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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원 은행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110화 (110/113)
  • 제110화

    한정우의 시선 속에서 사내가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는 한정우를 슬쩍 바라보고는 식탁에 앉았다.

    그릇을 바로 앞에 내려놓고는 나무로 된 숟가락을 들었다.

    한정우는 그가 자리에 앉아 수저를 들 때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조용히 그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옆에서 발포스가 반응하려고 했지만, 그가 먼저 손을 들어 막았다.

    ‘묘하네.’

    한정우는 사내를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사내는 묘한 사람이었다.

    분명, 한정우와 발포스는 그의 집에 멋대로 들어온 침입자였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의 집에 침입자가 발생하면 자연스럽게 경계하기 마련이었다.

    자신의 소중한 보금자리를 잃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그들의 신경은 날카로워질 수밖에 없었다.

    분명, 그래야 정상인데.

    ‘저건 침착하다 못해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은데.’

    한정우의 앞에서 기계처럼 수저를 움직이는 사내의 모습에서는 아주 작은 경계심마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마치, 한정우와 발포스가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태연하게 음식을 퍼 먹고 있었다.

    저건 의도적으로 하는 행동이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나오는 행동.

    이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자신의 일에 몰두하는 모습은 신기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그그극.

    한정우는 잠시 고민하다 사내의 앞에 있는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사내와 마주보고 앉는 형식의 자리.

    그런 그의 뒤로 발포스가 자세를 잡고 섰다.

    망부석처럼 서 있는 그를 뒤로한 채 한정우는 사내를 바라보며 식탁에 팔을 올렸다.

    손가락을 엮은 채 그 위로 턱을 올린 한정우는 조용히 사내를 바라보았다.

    우물우물.

    사내는 한정우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수저를 움직였다.

    수저가 그릇에 들어가면 하얀색 죽 같은 것을 퍼올렸다.

    “맛있습니까?”

    그 모습을 바라보던 한정우가 입을 열었지만.

    “...”

    사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그릇을 비우는 일에 집중했다.

    발포스가 움찔거리는 기색이 느껴졌지만, 한정우는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여기에는 혼자 삽니까?”

    “...”

    “여기에서 사신 지는 얼마나 되었죠.”

    “...”

    “...”

    “왜... 찾아왔지?”

    줄곧 침묵을 지키고 있던 사내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고개를 들어 한정우를 빤히 바라보며.

    사내는 표정 변화 없이 말을 걸어오고 있었다.

    “우연히 이 옆을 지나다가 신기해서 들어왔습니다. 무례했다면 사과드리죠. 원하신다면 보상도 해드릴 수 있습니다.”

    “...필요 없어.”

    한정우의 말에 사내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보상 따위는 조금도 필요하지 않다고.

    “적당히 구경했으면, 알아서 나가.”

    사내의 말은 딱딱했다.

    높낮이도 없었고 표정 변화도 없었다.

    감정이란 게 없는 사람처럼.

    사내는 줄곧 같은 톤으로 말하고 있었다.

    “...마계 슬라임에게 감정을 먹혔군요.”

    “감정을 먹혀요?”

    줄곧 조용히 있던 발포스의 말에 한정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계 슬라임에게 감정을 먹히다니.

    애초에 감정이란 게 먹을 수가 있는 거였나.

    “아까 제가 설명한 거 기억나십니까? 마계 슬라임은 부정 속에서 태어나는 생물이라는 거요.”

    “대충은요.”

    “마계 슬라임은 마계의 청소부입니다. 그런데 그 청소라는 게 단순히 물질적인 것만으로 가리키지 않습니다.”

    발포스의 설명에 한정우가 그를 돌아보았다.

    그는 사내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흥미롭다는 듯이 이죽이는 입꼬리가 눈에 들어왔다.

    “마계 슬라임은 모든 걸 먹습니다. 생물부터, 생물이 아닌 것. 그리고 감정까지도요.”

