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화 〉따님, 어머님을 주십시오!
해가 져서 어두워진 하늘 아래, 난 부자들만 산다는 주택가를 걸었다. 마왕이 골라준 옷을 입고, 집들이 선물로 꽃다발을 들고 있었다.
내가 여길 온 이유는 뻔했다. 바로 마왕이 사는 집에 초대됐기 때문이었다.
소중한 딸이 부모님을 속이고 같은 방에서 며칠이나 잔 놈을 어떻게 대우할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떨려왔다.
그런데 내 고민거리는 그거 하나가 아니었다. 바로 옷가게에서 본 후드티도 내가 스트레스를 받는 원인 중 하나였다.
물론 그 후드티가 누구인지 모르는 건 아니었다. 그 날 유리가 같은 옷을 입고 있었으니, 그녀가 바로 후드티의 정체겠지.
진짜 문제는 유리가 내게 어떤 대화도 하지 않으려는 점이었다. 전화나 연락은 받지도 않고, 강의실에서 마주쳐도 무시하기 일쑤였다. 게다가 들켰는데도 그녀는 계속해서 날 미행했다. 학생 식당에 갈 때나, 피시방에 갈 때도 항상 그녀를 볼 수 있었다.
자꾸 눈에 띄는 그녀 때문에 한숨 쉬면서 주택가를 걸어갔다. 그런데 여기서 들리지 않을 것 같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돈 좀 있지?”
“형, 얘는 돈보단 다른 걸 봐야 된다니까?”
“돈도 받고 딴 것도 하면 되죠.”
나는 고민거리가 하나 늘었다는 걸 직감하며 목소리가 들린 곳을 쳐다봤다. 주황색 가로등 아래에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뭉쳐 있는 게 보였다.
남학생들은 무언가나 혹은 누군가를 감싸는 것처럼 모여서 그 안쪽을 보고 있었다. 그 옆에서 허벅지가 다 보일 듯한 교복 치마를 입은 여자애들이 말했다.
“야 이 변태 새끼들아. 그냥 돈만 받고 보내.”
“변태 새끼들, 진짜.”
여자애들은 진심이 아닌지, 입꼬리를 올리며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내가 그들을 바라보자, 심연 또한 이쪽을 바라보는 것처럼 학생들이 눈치챘다. 그들 중 키가 가장 큰 남학생이 날 향해 소리쳤다.
“아저씨! 신경 쓰지 말고 그냥 가요! 그냥 노는 거니까!”
그 소리를 듣자마자 가슴이 철렁했다.
아저씨라니! 아직 20살밖에 안 됐는데 아저씨라니!
너무 황당한 바람에 발걸음을 멈추고 그들을 바라봤다. 그런 날 본 학생들은 위협하는 것처럼 목소리를 낮게 깔며 협박했다.
“아저씨, 그만 하고 가라고.”
“처맞아서 질질 짜고 싶지 않으면 그냥 가요.”
“영화 너무 많이 본 거 아니에요?”
딱히 싸울 필요는 없었다. 싸우면 내가 이기기도 한데다, 잘못해서 옷이 더러워질 수도 있었다. 마왕 집에 가려고 만반의 준비를 했는데 불필요한 폭력은 화만 부를 뿐이었다. 어차피 가서 경찰에 신고하면 되는 일이었고.
나는 앞으로 고개를 돌리며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내가 영화를 별로 안 봐서. 그냥 갈게. 하던 거나 마저 해.”
그런 내 반응에, 오히려 학생들이 당황했다.
“어?”
“이거 어떡하냐?”
“아씨, 어떡하긴! 야!”
남학생 중 한 명이 소리치면서 큰 걸음으로 내게 다가왔다. 그는 순식간에 바로 앞까지 걸어와서 내 멱살을 잡았다.
“이 씨발아! 우리 무시하냐!”
아니 좀 피해가려고 해도!
