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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화 〉학식은 돈까스지-2 (5/72)


  • 〈 5화 〉학식은 돈까스지-2

    “소희 선배! 제가 선배님 번호 없는  같은데 주실래요?”

    하면서 마왕에게 자기 폰을 내밀었다.

    마왕은 자기에게 내밀어진 폰을 보면서 다시 떡볶이를 집어먹었다. 과대는 마왕이 떡볶이를  씹고 삼킬 때까지 기다렸고, 마왕은 과대를 올려 보며 물었다.


    “짐이  그래야 하나?”


    “네?”

    과대는 거절당하는 게 당황스러운 듯 눈을 크게 떴다. 유리는 그런 과대의 팔을 이끌어 자리를 뜨려 했다.

    “하준아, 가자. 교수님이 빨리 오랬잖아.”


    “아니, 그래도. 잠깐만 유리야.”


    그는 유리의 팔을 쉽게 풀어버리고 다시 마왕에게 폰을 내밀었다.

    “선배님, 그러지 마시고 번호 좀 주세요. 네? 저번에 만났을 때도 안 주셨잖아요.”


    “짐이 왜 그래야 하지?”

    “어, 그게, 좀 있으면 MT가니까, 갈 때 연락해야 되는 일이 있을 수도 있잖아요.”


    “그렇다면 학생회실에 물어보게. 거기서 정확히 알려주지 않겠나. 그리고 짐은 MT에  생각이 없네.”


    “작년엔 참가하셨다면서요.”


    “작년엔 자네 같이 끈질기게 다가오는 놈이 없었기 때문이지. 자, 이게 가보게나. 자네 ‘여친’이 기다리지 않나.”

    마왕은 ‘여친’이란 말에 강조하며 유리를 향해 턱짓했다. 그녀가 가리킨 유리는 인상을 찌푸리면서 과대 옆에 서 있었다. 마왕이 자길 보고 있다는 걸 알아채자, 그녀를 노려보며 사나운 말투로 말했다.

    “선배님, 저희는 바빠서 가볼게요. 죄송해요.”


    그러고는 내 옆자리에 있던 라면 그릇을 들고 먼저 가버렸다. 발꿈치로 땅을 찍듯이 걸어갔는데, 저건 뭔가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으면 나오는 어릴 적부터 있던 습관이었다.
    과대는 온몸으로 짜증을 표출하는 유리를 보고, 황급히 말하며 그녀를 따라갔다.


    “소희 선배! 나중에 봐요. 알았죠?”

    마왕은 과대가 그러거나 말거나 하는 표정으로 손을 흔들었다. 다시 보자는 의미가 담긴 안녕이 아니라, 날아다니는 파리를 쫓는 듯한 행동이었다. 과대가 그렇게 자리를 떠나자, 그녀는 다시 떡볶이를 먹기 시작했다. 아까 식당에 들어올 때 언짢아 보이는 모습에 나는 눈치를 살폈다.


    “저기.”


    “왜 그러는가.”


    “혹시 쟤랑 아는 사이야?”


    “아는 사이고 뭐고 아무 것도 아닐세! 그저 귀찮은 놈일세, 저 놈은.”

    “그렇다면 아까 만났다는 건 뭐야?”


    “1학년이 듣는 강의 좀 알아보려고 했는데 저 놈이 먼저 접근하지 뭔가. 자네가 뭘 듣는지만 알고 헤어졌는데, 이렇게 만날 때마다 번호를 묻더군, 귀찮게.”

    “내 강의는 뭐하려고?”

    “자네 기억이 돌아왔는지 확인해야 되지 않나!”

    “잠깐만, 그런데 내가 이세계 다녀온 건 어떻게 알았어?”

    “흐리멍텅한 동태눈이던 놈이 하루아침에 눈빛이 바뀌면 분명 무슨 일이 있는 거겠지, 뭐겠나.”


    동태눈이라니. 그런 소릴 들은 건 처음이었다.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눈이 아니라 마왕의 심리상태였다. 과대가 말을 건 이후로 저렇게 뾰로퉁한 얼굴을 하면서 애꿎은 떡볶이 떡을 젓가락으로 쪼개고 있었다.


    “저 놈 때문에 치즈가 다 굳어버렸구만!”

    “에이, 그러지 말고. 이거 먹어.”

    기분 풀라는 뜻으로 내 접시에서 지금까지  먹고 남겨뒀던 물건을 건네 줬다.

    “왜 피클을 건네는 겐가! 짐은 고기가 먹고 싶네만!”


    “아니 아까 먹었으면 충분하잖아! 고기만 먹지 말고 야채도 먹어!”

    “엄마처럼 왜 그러는 겐가!”

    “너 엄마가 있어?”


    “……짐에게 시비 거는 겐가?”


    “아니! 그게 아니라!”

    전생에 마왕이었으니 현재에도 범상치 않은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다보니 그녀에게 어머니라는 존재가 있을 수 있다는  깜빡하고 말았다.


