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4화 〉오징어, 같이, 생겼으면, 바다에서, 살아, 야, 지. (14/72)


  • 〈 14화 〉오징어, 같이, 생겼으면, 바다에서, 살아, 야, 지.

    “지헌아, 같이 화장실 가자.”


    같이 화장실 가는 건 여자애들의 특권인 줄 알았는데, 사실 잘생긴 남자애도 포함되는 모양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내 팝콘을 아예 마왕에게 건넸다. 그때 과대가 내게 다가와 속삭였다.

    “빨리 와라. 씨발새끼야.”

    설마 30분도 안 되서 연달아 쌍욕을 들을 줄은 몰랐다.


    그 말을 듣고 벙쪄서 과대 얼굴을 바라봤다. 그런 욕을  사람이라고는  수 없는 웃음을 지으면서, 과대는 내 소매를 잡아당겼다.

    “왜 그래, 지헌아. 빨리 가자.”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면서, 문득 마왕을 내려봤다. 감이 날카로운 그녀는 과대가  말을 들었는지 날 향해 웃고 있었다.

    “왜 그런가, 자네. 어서 다녀오게.”

    그냥 갔다오라는  치고는 그 웃음에 담긴  많았다. 그렇게 말하더니, 한손으로 OK사인을 만들었다.


    “이건 충분하니 시원하게 싸고 오게.”

    싸(우)고 오라는 말이었냐. OK사인은 괜찮다는  아니라 돈이었고.


    “여자애가 무슨 말을 하냐.”

    그렇게 말하면서 과대가 이끄는 대로 갔다. 걸으면서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뒷모습만 보여줬다. 그렇게 들어간 화장실 안엔 아무도 없었다. 과대는 정말로 아무도 없는지 변기 칸 문을 일일이 열어봤다. 난 그가 그 일을 끝날 때까지 화장실 입구 근처에서 기다렸다.


    확인하는 절차를 끝낸 과대는 날 불렀다. 짝다리를 서서, 한쪽 허리춤엔 손을 얹고 남은 손으로 날 향해 까딱거리면서, 고개는 큰 한숨을 쉬는 것처럼 푹 숙였다.

    “야,  이리 와봐.”

    건들거리는 자세로 도대체  할까 싶어서, 가까이 다가갔다. 내가  걸음 정도 거리를 남기고 멈추자, 그가 말했다.

    “솔직히 생각해 봐라.”


    그렇게 말하는 과대의 얼굴은 평소와 다르게 보였다. 상냥하고 친절한 웃음은 어디가고, 이제는 어린 폭군처럼 보였다.

    “너랑,”

    날 부르던 손으로 날 가리켰다.

    “선배랑,”

    이제는 마왕과 유리가 너머로 있을 벽을 가리켰다.

    “급이 맞다고 생각하냐?”


    그가 한 말을 듣고 짜증이 나서 머리가 아파왔다.


    “생긴 대로 놀아야지, 지헌아.”


    갑자기 그가  팔을 들었다. 날 때리려 한 게 아니라, 내 어깨 양쪽에 손을 올리기 위함이었다. 마치  키를 줄이려는 듯이 어깨를 강하게 눌렀다.

    “안 그러니?”

    웃으면서 그 잘생긴 얼굴을 내게 들이밀었다. 향수냄새를 풍기는 그가 짓고 있는 표정엔 경멸과 조소가 담겨있다는 걸 쉽게 알 수 있었다.


    “잘해보자, 우리. 응?”

    그렇게 말하면서 손을 치우는데, 아까 고등학생 양아치보다 더 짜증이 몰려왔다. 분명히 정해야 할 건, 내가 느끼는  감정은 분노가 아니라 짜증이었다. 이런 놈한테 분노라는 단어를 쓰기조차 싫었다.

    과대는 이제 세면대 앞으로 가서 거울로 자기 얼굴을 봤다. 헤어스타일이 조금 헝클어졌는지 손을 들어 머리를 건들었다. 그러면서 옆에 선 내게는 시선도 주지 않고, 물을 틀면서 말했다.


    “지헌아, 우리 눈치  있게 살아보면  될까?”


    손을 적시고 허공에 물을  그는 다시 머리를 매만졌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차라리 이 놈을 때릴까 생각했다. 아까 마왕이 그랬던 것처럼 합의금은 그녀가 대줄 거였고, 뼈가  두대 부러지지만 않으면 괜찮았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면 안 되는 이유가 있었다.


    과대는 사교적이고 잘생긴 얼굴에 머리도 좋은 반면,  그저 방구석에 처박혀서 안 나오는 히키코모리였다. 만약 그를 때린다면 과에서 고립되거나 심하면 퇴학당할 수도 있었다. 유리도 더 이상 날 좋게 보지 않는 게 당연했다.

    속으로 그런 계산을 하면서 두드려 패지 않기 위해 화를 삭였다. 이럴 때는 현대보단 이세계가 더 나았다. 거기서라면 용사의 지위를 이용해 이런 놈을 죽일 수도 있었다. 물론 정치상 입장은 불리해지더라도.

