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1화 〉아까 말했잖은가 (21/72)



〈 21화 〉아까 말했잖은가

“여, 여보세요?”


-여보세요.

들리는  익숙한 마왕의 목소리였다. 나는 그녀가 전화   알고 언제 오냐며 재촉했다.


“너 빨리  오냐.  늦으면 치킨에 사용감 남게 해준다.”


하지만, 마왕이 이렇게 전화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아야 했다.


-저 소희 엄만데요.


이 말을 듣자 마자 온몸이 얼어붙었다. 마왕의 부모님은  여자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도 모르게 허리를 꼿꼿하게 피며 말했다.


“네, 어머니.”

긴장되는 분위기 속에서, 어머니께서는 잠시 동안 말씀이 없으셨다.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요

“네.”

-지현씨, 남자애가 맞지요?

“나, 남자 맞습니다, 어머니. 그리고 지헌이 아니라 지현입니다. 아니아니, 지헌이요. 이름이 지헌이에요.”


-그런가요? 그럼 혹시 하나 더 물어봐도 될까요?


어머니께서 말씀하신 질문은 충격적이었다.

-지헌씨는 우리 소희랑 사귀고 있을까요?

처음 듣는 어머니의 목소리는, 마왕의 언니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젊은 여성이 말하는  같았다. 게다가 마왕이었다는  티내려는 그녀와 달리, 어머니는 부잣집 아가씨처럼 연약하고 부드러운 말투였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말이 나오자, 뇌가 그걸 따라가지 못했다.


“어어, 네?”

-소희랑 사귀는지 물었는데요? 연인으로써 만나고 있는 건가요? 둘이?


“저, 저랑 마왕, 아니 소희, 아니 선배는. 선배는 그저 친구로 만나고 있습니다. 연인이 아니라요.”

-아! 그럼 아직 썸만 타고 있는 단계인가요?

“예? 아니 그냥 친구사인데요.”

-그래요? 자취방 비밀번호도 알려주고, 단둘밖에 없는 병실에서 같이 잤는데, 그게 연인관계가 아니라 그저 친한 선후배사이시라는 거죠?


“아니, 그, 그때 상황은요, 어머니.”

-혹시 제 딸이 연인관계도 아닌 이성과 같이 자는 여자인가요? 그런 건가요?

“그게 아니고요.”

역시 마왕의 어머니였다. 친절한 척, 가녀린 척하면서도 빠르게 말하며 날 밀어붙였다. 그녀의 공격에 난 정신을  차리며 최대한 마왕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 말할 단어를 골랐다.


드르륵!


“짐이 돌아왔다네!”


때마침 마왕이 병실 문을 열며 등장했다. 등까지 오는 고운 은발을 휘날리며 들어오던 그녀는, 내가 통화 중인  발견하고는 얼굴을 굳혔다.

“호, 혹시, 짐의 어머니신가?”


떨리는 손을 들어 전화하고 있는 내 폰을 가리켰다. 내가 맞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요란하게 들어왔던 방금전과 다르게 천천히 소리 죽이며 병실로 들어왔다.


-지헌씨?

마왕 때문에 대답하는 걸 잠깐 잊고 있었다. 일단 이 오해를 풀기 위해 어머니께 확실히 말했다.

“아 네, 저기 죄송한데요. 저랑 선배는 그냥 친구사입니다. 어머니께서 알고 계시는 사실은 진실이지만, 저는 선배한테 그런 마음 일절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가요?


“네. 저희는 그저 친구사입니다.”



갑자기 마왕이 입술을 내밀며  다리를 때렸다. 후려치는 정도가 아니어서 아프진 않았지만, 내 주의를 끌기엔 충분했다.

그녀를 보면서 소리내지 않고 입모양으로 물었다.


왜?

……툭

입술을 내밀어 불만 있는 표정을 짓고는 또 주먹으로 날 쳤다.

마왕이 영문모를 일을  건 처음이 아니었지만 이건 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꾸 이상한 행동을 하는 그녀를 뒤로 하고, 마왕 어머니와의 통화에 집중했다.

-그래요? 그냥 친구사이라고요? 그간 있었던 일은 다 오해고요?

“네. 그냥 친구사입니다.”

우적우적

갑자기 마왕이 치킨을 먼저 먹기 시작했다. 나보고는 기다리라고 했으면서. 게다가 닭다리를 양손에 든 채, 한입씩 번갈아 가며 뜯어먹었다.


내가 눈을 크게 뜨면서 그런 그녀를 보고 있을 때,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알았어요. 그럼 지금은 친구사이라고 생각하면 되죠?

