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8화 〉♥우리 오빠♥ (38/72)


  • 〈 38화 〉♥우리 오빠♥

    “어서 와요, 지헌씨. 기다리고 있었어요.”

    날 환영해주는 마왕의 어머니를 보다가, 다시 그녀를 쳐다봤다. 그러다 넋이 나간 얼굴로 마왕에게 말했다.


    “따님, 어머님을 주십시오!”

    “무슨 소린가! 자네!”


    마왕은 나한테만 들릴 만큼 작은 소리로 외치면서 내 뒤통수를 때렸다. 그런 그녀를 보고 어머니께서 우아하게 호통쳤다.


    “소희야!”

    세상에. 화내는 것조차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미간을 찌푸리는 것마저도 두근거리게 만드는 어머니께선 마왕을 나무라셨다.


    “손님에게 이게 무슨 짓이니!”

    “미, 미안해요, 어머니……”

    “사과할 사람은 내가 아니잖니?”

    “큭!”

    거친 신음소릴 낸 마왕은,  돌아보고 최대한 웃어 보이려는 표정으로 사과했다.


    “미안해, 지헌아……! 다, 신 안 할게……!”

    미소로 드러난 그녀의 치아가 금방이라도  물어뜯을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그건 그거고. 이렇게 누군가에게 꼼짝 못하는 마왕은 처음이었기에 나는 그녀 머리에 손을 얹었다.


    “그래, 앞으론 하지마. 알았지?”


    “……!”

    마왕은 고개 숙여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래도 은발 사이로 드러난 귓바퀴가 붉게 달아올라서, 그녀가 불같이 화내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그걸  나는, 나중에 검도장에 있을 재앙을 최소한으로 막기 위해 손을 내렸다. 그러자 마왕은 바로 현관문으로 뛰어갔다.

    “얘, 얘! 소희야!”

    어머니께서 부르는데도 귀가 붉어진 마왕은 멈추지 않고 집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어머니는 현관으로 들어간 마왕을 보다, 다시 날 돌아보며 사과했다.

    “미안해요, 지헌씨. 얘가 아직 철이 없어서……”

    “아, 아니요! 제가 더 미안하죠! 아까는 제가 헛소리해서 걔가 그럴만 했어요!”

    “그래도……”


    “괜찮다니까요? 게다가 머리 한 대 맞은 정도로는 그렇게 기분 나쁘지도 않았어요. 아프지도 않았고요.”


    사실 눈물 맺힐 만큼 아팠지만.

    내가 아무렇지 않다며 허둥대자, 어머니께서는 그제서야 안심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 뭔가 떠올린 것처럼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벌렸다.


    “아! 죄송해요! 손님을 이렇게 세워두고! 이리 들어오세요!”

    당황하는 것도 귀여우신 그 분은 들어오라며 현관을 향해 손짓했다. 나는 그걸 보고 발걸음을 옮겨 그녀 앞까지 걸어갔다. 가까울수록 심장이 두근거렸지만, 겨우 앞에 서서 고개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소희 친구 지헌이라고 합니다.”


    어머니께서도 공손히 고개 숙이며 인사했다.

    “네, 안녕하세요. 소희 어머니 되는 사람입니다.”

    거의 동시에 고개를  우리 중, 그녀가 들어가라며 다시 손짓했다. 난 그 안내를 받고 어머니 옆을 지나 실내로 들어갔다.


    들어가서 놀랐던 게 현관 넓이였다. 현관이  자취방 화장실보다 넓었다. 거기다 바닥에 깔린 새하얀 대리석과 신발장의 고급스러운 디자인이, 여기가 부잣집 현관이란 걸 알려줬다.


    현관만 봐도 기가 죽었지만, 아까 마왕이 신었을 슬리퍼와 세희의 신발을 보며 어느 정도 안심됐다.


    철컥!


    문 닫히는 소리에 금방 정신을 차렸다. 돌아보니 은발을 둥글게 말아 올린 어머니께서 문 닫은 게 보였다.

    나는 현관에 가만히 서 있는  실례라고 생각해서 바로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그냥 들어가면 없어 보일까봐 벗었던 신발을 슬리퍼 옆에 가지런히 정리했다.

