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화 〉네가 왜 여기 있어?-2
지크프리트는 내가 이세계에서 용사일 적에 쓰던 이름이었다. 그걸 알아차린 순간 ‘좋은 꿈’이란 단어를 어디서 들었는지 생각해냈다.
“자네가 죽였던 마왕! 오다인 소피아 레비아탄! 기억나지 않는 겐가?”
그 이름은 내가 죽였던 마왕이었다.
“아!”
나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런 반응에 마왕은 흡족한 듯이 웃으며 물었다.
“이제 짐이 기억나는 겐가? 오래 기다렸다네.”
“아니, 너 어떻게……!”
“궁금한가? 하긴, 궁금하겠지. 하지만 여기는 말할 만한 곳이 아니네.”
그녀가 내 어깨너머를 향해 턱짓했다. 뒤를 돌아보니 유리와 과대를 비롯한 여러 인싸들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그들이 서로 속삭이는 걸 보니 나와 마왕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확실히 마왕 말대로 여기는 이야기하기 좋은 곳은 아니었다. 전생이니 마왕이니 하는 소릴 해도 미친놈 취급받을 게 뻔했다. 게다가 다른 이유로도 강의실 안은 곤란한 게 많았다.
“나가자.”
“음!”
내 말에 마왕이 기운차게 대답했다. 나는 걸어서 강의실을 나갔다. 그동안 마왕이 내 뒤통수를 치지 않을지 온 신경을 뒤쪽에 집중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무 일 없이 강의실을 빠져 나갔고, 뒤따라오던 마왕이 물었다.
“어디 느긋하게 이야기할 곳은 있는가?”
“잘 모르겠는데.”
“짐을 따라오게.”
마왕이 날 앞질러가며 어딘가로 걸어갔다. 나도 아까 그녀가 강의실 안에서 그랬던 것처럼 따라갔다.
은발을 흔들며 앞서 따라 걷는 마왕을 바라봤다. 순간 갑자기 그녀가 내게 공격할까봐 조심했다.
강의실 안이 곤란한 이유는 여기 하나 더 있었다. 그녀는 내 적이었다. 죽기 직전에나 친구였지, 그 전엔 서로 대립하는 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만에 하나 싸움이 일어나더라도 주변 인물들이, 특히 유리가 말려들 수도 있었다. 전생이라면 모를까 지금 이렇게 허약한 몸으로는 나 하나 지키기도 힘들었다.
“자, 여기일세!”
그녀가 자랑스럽게 웃으며 소개한 곳은 학교 내 흡연장이었다. 학교 건물 뒤쪽에 원통형 재떨이를 설치한 곳으로, 주변에 폐자재나 그런 게 쌓여 있어 흡연자도 잘 오지 않는 곳이었다. 게다가 지금은 강의 시작까지 얼마 남지 않아서 이곳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여기라면 한바탕 싸움이 일어나도 다른 사람이 말려들 위험이 적었다. 아무리 최악이라도 나 하나로 끝나겠지.
“여기로 데려온 건 이유가 있겠지?”
“짐으로선 카페가 더 선호하지만 말일세.”
“그래, 그렇겠, 뭐라고?”
“자네도 카페에 가고 싶었나? 그럼 출발할까?”
“카페?”
“그렇네만.”
그렇게 말하는 마왕의 얼굴엔 어떠한 속셈도 보이지 않았다. 물론 그게 보인다면 속셈이라 할 순 없겠지만, 지금 하고 있는 표정은 순수 그 자체였다.
“자네 혹시 커피 안 마시는가? 걱정말게 홍차나 녹차도 있다네. 내 그걸로 시켜주지.”
“여기 싸우려고 온 거 아냐? 게다가 나한테 차도 사주고?”
“당연하지 않나. 짐이 자넬 억지로 끌고 왔으니 그 정돈 해 줘야지. 그리고 말일세.”
마왕이 팔짱을 끼며, 차분하게 웃었다.
“지금은 전시도 아니니 말일세. 마왕이었던 짐도 죽었고, 용사였던 자네도 죽었네. 더 이상 적도 아닌데 싸우는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건 그런데……”
“혹시 자네는 짐과 싸우고 싶은 겐가?”
“어? 아니, 그건 아닌데. 정말 안 싸울 거야?”
“방금 말했지 않나! 전쟁은 끝났다고! 짐은 자네와 싸울 생각이 조금만큼도 없단 말일세!”
그녀가 억울한 듯 두 팔을 벌려 보였다.
이게, 진짠가?
이세계에 있던 몇 년 동안, 마왕 토벌만을 생각하며 살았다. 싸우지 않으면 죽인다는 말에 죽기 싫어서 전장에 나갔다. 그로 인한 스트레스를 수많은 전투로 풀었고, 그만큼 또 스트레스를 받았다.
억울해 보이는 그녀에게 내가 물었다.
“그런 거면, 왜 온 거야.”
“친구가 친구를 찾아오면 안 되는 겐가?”
“친구라고? 내가 너랑 친구?”
내 말을 듣고 마왕이 상처받은 듯 두 눈을 크게 뜨고 입꼬리를 내렸다.
