자로 날 바라봤다. 드넓은 바다 같은 눈동자에 두근거린 나는, 황급히 고개를 돌리며 손을 치웠다.
“나머진 네가 닦아!”
그렇게 말하며 이번엔 내 입가를 닦았다. 그런 와중 옆에서 마왕이 말하는 흐뭇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호오, 그건 짐의 입술을 닦던 것이 아닌가? 간접키스로군?”
너무 당황한 바람에 마왕을 닦아주던 티슈를 뒤집지도 않고 내 입술을 닦아버렸다. 그런데 그렇다고 티슈를 바꾸거나 뒤집어서 쓰면 그녀를 의식하는 것 같아, 무시하며 닦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하! 간접키스는 진작에 졸업했거든?”
“그런 것치곤 뺨이 너무 붉지 않나?”
“이건…… 이건 화나서 그래!”
“뭐가 그리 화가 나는 겐가?”
“속에서 열불 터지게 하는 너! 너 때문에 화가 난다, 왜!”
대충 다 닦았다 싶어서 티슈를 내려놓고, 아까 생수와 같이 샀던 연고를 찾았다. 그런데 빈 상자만 보이고, 그 속이 비어 있었다.
“야, 여기 연고 어디갔,”
“에잇!”
“에페페!”
말하는데 마왕이 갑자기 내 입으로 손을 뻗었다. 그녀 검지가 내 입술을 문지르면서, 아까 욱신거렸던 부분에 무언가를 두텁게 발랐다. 그 행동에 놀란 나는 무의식적으로 입술에 묻은 걸 뱉으려 했다.
그런 모습을 본 마왕은 서운한지 미간을 좁히며 눈꼬릴 내렸다.
“그 행동은 뭔가. 기껏 발라 줬더니만.”
“발라? 뭘 바른 건데?”
“당연히 연고이지 않겠나. 자, 보게.”
그녀는 연고가 발라져 번들거리는 검지와 개봉된 연고 튜브를 보여줬다. 손을 들어 입술을 살짝 문지르니 연고 튜브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백탁색의 말랑한 덩어리가 닦였다.
“……진짜네?”
“그럼 짐이 거짓말이라도 하는 줄 알았나? 기분이 좀 상했네만. 흠!”
마왕은 삐진 듯이 팔짱을 끼며 몸을 돌렸다. 나는 그게 그런 척하는 거고, 뭔가 계획이 있다는 걸 알아챘다. 그 계획이 두려웠지만,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 미안해.”
“뭐가 미안한가?”
“너 의심하고, 그래서.”
“많이 미안한가?”
“응.”
“엄청 많이 미안한가?”
그렇게까진 아닌데.
“응.”
“그럼……”
내 예상대로, 그녀는 입꼬릴 올리면서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내 쪽으로 틀더니, 쥐고 있던 연고 튜브를 내밀었다.
“그럼 자네가 발라주게.”
“뭐?”
“제대로 들었지 않았나. 자네가 발라주게나.”
“아니, 그건.”
“자네가 미안하다고 했잖나. 그렇다면 어서 발라주게.”
그녀는 반 억지로 내 손에 연고를 들려주었다. 그리고 빨리해달라는 듯이 웃으며 얼굴을 내밀었다.
아 진짜. 어차피 피도 닦아줬는데, 연고 바르는 것쯤은 괜찮겠지? 그렇겠지?
그렇게 머릿속에 되새기며, 살이 제일 부드러운 약지에 연고를 발랐다. 이제 연고를 발라주기 위해 오른손을 뻗는데, 갑자기 마왕이 고개를 뒤로 뺐다.
“왜 그래?”
“……그 손 말고, 왼손으로 발라주게.”
“뭐?”
“왼손 약지로 바르라는 소리네. 어서 해주게.”
의심쩍었지만, 일단은 시킨 대로 오른손을 왼손 약지에 비벼 연고를 옮겼다.
“됐냐?”
“흐흠!”
그걸 본 마왕이 만족했는지 입꼬리를 슬며시 올리며 다시 고개를 들이밀었다.
진짜로, 얘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나는 왼손을 내밀어 약지로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에 연고를 발라줬다. 그런데 이 적당히 말랑하면서도 탄력 있는 감촉이, 아까와는 전혀 달랐다. 입술 마디 하나하나의 굴곡이 전부 느껴지면서, 연고가 윤활유 역할을 해줘서 감각이 생생하게 다가왔다.
게다가 보면 볼수록 그녀와 입 맞추고 싶다는 생각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내 시야는 점점 인형 같은 외모로 가득 차게 됐다.
길게 끌면 안 된다는 생각에 빠르게 연고를 발라줬다. 남은 연고 덩어리를 닦아주며 말했다.
“이제 다 했”
콱!
“아아아악! 야 이 미친년아!”
나도 모르게 순간 욕이 나왔다. 그것도 그럴게, 마왕이 내 약지를 물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손가락을 빼려고 손을 당겨봤다.
“야! 놔! 놓으라고!”
“……!”
“아아악!”
그런데 그럴수록 무는 힘이 가해졌다. 참을 수 없어서 이마를 밀어 봐도, 이번에도 역시 무는 힘을 더할 뿐이었다.
결국 난 기다리는 것밖에 할 수 없었고, 마왕이 입을 연 건 약 1분이 지난 뒤였다.
“자, 고생했네!”
“고생은 무슨!”
개소릴 지껄이는 마왕 입에서 황급히 손가락을 빼냈다. 다행히 잘리거나 피가 나진 않았지만, 그녀 잇자국이 심하게 남아 있었다. 깊게 파인 잇자국이 마치 절대 뺄 수 없는 반지처럼 보였다.
마왕은 내 왼손 약지 두번째 마디에 난 선명한 잇자국을 보며 중얼거렸다.
“좀 더 깊게 물 걸 그랬군?”
“개소리 좀 하지마!”
처음부터 대가를 바라고 시작한 사랑은 아니었다. 서로 입장 차이라는 게 존재했으니까.그렇다고 그런 장면을 보고 싶진 않았다.
서로 껴안으며, 그녀는 눈을 마주치려 하고 그런 그녀를 피하는 그의 모습. 하지만 결국 품 안에 뛰어들며 키스하는 모습까지.
대가를 바란 것도 아니고, 이루어지길 바란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 끓어오르는 듯한 감정은 도저히 참을 수 없다.
이럴 땐 뭘 먼저 우선시해야 하는지 고르는 게 좋았다. 무엇을 먼저 하면 좋을까. 내 사랑을 전달하는 게 먼저일까? 아니면…… 그 사람을 제거하는 게 먼저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