    그걸 본 어머니께서는 상냥한 얼굴로 말했다.

    “어머,  그러셔도 되요.”


    “아니요, 제가 손님이니까요.”

    “손님이시면 편히 있어야죠. 잠시만요.”


    어머니는 현관에 있는 신발장 문을 열고, 그 안에서 국밥집에서 봤던 도구를 꺼냈다.

    “이러면 신발 정리하기 편하더라구요.”


    은발의 귀부인이 우아하게 웃으며 신발 집개로 현관을 정리하는 모습을 보고, 역시 마왕의 어머니라는  깨달았다.

    자신이 신었던 슬리퍼마저 정리한 그녀는 날 안쪽으로 안내했다. 밖에서 보던 것처럼 실내도 굉장했다. 3미터나 넘어 보이는 높은 천장엔 작은 전등 수십개가 박혀서 은은한 조명 역할을 해줬고, 바닥에 깔린 대리석은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더해줬다.

    “여기가 거실이에요. 오느라 많이 힘들었을 텐데, 소파에 가서 쉬어요.”


    나는 어머니께서 가리킨 아이보리색 소파로 향했다. 가면서 둘러본 거실은 본가 집만큼 넓었고, 벽  쪽엔 내가 쓰는 침대보다 큰 TV가 걸려 있었다. 그런데 텔레비젼보다 그 위에 걸린 일본도가 눈에 띄었다.

    화려한 손잡이와 붉게 칠한 검집을 보며 발을 멈추자, 집안을 안내하던 어머니께서 설명하셨다.

    “몇 년전에 그이가 일본에서 선물 받은 거랍니다. 그래도 걱정 마세요. 도검소지 허가증도 있고, 평소엔 가검으로 걸어 두니까요.”

    “그런가요?”


    그럼 특별한 일이 있으면 진검으로 걸어두는 건가?


    나는 멍하니 가서 아이보리색 가죽으로  소파에 앉았다. 촉감은 일반 소파와는 차원이 달랐다. 푹신하지만 싸구려 소파처럼 푹 꺼지지 않았고, 우리집에 있는 것처럼 단단하지도 않았다.


    처음 앉아본 고급 소파에 놀라는 사이, 다시 어머니께서 물으셨다.

    “잠깐 거기서 쉬고 계실래요?”

    “네! 그러겠습니다.”


    “후훗, 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어요. 그냥 옆집 아줌마라고 생각하셔도 되니까요.”


     딸을 낳은 여성이라고 전혀 보이지 않은 은발 미녀가 그리 말씀하셨다.

    “아, 네.”


    “그럼 편하게 있으세요. 아직 요리가 안 끝나서, 미안하지만 좀 걸릴 것 같아요.”


    “괜찮습니다.”

    “편하게 하라니까요. 그나저나 오늘은 평소랑 달리 손님이 있어서 바쁘네요?”


    잠깐! 평소엔 가검으로 걸어 놓는다면서! 왜 오늘은 평소랑 다른 건데!


    “평소랑은 너무 다르네요, 평소랑은♪”


    마왕 어머니께선 의미심장하게 흥얼거리며 냉장고가 보이는 곳으로 가버렸다.


    점점 여기 있기 무서워졌다. 어머니도 예쁘시고 날 반갑게 맞아주는 마왕도 있었지만, 평소와 다르다는 말을 듣고 몸이 떨려왔다.


    “아……!”


    작게 들리는 신음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뒤엔 통이 넓어 편해 보이는 면바지와 남색 티셔츠를 입은 세희가  있었다. 교복을 갈아입은 그녀는, 아주 잠깐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면 눈이 마주치고 다시 감정 없는 얼굴로 바뀌었다.


    세희는 몇 초간 날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오빠.”


    “응?”


    “번호 주세요.”


    그렇게 말하고는 주머니에서 폰을 꺼내 내게 내밀었다.