“아뇨, 그게……”


-제가 병문안을  가게 되서 죄송해요. 지금 일이 바빠서요. 게다가 남편도 출장 때문에 갈 사정이 안 돼요.


“아, 그건 괜찮은데요.”

-나중에 퇴원하면 같이 저녁이라도 들기로 해요. 알았죠?

“네?”

-그럼 쾌유를 빌게요.




그렇게 말하며 전화가 끊겼다. 내가 폰을 내린 채 황당하게 쳐다보자, 마왕이 뾰로퉁한 말투로 물었다.

“왜 그런가. 어머니께서 끊으셨나.”

평소 눈을 빛내며 말하던 것과 달리, 지금 그녀는 목소리를 낮추며 불쾌한 걸 최대한 드러내고 있었다.


“왜 그래, 뭐가 문젠데.”

“아무 것도 아닐세.”

“그럼  닭다리를 두개  먹는 건데.”


“……”


마왕은 내게 고개를 돌렸다. 아무래도  얼굴도 보기 싫은 모양이었다. 그런 행동에 반해, 내게 곁눈질하며 물었다.


“……짐은 자네에게 있어 그냥 친구사이밖에 되지 않는 겐가?”


“그렇지.”

방금 말한 건 오답이었다. 마왕은 화를 푸는 대신, 다 먹은 다리뼈를 내려놓으면서 날개부위를 집었다.

아무래도 친구라는 게 마음에 들지 않은 것 같았다.


“근데, 평범한 친구사이는 아니지.”


멈칫.

날개 부위를 집은 손이 멈췄다. 나는 그걸 보고 이게 정답인가 싶었다.


“전직 용사와 전생 마왕사이니까.”


우적우적우적!

순식간에 치킨 조각을 먹어버리고, 이제 다른 부위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아니아니아니! 우린 그걸 뛰어 넘었지! 응!”

“그럼 뭔가?”


“어, 음, 절친?”

“……”


마왕은 곰곰이 생각하며 다른 날개 부위를 집었다. 하지만 그걸 먹지 않고, 내게 내밀었다.


“지금은 그런 걸로 만족하겠네. 이거 먹게.”

여전히 영문모를 말이었다. 하지만 날개 하나라도 지켜낸 게 다행으로 생각하며, 그 조각을 받았다. 폰을 내려놓고, 겨우 지켜낸 날개 부위를 먹으면서 그녀가 바랬던  뭔지 고민했다.

친구사이 이상을 바란 거 같은데, 설마 연인관계가 되길 바랬을까? 에이 설마. 그럴리가 있나.

마왕의 외모는 인형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주먹만큼 작은 머리에 예쁘고 오밀조밀한 이목구비가 각자 매력을 뽐내는 데다, 신비한 은빛 머리칼이 미스터리한 매력을 더해줬다. 물론 행동거지가 좀 이상하긴 하지만, 수많은 미남들이 접근했을 것이었다. 그런데 평범한 날 마음에 들어 할리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날개 뼈를 두려 하자, 마왕이 말했다.


“그런데 말일세.”


“뭐.”


“짐의 어머니께서 뭐라고 하셨는가?”


“같이 밥이나 먹자고 하셨는데.”

갑자기 여기서 한가지 의문이 들었다. 어머니께선 어떻게  전화 번호를 안 거지? 설마,

“네가 내 번호 알려줬냐?”

“어, 어쩔 수 없지 않나. 짐은 어머니의 요청을 거절하는 불효자가 아니란 말일세.”

“그럼 나한테 말해야 될 거 아니야. 내 번호 알려줬다고. 그럼 아까 복도에 나갈 때 전화 걸었던 분이 어머니시냐? 그때 알려 달라고 하신 거고?”


“그렇다네. 그리고 자네 폰이 꺼져 있지 않았나. 그래서 괜찮을 줄 알았네만.”


“그리고 거기서 내가 남자라고 말했지?”

“어머니께서 뉴스를 보셨단 말일세. 자네도 과대 놈이랑 착각 당하는 건 싫지 않은가.”


“그건 그런데. 아, 어떡하지. 같이 밥 먹자고 하셨는데.”

“그래도 다행일세. 아버지는 죽이시겠지만, 어머니께선  죽이실 수도 있다네.”


안 죽인다고는 않는 구나.


“그런데 말일세, 자네.”


마왕이 주제를 돌리려 했다. 나는 그녀 기분을 상하게 만든 게 미안해서 일부러 눈치없는  대답했다.

“자네 계획 있지 않은가.”