    그런 와중에도 과대는 태평하게 거울을 보면서 말했다.


    “보니까 너 유리 좋아한다더만. 유리가 그렇게 말하던데.”


    “뭐?”

    “우리 이렇게 하자. 내가 유리 줄 테니까, 너는 선배 주라.”


    그 말은 지금까지 한 말 중에 가장 최악이었다. 게다가 유리가 내가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는 충격에 머리가 복잡했다.


    과대는 거울에서 고개를 돌려 날 쳐다봤다.  초간  얼굴을 보다가, 다시 거울로 시선을 돌렸다.

    “얼굴 풀어라, 아직 유리랑 안 잤으니까.”

    “……”

    “선배가 나 안 좋아하는 건 걱정 말고. 다음주쯤이면 나랑 손잡고 다니는 거 볼 수 있을 거다.”


    “……”


    “야, 내 말 안 듣냐?”

    그가 다시 수도를 틀어 손을 적셨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손을 내게 향하더니, 내 쪽으로 털기 시작했다.


    “야.”


    그가 튀긴 물방울이 얼굴까지 닿았다.


    “고마워 해야지.”


    또 한 번 물을 튀겼다.

    “야, 너한테는 유리도 아까워.”


    물을, 튀겼다.

    그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말한마디마다 손을 내게 털었다.

    “오징어, 같이, 생겼으면, 바다에서, 살아, 야, 지.”


    얼굴에 묻은 물방울들 때문에 어느 정도 머리가 정리됐다. 게다가 물이 묻을 때마다 짜증이 치솟았다.

    손을 들어 얼굴을 닦자, 그가 내게 다가왔다. 이제는 내 옷에 물을 닦으며 말했다.

    “왜 땅으로 나와서 사람들 놀라게 하냐. 그러지 말자, 좀.”


    향기로운 향수 냄새가 나는 가운데, 혈압이 올라가 다른 의미로 얼굴이 뜨거워지고 귀가 울렸다.

    “나 먼저 나갈테니까, 알아서 와라?”

    이제 그가 화장실을 나갔다.

    화장실에 들어와서 그가 나갈 때까지, 그 잠깐동안 내가 아무 것도 못한  후회스러웠다. 차라리 마왕에게 손을 벌리지 않고 퇴학을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놈을 패고 싶었다.

    그런 걸 떠올리자 마자,  몸이 용수철처럼 알아서 앞으로 나아갔다. 머리에 피가 쏠려 회색 블레이져의 뒤를 발로 까고 싶다는 생각밖에 하지 않았다. 과대가 건들었던 화장실 문이 완전히 닫히기 전에, 그걸 손으로 밀치고 밖으로 나왔다. 저기  걸음도 안 되는 거리에 그 놈이 있었다. 이제 내가 할 일은 그에게 다리를 휘두르는 것만 남았다.


    그때, 그의 어깨 너머로 유리와 마왕이 보였다.  여자 둘은 우리가 아닌 다른 쪽을 보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엔 아까 내가 팼던 고등학생이 있었다. 교복을 입은 그의 손엔, 은빛으로 빛나는 무언가를 쥔 채였다.

    “야! 흰색머리!”



    몇 분 전

    유리는 선배와 즐거운 듯이 이야기하는 지헌을 보고 왠지 모르게 마음이 불편했다. 게다가 선배가 말한 ‘오늘밤’ 이란 단어. 그건 누가 들어도 그 짓을 의미한다는 건 알  있었다. 어제 지헌과 선배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걸 알았으면서도, 아직 그런 둘의 모습을  때마다 가슴이 뛰었다.


    혼란스러운 마음을 안고 하준이를 내려봤다. 유리가 살면서 이렇게 잘생긴 남자는 현실에서 처음이었다. 가장 보기 좋다는 키인 183센티에, 갓 성인이 됐는데도 차를 소유했고, 어디에 내놔도 부끄럽지 않을 외모를 가졌다. 그런데 웃으면 빛이 날 것 같은 그의 얼굴은 소희 선배를 향했다.

    남자애들이 화장실로 향하고,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유리는 팝콘 통을 치우고 선배 옆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선배.”


    “음? 왜 그런가?”


    선배라는 인물은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행동거지와 말투도 이상하고, 저런 얼굴을 가졌는데 가꾸기는커녕 매일 트레이닝복만 입고 다녔다. 외모는 따라가지 못할지라도, 다른 건 유리가 쉽게 이길 수 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준과 지헌은 그녀만 봤다. 게다가 선배는 이미 지헌과 사귀고 있는데도 자신와 만나는 하준에게까지 꼬리를 쳤다.


    “하준이 저랑 사귀고 있거든요?”

    “알고 있네만.”


    “알면서 왜 그래요? 아니, 선배도 지헌이랑 사귀고 있잖아요.”


    “지헌이랑은 사귀는 게 아니네만.”

    “사귀는 게 아니라고요? 그럼 혹시 섹......!”


    “자네가 생각하는 것도 아닐세. 그저 짐과 지헌은 친구일 뿐이야.”


    “친구라고요? 그럼 오늘밤, 오늘밤 그건 뭔데요.”