    이걸 말해주니 마왕은 떡볶이 떡을 자르는  멈추며 말했다. 그래도 기분이 어느 정도 풀렸는지 툭 튀어나왔던 분홍빛 입술이 들어갔다.


    “짐도 자네와 다르지 않네. 남들처럼 엄마 아빠 다 계시고 나이차가  나는 동생도 있지. 과거엔 마왕이었으나 지금은 평범한 여대생일세.”


    평범한 여대생치고는 너무 예쁜데. 말투도 괴상하고.


    “아까도 말했지 않았나. 과거는 과거고 현재는 현재라고. 과거의 기억에서 그만 벗어나게. 그런 의미로 이걸 선사하지.”


    그렇게 말하며 빨간 떡볶이 양념이 묻은 떡을 한 개 집어 내 돈까스 접시에 올려 줬다. 왠일로 착한 일을 하는 거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포크로 마왕이 준 선물을 찍었다.


    으직!


    “야! 떡이 아니라 대파잖아!”


    만약 마왕처럼 젓가락으로 집었다면 모르고 먹을 수도 있었다. 포크 덕분에 찍는 촉감으로 그게 대파인 걸 알아챘다.


    마왕은 내 말에도 뻔뻔하게 어묵을 먹으며 대응했다.


    “짐이 언제 떡을 준다고 했나?”


    “선물로 대파를 주냐!”


    “선물에서 내용물이 중요한  아닐세. 그 안에 담긴 의미가 중요하지.”

    “맞는 말이긴 하지만!”


    말문이 막혀서 말하는 걸 그만두고 그녀가 준 대파를 으적으적 씹어 먹었다.

    “어떤가. 짐의 선물이 마음에 드나?”

    “아주 마음에 드네, 아주 마음에 들어!”

    “짐의 호의를 이렇게나 격하게 받아줄 줄이야. 짐은 감격했네.”

    “그렇게 감격했으면 이거나 먹어라.”


    “아아! 피클 좀 넘기지 말게!”


    “내 호의를 무시하는 거냐?”

    “피클 따위는 무시해도 되네!”

    그렇게 서로에게 피클을 넘겨주다가, 마왕이 어묵을 주는 대신 내가 먹는 걸로 합의를 봤다. 서로 자기가 시킨 걸 반쯤 먹었을 때, 마왕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자네 혹시 저 여자애랑 친한 사인 겐가?”

    “누구, 아까 걔?”


    “그  여친말일세.”

    “아 걔. 어렸을 때부터 알던 사이야.”


    “그 여자애가 바로 자네가 좋아하는 애구만?”

    “어, 네가 그걸 어떻게, 아니, 됐다.”


    죽기 직전 마왕에게 유리 이야기를 해준 게 기억났다. 죽을 거라고 생각해서 아무 말이나 한 거였는데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그때 말해준 거 아직도 기억하고 있냐?”


    “당연하지 않나. 짐의 유일한 친구가 말해준 건데.”


    “그 유일한 친구가 지금 엄청 후회하고 있다는  알아둬라.”


    “나중에 더 후회할 일이 생길 것도 알아두게.”


    “뭐?”


    얼마 남지 않은 돈까스 조각을 먹다 말고 마왕을 쳐다봤다. 마왕도 그릇을 거의 다 비운 채 날 보고 있었다.

    “자네, 전생에서 어느 정도 사람 보는 법을 배우지 않았나?”

    “배우긴 했지. 배우고 싶어서 배운 건 아니지만.”


    “그렇다면 과대란 놈이 어떤 놈인지 알아채지 않았나. 유리란 여자애랑 같이 둬서는 안되는 놈이란 걸.”

    “……그게 무슨 소리냐.”

    “전생에서 52년, 현생에서 21년을 살아온 인생 선배로서 말하지.”


    “잠깐, 너 52살 먹은 아줌마였냐?”


    “말  끊지 말게. 사람 말하고 있을 땐 잘 들으라고 배우지 않았나? 어쨌든, 인생 선배로서 말하지. 저 하준이란 과대 놈, 여자 알기를 아주 물건으로 아는 놈이야.”


    “그래서?”

    “그래서가 아니잖나! 저런 놈은 여자를 꼬셔서 자기 하고 싶은대로 가지고 놀다가 질리면 버리는, 그런 악독한 놈이란 말일세!”

    확실히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 같은 고등학교를 나온 얘 말로는 여자를 그렇게나 갈아치워서 학교에 경찰차까지  적이 있다고. 하지만  그런 사실보단 다른 게 더 신경 쓰였다.

    “잠깐만, 그런데 너 남자친구나 애인 있었어?”


    “큭, 없었다만.”

    “너도 모솔이면서  그런  넘겨짚고 있어.”

    “아닐세! 지금까지 수많은 이들을 만나고 대화하면서 얻은 마왕의 감일세!”


    “지금은 평범한 여대생이라며.”


