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화 〉D-day (1/72)


  • 〈 1화 〉D-day

    누군가 그랬다. 모든 사람은 인생이라는 소설의 주인공이라고. 난 이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딱히 틀린 말이라서는 아니었다. 그저 마지막에 생략된 말 때문이었다.

    모두가 인생이라는 소설의 주인공이다. 단, 어떤 ‘장르’인지가 중요하다.


    비극인지, 코미디인지, 액션, 로맨스, 스릴러, 호러 등. 소설 같은 매체엔 당연하게도 장르라는  존재한다. 이걸 인생에 대입해 보면, 돈 많고 잘생긴 남자는 로맨스 코미디의 주인공, 나처럼 평범하고 찌질한 남자는 비극이라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난 내 인생의 장르를 알아버렸다. 내 장르는 바로 NTR이었다. 네토라레, 그러니까 내가 좋아하는 여자가 다른 남자와 눈이 맞은 경우를 말했다. 성인 만화를 보면 내가 느낄 수 있는 건 은근한 빡침과 성욕이었다. 만화와 달리 현실에선 온몸이 무너져 내릴 듯한 자괴감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평소처럼 피시방에 들러 게임을 하다가 유리의 집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유리는 내가 초등학교 때부터 좋아하는 여자로, 같은 중고등학교를 나온 동창이다. 게다가 대학에서도 같이 있기 위해 그녀가 선택한 집 근처 대학의 같은 과를 선택했다. 불알친구처럼 친해서 같은 집에서 자기도 했고, 단 둘이 여행도 다닌 사이였다. 지금은 그저 친구사이지만, 언젠가 그녀가 내 마음을 알아채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유리가, 가로등 아래 어떤 남자와 단 둘이 서있는  발견했다.


    처음엔 그저 남의 집 앞에서 꽁냥대는 커플인 줄 알았다. 유리가 사는 주택가엔 그런 사람들이 많았기에 어려서부터 그런 사람들을 자주 봐 왔다. 하지만 유리가 메고 있는 가방을 보고 그녀인 걸 알아차렸다.

    베이지색 핸드백은 내가 유리 생일선물 겸 성인이 된 기념으로 사준 물건이었다. 알바하고 받은  월급으로 사줬는데, 그런 내 선물이 유리가 다른 남자와 만나는 데 쓰이고 있었다.

    내가 유리인 걸 알아채고 골목 구석에서 서 있는데, 유리와 남성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졌다. 그렇게 1~2초간 붙어 있더니 이내 떨어졌다. 멀리서 본 광경이었지만 나는 그게 뭐하는 움직임인지 알아챘다.


    기억상 유리에게 남친은 없었다. 그런 소문도 들은 적이 없었으니, 내가 지금 목격한 게 그녀의 첫키스일 수도 있었다.


    첫사랑의 첫키스를 목격하다니, NTR 장르에서 흔하게 등장하는 소재였다. 정확하게는 더한 행위를 하지만 지금 중요한  그게 아니었다. 나중에 내가 유리와 사귀어서 키스를 해도, 내겐 첫키스일 뿐 그녀에겐 여러 번의 키스  한 번에 불과했다. 그런 생각을 하니 다리에 힘이 풀릴  같았다. 동시에 시야가 어지러워지고 머리가 뜨거워졌다.


    그 사이에 남자는 유리에게서 멀어져 몸을 돌렸다. 등만 보이던 그의 얼굴을 드디어  수 있었다. 그는 바로 우리 과의 과대였다. 잘생기고 활발한 성격에 차를 가지고 있는 걸로 보아 집에 돈도 많은 것 같았다. 과대와 같은 고등학교를 나온 동기 말로는 여자가 끊이지 않은 적이 없다고 했다.

    내게는 첫사랑인 여자가, 다른 남자에겐 그저 수많은 여자 중 한명일 거라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복잡했다.