“그렇지.”

“유리가 필요한 부분이 있는 겐가? 자네 혼자로도 충분히 이룰 수 있을 것 같네만.”

“그래서 말했잖아. 필수는 아니라고.”

“그럼 어디에  거였나?”

“과대한테 붙여 놔야지. 걔 반응  보게.”


“하긴, 자네 말이 맞군. 지금쯤 그 놈은 무척 쫄릴 게야.”

마왕 말이 맞았다. 애초에 과대가  거짓말은 금방 들통나는 거였다. 그때 우리말고도 보는 사람이 많았고, CCTV에도 내가 양아치를 쓰러뜨린 게 제대로 찍혔다. 그런데 나는 가만히 있는데다, 그의 본성을 녹음한 파일도 가지고 있다. 내가 언제 이걸 퍼뜨릴지 그는 지금 전전긍긍하고 있을 것이었다.


나는 그걸 말하면서 웃음을 참지 못했다.

“아, 걔가 얼마나 겁먹었을까. 직접 보진 못해도 알고는 싶었는데.”


“……역시 자네는 용사 실격이구만.”


“시끄러. 그런 너도 웃고 있잖아.”


“짐은 마왕이지 않나?”

“쳇.”


우리 둘은 웃으면서 마저 치킨을 먹기 시작, 하려다 갑자기 마왕이 소리질렀다.


“아!”

“깜짝이야! 왜?”

“짐이란 자가 이걸 깜빡하고 말았군!”

마왕이 비닐 봉투 안에 있던 티슈로 손에 묻은 치킨 기름을 닦았다. 그러더니 어제 여기 들어올 때 가지고 왔던 가방에서 뭔가를 꺼냈다.


“치킨하면 이거 아닌가!”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내놓은 건, 어제 내게 보여줬던 캔맥주였다.


아니, 치킨에 맥주가 맞긴 한데. 낮부터 술을 마신다고? 낮술하면 밤에 마시는 것보다 더 취한다고 들었는데?


그런 의문과 황당함을 담아서 물었다.


“너 그래도 돼? 이 시간에?”

“괜찮네. 짐에겐 있어 맥주는 물과 다를 게 없다네.”


“너 주량이 얼마나 되는데.”

“소주 4병 이후로는 세어보지 않았네.”

“4병 이후로 기억이 없는 게 아니고?”

“짐을 뭘로 보는 겐가, 아니면 물로 보는 겐가?”

“됐다. 그냥 마셔라, 마셔.”

이상한 말장난은 넘기기로 했다. 게다가 맥주가 500미리짜리라고 해도, 술에 엄청 약한 게 아니라면 괜찮다고 생각했다.

푸칵!

내가 마시라는 말을 하자마자 마왕은 기름 닦은 손으로 캔을 땄다. 한 손엔 치킨을, 다른 한 손엔 캔을 들고는, 치킨을 베어먹었다. 기름으로 번들거리는 입술을 오므린 채 치킨을 씹다가, 이번엔 맥주를 들이켰다.

어제부터 가방에 있어서 미지근할 맥주를, 마치 광고처럼 시원하게 마시던 그녀가 캔을 내리며 외쳤다.


“꿀꺽 꿀꺽 꿀꺽, 캬아! 이 맛이로구만! 우하하하, 꺽, 하하하!”

먹는 모습이 거의 산적이었다. 게다가 트림한  웃으며 얼버무리는 것까지. 내게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데, 날 이성으로 볼  없었다.

고기조각이 낀 이빨을 드러내며 웃는 모습에서, 이상하게 오늘 아침 자고 있던 그녀의 모습이 연상됐다. 그때 조그마한 분홍 입술사이로 보였던 조그마한 앞니가 귀엽다고 생각했다.

이제서야,  마왕이 나랑 같은 침대에서 자고 있었는지 의문이 생겼다. 사실 눈을 뜨자 마자 물어봤어야 하던 거였는데, 간호사 누나와 유리가 오는 바람에 까먹고 있었다.

“야.”


“음? 왜 그런가?”


“너 왜  침대에서 자고 있었냐? 밥도 먹고 양치도 했으면서.”


“아 그거 말인가. 아까 말하지 않았나.”


그렇게 말하면서 치킨을 베어 물었다. 마왕은 다 삼키고 나서야 말을 이었다.

“자네가 너무 기분 좋게 자고 있었다고. 그런 걸 짐이  보고 배기겠나?”

“뭐?”

“으음, 꿀꺽꿀꺽.”


마왕은 맥주를 마시면서 대답을 거부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