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9화 〉어제 지헌과 광란의 밤을 보냈지! (19/72)


  • 〈 19화 〉어제 지헌과 광란의 밤을 보냈지!

    “지헌아,   일인실에 있는 거야?”

    찾아온 사람은 유리였다. 검은 슬랙스에 정사이즈보다 더  베이지색 니트를 입어서, 꾸민 것 같지 않으면서도 꾸민 것 같은 차림이었다. 그녀는 어깨에 내가 사줬던 가방을 메고, 다른 손엔 병문안 선물인지 하얀 비닐 봉투를 들고 있었다.

    유리는 문을  때 복도 쪽을 보고 있어서 안에 있는 마왕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문이 완전히 열리고, 발걸음을 옮기기 직전, 그녀는 마왕을 발견했다.


    “어?”


    웃고 있던 유리의 얼굴이 굳어졌다.


    “오! 유리아닌가!”

    고개를 돌려  쪽을  마왕이 밝게 소리쳤다. 놀란 그녀와 달리, 마왕은 반가운 모양이었다.

    “어서 들어오게. 지헌 병문안인가?”


    그렇게 말하면서 마왕이 문 쪽으로 향했다. 검정 추리닝을 입은 등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지만, 유리가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다.


    “선배, 선배가 왜 여기 있어요?”

    “당연하지 않은가! 짐을 구해준 영웅인데, 마지막 가는 길 정도는 봐줘야 하지 않겠나!”

    “잠깐만! 왜  멋대로 죽이는 건데!”

    헛소리를 날린 마왕에게 소리쳤다. 그러자 그녀는 날 돌아보며 당당하게 답했다.

    “짐이 언제 자네가 죽었다고 했나! 그저 얼마 안 남았다고 했네만!”


    “내가  얼마 안 남아…… 아!”


    유리가 와서 까먹었던 중요한 사실을 기억해 냈다. 마왕 부모님이 날 여자로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다. 내가 죽진 않을 거라고 했지만, 방금  말을 보니 내 사망은 확실히 정해진 거였다.


    내가 절망에 빠진 사이, 마왕은 유리를 병실 안으로 데려왔다.


    “거기 서있지 말고 어서 들어오게나.”


    “네? 네에.”

    힘없이 대답하면서도 유리가 병실로 들어왔다. 마왕은 그녀의 손을 잡아 끌면서, 그 손에 들린 흰 봉투를 낚아챘다.


    “뭘 굳이 사온 겐가. 맨손으로 와도 괜찮은데 말이지.”

    마치 자기가 입원한 것 마냥,  위해 사왔을 병문안 선물을 뒤적였다.

    “오, 이건 뭔가?”

    마왕이 기뻐하는 목소리를 내며, 봉투에서 꺼낸  딸기가 든 팩이었다.


    “짐이 딸기 좋아하는 걸 어찌 알고 사온 겐가. 조금만 기다리게. 짐이 금방 씻어오지.”


    딸기가 든 플라스틱 팩을 들고 병실 안에 있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잠시동안 나와 단둘이 있게 된 유리는 마왕이 있는 곳을 잠깐 쳐다보다가, 내게 말했다.


    “지헌아, 너 많이 다쳤어? 괜찮아?”


    유리에게 걱정 어린 말을 듣는 게, 좀 어색하게 느껴졌다. 감기에 걸렸을 때도 걱정하긴 했지만, 이런 느낌은 아니었다.

    일단 낯설게 생각하면서도 괜찮다고 대답했다.


    “어, 어. 괜찮아. 크게 다친 건 아니야.”

    “입원할 정도면 위험한 거 아니야?”

    “괜찮다니까. 링거도 안 달았잖아. 봐봐.”


    나는 양손을 펼쳐 보였다. 말한 대로, 너무 경상이라 병원에선 링거를 안 달아도 된다고 했다. 달고 싶냐고 물어봤지만, 굳이 안 해도 되는데 일부러 팔에 바늘 꼽고 싶진 않았다.
    아무 것도 없는 내  팔을 본 유리가 작게 미소지었다.


