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3화 〉이제 슬슬 해야지 (23/72)



〈 23화 〉이제 슬슬 해야지

“오오, 지헌이여.”


학교에서 하루만에 본 마왕은 어제와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내가 자취하는 건물에 내려줄 때까지 툴툴댔으면서, 지금은 아주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리고,

“너, 무슨  있냐? 그렇게 차려 입고?”


오늘 마왕은 평소 입던 추리닝이 아닌, 전혀 다른 복장이었다. 무릎이 완전히 드러나는 검은 바탕에 흰색 꽃무늬가 그려진 원피스를 입고, 그 위에는 흰색 데님 재킷을 입어 귀여우면서도 약간은 거친 매력을 보여주었다.


마왕은 이게 자랑스러운 듯, 몸을 반쯤 돌렸다. 그러자 은색 머리카락과 검은 치마 자락이 잠깐 허공에 휘날렸다. 게다가 상큼한 향수 냄새가 흘러와 나도 모르게 심장이 두근거렸다.


“어떤가. 잘 어울리는가?”

“어, 어?”


나는 마치 꽃잎이 흩날리는 것 같아서, 순간적으로 넋을 잃어버렸다. 잠깐 뜸을 들이다 대답하는 날 보고, 마왕이 허리춤에 주먹 쥔 양손을 얹으며 말했다. 그러자 그녀 어깨에 맨 작은 가방이 흔들렸다.

“후훗, 짐이 그렇게 예쁜 겐가.”

“아, 응, 예쁘긴 하네.”


“하하하! 진짜로 그렇게 말하는 겐가!”

그녀가 호탕하게 웃으면서 내 가슴팍을 때렸다.

“아악!”

근데 이게  엄청나게 아팠다. 때릴  얼굴을 살짝 붉힌 걸 보니, 어느 정도 진심을 담아서 때린 모양이었다. 역시 마왕은 마왕이었다. 겉모습은 이쁘더라도 사람을 가차없이 때리고 베는 짐승이 안에 깃들어 있었다.

착각에서 깨어난 내 앞에서 마왕이 밝은 얼굴로 말했다.

“엄살 떨지 말게. 그렇게  아프지 않은가.”

“아프거든! 게다가 어제까지 병원에 있던 놈을 때리냐! 그렇게 무식하게!”

“하하핫!”

그녀는 웃음으로 날 무시했다. 그런 마왕이 익숙해졌기에, 난 아까 물었던 질문을 또 던졌다.


“무슨 일 있냐?”


순간 누구 만나는 거냐는 질문이 나올 뻔했다. 하지만 그럴리 없었다. 이런 마왕한테 누가 들러붙는  과대밖에 보지 못했다. 그런 과대도 뉴스에서 거짓말  걸로 인해 마왕에게 연락을 끊었으니,  일리 없었다.

내 질문에 그녀는 과장스러운 움직임으로 입술에 검지를 갖다 댔다.

“쉿! 이건 기밀일세! 첩보에 필요한 복장이지!”


“무슨 기밀이고 첩보냐. 무슨 국정원이냐?”


“그런 게 있네.”

“있긴 뭐가.”

그렇게 말하면서 다시 한 번 마왕을 위에서 아래까지 천천히 감상했다. 가장 눈에 띄는 건 흰 다리였다. 평소 추리닝을 입고 다니면서 가리고 다녔던 하체였다. 이렇게 뜻하지 않게 보게  줄은 몰랐다.

“그렇게 보고 싶은 겐가? 에잇!”


“어어? 야!”

내가 소리지른 이유는, 그녀가 갑자기 치마 자락을 들어올렸기 때문이었다.

백금같이 흰 허벅지가 드러나자 나는 바로 주위를 둘러봤다. 다행이 이 주변엔 아무도 없었고, 멀리 있는  사람들도 이 곳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소리를 지르면서도  시선을 집중했다. 불행, 아니 다행히도 보인 건 허벅지까지였고, 치마가 완전히 내려가자 마왕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밖에서 그러면 어떡해!”

“그럼 자네 방에선 괜찮은 겐가?”

“어?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꽤 자세히 보더군, 자네.”

“아, 안 봤어!”


“이런 얼굴을 하고 보지 않았나.”


마왕은 그렇게 말하면서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아마 내가 지었다는 얼굴인 것 같았다.


“내가 언제 그렇게 봤는데!”

“역시 봤구먼?”


그만 유도심문에 걸리고 말았다.

하지만 자기가 보여준 것이기에 분위기는 심각하게 흘러가지 않았고, 우리는 다른 걸로 화제를 이어갔다.

“자넨 강의실 가는 중인가?”

“응, 오늘 2시 강의. 너는? 밥은 먹었냐?”

“당연히 먹었다네. 이쪽으로 가지.”

가리킨 방향은 내가  강의실이 있는 건물 쪽이었다. 강의 들으러 가는 길인지 묻자, 고개 저으며 말했다.

“아닐세. 짐은 오늘 강의는  들었네.”

“근데 왜?”