나는 꽃다발을 쥐지 않은 왼손을 들어, 내 멱살을 잡은 학생의 손을 움켜쥐었다. 거기서 뼈가 부러지지 않을 정도로만 힘을 줬다.
꾸드득!
“어어, 아, 아아악!”
자연스레 손에 힘이 빠지며 내 멱살에서 떼어냈다. 남자애는 반격하지 않고, 손이 으스러지는 듯한 고통에 천천히 무릎 꿇었다.
그런 아파하는 모습을 보고도, 그의 친구란 놈들은 비겁하게 눈만 크게 뜨고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들이 둘러싸고 있던 여자애가 눈에 익었다.
절대 잊을 수 없는 인상을 가진 그녀를 불렀다.
“거기 세희야?”
언니처럼 긴 흑발을 한 여자애가, 양아치들과는 전혀 다르지 않은 표정을 한 채 바라봤다. 자기 이름이 불리자 그녀가 대답했다.
“아, 네!”
“너 왜 거기 있어?”
묻긴 했지만 답은 뻔했다. 양아치들이 삥 뜯고 있는 사람이 바로 세희였다.
나는 아직까지 잡고 있는 놈의 손을 풀어주며 그녀를 불렀다.
“거기 있지 말고 이리 와. 빨리!”
“……”
교복 차림인 세희는 양아치 틈을 비집고, 흑발을 휘날리며 내게 달려왔다 그 사이 포로 교환처럼 남자애가 자기 동료들을 향해 달려갔다.
“오빠!”
그녀는 내 블레이저 자락을 잡고 뒤로 몸을 숨겼다.
“오빠, 학원 끝내고 가는 길이었는데, 저 사람들이 자꾸……!”
처음 만났을 때 보여줬던 얼음 같은 인상과 다르게, 지금 들리는 그녀 목소리는 떨고 있었다. 겁먹은 목소리와 함께 내 등에 머리를 기대니 자동적으로 몸이 긴장으로 굳어졌다.
하지만 마왕의 갖은 짓으로 단련된 나는 평정을 가장하며, 학생들에게 소리쳤다.
“이제 그냥 가지?”
무시하자 달려들었던 아까와 달리, 학생들은 말 몇 마디에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그들은 날 어깨너머로 힐끔힐끔 쳐다보며 자기들끼리 중얼거렸다.
“야 시발 진짜 했어!”
“아파?”
“존나 아프지! 아까 부러지는 소리 못 들었냐?”
안 부러졌는데 엄살은……
나는 그들을 보다 고개를 돌려 뒤에 숨은 세희를 쳐다봤다. 그녀는 여전히 옷자락을 놓지 않은 채 벌벌 떨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안심하라며 상냥하게 말했다.
“세희야?”
“네……? 그 사람들, 다 갔어요……?”
“다 갔어. 안심해도 돼.”
내 말이 그녀가 얼굴을 들었다. 눈물 젖은 눈을 나와 마주치며, 안심했는지 입꼬리를 조금 올리며 웃었다.
“정말요……?”
“응.”
그제야 세희가 잡고 있던 옷자락을 풀어줬다. 다친 덴 없는지 살피려 몸을 돌리자, 그녀가 내 품 안으로 뛰어들었다.
“오빠!”
“어엇!”
갑작스러운 태클에 가슴이 쑤셨다. 동시에 이런 미소녀가 내 가슴팍에 안겨든 것에 심장이 떨려왔다.
“괘, 괜찮아……”
나는 천천히 손을 들어서 그녀 머리를 쓰다듬었다. 매끈하고 부드러운 머릿결을 어루만지자, 자기 언니처럼 달콤한 향기가 피어올랐다.
세희가 진정한 건 몇 분이 지났을 때였다. 그녀는 어느 정도 진정된 얼굴로, 다시 무표정을 유지하며 사과했다.