    이런  NTR장르의 남자 주인공이 느껴지는 감정일까.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물건을 세우는 건지 도통 모르겠다. 나는 눈물을 참는 것만으로도 힘이 다할 것 같은데.


    과대는 몸을 돌려  옆에 주차된 차문을 열었다. 차에 타고 운전해 골목 길을 빠져나가려 했다. 그런데 차가 나가는 방향이 내가 있는 곳이었다.


    나는 황급히 손을 올려 눈에 고인 눈물을 닦아냈다. 손을 내리는 순간 과대가  차가 내 옆을 지나갔다. 그가 날 봤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차피 그는 나 같은 잔챙이는 신경 쓰지 않을  같았다. 내가 신경 써야 하는 건  발견한 유리였다.

    그녀는 빠져나가는 과대의 차를 향해 손을 흔들다가 나를 발견했다. 그대로 굳은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러더니 날 향해 빠른 걸음으로 걸어왔다.

    “……봤어?”


    내 앞에서 물어보는 유리의 얼굴은 어둠 속에서도 알아볼 만큼 부끄러움과 흥분으로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걸 보고 난 다시 머리가 아찔했다. 그래도 최대한 평정을 가장하면서 물었다.


    “어, 어어, 둘이, 둘이 사귀는 거야?”

    “응!”

    유리는 밝고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지금 말하는 대상은 나였지만 그렇게 만든 이는 과대였다는 사실에 눈물이 나올  같았다.

    “언제부터, 사귄, 거야?”

    “만난 건 O.T때 부턴데, 어제 저녁부터 사귀기로 했어!”

    “그, 그렇구나.”

    O.T는 저번주였다. 그때 이상한 여자가 내게  걸어서 유리와 떨어졌을 때 과대가 그녀에게 접근한 거였다. 어제 저녁도 나는 피시방에서 게임이나 하고 있었다. 내가 그렇게 인생을 허비할 동안에 유리는 과대와 친해져서 그와 사랑을 시작하고 있었다.


    안되겠다. 더 이상 이야기하면 눈물을 참을  없을 것 같았다.

    “어, 그래. 그럼 나 갈게.”

    “가게? 우리집에 충전기 가지러 온 거 아냐?”


    “이미 사버려서. 그거 말하려  거야.”

    “그런 거면 전화로 하지.”

    “만나서 이야기하는 게, 그냥, 그게  좋을 거 같아서. 게다가 예의도 없어 보이잖아.”

    “예의는 무슨, 우리 사이에.”


    “그러게. 우리 사이에 예의는 무슨.”


    유리의 마지막 말을 따라하며 그녀처럼 웃어 보였다. 하지만 얼굴이 일그러지고 평소 같은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지금이 밤이라서 다행이었다. 대낮이었으면  표정이 그대로  보일 뻔했다.

    “나 갈게.”


    그만 참지 못하고 몸을 돌렸다. 뒤에서 유리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내일 강의에서 보자!”

    “어.”


    내일 보자는 말도 못하고 그저 골목길을 걸어갔다.

    아, 망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좋아했으니까 대충 7년을 좋아한 건데. 결국 이렇게 끝났구나. 좋아하는 티를 안 내진 않았을 건데, 고백을  해서 그런 거였을까. 첫사랑이 그냥 짝사랑에 그친  끝나버렸구나.

    고개를 푹 숙인  앞으로 향하는 발만 바라보며 걸었다. 조금 전 이 길을 걸어올 때만 해도 유리 얼굴을  수 있다고 좋아했는데, 지금은 그냥 울면서 가고 있었다.


    이 길을 걸을  항상 유리와 있을 지도 모를 생활을 상상했다. 서로 손을 맞잡으며 어릴 적부터 알고 있던 유리네 부모님을 뵈면서 잘 살겠다고 다짐하는 장면, 그녀와  사이에 태어난 사랑의 결실을 품에 안고  길을 걷는 장면 등. 이제는 절대 이뤄질 수 없는 꿈이었다. 어쩌면 유리가 과대와 헤어지고 그 꿈을 이룰 수 있을 지도 몰랐다.


