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9화 〉자네 방에서 이어서 하고 싶네만 (39/72)


  • 〈 39화 〉자네 방에서 이어서 하고 싶네만

    “그러니, 짐을 소희라고 불러보게!”

    “갑자기?”

    “왜 그런가. 서서 하기엔  그런가?”


    그렇게 말한 그녀는 내 옆을 지나쳐, 애니 캐릭터 얼굴이 수없이 그려진 침대에 앉았다.


    “여기 앉게!”

    “거기?”


    “음!”

    팡팡!


    마왕은 보란 듯이 자기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자! 여기 앉아서 짐을 소! 희! 라고 불러보게! 참고로 귀에 속삭여서 불러주면 더 좋겠군!”


    “여기서?”

    “뭐가 문젠가. 어차피 짐과 단둘이 있지 않은가.”


    그러면서 과장된 몸짓으로 미소녀 수십 명이 있는 방안을 둘러봤다. 유일하게 살아있는 미녀는 흐뭇하게 웃으며 다시 침대를 두드렸다.


    “문제없네. 어서 앉게.”

    “아니, 그래도……”


    “거참! 사내놈이 우유부단하기는!”

    갑자기 마왕이 내 손을 잡아당겼다. 예상외의 힘이 가해지자 난 앞으로 넘어졌고, 결국 그녀 위를 덮치듯이 쓰러졌다.

    “!”

    “!”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이 시야에 가득 찼다. 누구도 손대지 않은 눈밭 같은 하얀 피부에, 당돌하게 빛나는 푸른 눈, 시원하게 솟아오른 높은 코, 매혹적으로 웃고 있는 연분홍 입술까지. 마왕은 이렇게 될 줄 몰랐는지 눈을 크게 떴지만, 이내 고혹적인 눈웃음으로 변해갔다.


    “호오, 이런 걸 바란 건 아니었네만.”

    “미, 미안!”


    나는 황급히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 짧은 사이 마왕이  목에 팔을 둘렀고, 난 움직이지 못했다.


    “어엇, 야!”

    “뭐가 미안한가. 짐이 자초한 일인데.”


    당황한 나와 달리, 그녀는 오히려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다.

    “이제 소희라고 불러보게.”


    “야, 야!”

    “자네는 일부러 그러는 것인가?”

    그녀는 불만스러운지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장난스러운 웃음을 짓더니,  껴안은 팔에 힘을 줬다.

    “짐이 ‘야’라고 부르지 말라고 했잖, 낫!”

    “어어엇!”


    방금 전에까지 나는 최대한 접촉하지 않기 위해, 허리에 힘을 줘서 어정쩡하게 굽힌 상태였다. 그런 상태에서 그녀가 힘을 주니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내 눈앞에 보이는 건 침대에 그려진 캐릭터 눈알밖에 없었다. 하지만 난 보이는 것보다 피부에 닿은 감촉이 더 신경 쓰였다. 나는 지금 마왕 위에 겹치듯 쓰러져 그녀와 뺨을 비비고 있기 때문이었다.


    마왕이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살랑이는 숨결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지금이 기회잖나.”


    “……”

    “어서 말해보게.  날밤 그랬던 것처럼.”

    “……!”


    “지금 자네 숨이 떨리는 게 느껴진다네. 긴장하지 말게.”

    “!”

    긴장하고 있던 걸 들지자, 무의식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엇차, 움직이지 말게. 짐이 놓아줄 것 같나.”


    이번에도 마왕에게 제압당해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도 몸을 조금 움직이니, 붉어진 귀가 은발 사이로 보였다.

    나만 부끄러워하는 게 아니라는 걸 보니 안도감이 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걸 의식하는 바람에 얼굴이 뜨거워졌다.


    “자.”


    마왕이 내 귀에 속삭였다.

    “짐을 불러보게.”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한 가냘픈 목소리였다. 그런데도 그 얇은 음성이 뇌리에 박히는 것처럼 강렬했다.

    “……소”

    나도 모르게 입을 열어 그녀를 부르려 했다. 떨리는 숨결이 닿았는지, 마왕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으으음…….!”