“자네하고 같이 있고 싶어서 말이지.”

“뭐?”


“후훗, 두근거렸나?”

마왕은 웃으면서 내 앞을 가로막았다. 이번에도 상큼한 과일향이 날리면서 내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그녀에게 두근거린 걸 들키면 자존심이 상하니, 붉어진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고개를 돌렸다.


“별로.”


“에이, 뭐가 별로인 겐가. 걱정말게. 자네가 짐에게 두근거려도 이해하겠네.”

“뭘 이해해!”


“짐이 이렇게 아름다운 걸 어쩌겠나!”


아, 망할! 저러지만 않았어도 정당하게 두근거리는 건데!

“비켜!  때문에 늦으면 어떡할래!”

황급히 그녀 옆을 돌아서 학교 건물로 걸어갔다. 몇 걸음 걷자 마자 뒤에서 타박타박 걷는 소리가 들렸다. 가까워지는 발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돌렸다. 마왕이 입꼬리를 올린  잰걸음으로 걸어오는 게 보였다.

오늘 본 마왕은 평소와 다르게 차려 입어서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닌  같았다. 하지만 원피스차림에 어울리지 않는 낡은 운동화를 신을 걸 보고, 조금은 안심할  있었다.
……왜 불안하고 안심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하핫! 짐이 정곡을 찌른 겐가? 아직 7분이나 남았으니 늦을리가 없지 않은가!”


“시끄러!”

입은 그렇게 말해도, 익숙한 신발을 보고 어느 정도 진정된 마음으로 말을 이었다.


“넌 강의 없으면 집이나 가! 가서 잠이나 자!”


“자네는 짐따윈 보기 싫은 겐가?”

“내가 언제 그랬어!”


“그렇게 빨리 걷지 말고 같이 가세. 자네 보폭으론 짐이 따라잡기 귀찮네.”

고개는 여전히 앞 쪽을 향하면서도, 그녀가 말한 대로 느리게 걷기 시작했다.


“고맙군! 역시 자네밖에 없어!”

갑자기 마왕이 내 왼쪽 어깨에 작은 손을 올렸다. 나는 오른손을 들어, 마치 더러운 것이라도 만지는 것처럼 검지와 엄지만으로 그녀의 손을 치웠다.


“그렇게 하면 짐도 꽤나 상처 받네만.”

“너도 내 가슴에 상처 줬잖아. 그것도 물리적으로.”

“뭐, 그러긴 했지만 말일세.”


그렇게 대화하면서 우리는 건물에 들어갔다. 이번 강의실은 2층이기에 중앙에 있는 계단을 밟아야 했다. 마왕은 도대체 언제까지 따라올 생각인지, 계단 도착할 때까지 떠나지 않았다.

이제 계단을 밟으려 할 때 마왕이 날 불렀다.


“자네, 이것 좀 보게.”


“응? 뭐가?”

고개를 돌려서 그녀가 가리킨 곳을 봤다. 그곳은 학교 내 소식들을 알려주는 게시판이었다. 뭘 말하는 건지, 익숙한 사람이 찍힌 얼굴이 보였다.


“저거 그 새끼잖아. 과대.”

“그러게 말일세.”

나와 마왕은 게시판 바로 앞까지 걸어갔다. 과대 얼굴이 나온 사진은 학교 신문이었다. 과대는 학교에서 높은 사람으로 보이는 50대 아저씨와 악수하며, 상장으로 보이는 종이를 들고 있었다. 신문 발행 날짜를 보니 내가 퇴원했던 어제였다. 내가 입원했던 주말동안, 과대는 학교 신문에서 취재를 받았던 모양이었다.

“영화관에서 난동을 제압한 영웅 ‘이하준’ 학생, 이라……”


마왕이 신문에 나온 기사 제목을 소리내서 읽었다. 그 이후로는 말없이 기사를 읽다가, 이번엔 내게 말했다.

“이제 괜찮지 않은가? 충분히 익은 것 같네만.”


그녀 말이 맞았다. 지금이 제일  익었으니 수확할 때였다.


내 복수 계획은 간단했다. 양아치를 제압한 사람은 과대가 아니라 나였다는 진실을 밝힌다는 거였다. CCTV는 물론이고, 다친 상처에 대한 치료기록, 그 당시 입었던 옷, 사건 기록까지.

바로 제보하지 않았던 이유는 얼굴이 세상에 팔리길 기다렸기 때문이었다. 당연한 말이자만 과대는 너무 잘생겼다. 그의 얼굴을 쉽게 잊을  없을 정도로 잘생겼다. 그런 미남이 영웅이 되어 뉴스에 나오니, 당연히 유명해질 수밖에 없다. 며칠이 지난 지금, 과대의 얼굴은 뉴스뿐만 아니라 이런 학교 신문, 인터넷 신문까지. 도저히  볼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데 그 잘생긴 영웅이, 그저 사기꾼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밝힌다면, 그렇게 된다면, 쉽게 잊을 수 없는 그 미모는 맹독이 되어버린다. 전국민적인 사기꾼이란 명찰이 과대를 따라다닐 것이다.