    “감정을 먹는다고요?”

    “정확히 말하면 감정의 찌꺼기를 먹는 거죠. 생물이 토해낸 감정의 찌꺼기 말입니다.”

    감정의 찌꺼기란, 생물이 감정적으로 행동했을 때 나오는 기운을 말한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개념.

    “보통, 한 마리 가지고는 큰 영향을 받기 힘듭니다. 오히려, 한 마리만 있으면 감정을 조율할 수 있어 도움이 되지요.”

    “그러면...”

    “하지만, 그 숫자가 쌓이기 시작하는 순간. 마계 슬라임은 단순히 감정의 찌꺼기 만을 탐하지 않습니다.”

    “그 말은 저 삶이 마계 슬라임에 감정을 잡아먹히고 있다는 건가요?”

    “정확합니다.”

    발포스의 말에 한정우가 사내를 다시 돌아보았다.

    그의 말을 듣고 나니 확실히 사내가 이상하게 느껴지기는 했다.

    감정이 없는 것.

    그래 한정우가 느끼는 묘한 기분은 바로 사내에게 감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람으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감정이 없는데, 어떻게 이상함을 느끼지 않을 수가 있을까.

    “이름이 뭡니까?”

    한정우는 사내에게 물었다.

    이름이 뭐냐고.

    아무리 감정이 없는 사람이라도, 이름까지 잃은 건 아니었으니까.

    “...유.”

    “유요”

    사내가, 유가 고개를 끄덕인다.

    이름이 그냥 유라.

    성은 어디 갔으며, 이게 진짜 사내의 이름인지도 의문이었다.

    하지만, 한정우는 그런 걸 묻지 않았다.

    굳이 이름을 알지 않아도 ‘유’ 하나만으로 호칭을 통일 할 수 있었으니까.

    “유. 당신은 왜 여기서 사는 겁니까?”

    “안전하니까.”

    “밖에 나갈 생각은 안 했습니까?”

    “나간다고 좋은 건 없을 것 같아서. 여기서 나는 만족하면 살 수 있어.”

    만족?

    지금 사내의 모습 그 어디에 만족이란 말을 쓸 수 있단 말인가.

    한정우는 사내가 만족하고 있다는 사실에 동의할 수가 없었다.

    만족한다는 사람의 표정이 어떻게 저런단 말인가.

    “만족말입니까?”

    “안전하고 밥도 먹을 수 있어. 이곳만큼 안전한 곳은 없어.”

    만족은 모르겠고, 안전 부분에 있어서는 한정우도 크게 동의하는 바였다.

    마계 슬라임으로 이루어진 집에서 살고 있는데 어찌 위험할 수 있을까.

    안전 부분에 있어서는 한정우도 할 수 있는 말이 많지 않았다.

    “발포스.”

    “네.”

    “감정을... 다시 얻을 수는 없습니까?”

    “있습니다.”

    “있다고요?”

    “네. 마계 슬라임은 근원을 먹는 게 아니니까요. 그들과 떨어지고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감정을 느끼게 될 겁니다.”

    “그렇군요.”

    발포스의 설명을 들은 한정우는 툭툭 식탁을 두드렸다.

    유는 여전히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어려 보이는데.’

    한정우의 시선 속에 담긴, 유는 무척이나 어려보였다.

    이제 막 스무살이 된 듯한 앳된 얼굴.

    “당신은 여기서 계속 살고 싶습니까?”

    “여기서 벗어날 이유가 없으니까.”

    “흠... 유. 당신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관심 없습니까?”

    “굳이 알 필요는 없어서.”

    한정우는 마치 인형과 대화하는 듯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든, 돌아오는 건 딱딱한 말뿐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분이 나쁘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런 걸로 기분 나빠하기에는 그가 겪은 일들이 너무 많았다.

    “유. 당신은 밥을 어떻게 해결하고 있는 겁니까? 보니까, 그냥 죽을 먹고 있는 것 같은데.”

