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6화 〉왜 그런가. 짐이 키스라도 하는 줄 알았나? (36/72)


  • 〈 36화 〉왜 그런가. 짐이 키스라도 하는 줄 알았나?

    “짐이, 전에 누이와 이 가게로 온 적 있다고 하지 않았나.”

    “어어, 그랬지. 근데 왜?”

    “그 누이가 여기로 들어왔단 말일세!”

    “그런데 그게 왜?”


    “에잇, 진짜! 일단 가만히 있게!”

    외동이라서 그런가, 자기 동생을 보고 겁먹은 듯한 반응을 보이는 마왕이 이해되지 않았다.

    나는 어쩔 줄 모르는 마왕을 약하게 밀었다. 그러니 그녀는 내 가슴팍에 손을 얹으며 날 말렸다.


    “왜 그러는 겐가, 자네”


    “아니, 밖에  보려고.”


    “그러다 들키면 어쩌려는 겐가!”

    “인사하면 되지.”


    “그냥 가만히 있게! 일이 꼬이잖나!”


    도대체 여동생이 마왕한테 어떤 존재길래 그러는 걸까.


    그녀는 가지고 들어온 남색 스웨터를 쥐고 커튼을 여러  힐끔거렸다. 무서워하는 건 아니었지만, 가만히 있지 못하며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대충 10분이 조금 넘게 지나고, 피팅룸 너머로 들리던 여중생들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옷 사러  것치고는 꽤 빨리 나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때 마왕이 아직도 떠는 목소리로 날 불렀다.


    “자, 자네.”


    “왜?”

    “정말 나갔나 한 번 확인해보게.”

    “내가?”


    “짐이 하다 발각되면 어떻게 하나! 어서 가보게!”

    마왕은 날 커튼 쪽으로 밀치며 작게 소리쳤다. 나는 불합리한  느끼면서도 커튼을 살짝 젖혀 가게 내부를 살폈다.


    매장 안은 아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손님  명이 옷을 골랐고, 점원들은 옆에 서서 그들을 도와줬다. 물론 아까 들어왔던 여중생들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안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간  같은데?”


    “정말로 간 겐가?”


    “응.  보여.”

    “그럼 정말로 갔는지 확인해보게.”


    “아니, 정말 안 보인다니까?”

    “일단 확인해 보게!”


    마왕이 소리치며 들고 있던 남색 니트를 내게 던졌다. 아프진 않았지만, 어느 정도 기분이 나빠졌다. 그래도 얼마나 겁먹었으면 저런 건가 싶어서 다시 밖을 쳐다봤다.


    “안녕하세요?”

    “어엇 시발!”

    아래에서 들려온 목소리 때문에 놀라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엉덩이가 아픈 와중에도 나는 시선을 올려 목소리의 주인을 쳐다봤다.

    그녀는 아까 봤던 마왕의 여동생이었다. 중학생이면서도 차가운 미녀 같은 인상을 가진 여자애는 날 내려보다가, 피팅룸 구석으로 시선을 돌렸다. 자기 언니를 발견한 그녀는 무표정으로 커튼을 열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언니.”


    마치 더운 여름날에 깨문 얼음 같은 목소리였다. 평탄하고 감정 없는 말투지만, 성우처럼 듣기 좋은 음성이었다.

    불린 마왕은 자기 동생을 향해 굳은 얼굴을 보여줬다.


    “아, 응. 안녕?”

    누가 봐도 자신과 만난 걸 꺼린 모습을 보고도, 여동생은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이어 나갔다.

    “여긴 어쩐 일이세요?”

    “나? 잠깐 쇼핑 좀 하려고 왔는데……”

    마왕이 자길 지칭할  ‘나’라고 했다. 항상 ‘짐’이라며 거만하게 말하는 말투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처럼 여동생과 대화했다.


    내가 놀라는 사이 동생은 날 잠깐 내려보더니 마왕에게 물었다.

    “이 분과 함께요?”

    “응, 얘가 옷 좀 골라 달라고 해서 말이야. 야, 일어나.”