    “다행이네. 그런데 입원은 왜 한 거야? 그리고 왜 일인실이야?”


    “그거?  복잡해.”

    나는 머릿속으로 할 말을 정리했다.

    “그러니까, 음…… 쟤, 아니 선배 아버지께서 내 이야기를 들었나봐. 그래서 병원에 나 잘 좀 봐달라고 한 거고, 그런데 병원이 여길 주더라.”


    “진짜?”

    “게다가 치료비랑 입원비는  분께서 다 내신다더라.”

    “와, 선배 부자인가봐.”

    “그러게. 나도 그냥 건물주인  알았거든? 그런데 더한 사람인가봐.”


    내 말을 듣던 유리가 갑자기 미간을 찡그렸다.

    “그런데 건물주인 건 어떻게 알아?”

    “뭐?”

    “선배 아버지가 건물주인 건 어떻게 아냐고.”


    순간 말문이 막혔다. 건물주인 걸 알게  경위를 말하려면 검도장에 간 걸 말해야 하고, 검도장에 간  말하려면 왜 갔는지 말해야 했다. 내가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이걸 유리에게 말하면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이때 날 구원해준 사람은 마왕이었다. 어감이  그렇지만.


    “자, 오래 기다렸구만!”


    물이 뚝뚝 떨어지는 플라스틱 통을 든 채 마왕이 화장실에서 나왔다. 소매를 걷어 흰 팔뚝을 보여주던 그녀는 아직까지 서 있는 유리에게 말했다.

    “계속해서 서 있었나? 침대에 앉게.”


    “……”


    유리는 말없이  쳐다보다가, 마왕이 말한 대로 침대에 앉았다. 그것도 바로 내 옆에.


    마왕도 그걸 보고 놀랐는지, 그 모습을 눈을 크게 뜨고 쳐다봤다. 그러다 딸기 팩을 침대 옆 서랍장에 두고, 자신이 말했던 침대인 간병인 침대로 향했다. TV와 환자 침대 사이에 있는 간병인 침대를 끌어서 나와 마주보는 형태로 앉았다.


    “자, 먹게.”


    서랍장 위에 뒀던 딸기 팩을 잡아서 내밀었다. 금방 씻어서 물방울이 맺힌 딸기가 형광등 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마왕은 다른 손으로 딸기를 집어서, 꼭지만 남기고 베어 물었다.

    “음!”


    광고라도 찍는 것 마냥, 눈을 질끈 감아서 표정으로 딸기의 상큼함을 표현했다. 그녀는 딸기를 씹으면서 남은 꼭지가 어디에 있으면 좋을지 주변을 둘러봤다. 마왕이 버린 곳은 간병인 침대였다. 인조가죽으로 되어 있으니 거기다 버려도 문제없긴  것 같았다.

    딸기 꼭지를 자기 옆에 두면서, 마왕은 웃으며 유리에게 말했다.

    “지금이 딸기 철은 아니지만 정말 맛있군!”

    “네, 네?”


    “얘는, 아니 선배는 하우스 딸기가 더 맛있다고 생각하거든. 그래서 그래. 그냥 깊게 생각하지마. 그게 편해.”

    유리에게 마왕 사용 설명서를 알려주며, 나도 딸기를 집었다. 다치지 않은 오른손으로 딸기를 집어 한 입 베어물었다. 그러자 아삭한 딸기 과육이 으스러지며 상큼한 과즙이 흘러나왔다.


    “음, 맛있네. 유리야 이거 어디서 산 거야?”

    “맛있지. 이거 앞에 사거리에서 할머니가 팔길래 거기서 사왔지.”

    예의상 한 말이었는데 유리가 내게 상세히 알려주기 시작했다.