    폰을 집은 채 천천히 다가오는 그녀를 보며, 나는 ‘설마……?’라나 생각이 들었다. 위기에 빠진 여자애를 구해주니 자신에게 반한 것처럼, 어쩌면 세희가 날 좋아하게 된 걸 수도 있었다.


    “……오빠.”

    바로 앞까지 다가온 세희가 재촉하듯 내 이름을 불렀다.

    무표정한 미녀가 날 좋아해주는 건 나쁜 기분이 아니었다. 문제는 그녀가 중학생이라는 점이었다.

    “번호요.”


    “알았어, 잠깐만.”

    근데 딱히 거절할 이유가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번호 따이는 건 처음이라 어떻게 거절하는지 모르는 것도 있었다.

    물론 마왕에게 번호를 따인 적 있지만, 그건 그녀가 일방적으로 내 번호를 딴 거니 무효라고 쳤다.

     번호를 입력하자 세희는 전화를 걸었다. 바로  폰이 울렸고, 내가 바지에서 꺼내는  확인한 그녀는 바로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내가 그녀 이름을 저장하려 할 때 내게 말했다.

    “오빠.”

    “응? 왜?”

    “세희라고 저장해 주세요.”

    “응, 그렇게 할 거였는데.”


    “이름 옆에 하트도 넣어주시고요.”


    “뭐?”


    세희는 대답 대신 자기 폰을 보여줬다. 그  화면엔 ♥우리 오빠♥라고 적혀 있었고,  아래 보이는 번호는 바로  전화번호였다.

    “아니, 너……!”


    내가 놀라는 사이 그녀는 폰을 주머니에 넣고 자리를 떠나 버렸다. 뭔가 말하려 했지만 세희는 주방 반대편에 있는 계단을 올라가 버렸다.

    역시 그녀도 마왕 동생답게 마이페이스가 심했다.


    고개를 돌려 다시 앞을 보는데, 다시 폰이 울렸다. 세희가 전화한 건 아니었고 마왕이 문자한 거였다.


    폰을 켜서 확인하니 단 다섯 글자밖에 안 보였다.

    뒤돌아보게


    “?”


    일단 시키는 대로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세희가 사라졌던 계단  기둥으로 마왕이 머리를 반만 내민  보고 있는  발견했다.


    “너 거기서 뭐하냐?”


    “……”

    내 말에도 그녀는 말없이 내 쪽을 향해 이리 오라며 손짓했다. 수상해 보이면서도 나는 가만히 소파에서 일어났다.

    “왜, 뭔데.”


    “……”


    여전히 마왕은 말없이 손짓했다. 내가 천천히 그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그녀는 기둥 너머로 몸을 숨겼다.


    마치 홀리는 것 같았지만 발을 멈추지 않았다. 계단에 도착해도 마왕은 보이지 않았다. 위를 보기 위해 고개를 드니, 계단 너머로 멀어지는 발소리가 들렸다.

    “얘는 진짜 왜 이래.”


    중얼거리면서 계단을 올라가 2층에 도착했다. 수많은 조명이 있던 1층과 달리, 2층 복도는 생각보다 어두웠다.


    끼익……

    여기서 몇 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서 문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열린 문틈 사이로 복도보다 밝은 빛이 흘러나왔다. 나는 마왕이 저기로 유인하는 걸 깨닫고, 그 방을 향해 다가갔다.
    귀찮은 유혹에 이끌려 도착한 방은 놀라움으로 가득 찼다. 왜냐하면  방은 온갖 오타쿠 물건으로 도배되었기 때문이었다.

    바닥을 제외한 모든 부분이 애니메이션 캐릭터로 가득이었다. 아슬아슬한 옷을 입은 작은 여자애 그림이 창문 커튼에 그려졌고, 문가엔 커다란 가슴을 가진 금발 미녀가 그려진 큰 쿠션이 서 있었다.


    방에 천천히 들어가며 안을 자세히 구경했다. 나도 이런 쪽에 관심이 없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여기서 알고 있는 캐릭터도 있었다. 하지만 이건 거의 인터넷에서나 볼 법한 오타쿠 방이라 신기할 수밖에 없었다.

    “어딜 보는 겐가.”