    마왕이 내게 다가와 일어나라며 발로 찼다. 난 그대로 일어나기 뻘쭘해서 아까 욕했던  사과했다.

    “아까 욕해서 미안. 너무 놀라서……”

    “괜찮아요. 근데 저희 언니랑 어떤 사이에요?”

    “그게,”

    “친구! 그냥 친구야!”

    마왕이 황급히 내 말을 가로막았다. 나도 친한 선후배 사이라 말할 거였지만, 이상하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말을 들은 동생은 눈만 움직여  위아래로 쳐다봤다.

    스캔하는 듯한 눈빛을 억지로 무시하며 그녀에게 손을 내밀며 인사했다.

    “아, 안녕? 어……”

    슬쩍 그녀의 가슴팍을 쳐다봤다. 노란 명찰에 백세희란 글자가 박힌 걸 발견했다.

    “세희야. 반가워.”


    악수하려 오른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세희는 그걸 보고도 고개 숙여 인사했다.

    “네, 안녕하세요.”

    나와 악수하고 싶지 않았는지, 고개를 들고도 두 손을 공손히 앞으로 모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뻘쭘한 마음이 들어 조용히 손을 내렸다. 손을 완전히 내리자 그녀가 물었다.


    “오빠가  사람 맞죠?”

    오빠. 모든 남성이 듣고 싶어 하는 단어였다. 하지만 직접 들어도 그 차가운 말투 때문에 기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차라리 마왕이 양아치에게 시비 걸 때 들었던 오빠가 더 기분 좋았다.

    그런데,  사람이라니?

    세희는 표정을 움직이지 않고 인형 같은 외모로 말했다.

    “뉴스에서 봤어요. 영화관에서 칼 든 사람 제압하셨다고.”


    하준이 잡혀가고 진실이 밝혀진 걸 기억해냈다. 병원에 있을 때 기자랑 인터뷰를 몇 번 했는데, 세희가 그 뉴스를 본 모양이었다.


    “아 응! 그 사람 맞지. 응.”


    “그때 저희 언니 구해주셨다면서요. 정말 고맙습니다.”

    그녀는 말을 마치며 고개를 숙였다. 무표정이라 감정 없는 로봇 같은 인상에, 내 악수를 무시해서 날 별로 좋아하지 않은 건 알아챘다. 하지만 그런 상대에게 이렇게 고개 숙이는 걸 보니, 언니를 꽤 많이 좋아하는 동생이란 걸 깨달았다.

    살짝 흐뭇한 생각이 든 나는 고개 숙인 세희에게 손을 저었다.

    “아, 아니야.  거 아니었어.”

    “아니에요. 오빠 아니었으면 다신 언니를 못 봤을 수도 있었어요.”


    사실 네 언니가 나보다 쎄.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당사자가 뒤에 있으니 이번에도 아니라며 부정했다.


    한동안 내게 고개 숙이던 그녀는 머리를 들고 마왕에게 말했다.


    “언니.”

    “어, 응?”

    “집에 늦게 돌아오실 건가요. 혹시 늦게……”


    “아니 금방 갈 거야! 저녁 먹기 전에 갈 거였어!”


    “그런가요?”

    “응! 그러니까 어머니껜  안 해도 돼!”

    “……”

    세희는 대답하지 않고 조용히 나와 마왕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렇게 약  초가 지나자, 다시 얼음 같은 말투로 대답했다.


    “알겠어요. 그럼 저는 먼저 돌아갈 게요. 밖에 기다리는 친구들이랑은 금방 헤어질 거에요.”

    “응, 돌아갈 때 조심하고!”

    “언니도요.”

    그 말을 할 때 그녀의 시선은 언니가 아닌 날 향하고 있었다. 세희는 다시 마왕을 쳐다봤다.

    “언니, 이따 집에서 봬요.”

    “그래! 이따 봐!”


    “네. 안녕히 계세요.”


    세희는 내게 간단히 묵례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자기 언니처럼 등까지 오는 긴 흑발이 살랑이며 가게를 나갔다.


    자기 동생이 매장을 나가자 마왕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휴우, 드디어 떠났군.”