    “아침이 아직 쌀쌀한데 거기서 장사하시더라고, 하나라도 더 사면 빨리 들어가실까 싶어서 사왔어.”


    “어, 그래?”


    “응!”


    눈을 반짝이며  쳐다봤다. 마치 자기 행동을 칭찬해달라는 아이 같았다.

    “자, 잘 했어.”

    “그렇지?”

    내 칭찬을 듣고 유리가 미소 지었다. 그러면서 자길 보라는 것처럼 은근히 마왕을 쳐다봤다. 그런 시선에도 불구하고 마왕은 딸기에만 집중했다.


    “암냠냠, 암냠냠, 암냠냠, 암냠냠!”


    “야! 작작 처먹어!”

    아무 말 안 하고 가만히 쳐다보니, 자기 혼자서 3분의 1이나 먹고 있었다.

     말을 들은 마왕이 입안에 딸기가 가득  채로 말했다.

    “숙녀한테 처먹으라는 말이 뭔가!”


    “숙녀가 음식 먹으면서 말하냐!”

    “짐을 그런 프레임으로 속박하려 들지 말게! 암냠냠!”

    “아니 먹지 말라고! 나랑 유리도 좀 먹자!”


    내가 자신을 언급하자, 유리가 자애로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괜찮아, 지헌아.  사오면 되지.”

    “아니 그래도 네가 사왔는데,”

    “괜찮다니까? 선배님이 많이 배고프신가 봐. ‘저렇게’ 드시는 걸 보면.”


    말만 들으면 인자한 것 같았지만, 어딘가 연기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저렇게’를 강조하는 모습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왠지 모를 위화감에도 나는 유리에게 대답했다.

    “아니, 내 아침도 뺏어 먹었으면서, 무슨 배가 고파.”

    “지헌아, 그럴 수도 있잖아.”

    “맞네! 그럴 수도 있지 않은가!”

    “넌 그러지  마!”


    마왕에게 소리치며 딸기 팩을 뺏다시피 가져갔다. 거의 절반이나 먹어 놓고는, 그녀는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아직 먹고 있지 않은가.”

    “너도 줄 거야. 걱정하지마.”

    그렇게 말하면서 침대  서랍장을 열었다. 거기서 내가 이 병실에 들어올 때부터 있던 과도를 꺼냈다. 녹색 플라스틱 검집을 벗기고 날을 확인했다. 녹도 슬지 않았고, 먼지도 껴있지 않았다. 이 정도면 쓸  있을 것 같았다.


    칼로 꼭지 부분을 도려내고, 딸기 과육만 있는 부분을 팩에 담았다.

    “유리야, 먹어.”

    “고마워, 지헌아.”


    유리가 웃으면서 딸기를 가져갔다. 그런데  웃음에 뭔가 담겨 있는  같았다. ‘네가 그럴 줄 알았다’는 자만 섞인 눈빛이었다.

    계속해서 딸기 꼭지를 따면서 어제 과대가 했던 말을 생각했다. 유리가 내가 자신을 좋아했던 걸 알고 있었고, 그걸 과대에게 말했다는 것이었다.

    도대체 그걸 왜 말했을까? 라는 의문이 드는 동시에, 어제 저녁 녹음한 걸 들려주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유리는 이제부터 나와 마왕이 실행할 계획에서 필요 없는 존재였다. 녹음한 걸 들려주는 행위는 그녀에게 상처주는 행위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런 무의미한 행위더라도, 유리가 상처받는 것 자체에 의미가 있었다.

    날 버리고 잘생긴 과대를 선택했는데, 그런 미남이 사실 자기를 성욕을 해소하는 존재만으로 생각했던  알면 어떻게 될까?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면서 날 봐주지 않을까?

    “지헌이여.”


    어두운 생각에서 꺼내준 건 마왕이었다. 그녀는 내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짐에게 주게.”

    “뭐?”

    “과도 말일세. 짐이 하지.”

