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3화 〉방금 짐이 말한 건 절대 잊지 말게 (33/72)



〈 33화 〉방금 짐이 말한 건 절대 잊지 말게

강의가 거의 다 끝나고 점심이 다 된 지금까지도, 마왕의 감촉을 잊을 수 없었다. 나는 그녀의 향기가 밴 맨투맨을 쓰다듬으며 옆자리를 쳐다봤다.

“……”

유리가 수업에 집중하면서 필기하고 있는 게 보였다. 그녀는 마왕을 따라하려는 것처럼 후줄근해 보이는 회색 후드티와 같은 색인 트레이닝복 바지 차림이었다.


강의가 시작될 때까지 보이지 않길래 유리가    알았다. 하지만 시작한 직후에 들어온 그녀는 나와 눈을 마주치면서  옆자리에 앉았다. 그 이후로 내게 눈길을 주거나 말을 걸진 않았다. 잠깐 쉬는 시간이 됐어도 유리는 강의실을 나가서 강의가 시작될 때까지 들어오지 않았다.


저번주에 나는 유리를 찼다. 그것도 심하게. 자기가 식당 앞에서 떼를 쓰며 자신과 만나달라는 게 얼마나 보기 나빴는지 알고 있을 것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이러는 이유를 전혀 모르겠다.

아예 모른 척하려면 옆자리에 앉지 말던가. 다시 친한 척하려면 말을 걸던가.

“자, 오늘은 여기까지  게요.”

교단 앞에 선 교수님이 강의를 끝냈다. 그러자  동기들이 “수고하셨습니다.”를 중얼거리며 자신의 교재를 챙겼다. 나도 필기를 제대로 하지 못한 노트를 정리하며 가방에 넣었다.


아무 말없이 가만히 앉아 있는 유리 때문에 공부에 집중할 수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마왕이랑 자체휴강이나 하는 게 나았다.

“……지헌아.”

갑자기 옆에서 유리가 날 불렀다. 오늘 처음 듣는 목소리에  놀라면서 그녀를 쳐다봤다. 유리는 무표정으로 날 바라보며 말했다.


“어, 어?”

“……”

유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말없이 가방에 교재를 챙겼다. 먼저 나갈 준비를 마친 동기들은 이쪽을 지나치며 한번씩 훔쳐봤다.

왠지 모르게 불안한 마음이 들어 가방을 메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일어난 건 유리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가방을 메면서 날 바라봤다. 어떠한 감정도 담은 것처럼 보이지 않는 그 눈으로 보면서 입을 열었다.


“내일 봐.”


말을 마친 유리는 바로 강의실을 나가 버렸다.

대답도 듣지 않고 나가버리는 그녀를 보며, 나는 점점 더 혼란스러워졌다. 날 싫어하는 건지 좋아하는 건지 전혀 모르겠다.

혼란한 상황에 얼굴을 찌푸리면서 나는 강의실을 나왔다. 월요일인 오늘은 오전 내내 강의가 있었기에 힘들었지만, 그래도 오후부터는 완전한 자유였다. 그런 생각에 기분이 좋아지자 난 웃음을 지으면서 학교 건물을 나왔다.


건물 입구를 나서자, 아까 헤어졌던 유리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강의실에서와 달리 후드를 깊게 눌러쓴 채였다. 그런데 내가 놀란  그런 유리 앞에 마왕이 걸어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마왕은 아침에 봤던 것과 같은 검은 추리닝 차림이었다. 백수처럼 옷 상의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놓고는, 날 발견하자 환하게 미소 지었다.

“지헌! 강의는  끝났는가!”

바닥을 보고 걷던 유리가 마왕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 장면을 보고 무슨 큰일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를 찼던 날처럼 유리가 사납게 변할  알았다. 금방이라도 마왕에게 달려들어서 격한 감정을 내보일 게 뻔했다.