    어, 다시 돌아왔다.

    평소 말투로 돌아온 마왕은 자기가 던졌던 니트를 주웠다. 그걸 내게 건네더니, 피곤한 얼굴로 말했다.

    “장소를 옮기지 않겠나?”

    “왜?”

    “짐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알려주겠네. 아니면, 궁금하지 않은 겐가?”


    “당연히 궁금하지!”








    입었던 옷과 니트를 결제하고, 우리가 향한 곳은 근처에 있는 카페였다. 각자 아메리카노를 한 잔씩 시킨 우리들은.

    “짐은 라떼로 하지.”


    아메리카노와 라떼를 시킨 우리들은.

    “아닐세, 캐러멜 마키아또로 하겠네.”


    아메리카노와 캐러멜 마키아또를 시킨 우리들은.


    “아니아니, 고구마라떼로 주게.”

    ……아메리카노와

    “그냥 초코”


    “아무거나 처먹어!”


    갈팡질팡하던 마왕에게 소리치고, 번복되는 주문에 힘들어하는 점원에게 말했다.

    “아메리카노 2개요. 차가운 걸로요.”


    “네, 알겠습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2개요.”

    아메리카노를 한잔씩 시킨 우리들은 카페에 있는 테이블에 앉았다.


    나는 조금 전 샀던 종이가방을 의자 옆에 내려놓았다.


    “도대체  그런 거야? 네 동생이잖아.”

    맞은편 의자에 앉은 마왕은  팔을 벌리며 되물었다.

    “자네는 짐이 어떻게 보이는가?”


    그 질문을 듣고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지 고민했다. 내가 보는 마왕은, 예뻤으니까. 하지만 그녀가 물어보는  그게 아니란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예쁘다고 해봤자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마왕이 기뻐하면서 때릴  뻔했다.

    내가 대답하지 못하는 걸 보고 마왕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 자네가 봐도 짐은 좀 특이하지.”

    그거였냐! 그리고 자기도 자신이 특이한 거 알고 있었구나!


    경악해서 평소처럼 그녀에게 말하려다, 심상치 않은 표정을 보고 입을 닫았다. 그녀는 전에 없던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까…… 그래, 짐이 전생했다는 걸 알아챘을 때부터 하는 게 낫겠군.”

    마왕이 전생한 걸 알아챘을 때는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그날 친구들과 철봉에 오르다 미끄러져서 바닥에 머리를 부딪친 것이 계기가 됐다고 했다.

    전생에 마왕이었던 걸 안 그녀는 가장 먼저 부모님에게 알렸다. 낳아주고 키워주는 사람들이었기에,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 알려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부모님들은 중학교 2학년 때까지는 그저 단순한 이탈인 줄 알고 넘어가려 했다. 하지만 학교에서 주변 친구들과 녹아들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듣자, 그때부터 그녀가 평범하지 않다는 걸 알았다. 여러 병원에 다니고 급기야 사이비 종교까지 다녀봤지만, 마왕은 전처럼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런 노력이 계속되어가자, 그녀는 결국 정상으로 돌아온 척 연기를 시작했다. 갈수록 힘들어하는 부모님을  수 없었기에.

    여기까지 이야기가 끝내자 때마침 진동벨이 울렸다.

    “짐이 가져오지.”


    마왕은 어색한 분위기를 견디기 힘들었는지, 붉게 빛나며 진동하는 진동벨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카운터로 향하는 그녀를 보면서 꽤 외로웠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야 죽자마자 바로 현대로 돌아왔지만, 마왕의 경우엔 13살이란 어린 나이로 다시 태어났다. 자신에 대해 말해도 아무도 믿지 않았고, 그저 정신병 취급하며 이해해주지 않았다. 그것도 무려 8년 동안이나.


    그렇게 8년이란 긴 시간 동안 홀로 있다가 날 만났을  얼마나 기뻤을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그런 걸 생각하면 그녀가 나와 심할 정도로 친하게 대해주는 게 납득이 갔다.


    “자, 가져왔다네.”