    갑자기 뒤에서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바로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 자리엔 아무도 없었다. 혹시나 해서 복도까지 가봐도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그때 또다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여길세, 여기.”


    이번엔 아까보다 더 가까운 곳에서 들렸다. 방 안에서 들린 것 같아 다시 들어가봤다. 하지만 역시 마왕을 발견할  없었다.


    “여기라고 하지 않았나.”

    또다시 뒤에서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도 고개를 돌렸지만 아름다운 은발은 보이지 않았고, 문가에 서있는 커다란 다키마쿠라밖에 안 보였다.

    “……설마?”

    “그 설마일세!”

    “이런 미친!”

    그 다키마쿠라가 꿈틀대기 시작하더니, 아랫부분에 올라가면서 청바지차림의 다리가 나타났다. 그렇게 두다리가 자라난 다키마쿠라가 내게 달려왔다.


    두다다다!

    “으어어!”


    뒷걸음쳐 도망치려 해도 너무 놀라서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내게 달려오던 다키마쿠라가 날린 태클에 넘어졌다.

    쿵!


    아랫층까지 울릴 만큼 큰소리를 내며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으하하하! 당했군, 용사여!”

    다리 달린 다키마쿠라가  내려보며 마왕처럼 웃었다. 그러다 아까처럼 몸을 꿈틀대며 커버를 마저 벗었다.


    커버를 뱀 허물처럼 벗은 그녀는 은발을 휘날리며, 장난스러운 웃음으로 물었다.

    “자네는 어찌 이렇게 눈치가 없는가?”


    “눈치가 없는 게 아니라 네가 이상한 거겠지!”

    “그렇게 쉽게 뒤를 잡히면 금방 죽고 말 걸세.”

    “이세계도 아니고 현대 사회에 무슨……”


    헛소리를 넘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여기, 네 방이냐?”


    “음, 그렇네만.”


    마왕은 누가 듣지 못하게 방문을 닫았다.

    “왜 그런가. 자네가 보기엔 이상한가?”

    질문을 한 그녀는 불안한 듯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내 눈치를 살폈다.

    나는 애니 굿즈와 피큐어로 도배된 방을 둘러봤다. 사실 나는 전화 벨소리를 애니 노래로 한 것부터 그녀가 오타쿠인 걸 짐작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뭐랄까, 상당한 수준인 줄은 몰랐다.

    그래도 뭐, 취향은 취향이지. 이런 방을 쉽게 알려준 것도 꽤나 용기 냈을 건데.

    “아니, 이렇게 많은 걸 보는  처음이라서 그래.”


    “그런가!”


     말에 마왕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역시 짐과 자네는 천생연분이구만!”

    천생연분 뜻을 생각하고 얼굴이 뜨거워진 나는, 그녀도 뜻을 알라며 눈치줬다.


    “아니, 이럴 때 쓰는 말은 아닌  같은데.”

    “아닐세! 이럴 때 쓰는 말이 확실하다네!”

    너무 당당하게 대답하는 바람에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제대로 알려주기 위해 마왕을 불렀다.

    “야, 그게 아니라……”

    “어허! 잠깐!”


    말하던 도중 마왕이 가로막았다.

    “집에선 ‘야’라 천박하게 부르지 말게.”

    “왜. 기분 나빴어?”

    “짐은 괜찮지만, 어머니나 세희가 듣는다면 상처받을 수도 있지 않나.”

    “그, 그런가?”


     대답을 들은 마왕은 푸른 눈을 빛내며 입꼬리를 올려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그러니, 짐을 소희라고 불러보게!”

    “갑자기?”

    “왜 그런가. 저번에도 부르지 않았나. 아니면 서서 말하기 좀 그런 겐가?”


    그렇게 말한 그녀는 내 옆을 지나쳐, 애니 캐릭터 얼굴이 수없이 그려진 침대에 앉았다.

    “여기 앉게!”


    “거기?”

    “음!”


    팡팡!

    마왕은 보란듯이 자기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자! 여기 앉아서 짐을 소! 희! 라고 불러보게! 참고로 귀에 속삭여서 불러주면 더욱 좋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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