예상과는 달리, 유리는 다시 고개를 내리고는 가던 길을 멈추지 않았다. 마왕도 그런 그녀를 잠깐 쳐다봤을 뿐, 다시 내게 잰걸음으로 다가왔다.


마왕은 지나쳤던 유리를 향해 뒤돌아보면서, 내게 궁금한 표정으로 질문했다.

“저 자는 유리 아닌가? 저번에 봤을 때보다 어두워 보이는군. 혹시 저번  때문인 겐가?”

그녀가 말하는 저번 일은 내가 과대에 대한 진실을 퍼뜨린 일을 의미했다. 하지만 유리가 저러는  내가 찬 일 때문이었다. 그때 비상계단에서 들었던 절규를 생각하니 우울한 기분이 들었다.


“아니, 그건 아닌데……”

“그럼 무슨 일인 게지? 설마……!”


마왕은 고민하다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설마 자네, 유리에게 고백한 겐가? 그런 겐가?”

놀리는 듯한 말투와 함께, 주머니에서 손을 꺼내 내 가슴팍을 약하게 쳤다.


아프지도 가렵지도 않았지만 그 주먹이 큰 울림이 된 것처럼, 나도 모르는 사이 대답이 튀어나왔다.

“응.”


“물론 그럴리가 없겠…… 자네 지금 뭐라고 했나?”

“내가 유리한테 고백했다고.”


한숨 섞인 내 대답을 들은 그녀가 표정을 굳혔다. 창백한 얼굴을  마왕은 불안한 말투로 말했다.


“그, 그래. 고백했다고? 음! 고백할 만도 했지! 그동안 좋아했는데 드디어 마음을 전한 거구만! 음!”

그녀는 과장스럽게 웃으며 다시 내 가슴팍을 쳤다.


퍽!

“억!”


아까와 달리 힘이 잔뜩 들어간 주먹이었다. 올라간 입꼬리와는 다르게 주먹을   마왕이 말을 이었다.

“그래도 너무 마음 상하진 말게. 유리는 자신을 좋아해준 자넬 잃은 것이지만, 자넨 자넬 좋아하지 않은 사람을 잃은 것이니 않나?”

아픈 가슴을 문지르다 이상한 걸 눈치챘다.

“7년 동안 짝사랑한 결과가 이거라니, 실망하지 말게. 유리도 7년간 친하게 지냈던 좋은 ‘친구’를 잃어서 저렇게 우울해하지 않나.”

나는 이상하게 친구라는 말을 강조하는 마왕에게 말했다.


“아니, 내가 유리 찬 건데?”


“뭣이? 자네가 고백했다고 하지 않았나.”

“하긴 했는데, 바로 찼지.”


 말을 들은 그녀는 푸른 눈을 빛내며 환하게 미소지었다. 그러더니 다시 내 가슴팍에 주먹을 내리꽂았다.

빠악!

“아악! 야!”

“그걸 왜 말하지 않았나!”


얼마나 세게 때렸는지, 맞는 순간 잠깐동안은 숨을 쉴 수 없었다.


고통에 얼굴을 찌푸리는 나와 달리 마왕은 아까보다 환하게 웃었다.

“그래서 유리 그 자가 그렇게 한 거였구만! 아하하핫!”

남의 불행을 보고 즐거운 듯이 웃는 모습은 말그대로 마왕이었다. 한동안 그렇게 웃던 그녀는 다시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물었다.

“그런데, 자네가 찼으면 왜 자네가 괴로워하는 겐가? 유리가 힘들어하는 건 이해가 가네만.”

“아니, 그게……”

“하긴, 7년 동안이나 그 마음을 간직했는데 쉽게 잊을 수는 없는 거겠지. 음.”

멋대로 질문하고 멋대로 납득한 마왕은, 남은 왼손마저 주머니에서 빼내고 허리춤에 양손을 얹었다.