    “짐이 말하고자 한 것은 그게 아니지 않은가!  알고 있으면서 왜 그렇게 말을 돌리는 겐가!”


    “뭘 돌려. 내가.”

    “아직도 유리란 여자애를 좋아하지 않나! 좋아하는 여자애가 상처 입는 걸 보고 싶은 겐가?”

    마왕이 한 말에 말문이 막혔다.


    내가? 유리를 좋아한다고? 내가 7년 동안이나 좋아했지만 내 마음을 받아주지 않은 여자였다. 물론 내가 고백하지 않아서 그런 점도 있지만, 그렇게 길게 지냈으면서 자기 남자친구 만나는 이야기는 조금도 꺼내지 않았다. 그런 주제에 나한테는 마왕이랑 아는 사이인  말 안 한 거에 서운하다고 했다.

    그런 걸 마왕에게 말해줬지만 그녀는 똑같은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좋아하는  맞지 않나! 그저  여자가 다른 남자와 만나는 게 싫어서 모른 척하고 있는 거고! 그거 아는가? 자네가 유리라는 여자를 볼 때와 짐을 볼 때와 눈이 다르다는 걸?”


    “아니라니까. 이제는 다 잊었고, 그냥 첫사랑이니까 그렇게 보는 거지.”

    “사랑이 시간이 지났다고 잊혀지면 그게 사랑인 겐가? 인정하게, 아직 좋아한다고.”


    “시간이 7년이 지났어. 7년이! 당연히 잊고도 남았지! 게다가 난 전생에 결혼도 했다고.”

    “어차피 정략 결혼이었잖나!”

    “어느 정도 감정은 있었어!”

    나와 마왕은 서로 마주보며 굳게 입을 다물었다. 나는 초조함에 잡은 포크로 쟁반을 약하게 두드렸다. 그녀는 손가락을 움직이며 딴짓을 했다. 하지만 이런 불편한 침묵이 오래 가진 않았다. 마왕이 갑자기 풋, 하고 웃기 시작한 것이었다.

    갑자기 얘가 미쳤나, 하면서 바라보자 마왕이 말했다.

    “미안하군, 갑자기 웃어서. 큭큭큭.”


    그러고는 뭐가 그렇게 웃긴 건지, 배를 잡고 고개를 숙이면서 어깨까지 떨며 웃는 모습을 보여줬다. 슬슬 기분이 나빠지려 할 때쯤,

    “큭큭큭, 아, 미안하네. 실은 이게 꿈이었네. 친구와 말다툼하는 것이.”

    “뭐?”

    “이렇게 타인과 열 올리며 이야기한 건 처음일세. 전생에서나 현생에서나.”

    그렇게 조금 더 웃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다시 한  사과하지. 미안하네. 이런 방식으로 꿈을 이룰 줄은 몰라서 말이지. 정말 미안하네.”

    사과하는 마왕은 아까와 달리 많이 부드러워 보였다. 그렇게 웃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어느 정도 마음이 가라앉았다.

    “아냐, 됐어.”

    “용서해줘서 고맙네. 이제 진짜 마지막으로 말하지.”


    마왕은 진지한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아까 다툴 때처럼 사나운 얼굴이 아니라, 진중하게 말을 고르려 하는 얼굴이었다.

    “만약 이대로 둔다면 그 여자애는 크게 상처받을 것이네. 지금껏 살면서 받아왔던 것보다 훨씬 큰 상처일 게야.”

    “그래서.”

    “자네가 아직도 그 유리라는 여자애를 짝사랑으로 생각하던, 아니면 그저 첫사랑으로 생각하던 상관없네. 하지만 내 장담하지. 그녀가 상처받을 걸 알고도 이대로 둔다면, 자네는 반드시 후회할 게야. 그녀가 상처받는 만큼이나 자네도 아파하겠지.”


    그녀의 말을 듣고 생각에 빠졌다. 전에 들었던 소문으로도 과대 놈은 여자를 울리기로 유명했다고 했다. 게다가 지금도 유리랑 사귀면서도 마왕에게 작업을 따려 했다. 그것도 유리가 보는 앞에서.


    들었던 말과 봤던 걸 합치면 마왕 말이 맞은 것 같았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생각도 들었다.

    ……유리가 상처받은 건 자기가 선택한 대가 아닌가?


    짝!


    “자! 진지한 이야기는 여기까지 할까!”

    마왕이 박수치는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그녀는 진지하게 말했던 것과 달리 과장스런 말투와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이제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게 어떻겠나.”

    그녀 딴에는 진지하게 날 생각해줘서  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봤자 내가 유리이 선택에 관여할 이유는 없었고,  도와주려  마왕을 위해 모른척하며 물었다.

    “무슨 얘긴데.”

    “짐이 알고 있는 바로는 1시에 강의가 있다고 들었네만.”

    “그건 맞지.”

    “그리고 저녁엔 시간이 비어있지 않나?”

    그렇게 말하는 마왕의 얼굴엔 왠지 모를 장난스러운 미소가 피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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