“죄송해요. 너무 놀라는 바람에 그만, 폐를 끼치고 말았네요.”
폐를 끼쳤다니, 그게 중학생이 할 말인가.
“아, 아니야.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아니에요. 정말 죄송합니다.”
재차 사과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걸 보니 안 받아 줄 때까지 계속해서 사과할 것 같았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고개 들어.”
“예.”
말이 끝나고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저기, 사죄라고 하긴 뭐하지만. 오빠가 저에게 원하시는 게 있다면, 그게 뭐든지 하나만은 들어 드릴게요.”
뭐든지라니. 또래 남자애였다면 가슴이 두근거릴 말이었다. 하지만 나는 중학생한테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그렇다고 그녀에게 원하는 게 없는 건 아니었다.
“알았어. 그럼 하나만 들어줄래?”
“……이렇게 빨리요?”
눈썹이 미세하게 떨리며 얼음 같던 표정이 깨졌다. 나는 그런 얼굴을 보면서 대답했다.
“응.”
“그, 처음이 밖에서 하는 거인 줄은 몰랐는데요……”
얘는 도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걸까. 이렇게 예쁜 애라도 사춘기라는 걸까.
“무슨 소리야. 네 집까지 안내해달라고 할 건데.”
“네?”
다시 표정이 흐트러지면서 날카롭던 눈매가 깨졌다. 놀란 듯이 내 얼굴을 쳐다본 그녀는 말을 더듬으며 되물었다.
“집, 이요?”
“들었을지 모르겠는데, 사실 오늘 너네 집 가야 하거든.”
나는 집들이 선물이란 뜻으로 꽃다발을 흔들었다.
“그런데 여기 오는 건 처음이라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거든.”
“그런가요?”
“응.”
“……”
세희는 말없이 내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어렴풋한 어둠 속에서도 빨갛게 달아오는 귓바퀴를 흑발 사이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잠시 고개를 돌리던 그녀는 갑자기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따라오세요.”
잠시 먼저 걸어가는 세희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따라갔다.
그렇게 잰걸음으로 다가갔고, 나는 그녀와 나란히 걸었다. 곁눈질로 본 얼굴은 처음 만났을 때처럼 차가운 무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렇게 말없이 가던 도중, 세희에게 사과할 일이 있다는 게 떠올랐다. 양아치들에게 둘러싸여 위험에 빠진 그녀를 모른 척하고 가려 했던 행동이었다.
“저기, 아까는 미안.”
“뭐가요?”
“아까, 네가 위험한 줄 모르고 그냥 가려고 했잖아.”
“그거요? 괜찮아요.”
“변명으로 들리겠지만. 사실 지나치면 바로 경찰에 신고하려고 했어. 진짜로.”
“네.”
“믿어 주는 거야?”
“당연하죠.”
세희가 말을 마치며 발걸음을 멈췄다. 나는 바로 멈추지 못하고 몇 걸음 더 가서 정지했다. 그녀는 앞서간 날 무표정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이렇게 구해주셨잖아요.”
아니, 무표정이 아니었다. 입가가 조금 올라가서, 희미하지만 제대로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건 아주 잠깐이었고, 그녀는 말이 끝낸 직후 다시 발을 움직였다.
다시 나란히 걷게 된 우리는 잠깐 말이 없었다. 나는 어차피 그녀에게 말을 걸 껀덕지가 없었고, 마왕네 집에 간다는 것만으로도 긴장으로 사고가 굳어버렸다.
마왕 어머니께 어떻게 인사를 건네야 할지 고민하는 순간, 다시 세희가 입을 열었다.
“오빠.”
“응?”
“오빠 있잖아요.”
그녀는 몇 초 동안 말이 없었다.
“……오빠는, 저희 언니랑 사귀는 사이에요?”
그 말을 듣고 순간 생각이 멈춰버렸다. 마왕이 못생긴 것도 아니고, 두근거리지 않은 적도 없었다. 이성적으로 좋아하는 건 맞지만, 지금까지 내가 알던 사랑하는 감정과는 다른 호감이었다.