“그렇다면 짐이 그 기억을 잊게 해주지. 짐만의 방식으로 말일세.”


그 말을 듣자 마자 심장이 두근거렸다. 날 올려보는 푸른 눈동자가 아름답기도 했지만, 마왕의 방식이란 게 정상적인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마왕은 평소 겨울이 딸기 제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가 자신만의 방식이라고 했으니 정상적인 방식이 아닌  분명했다. 그러고 보니 어제, 자네도 같이 운동할 때가 되지 않았나?라고 말한 게 기억났다. 어쩌면 그 방식이 기억을 잊을 때까지 운동하는 걸지도 몰랐다.


“이미 잊은 거 같은데? 아니, 이미 잊었어!”


“짐 앞에선 강한 척하지 않아도 된다네! 음!”


마왕은 그렇게 말하더니 내 옆으로 와서 나란히 섰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가볍게 점프해서  머리를  팔로 감싸 안았다.

“어?”

그녀가 내 머리를 껴안자, 그 무게가 목으로 전달됐다. 그대로 서 있을 수 없는 무게가 실려지고 자동적으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처음엔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마왕 옷에서 풍기는 섬유유연제 냄새와 추리닝 너머로 부드러운 살결을 느낄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녀가 팔에 힘을 줄 때부터 고통이 시작됐다.

“용사였던 자네도 대가리가 깨지면 아무 것도 못하니 말일세!”


“아아아아아악!”

진짜 말 그대로 머리가 쪼개지는 듯한 고통이었다. 얼굴에  말고 다른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지긴 했지만  감상을 남길 여유는 전혀 없었다. 차라리 차에 치였을 때가 나았을 정도로 아파왔다.

“자, 잠깐만, 잠깐만! 스톱!”


나는 항복한다는 표시로 그녀의 팔뚝을 약하게 두드렸다. 하지만 그럴수록 내 머리는 조여만 갔다.


“왜 그런가? 기억나지 않았던 게 기억나기라도 한 겐가?”


“어어어! 기억 났어! 기억 났다고!”

“확실한가? 정말로 기억난 겐가? 거짓은 아니겠지?”

“진짜로 기억 났다고! 이거 풀어줘!”


“풀어주세요, 해보게.”


“어?”


꽈아악!

“아아악! 풀어주세요! 풀어주세요! 제발요!”


“이렇게까지 간청하는데, 안 풀어줄 수가 없겠군.”

마왕은 그렇게 말하면서 내 머릴 감싼 팔에 힘을 풀었다. 풀려난 나는 아스팔트 바닥에 무릎 꿇고 앉아서 아픈 머리를 매만졌다.

“아야야야…… 아프잖아!”

“당연하지 않나. 아프라고  건데 말일세.”


아침에 두근거렸던 일이 거짓말 같았다. 그때는 그렇게 귀엽고 예뻤는데, 지금은 사람 괴롭히기 좋아하는 악마로 보였다. 정확히는 마왕이었지만.

나는 전직 용사로써, 마왕에 대한 혐오감을 담아 그녀를 쳐다봤다.


“이……!”

“호오, 그렇게 노려보면 어쩔 텐가. 짐을 때리기라도  텐가?”


“……렇게 아름다우신 분을 제가 어떻게 때립니까.”


그래도 싸우면 내가 진다. 이세계에서나 겨우 비등하게 싸웠지, 지금은 상하구조가 완전히 굳어 있었다.


내 말을 들은 마왕은 흡족한지 호탕하게 웃었다.


“우하하하핫! 짐이 좀 아름답긴 하지! 하하하!”

그렇게 웃던 마왕이 갑자기 몸을 낮추며 내 멱살을 잡았다. 마치 키스할 거처럼 얼굴을 가져다 대자 얼굴이 뜨거워졌다. 하지만 인형처럼 예쁜 얼굴은 붉게 달라 올랐을 내 얼굴을 지나쳤고, 그녀는 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허나 짐은 예쁘다는 말을  좋아한다네.”