    이때는 나는 극도로 긴장해서 심장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어찌나 큰지, 그녀가 말하는 목소리도 잘 들리지 않았다.

    “마, 마저 해보게. 소, 희, 라고.”


    “소, 소……”

    “……크읍.”


    “희”


    똑똑똑!

    갑자기 들린 노크소리에 나는 용수철처럼 허리를 폈다. 마왕도 놀랐는지 팔을 풀었고,  덕에  겨우 품 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아까와 다르게 두근거리는 심장을 안고  쪽을 바라봤다. 그녀도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반응했다.

    “네, 네?”

    “언니.”


    노크한 사람은 바로 세희였다. 붉어진 얼굴을 한 마왕은 타이밍 좋게(?) 찾아온 동생에게 떨린 목소리로 물었다.

    “왜, 왜? 무슨 일이야?”

    “어머니께서 식사하시래요.”

    “아 그래?”

    “네, 손님도 데려오시래요.”


    “알았, 알았어. 조금만 기다려.”


    마왕은 아직 붉은 기가 남아 있는 얼굴을 한 채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러더니  너머에 있을 세희에게 들리지 않을 목소리로 작게 말했다.

    “미안하네, 아무래도 짐이 너무 흥분했던 모양일세. 자네가 여기 온  너무 즐거웠던 탓이겠지.”


    그녀는 말하는 동안 나와 눈을 맞추려 하지 않았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고, 우리 둘은 서로 마주 보지 않으며 방문으로 향했다.


    “아 근데.”

    마왕이 갑자기 멈추면서 날 돌아봤다. 그러더니 입꼬리를 올리며 내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서로 숨결이 느껴지는 거리에서 그녀는 작게 속삭였다.

    “자네 방에서 이어서 하고 싶네만, 자네 생각은 어떤가?”

    “뭐, 뭐?”

    “농담일세! 뭘 그리 놀라는가!”

    장난치는 것처럼 그녀가 가볍게 내 가슴팍을 쳤다. 그리고 내가  걸 틈도 없이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문 앞에 있는 세희를 보고 깜짝 놀라 1초간 몸을 굳혔지만, 이내 은발을 휘날리며 계단으로 향했다.


    “……”


    세희는 그렇게 가버린 언니를 말없이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려 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녀는 냉철한 표정으로 날 불렀다.


    “오빠.”

    “어, 어?”


    이때 나는 나쁜 짓 하다 들킨 것처럼 그녀에게 겁먹은 상태였다. 안 그래도 쫄아 있는 내게 세희는 침착하게 폰을 꺼냈다. ♥우리 오빠♥가  있는 화면을 보여주며 말했다.

    “언니랑 너무 친하게 지내지 마요.”


    그러더니 마왕처럼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계단으로 걸어갔다.

    역시 동생인 건가 싶기도 했고, 질투하는 건가 싶기도 했다. 나는 조금전까지 있었던 일에 얼굴을 붉히면서도 천천히 1층으로 향했다.

    그렇게 1층에 도착해 세희를 따라 주방으로 들어갔다. 주방 한가운데엔 6명은 충분히 앉을 만한 직사각형 테이블이 있었고,  위에는 갈비찜을 메인으로 여러 반찬이 놓여 있었으며, 그 식탁엔 마왕과 그녀의 어머니께서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어, 지헌아! 여기 앉아!”


    마왕이 평범하게 말하며 빈 옆자리를 가리켰다. 그런데 세희가 전혀 거리낌없이  자리에 앉아 버렸다.

    그녀의 돌발적인 행동에 마왕과 어머니마저 멍하니 쳐다봤다. 먼저 말을 한  어머니였다.

    “세, 세희야. 그러면 안 되잖니.”


    “……”

    “세희야, 비켜주면 안 될까?”

    “……”

    둘의 말에도 세희는 말없이 일어나지 않았다. 나도 어이가 없었지만, 그녀가 내게 했던 말을 생각하며 둘을 말렸다.

    “아, 아뇨! 괜찮아요! 제가 저기 앉을게요.”

    나는 말하며 어머니 오른쪽에 홀로 차려져 있는 자리로 향했다. 내가 앉아버리니 두 여자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납득했다.