    “그건 그저 운동일세. 지헌이 요즘 짐과 같이 운동을 하고 있다네.”


    유리는 지금까지 봐왔던 지헌을 생각했다. 그는 체육시간에도 뛰어 놀지 않으며 그늘에서 책만 읽었다. 수영장에서 봤던 그의 몸매도 도저히 운동하고 있는 몸이라고 볼 수 없었다.

    그녀의 말이 믿기지 않으면서도, 이상하게 안심하는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걸 오랜 친구 사이니까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왜 그런 겐가?”

    유리가 계속  씹은 표정을 하고 있자, 소희는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동양인 중에선 볼 수 없는 큰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아뇨, 아무 것도 아니에요.”


     눈이 부담스러워 잠깐 시선을 피했다. 그러다 왜 그녀에게 말을 걸었는지 생각해 냈다.


    “선배, 하준이한테 가깝게 지내지 마요.”


    “짐도 그렇게 하고 있다네. 그런데 그 놈이 다가오는  어쩌겠는가.”


    “그럼 피해 다녀야죠!”

    그만 큰소리를 내고 말았다. 유리는 자기도 모르고 낸 소리에 놀라서 주위를 살펴봤다. 자신들처럼 상영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유리 쪽을 쳐다봤다. 그러자 그녀는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하준이가 오면, 피하시면 되지 않아요?”


    “글쎄 그 놈이 자꾸 다가온단 말일세. 그리고 짐은 지헌 일편단심이니 걱정말게.”

    “아까는 친구사이라면서요.”

    “남녀관계라는 게 좀 복잡한 일이지 않나. 친구였다가, 연인사이가 될 수도 있는 걸세.”


     이 느낌이었다. 능글맞게 웃는 선배가 지헌이 서로 손을 잡는 상상을 하니 가슴이 조여왔다.

    “자네도 하준과 만날  그러지 않았나?”


    선배의 질문에 처음 그를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지헌이와 같이  과에는 쉽게 친해질 수 있을 만한 여자아이가 없었다. 하지만 그때 그가 내게 다가왔다. 처음 술자리가 시작될 때에도 눈에 띄던 그가 일부러 내게 와서 말을 걸어주다니, 믿기지 않았다.

    그런 잘생긴 사람이 내게 다가오자, 지헌이 녹일 수 없었던 내 마음을 쉽게 녹여줬고, 나는 그에게 반하고 말았다. 정말 행운으로, 그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고, 며칠 전 나는 그와 사귀게 되었다.


    이 감정을 잊지 않으며 소희 선배에게 반박했다.

    “아니요. 제가 첫눈에 반한 건데요.”

    “그런 겐가. 첫눈에 반했다고.”

    그렇게 대답하는 선배는 먼 회상을 추억하는 것처럼 허공을 바라봤다. 그러더니 다시 날 보며 말했다.


    “첫인상보다 불확실하면서도 확실한 게 없지. 인간이란 건 처음 본 그 모습만으로 상대방을 판단하네. 자네는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이 첫모습과 동일한가?”


    그러자 최근 들어 선배에게 다가가는 하준을 떠올렸다. 아까는 그녀가 도착하자, 일부러 카드를 주며 팝콘을 사오라고 시키기까지 했다. 지헌이와 함께 돌아오니 선배와 재미있게 이야기하는 그.

    아니, 이건 나와 하준이 사이를 멀게 만들려는 소희 선배의 계획일지도 몰랐다. 하준은 지금까지 이런 기분은 처음이라며, 다른 여자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했다.

    “선배, 그런 말 해도,”


    “사실 짐도 지헌에게 첫눈에 반했다네.”

    “네?”

    “지헌을 처음 봤을 때, 그렇게 아름다우면서도 처절한 건 처음 봤네. 게다가 자신의 일부를 희생해서라도 승리하려는  의지.  의지는 정말……!”

    다시 허공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 빛이 감돌았다. 세상 경험이 적은 유리에게는 알 수 없는 눈빛이었다. 사나우면서도, 사랑스러우며, 즐거우면서도, 슬퍼 보였다.

    유리는 지헌과 선배가 게임에서 만났다고 들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말하는 사람이 게임에 대한 이야기한 거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둘 사이에 무언가 있다고 생각한 순간, 그녀는 선배 너머에 있는 사람에게 시선이 끌렸다.


    근처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그는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유리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

    그녀는 그렇게 충혈된 눈을 처음 봤다. 잠을 못 자서 봤던 눈과는 차원이 달랐다.

    원인 모를 무언가에 섬찟함을 느끼면서, 어서 그가 시선을 돌리길 바랬다. 하지만 그는 유리 쪽을 보며 소리쳤다.


    “야! 흰색머리!”

    그렇게 말하더니 여기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런 그의 손에 눈에 띄는 게 하나 있었다. 조명 때문에 하얗게 보이면서도 은색으로 보이는 금속 물건이었다. 그게 칼이라는 걸 알아챌 때는 이미 그가 자신으로부터 몇 걸음  남았을 때였다.


    "그 새끼 어디 있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