나는 잠깐 고민하다, 결국 대답을 내놨다.
“아니.”
이렇게 대답하는 게 맞았다. 내가 그녀를 좋아하고 말고 떠나서, 연인관계는 아니었다.
“그래요? 다행이네요?”
“어, 뭐?”
“여기에요, 우리집.”
내가 물어도 그녀는 아무 말도 안 했던 것처럼 평정을 유지했다. 여전히 표정 없는 얼굴로, 발걸음을 멈춘 대문에 있는 초인종을 눌렀다.
딩동~!
초인종 소리가 들리고 얼마 안 돼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마왕이 내는 목소리였다. 나는 반가워 내가 왔단 걸 알리려 했으나, 먼저 목소리를 낸 건 세희였다.
“언니, 저 왔어요.”
그러자 마왕은 대놓고 실망한 말투로 대답했다.
-그래……? 좀 늦었네……?
지이잉, 철컥!
전기가 오르는 듯한 소리가 난 직후에 대문이 열렸다. 대문 사이로 보이는 집은, 그 말대로 영화에서 볼 것 같은 주택이었다. 저택이란 말이 어울릴 정도로 큰 2층 집에, 푸른 잔디가 넓은 마당에 깔려 있었다. 만약 내가 여기 산다면 집에 들어올 때마다 신날 정도로 좋아 보였다.
그런데 세희는 들어가지 않고 인터폰을 향해 한 번 더 말했다.
“언니, 그 오빠분도 오셨어요.”
-그래!?
뚝!
밝은 목소리와 함께 인터폰이 끊기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얼마 안 돼서 집에 있는 현관문이 열렸다.
“왔어?”
얼굴에 환한 미소를 한 마왕이 그 문으로 튀어나왔다. 하체 라인이 드러나는 청바지와 얇은 긴 팔 티셔츠를 걸친 그녀는 삼선슬리퍼를 신은 채 마당을 거의 뛰듯이 걸어왔다. 슬리퍼 끄는 소릴 내며 여동생을 지나치고 내 앞에 멈췄다.
꼬리가 빠른 속도로 흔들리는 환각이 보일 정도로 마왕은 반가운 미소를 지었다.
“아니 뭘 이런 걸 다 사 왔어!”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달라면서 손을 내밀었다. 그녀가 꽃다발을 받는 사이, 세희는 먼저 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마왕은 자기 동생이 떠나는 걸 보면서, 평소 말투로 작게 속삭였다.
“왜 이런 걸 사 왔는가. 먹을 걸 사 오지 않고.”
“그럼 내놔. 다른 거로 바꾸고 올 거니까.”
“왜, 왜 그러는가. 짐은 싫다고 안 했네만.”
“그게 싫다는 거 아니면 뭔데.”
“에이, 그러지 말게. 그러지 말고 어서 들어가세. 어머니께서 기다리시네.”
그 말을 듣고 마왕이 나왔던 현관문을 쳐다봤다. 그곳엔 마치 숨이 멎을 정도로 아름다운 백인 여성이 서 있었다.
마왕이 태양처럼 밝게 빛나는 해바라기, 세희는 고고하고 차가운 백합이라면, 저 사람은 꽃 중의 왕이라는 장미, 백장미였다. 아니, 그걸로도 충분하지 못할 만큼 아름다웠다.
마치 여신이라고 착각할 미모를 가진 그녀는 빛이 날 것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서 와요, 지헌씨. 기다리고 있었어요.”
날 환영해주는 마왕의 어머니를 보다가, 다시 마왕을 쳐다봤다. 그러다 넋이 나간 얼굴로 마왕에게 말했다.
“따님, 어머님을 주십시오!”
“무슨 소린가! 자네!”
당연히 마왕한테 한 대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