“짐은 자네가 친구라고 생각했다만, 아무래도 짐 혼자만의 생각이었나 보군…… 시간 빼앗아서 미안했네. 그만 들어가보게……”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흡연장을 떠나려 했다. 나는 그 모습이 비에 푹 젖은 강아지 같이 보여 마왕을 막아섰다.
“왜 그런가…… 친구도 아닌 전 용사여.”
“아니, 나도 널 친구라고 생각했어!”
“정말인겐가!”
비구름이 걷힌 들판같이, 마왕이 환하게 웃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날 껴안았다.
“역시 자네는 짐의 친구였던 게야! 역시! 짐의 착각이 아니었어!”
“어엇!”
“짐만 그렇게 생각했던 게 아니었구만! 자네는 짐의 친구가 맞았어!”
강하게 껴안아오는 마왕 때문에 숨도 쉬지 못할 만큼 압박 받았다. 도저히 여성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힘이었다. 겨우 그녀를 떼어놓으며 물었다.
“어, 어떻게 여기 온 거야. 그때 그냥 죽어서 지옥에 간 거 아니야?”
“왜 짐을 지옥으로 보내는 겐가. 천국이나 연옥도 아니고. 그리고 자네 말에 대답하자면, 짐도 잘 모르겠네.”
“모른다고? 왜 몰라.”
“모르니까 모르는 거 아닌가. 게다가 짐도 처음 죽어본 거잖나. 뭐, 자네는 두번째였겠지만.”
마왕은 다시 웃어보이며 말했다.
“정말 다행일세. 저번에 짐을 봤을 땐 짐을 모르지 않았나.”
“그때는 내가 거기 안 갔다와서 그런 거지.”
“갔다오다니, 그게 무슨 소린가?”
그녀에게 어제 차에 치이기 직전 이세계에 다녀왔음을 알렸다. 차에 치이기 직전 시야가 하얗게 되더니 이세계역고, 마왕에게 치명상을 입고 눈을 떴더니 여기였다고.
이 말에 마왕이 물었다.
“짐처럼 전생한 게 아니었던 말이더냐?”
“전생에 용사는 아니었을 거야. 용사 시절에 현대 기억이 또렷하게 났으니까.”
“흠, 생각보다 복잡하군. 짐은 전생이었는데 자네는 다른 경우라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이세계 전이한 용사가 현대로 돌아와서 전생한 마왕을 볼 수 있는 확률이 얼마나 될까. 마왕과 용사가 부부가 된 이야기는 들어본 적은 있어도 이런 종류는 들어보지도 못했다. 그런데,
“너 여자였냐?”
마왕이 이런 여자일 거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다. 전장에서 봤던 마왕은 빡빡머리에 검은색 판갑옷을 입고 있었다. 그건 인간 남성이 입으면 보조 마법 없인 서지도 못할 만큼 무거운 갑옷이었다. 그런 걸 입고 전장을 거의 날아다니다시피 했으니 무조건 남자라 생각했다. 그리고 전우들이랑 했던 야한 농담에도 항상 마왕은 남자로 등장했다.
내 말을 듣고 마왕은 펄쩍 뛰었다.
“실례아닌가! 짐이 어디가 여성스럽지 않은 겐가!”
그녀가 몸매를 부각시키려는 듯 포즈를 잡았다. 짝다리를 서고 허리를 굽히며 허리춤에 손을 얹었다. 마치 휴대폰 매장에 자주 보이던 입간판 같은 포즈였다. 만약 입고 있는 파란 추리닝만 아니었으면 완벽했을 건데.
일부러 대답하지 않고 다른 질문으로 넘어갔다.
“그럼 전생에서 왜 빡빡머리로 다녔던 건데!”
“그때는 전시 아닌가! 짐이 아무리 숙녀에다 최상급자라도 머리를 길게 기를 여유는 없었다네!”
“뭐야! 참군인이잖아!”
“자네도 짐이 여자니까 머릴, 방금 뭐라고 했나?”
“참군인이라고!”
이런 이야길 들을 때면 그 후작 새끼가 기억났다. 후방으로 도망친 놈을 말하는 게 아니다. 다른 후작 놈이었다. 그 놈은 전장에도 귀족의 품위를 지켜야 한다며, 한창 훈련 중에도 차를 마신 새끼였다. 일반 지휘관이었으면 별 미친 새끼 다 보겠네 싶었지만, 부대에서 최고 화력을 자랑하는 마법사 부대의 지휘관이라서 더 열이 올랐다.
이걸 마왕에게 이야기해주니 그녀도 내 말에 공감해줬다.
“미친 새끼 아닌가! 한창 훈련 중에!”
“그러니까! 아니 지금 화력 지원 없어서 병사들 힘들어 죽어가는 판인데 차를 달이고 있더라니깐?”
“그땐 짐에게 미리 말하지 그랬나!”
“왜?”
“그 놈한테 암살부대를 보냈을 건데!”
“맞아! 차라리 그랬어야 했는데!”