“뭣……!”


그 속삭임에 들은 나는 놀라서 뒤로 자빠졌다. 내가 넘어지기  멱살을 놓은 마왕은, 다시 허리를 펴서 내려보며 말했다.

“방금 짐이 말한 건 절대 잊지 말게. 알겠나?”

파란 눈동자로 눈웃음을 지으며 장난스럽게 미소 짓는 마왕을 보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진정해라, 심장아……! 오늘 아침  방 화장실에서 토한 여자야……!! 방금 전까지 나한테 헤드락 걸었던 여자라고……!!!

“언제까지 그렇게 자빠져 있을 겐가?”

두근거리는 미소를  마왕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왠지  손을 잡는 게 부끄럽게 느껴졌지만, 바닥을 짚느라 묻은 흙먼지를 바지에 털며 그 손을 맞잡았다.


“웃차!”

여자답지 않은 힘을 가진 그녀는 쉽게 날 일으켰다.

“고, 고마워.”


일어난 나는 잡았던 손을 놓고, 방금 전 느꼈던 감촉을 회상했다. 굳은살이 박혔지만 여자 답게 작고 부드러운 손이었다. 게다가 날 일으키는 강인함에선 평범한 여자에겐 없는 든든함마저 느껴졌다.

“뭘 그리 멍 때리고 있는 겐가?”


“어?”

정신을 못 차리는 내 앞에 마왕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커다란 푸른 눈이 날 쳐다보자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 아냐.”


“아니긴 뭐가 아닌가. 혹시 짐에게 반하기라도 한 겐가?”

“어?”


무슨 말인지 되물으려는 찰나, 마왕이 긴 은발을 휘날리며 몸을 돌렸다. 그것 때문에 그녀가 짓는 표정을 볼 수 없게 됐다. 내게 등을 보이는 마왕이  상태로 말했다.

“그냥 농이었네.”

“농이라고?”

“그냥 농담이란 말일세.”

이때 잠깐이지만 그녀의 귀가 빨갛게 붉어진 것처럼 보였다. 자세히 보려는 순간 마왕이 다시 몸을 돌려 날 바라봤다.


“언제까지 그렇게  있을 겐가. 어서 가세.”


귀를 다시 보려고 해도 그녀가 말 거는 바람에 그럴 수 없었다.


“자칫하면 불거나 식을 수도 있단 말일세.”


“부, 불다니?”

“아까 말하지 않았나. 짐만의 방식을 알려주겠다고.”

그러고보니 아까 그녀가 그런 말을 하긴 했다.


“우연찮게도 짐이 그 ‘방식’을 주문시켜서 말이네만.”

마왕은 그렇게 말하면서 나와 손을 맞잡았다.

“어서 가세. 도착했을  즈음이면 그것도 도착했을 게야.”


다시 손을 잡은  부끄럽기도 하고 그 방식이 무서워서 물었다.


“뭐, 뭔데 그래?”

“그것 말이지. 그건…… 떡볶이라네.”

떡볶이란 말에 잠시 사고가 굳었다. 내가 생각했던 방식은 죽어라 달리거나, 죽어라 맞거나, 아니면 그냥 죽는 게 전부였다. 그런데 갑자기 떡볶이란 단어를 들으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마왕은 그런 날 보고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뭔가. 자네는 짐과 점심을 함께하고 싶지 않은 겐가?”


나는 대답하기 직전 그녀의 귀를 쳐다봤다. 백금색으로 반짝이는 은발사이로, 마왕의 피부만큼이나 하얀 귓바퀴가 보였다. 역시 그녀가  때문에 귀를 붉히며 부끄러워 할리 없었다.

왠지 모를 실망감에, 나는 될대로 되라고 생각하며 말했다.


“그래, 먹자.”


“!”

내 대답에 마왕은 다시 눈웃음 지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