    아니, 방금 첫사랑이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습관적으로 행복한 상상을 하고 말았다. 아니면 눈 앞에서 일어났던  생각하기 싫어서 현실도피를 했던가. 어찌됐든 확실한 건 나는 실연당했다는 거였다.

    ……혹시 지금이라도 가서 고백할까? 너 좋아했다고?


    순간 눈앞이 밝아졌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정말로 눈 앞이 밝아졌다는 말이었다.

    빠아앙!

    시끄러운 경적소리가 귀를 찔렀다. 내가 바닥만 보면서 걷다 보니 주변을 보지 못한 것이었다.

    오늘은 정말 최악이구나. 첫사랑이 실연당한 것도 모자라서 차에 치이다니.


    눈을 질끈 감고 다가올 충격을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충격은 오지 않았고, 난 눈을 살며시 떠봤다.

    “어서 오세요, 용사님.”

    예쁜 백인 여성이 중세 복장을 하고 서있는  보였다.


    이 이후로는 어디선가 많이 보던 전개였다. 중세 판타지 세계관을 가진 곳에서 날 용사로 소환했고, 난 마왕과 싸워야 했다.  년간의 수련 끝에 전쟁이 발발하고,  전쟁은 또다시  년간이나 지속됐다.


    와아, 진짜. 힘들어 죽겠다.

    나는 거칠어진 숨을 가다듬으며 쥐고 있는 검 손잡이를 고쳐 잡았다. 지금 내 주변엔 내 전우들과 적인 마족들이 서로 뒤엉켜  채 쓰러져 있었다. 죽은 이들도 있었고 아직 살아있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만이라도 살리기 위해서는 나는 내 앞에 있는 마왕을 죽여야 했다.

    “여기서 그만두지?”


    말도 안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일단 내뱉어 봤다.

    “네가 죽었다고 치고, 항복하면 바로 살려줄게.”


    사실 조금이라도 시간을 끌고 싶었다. 그만큼 휴식을 취하면서 컨디션을 회복해야 했다.


    “항복 안 해도, 도망치면  감아주고.”

    “……그 말을, 짐이 믿을 것 같으냐?”


    검은 갑옷을 입고, 대머리에 두건으로 입가를 가린 마왕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두건에 마법이라도 걸린 건지 아니면 원래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처음 듣는 마왕의 목소리는 칠판을 긁는 것 같이 불쾌하게 들려왔다.

    그런 대답에 나는 손을 올려 깨진 투구를 벗었다. 여러 방어 마법이 걸려 있던 투구가 마왕 직속 부하와 싸우느라 망가져버렸다. 국보급 마도구였지만 이제는 다른 헬멧과 다르지 않은 물건을 전장 한쪽으로 던지며 말했다.


    “왜 인간을 못 믿어.”


    “당연하지 않나. 우리가 걸었던 평화 협정을 네놈들이 먼저 깨뜨렸으니.”

    “내가 만난 마족 포로들은 다 똑같이 말하더라.”

    “짐이 만난 인간 포로도 그렇게 말했지.”


    “그래도 뭐, 마족중에 가장 대가리인 네가 말하니까 우리 인간이 협정을 깨뜨린 거겠지.”


    “무슨 말이더냐. 네가 항복할 것이냐?”

    “항복을 내가 왜 해. 지금 이기고 있는 건 우린데.”


    마왕과 용사가 일대일을 할 상황은 단 두개밖에 없었다. 인간 측이 지고 있거나 그 반대거나. 우리 대화를 듣고 알 수 있듯이 마족은 지금 파멸 직전에 몰려 있었다. 굳이 마왕을 치지 않더라도 이긴 판이었지만, 국왕은 상징적인 의미로 마왕의 머리를 원했다.


    “평화 협정을 먼저 깨뜨린 건 인간 쪽이었는데도 말이냐?”