마왕이랑 이렇게 군대 이야기를 하게 될 줄은 몰랐다. 군필들이 왜 군대 이야기를 못 끊는 건지 조금은 이해가 갔다.
나와 마왕은 전생에 있었던 군대이야기를 계속해서 이어갔다. 그러다 마왕이 먼저 정신을 차렸다.
“앗, 이러면 안되는 거 아니잖나. 자네 수업 들어야지!”
“네가 끌고 왔는데 이러기냐.”
폰을 꺼내 지문을 찍고 몇 시인지 확인했다. 바탕화면은 강의 시각이 조금 넘은 시간을 알리고 있었다. 게다가 유리에게 메신져가 온 걸 발견했다. 지금은 그걸 신경 쓸 게 아니고, 강의실에 가는 게 먼저였다. 나는 강의실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난 강의 들으러 갈게. 만나서 재밌었다.”
“잠깐만! 잊은 게 있지 않나?”
“뭐가.”
“오늘 한 번만 보고 말 것도 아니잖는가. 우리 사이에. 잠깐 줘보게.”
“어, 야!”
마왕은 용사였던 내 손에서 스마트폰을 가져갔다. 아직 전원버튼을 누르지 않아 잠겨지지 않은 폰에 뭔가를 입력했다. 그걸 돌려주며 그녀가 말했다.
“이게 짐의 번호일세! 나중에 점심즈음에 연락하지.”
“마왕이 무슨 폰도 가지고 있냐.”
“마왕이기 이전에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평범한 여성일세. 더 이상 늦으면 안되겠어. 그 교수님은 좀 더 늦으면 아예 결석처릴 하니 말일세.”
“뭐? 진짜로?”
“짐이 뭐하러 거짓말을 하겠나. 어서 가보게. 아, 그리고 자네가 죽은 건 참으로 유감일세.”
영문모를 소리에 발을 멈추고 그녀를 돌아봤다.
“무슨 소리야, 네가 죽였으면서.”
“음?”
“그리고 나보다 네가 먼저 죽었잖아.”
“아닐세. 짐은 그때 말을 할 수 없었을 뿐, 의식은 또렷했다네.”
“그럼 누가 날 죽인 건데.”
“……나중에 말하기로 하지. 일단 가보는 게 좋겠어. 과거의 삶보단 현재를 더 중요시해야 하지 않겠나.”
일단 그녀 말대로 강의를 듣는 게 먼저였다. 여기서 내가 어떻게 죽었는지 들어도 강의를 들어야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어제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그건 과거였고, 나는 지금 현재를 살고 있었다.
뛰지 않고 최대한 빠르게 걸으면서 강의실에 도착했다. 마왕이 말한대로 교수님은 날 보자마자 ‘좀 더 늦었다면 결석처리 할 거 였다.’고 말했다. 죄송한 마음에 사과하면서 아까 강의실에 들어왔을 때 앉았던 자리로 향했다.
자리에 앉아 강의를 듣는데, 아까 유리에게 왔던 연락이 떠올랐다. 폰을 꺼내 확인하니, 대충 마왕이랑 어떤 사이냐는 내용이었다.
이 내용을 보고 머리가 아파왔다. 몇 년만에 유리가 먼저 연락한 건 넘어가기로 하고, 나와 마왕의 사이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었다. 사실대로 말하면 별 미친놈 취급받을 게 뻔했고, 속인다고 하더라도 좀 믿을 만한 거짓말이 필요했다.
어느 정도 고민 끝에 어떻게 답장을 보내야 할지 결정했다.
‘게임에서 만났어.’
내가 게임하는 건 유리가 이미 알고 있기도 했고, 지금 마왕이 하는 행동거지는 중2병이 세게 온 씹덕과 다르지 않았다.
보내자 마자 1이 사라졌다. 그녀가 읽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내게 답장을 보내진 않았다. 뒤를 돌아보자 유리가 자기 옆에 앉은 남자친구한테 웃으면서 자기 폰 화면을 보여주는 걸 목격헸다. 역시 유리는 내겐 관심 없고 과대가 부탁한 모양이었다.
무관심한 모습이 거슬렸지만 지금은 내가 어떻게 죽었는지 마음에 걸렸다. 마지막 기억으로는 마왕한테 팔이 잘리고 가슴을 꿰뚫려 치명상을 입었다. 누가 봐도 마왕이 날 죽인 거였다. 아니, 그녀가 내게 치명상을 입히긴 했지만 내 사인은 과다출혈이었다. 그것 덕분에 마왕과 이야기하면서 천천히 죽음을 맞았다.
이때 마왕에게서 연락이 왔다. 내용은 점심시간에 학식 앞에서 만나는 거였다.
그녀는 그곳에서 내 사인을 말해줄 생각일까.
그러고보니 유리를 제외한 이성의 전화번호는 마왕이 처음이었다. 아이돌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예쁜 외모에, 아까 날 껴안았을 땐 그녀에게서 흘러나오는 향기 때문에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세계에서 몇 년을 산만큼, 마왕을 이성으로 생각하는 건 그녀에게 실례였다.
……그래도 예쁘긴 하지, 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