    “미안해요, 지헌씨.”


    “괜찮다니까요.”


    “그래도……”


    “자리가 어떻든 밥만 맛있으면 되죠.”

    “아 밥!”


    어머니는 말씀하시면서  앞에 있던 밥과 세희 앞에 있던 밥을 바꿨다. 그런데 그 양이 장난이 아니었다. 세희한테 준 건 평범했지만, 내게 내민 건 양이 엄청나게 많았다. 밥그릇에 밥이 담긴 게 아니라 거의 쌓여 있었다.


    성인 남성 두 사람은 충분히 먹이고도 남을 만한 밥을 보고, 고개를 올려 어머니를 쳐다봤다. 그녀는 불안한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

    “너무 많나요? 딸아이들이 남자앨 데려오는 건 처음이라서 좀 많이 담아봤는데요……”

    나는 차마 많다고 말할 수 없었다.


    “아뇨, 충분합니다……!”

    “그래요?”

    그러자 어머니께서 빛이  것 같은 미소를 지으며 신난 말투로 말했다.


    “혹시 밥 모자라면 더 말해요. 지금  새로 하고 있으니까요! 세희가 지헌씨 밥 많이 먹는다고 해서 미리 지어놨어요!”

    그녀가 가리킨 쪽엔, 신나게 돌아가고 있는 전기밥솥이 보였다.

    싱글벙글한 어머니와 다르게, 난 마왕을 쳐다봤다. 그녀는 날 비웃으며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랬냐!


    당장이라도 소리치고 싶었지만, 세희와 어머니께서 보는 앞에서 그럴 수 없었다. 내가 지금 할  있는 건 사람 좋게 웃어 보이는 것뿐이었다.

    “그래요? 안 그러셔도 되는데!”

    진심으로.


    “오호호! 그렇게 좋아 보이니 저도 기분이 좋네요!”

    “네! 너무 좋아요!”


    어머니께선 내 속도 모르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 뭔가 생각난 것처럼 박수를  번 쳤다.


    짝!


    “아! 그러고 보니 그이를 깜빡했네요. 세희야?”


    “네.”


    불린 세희는 별말 없이 일어나 주방을 나갔다.  사이 어머니께선 웃는 얼굴로 이야기하셨다.

    “지헌씨는 딸 아빠를 보신 적이 없으시죠?”

    “아 네. 그, 치료비랑 입원비도 내주셨는데 전화 한  안 드려서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소희 때문에 그랬던 거잖아요. 당연히 저희가 내야죠.”

    “그래도 진작에 찾아가 뵙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죄송할 필요 없다니까요? 게다가, 지헌씨께서 만나려고 해도 어차피 못 만났을 거예요.”


    “네?”


    “실은, 그이가 멀리 떠났거든요……”

    어머니께선 말끝을 흐리며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그걸 본 순간 뭔가 좋지 않다는 예감이 들었다. 무슨 일인지 궁금했지만, 이미 알고 있는 상황으로 보였다.

    “어머니.”


    세희가 액자를 품에 안고 주방으로 들어왔다. 검은 테두리를 가진 액자엔, 50대로 보이는 한국인 중년 남성 사진이 보였다.


    설마, 돌아가셨……!

    머릿속에 불길한 생각으로 가득 찰 때, 인자한 표정을 남성의 사진이 움직였다.


    -네가 지헌이니?


    영상통화이었냐! 그러고 보니 멀리 출장 갔다고 얘기했지!

    영정사진인 줄만 알았던 액자는, 사실 태블릿 PC였다. 태블릿 속 남성은 정장 차림으로, 머리가 거의 군인처럼 짧았다. 어쨌든 마왕 아버지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지헌이라고 합니다.”

    -어어, 앉아. 앉아 있어도 돼.

    그 말을 듣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사이 세희는 태블릿을 어머니에게 갖다 드렸다. 어머니께선 그걸 두 손으로 들며, 영상 속 아버지와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남편!”


    -응! 자기! 외로웠어?

    “뭘 외로워요. 떨어져 있는  하루 이틀도 아닌데.”


    -에이……

    “그래도,”

    그녀는 태블릿 하단, 마이크가 있는 부분에 입 맞출 걸처럼 가까이 갖다 대며 속삭였다.