    “방금 말했잖아. 이기고 있는 건 우리라고. 역사는 항상 승리한 자에 의해 쓰이잖아. 마왕인데 그것도 몰라?”

    “그건 그렇지. 크흐흐흐.”

    “어차피 너네가 졌는데 그냥 도망치면 안될까? 도망쳐서 변두리에서 살아. 시체는  부하 목 잘라서 마왕이라고 할게.”

    “그렇다면 짐이 부하  면목이 없지 않나.”

    “넌 명예 때문에 사는 거냐? 사는  먼저지.”


    “명예를 저버린다면 살아도 사는 게 아니다. 이제 그만큼 쉬었으면 되지 않나?”

    “들켰나?”


    “진작에.”


    좀 더 쉬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지.

    나는 성검을 들어 마왕과 싸울 준비를 했다. 마왕도 바닥에 박혀 있는 검은색 마검을 뽑아 들었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첫사랑이 깨지더니 이세계에 오고, 그렇게   뒤엔 마왕과 싸우게 되다니.  인생 장르는 NTR인줄 알았는데 실은 판타지였구나.

    그런 어이없는 생각을 하면서 마왕과 나는 서로 검을 나누기 시작했다. 아까 내 부하를  때와 마찬가지로 마왕은 검을 크게 휘둘러 날 양단하려 했다. 사람을 두동강낼 정도로 힘이 세다는 건 그만큼 속도가 있다는 것, 난 최대한 피하려 했지만 검을 든 오른손이 잘려 나가고 말았다.

    “읏!”


    신음소리를 내뱉은 건 내가 아니라 마왕이었다. 내가 그를 봤던 것만큼 그도 나를 봐왔다. 이렇게 쉽게 당하지 않을 거라고 판단했는데 그 예상이 틀려 당황한 모양이었다.

    되도 않는 변명 같겠지만, 이건 내 노림수였다.


    그가 당황한 사이, 나는 그의 품속으로 뛰어들어가 갑옷 사이로 드러난 목덜미를 물었다. 진한 땀냄새가 나는 살을 씹을 듯이 베어 물자 비릿하고도 뜨거운 액체가 입안으로 뿜어져 나왔다.  거기서 당황하지 않고 그대로 목에 힘을 줘서 마왕의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이게 내 계획이었다. 어차피 지구력이나 체력이나 그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가장 단시간, 그가 방심한 틈을 타 치명상을 입혀야 했다. 마법이 있는 판타지 세상이니 팔이 잘려도 살아만 있으면 금방 붙일 수 있었다. 지금 오른팔도 이게 4번째로 잘리는 거였다. 이대로 지혈하며 지원을 기다리면 내 승리였다.


    어쨌든 내 계획은 성공했고, 내 예상대로 마왕은 목에 붉은 피를 분출하며, 내 가슴팍에 검을 찔렀다.


    푸욱!

    ……이건 계획에 없었는데?


    왠만한 사람이라면 죽었을 출혈량인데, 마족의 왕이란 이름답게 마왕은 쉽게 가지 않았다. 투구와 마찬가지로 고위 방어마법이 걸린 갑옷을 쉽게 찢어버리고  몸에 마검을 꽂아 넣었다.

    어느 정도의 부상에도 싸울  있게 마비 마법이 부여되서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몸에 힘이 빠져 바닥에 쓰러졌다.

    마왕도 그게 마지막이었는지  가슴이 꽂힌 검을 놓아버리고, 피가 뿜어져 나오는 목을 감쌌다. 검은 철제 장갑 사이로 피를 흘리면서 천천히  앞에 무릎 꿇었다. 검은 두건이 피로 인해 축축해지는 와중에도 마왕이 말했다.


    “비겁한 놈, 인간 맞나?”

    온몸에 힘이 빠지면서도 나는 입을 열었다.

    “비겁하니까, 인간이지.”

    “훗.”


    그도 동의하는지 가벼운 웃음소리를 냈다.