    딸기 꼭지 따는 걸 자기가 하겠다는 의미였다. 나는 조금 전 생각했던 걸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에 억지로 농담을 건넸다.

    “그러면서 네가  먹을 거잖아.”

    “아닐세. 짐은 충분히 먹었네. 어서 주게.”


    “먹을 거면서.”


    농담을 날리며 칼날을 잡고 손잡이를 마왕에게 향했다. 이때 유리가 끼어들었다.

    “아니에요, 선배. 제가 할게요.”

    칼 손잡이를 향해서 움직이는 유리의 손을 보며 생각했다. 칼을  마왕, 칼을 쥔 유리. 둘 중에 어느 게 나은 미래일까 싶었다. 하지만 나온 건,

    “아니야, 내가 할게.”

    칼을 쥐고 있는 나였다.


    “짐이 한다고 하지 않았나.”


    “내가 한다니까? 지헌아.”

    계속해서 자신이 하려고 하는 둘에게 설명을 덧붙였다.

    “사실 어제 베인 후로 다른 사람 손에 칼이 들린 걸 보기 좀 그렇더라. 그리고 내가 쥐고 있는  괜찮으니까 내가 할게.”


    “……큭!”

    “그렇구나, 알았어. 네가 해.”


    유리는 웃으며 수긍한 반면, 마왕은 유리에게 보이지 않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누가 보면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 하는 것 같았지만, 난 그녀의 올라간 입꼬리를 볼  있었다.

    하긴,  잘려도 달려드는 놈한테 무슨 PTSD냐. 웃기겠지.


    딸기를 거의 다 먹을 때쯤, 유리가 마왕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물었다.

    “선배. 선배 혹시 여기서 자고 갔어요?”


    그런 의심을 하는 것도 당연했다. 어제 본 차림과 똑같은 옷을 입은 마왕이, 약간 부스스한 머리를 한 채 병실에 있었으니까.


    그런데, 내가 칼을 가지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음?”


    유리의 질문에 마왕이 딸기를 씹은 채 그녀를 쳐다봤다. 그리고 입안에 있는 걸 다 먹더니, 이렇게 말했다.

    “음! 어제 지헌과 광란의 밤을 보냈지!”


    ……내가 칼을 가지고 있어서 정말로 다행이었다. 진짜로.

    유리는  말을 듣자 마자 얼굴을 굳혔다. 하지만 저번에 자취방 때와는 달랐다. 눈을 부릅뜨면서 살기까지 담아서 마왕을 쳐다봤다.


    혹시 몰라서 과도를 서랍에 넣고 바로 닫았다.  직후 마왕에게 따졌다.

    “너 그렇게 좀 말하지 마라, 좀.”

    “지헌아.”

    지금껏 유리에게 들었던 말  가장 차가운 말투로 날 불렀다.

    “저 말이 사실이야?”

    그녀의 살기는 내게까지 향하고 있었다. 그걸 보며 난 황급히 진실을 알려줬다.


    “아니 게임한 거야, 게임. 얘가 말을 항상 이상하게 한단 말이야.”


    “얘?”

    “아니 선배.”

    “선배, 진짜에요?”

    유리의 살기를 받으면서, 마왕이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그렇네만. 주위를 둘러보게.”

    그 말에 그녀가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폈다. 어제 게임하고 바로 잔 바람에, TV 아래 서랍장에 스위치독이 설치되어 있었다. 게다가 간병인 침대와 환자침대에도 게임 패키지와 스위치가 널브러진 게 보였다.


    “지헌아, 진짜야?”

    “당연하지. 네가 뭘 생각하는지 아는데, 그건 절대 아니야.”

    애초에 마왕을 이성으로 보기엔 내 자존심이 상했다.

    “……그래?”

    잠깐동안 생각하던 유리가 아까처럼 자애로운 표정으로 돌아왔다. 마치 이중인격 같은 변화에, 차라리 그녀가 안 오는 게 나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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