이걸 말하면서 웃자, 마왕은 그때도 들었던 말로 대답했다.

“역시 자네는 용사 같지 않구만.”


“시끄러. 어차피 지금은 그냥 일반인인데. 그리고 과거는 과거로 둬야지.  그래?”


“좋네. 전직용사라고 무조건 정의로워야 하는 법도 없고 말일세.”

“그렇지.”

나는 대답하면서 폰을 들었다. 그간 모아뒀던 증거들을 이메일로 보내기 위함이었다.

폰을 조작하는 날 보고 마왕이 물었다.

“어디로 보낼 겐가? 방송국인가?”


“아니, 인터넷 신문사.”


“왜 그런 겐가?”


“방송국은 규모가 있어서 자기가 오보했다고 잘 안 할  아니야. 그런데 인터넷 신문은 찌라시만 보내도 좋아라하고, 재미있게 각색해서 기사 내겠지.”


“보내는  진짜지 않는가.”


“그러니까 더 좋아할 거야. 자기들은 진짜 언론인이라면서, 그렇게 내세울 수 있으니까. 아마 오늘 저녁이면 기사 나올 걸? 아, 가능하면 그때 그 놈 얼굴보고 싶은데.”

“흠……”


이메일을 보내고 눈을 돌려 마왕을 쳐다봤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 말없이 날 위아래로 훑어보고 있었다.  모습에  폰을 바지주머니에 넣으며 물었다.

“왜, 이번에도 용사같이 않다고 말할 거지.”

“아닐세. 이제서야 자네가 게임에서 골드란 걸 믿게 되었을 뿐이라네.”


“갑자기 게임이  나와?”

“자네 실력은 브론즈5지 않나. 이제 보니 정치질로 골드를 간 거였군?”

“시끄러! 그리고 그때는 오랜만에 해서 그런 거였다니까! 이제는 감 잡았어!”


“호오, 그런 겐가?”

마왕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짓다가, 아까 밖에서 봤을 때처럼 팔짱을 풀고 허리춤에 양손을 얹었다.


“그렇다면 강의 끝나고 피시방에서 보세! 1대1로 발라드리겠네!”

“발려드리겠네, 가 아니고?”

“결과는 그때 가서 보지! 만약 짐이 진다면 피시방비 전부를 대겠네!”

“좋아!”

그렇게 말하면서 내민 그녀의 손을 잡아 악수했다. 내 것보다 작지만 굳은살이 박혀 있는 손을 놓을 때, 마왕이 말을 덧붙였다.

“아, 그리고 자네가 졌을 경우, 짐이 원하는  하나만 들어주게.”

“나도 돈 대주면 되는  아냐?”

“가치는 상대적인 걸세. 어차피 자네도 별로 손해볼 일은 아닐 게야.”


“……뭔데.”

“짐과 한번 놀러가세. 비용은 짐이 대겠네.”

“어디로 가는 건데.”

“그건 그때 가서 알려주겠네.”


아씨, 얘가 이런  할 때마다 항상 결과가 안 좋았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고민했다. 그런 날 보고, 마왕은 도발하며 웃어댔다.

“왜 그런가, 쫄리는 겐가? 실버3한테 질까봐?”


“! 아니거든! 좋아!”

“알겠네. 그럼 끝나고 피시방에서 보세!”

“그래!”


드디어  생각인지, 마왕은 건물 출입구로 걸어갔다. 나도 이제 강의 시간이 얼마  남았으니 계단으로 향했다.

이제 계단을 밟으려 할 때, 갑자기 그녀가 날 불렀다.

“이보게.”

뒤를 돌려 마왕을 쳐다봤다. 그녀는 출입구를 아직 지나가지 않은 채, 처음 보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조여오는 가슴을 애써 무시하며 대답했다.


“왜.”

“그렇게도 보고 싶은 겐가?  놈이 기사 볼 때 얼굴을.”

“보고 싶긴 하지, 왜?”

“아무 것도 아닐세. 짐도 보고 싶어서 말이지.”

말을 끝낸 마왕은 몸을 돌려 건물을 나가려 했다. 저렇게 차분해 보이는 마왕은 처음이라, 나는 농담을 섞어서 물었다.

“무슨 죽으러 가냐? 쓸데없이 비장하네.”


“!”


들었는지 그녀는 문을 열던 손을 멈췄다. 그리고 잠깐동안 움직이지 않더니, 이쪽을 향해 몸을 돌렸다.


“죽는 건 짐이 아니라 자네라네! 다음에 볼  소환사의 협곡일세!”


그 말을 마지막으로 마왕은 건물을 나갔다.

이상한 행동에 불안하면서도, 내가 선택한  계단을 올라가는 거였다.


원래 마왕은 좀 이상했다. 그러니 내가 신경 써도 피곤하기만 할 뿐이었다. 어차피 별일 아닐 테고.


……그렇게 믿고 싶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