    등까지 관통한 검 때문에 제대로 눕지 못하고 꼴사납게 옆으로 누워야만 했다. 그런 반면 마왕은 무릎 꿇은  고개를 숙여 죽을 때까지도 왕의 품격을 드러냈다.


    그나저나 즉사 마법이 부여된 마검인데 갑옷에 부여된 마법 때문에 금방 죽지도 못했다. 잘린 팔에서 흘러 나오는 피로 보아, 출혈사로 죽을 것 같았다. 아무래도 죽을 때까지 시간이 좀 걸리겠다고 생각한 그때, 마찬가지로 아직  죽은 마왕이 말을 걸었다.

    “……이보게.”


    “아직 안 죽었냐.”

    “머지 않았네, 자네와 다르지 않아.”


    “그러냐. 그럼 우리 죽을 때까지 이야기나 할까. 심심한데.”


    “훗, 좋지.”


    그렇게 우리는 서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전쟁 전에 서로 견제하면서 벌어졌던 소규모 전투 때 있었던 이야기, 평화로운 한 때를 즐겼던 이야기, 사실은 이런  다 버리고 도망치고 싶었던 이야기 등등.

    말하고 보니 그는 서로 입장만 아니었다면 쉽게 친구가   있을 것 같은 놈이었다. 그걸 마왕에게 말해봤다. 부끄럽기도 했지만 이제 죽을 놈인데 눈에 보이는 게 없었다. 출혈 때문에 시야가 진짜로 흐려지기도 했고.


    “전쟁만 아니었으면, 친구가 될 수 있었을 건데. 안그래?”

    “그래…… 그랬겠지……”


    상처가 칼로 막혀 있는 나와 달리, 마왕의 목에  구멍은 출혈을 잡지 못한 모양이었다. 말을 흐리면서 말투에 힘이 빠진  눈에 띄었다.

    “아, 이제 죽을  같냐. 나도 죽는 건 처음인데.”

    “그렇, 지…… 짐도, 처음인……”


    “아니다. 이미 한  죽은 건가?”


    “그게, 무슨……”


    나는 그에게 내가 사실 다른 세계에서 왔던 사람이란 걸 알려줬다. 그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거기가 어떤 세상인지 물었다. 의식도 잃어가는 주제에 내 말을 열심히 들었다. 나는 그가 죽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내 첫사랑에 대해 말해줬다.

    첫만남부터 시작해서 과대와 함께 있다는 걸 봤을 때였다. 나도 피를 너무 많이 흘러 입이 잘 움직이지 않았다.


    “거기서, 유리랑, 그…… 과대가…… 야, 듣고, 있냐……”

    “……짐은…… 이제, 좋은…… 좋은 꿈을…… 꾸러…… 가야 겠……”

    “야……”


    “……”

    “야……!”

    “……”

    “……뒤졌나, 보네에……”


    마왕은 고개를 숙인 채 대답하지 않았다. 나도 이제 머지 않은 듯, 독감 걸린 것처럼 오한이 느껴지던 몸에 감각이 없어졌다. 그 상태에서 눈을 감으며 죽음이 오길 기다렸다.

    ……아아앙!


    갑자기 이명이 들리더니 눈앞에 환해졌다. 이제 천국에 왔나 싶어서 눈을 떴다. 바로  앞엔 글자와 숫자의 조합이 보였다.

    ○○바 ○○○○

    그게 차량 번호인 걸 깨닫자, 사나운 남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야 이 미친놈아! 눈 똑바로 안 뜨고 다녀!”


    오랜만에 듣는 한국말이었다. 한국어가 천국 공용어가 아닌 이상, 나는 여기가 어딘지 알 수 있었다. 눈에 익은 골목길, 노랗게 켜진 가로등, 불 켜진 검은색 승용차. 이세계에서 눈을 뜨기 직전과 다르지 않은 풍경이었다.


    나는 죽자 마자, 다시 현대로 돌아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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