    아이스 아메리카노 2잔이 담긴 쟁반을 들고 마왕이 자리에 앉았다. 하나는 자기 먹고 남은 걸 내게 내밀며 물었다.


    “또 궁금한  있나?”


    난 컵에 담긴 빨대로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빨아 마신 후 대답했다.

    “그럼 왜 동생한테서 나랑 같이 쇼핑   숨긴 거냐.”

    “그거 말일세.”


    마왕은 빨대를 빼고 컵으로 마셨다. 그동안 말하면서 꽤 목이 말랐는지 몇 모금 마신 후 컵을 내려놓았다.


    “세희는 말일세. 짐을 조금 과보호하는 면이 있다네.”

    과보호라고?


    나는 아까 세희와 대화했던 걸 떠올렸다. 그건 자기 언니와 같이 있는 남자를 봤을 때 평범한 반응 같았다.

    “짐이 남자와 있는 걸 보고, 세희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예상이 가지 않았네. 심하면 자넬 만나는 걸 반대할 수도 있었지.”


    “……”


    “아무래도 부모님께서 짐을 많이 걱정하는 걸 보고 따라 한 것 같다네. 어린 나이에 비뚤어지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네만……”


    마왕은 말을 흐리며 괜히 오른손으로 컵을 만지작거렸다. 컵 표면에 맺힌 이슬을 손가락으로 닦던 그녀는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세희뿐만 아니라, 짐의 부모님께서도 짐을 과보호하는 면이 있다네. 아마 자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심할 게야. 최악의 경우, 자넬 만나지 못하게……  수도……”


    나는 점점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보다, 가만히 있지 못하고 꼼지락거리는 손가락이 더 신경 쓰였다.

    순수히! 정말 순수한 의도로! 단 한 점의 불순한 의도 없이! 손을 들어  표면을 더듬는 그녀의 손을 덮었다.

    “……! 자네.”

    그러자 마왕은 푸른 눈을 크게 뜨며 날 쳐다봤다. 난 붉어지는 얼굴이 들킬까 봐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잠깐만 짐을 봐주게나.”

    그렇게 말한 그녀는 갑자기 왼손을 들어, 내 뺨을 감쌌다. 힘을 주어 자신을 바라보게 고개를 돌리더니, 나와 눈을 마주쳤다.


    “가만히 있게.”

    낮은음으로 속삭이는 목소리에, 내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더군다나 마왕은 자리에서 조금씩 일어나더니,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내 쪽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너……!”

    너무 놀란 나머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고 몸도 움직일 수 없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눈을 크게 뜬 채 심박수를 올리는 것밖에 없었다.

    앞니가 살짝 보일 만큼 벌어진 연분홍빛 입술 사이로 옅게 내쉬는 숨이 내 얼굴에 닿았다.  작은 숨바람은 내 얼굴을 간질였고, 거기에선 달콤한 향기가 났다.

    “자네……”


    드디어 그녀가 말을 꺼냈다. 나는 무슨 말을 할지 두근거렸는데, 충격적인 말이 들려왔다.
    “아무래도 눈썹 정리를  하는 게 좋겠군.”

    “뭐?”

    “눈썹 정리 말일세. 칠할 필요는 없어 보이니 눈썹 칼로 정리만 해도 괜찮을 걸세.”

    말을 마친 마왕은 다시 제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아직 제정신을 차리지 못한 날 보며,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왜 그런가. 짐이 키스라도 하는  알았나?”


    그제야 그녀가 내게 장난친 걸 깨달았다.

    “아 진짜!”

    “그렇게 화내지 말게. 분위기가 너무 무거워서 가벼운 장난 좀  봤네.”


    “그러지 좀 마라!”

    “아하하하! 어떤가, 두근거렸나?”


    “시끄러워!”


    역시 마왕을 상대로 두근거리는 건 무의미한 일이었다. 하지만 두근거린 건  뿐만이 아니었는지, 그녀 또한 귀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것 덕분에 아까 진지했던 분위기는 날아갔고, 동시에 매장에서 봤던 회색 후드티도 잊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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