    “보고 싶었어요, 자기. 그것도 많이요.”


    마왕이 두근거리게 하는 방법을 누구한테 배웠는지 알아냈다. 자기 부모님이 저러는 딸이 안 배울 리 없었다.


    “으엑.”

    그런 반면 마왕은  볼 걸 봤다는 듯이 얼굴을 찡그렸다. 항상 무표정인 세희도 보고 싶지 않은지 어머니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린 상태였다.

    둘이 그러든 말든 한동안 꽁냥 거리던 어머니는 다시 태블릿 화면을 내게 보여줬다. 거기엔 두근대서 얼굴이 붉어진 마왕의 아버지가 있었다.


    -갑자기 이래서 미안하게 됐어. 손님을 앞에 두고.

    “아뇨. 사이 좋아 보여서 보기 좋았어요.”

    -그래? 어쨌든 반가워. 난 소희, 세희 아버지 백중호야. 그냥 아버님이라 불러.

    “네, 아버님.”

    -싫으면 안 그래도 되고, 어? 진짜 부르네?


    그는 즐거운 듯 웃음을 띠었다. 하지만 나는 농담이었다는 말에 얼굴을 굳히며 사과했다.

    “죄송해요. 아버님이라고 부르면 안 되나요?”

    -아냐 아냐! 농담으로 한 말인데 들어줄지 몰랐지! 그런데 내가 아들이 없어서 그런데, 혹시 아빠라고……


    “자기?”

    아버지께서 말하던 도중 어머니께서 태블릿 화면을 자기 쪽으로 돌렸다.


    -응?

    “미안한데 지금은 식사 먼저 하면  될까요? 애들이나 지헌씨도 기다리고 있잖아요.”

    -아아, 그래그래! 그럼 밥 먹으면서 이야기하자!

    그렇게 마왕 집에서 저녁 식사가 시작됐다. 어머니께서 차려 주신 음식은  그대로 일품이었고, 화면 너머 아버지도 무언가를 먹으며 같이 밥 먹는 느낌을 내줬다. 서로 농담도 나누며 나는 그녀 가족과 친해졌다.


    즐거웠던 식사가 끝나고, 나는 산처럼 쌓인 밥을  공기나 비워서 배가 완전히 부른 상태였다. 어머니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웃으며 딸들에게 말했다.


    “소희야, 세희야.”


    “네?”


    “네, 어머니.”


    “소희야, 설거지  해줄래? 세희는 언니 도와주다가 시간 남으면 사과랑 파인애플 좀 깎아 오고.”


    둘은 알았다는 말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도와주기 위해 일어났지만, 어머니께서 날 불렀다.

    “지헌씨? 지헌씨는 저  따라와 줄래요?”

    “네?”


    “걱정 마세요. 거실까지만 갈 거니까요.”


    어머니는 태블릿을 들며 일어나, 주방을 나갔다.  그런 모습을 보고 올 게 왔다는 예감이 들었다. 심장이 떨려왔지만, 어차피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하고 그녀를 따라갔다.


    “소파에 잠깐 앉아 주실래요?”


    그렇게 말한 그녀는 태블릿을 소파 앞 낮은 탁자에 세워 뒀다. 내가 앉을 때까지 서서 지켜보다가, 앉고  뒤엔 벽에 걸린 TV를 향해 걸어갔다.

    긴장되는 분위기 속에서, 화면 속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그의 입가엔 아까처럼 인자한 웃음이 걸려 있었지만, 날 바라보고 있는 눈은 진지했다.

    -지헌아. 우리가 진지하게 물어볼 게 있어. 그러니 너도 진지하게 이야기해 주길 바래.


    “어, 네.”

    -지헌아,  소희를 어떻게 생각하니?

    그 질문을 들은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도움을 구하기 위해 어머니 쪽을 봤지만, 그녀는 TV 위에 걸린 일본도를 집고 있었다.

    잠깐이나마 도움을  거라 생각했던 어머니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지헌씨. 피하셔도 좋고, 반격하셔도 좋아요. 그런데, 다치지만은 마세요. 알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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