    “내가 먹을 건 슬라임들이 구해줘.”

    “그렇군요. 이 슬라임들은 어떻게 소환하게 된 겁니까? 소환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내 직업이 마계 소환사라서. 내 부름에 답해준 게 얘네들이야.”

    유는 자신의 직업을 말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애초에, 그는 말을 하는 데에 있어서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숨기지 않아도 된다는 사람처럼.

    그런 유의 모습에 한정우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래, 차라리 숨기는 것보다는 솔직하게 말해주는 게 나았다.

    그러면, 적어도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파악할 수는 있으니까.

    “유. 당신은 이번에 차원 은행이란 게 새로 생긴 걸 아십니까.”

    “...차원 은행?”

    “네. 차원 은행이요. 은행이 뭔지는 아시죠?”

    한정우의 물음에 유는 크게 고민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 사람 중 은행을 모르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진짜, 엄청 외진 곳에서 바깥 구경을 해보지 못한 사람만이 은행을 모르겠지.

    적어도 유는 그 정도로 외진 곳에 산 사람은 아니었다.

    “당신을 저희 차원 은행의 고객으로 받고 싶습니다.”

    “...알았어.”

    한정우의 말에 유는 역시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한정우는 피식, 웃음을 흘리고는 그에게 시스템을 보냈고.

    [‘유’가 당신의 고객이 되었습니다.]

    [‘유’가 가지고 있는 코인이 계좌에 들어옵니다.]

    [10,323,323코인.]

    “...어?”

    유의 계좌를 보는 것과 동시에 한정우가 멈칫거렸다.

    뭐지, 지금 숫자를 잘못 본 건가.

    한정우는 유가 보유한 코인을 확인했고, 천만 코인이라는 걸 본 순간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한 단체의 대표조차 십만코인을 넘기지 못했는데.’

    혼자 살아가는 유는 천만 코인 넘게 가지고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걸까.

    한정우는 두 사람의 차이가 무엇인지 고민해 보았고, 이내 한 가지를 알 수 있었다.

    ‘마계 슬라임이 사냥해주고, 그렇게 모인 코인을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건가.’

    유는 감정이 없었다.

    즐거움도, 기쁨도, 행복함도.

    그렇기에 먹는 것, 입는 것, 자는 것에 큰 관심이 없었다.

    그저 잘 수만 있으면 되는 거고 먹을 수만 있으면 된다.

    자는 거야, 이곳에서 자면 되는 것이고.

    먹는 것이야 마계 슬라임이 구해준다.

    그런 그에게 코인을 사용할 일이 얼마나 있을까.

    심지어 마계 슬라임은 발포스도 인정해줄 정도로 강력한 생명체.

    마계 슬라임은 움직이면서 온갖 몬스터들을 다 잡았을 테고.

    그렇게 쌓인 코인이 고스란히 통장에 쌓인 것이리라.

    ‘이런 건 또 처음인데.’

    한정우는 헛웃음을 흘리던 것도 잠시, 식탁을 툭툭 두드렸다.

    왠지 유를 이대로 내버려두고 싶지 않았다.

    마계 슬라임을 대거 소환해낼 수 있는 잠재력.

    그것 하나만으로도 유가 대단한 인재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이 사람을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이 어디 없을까.’

    한정우는 유를 활용할 방법이 없는지 고민해 보았다.

    마계 소환사.

    ‘잠시만, 마계 소환사라는 건 굳이 슬라임만 소환해낼 수 있는 게 아닌 거잖아.’

    만약, 이 생각이 맞다면.

    “유.”

    “...”

    “당신은 슬라임 말고 다른 것도 소환할 수 있습니까?”

    한정우의 물음에 유는 잠시 고민하는 가 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한정우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유를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감이 잡혔다.

    ‘안 그래도 차원 은행을 새롭게 개편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잘 됐네.’

    한정우는 씨익, 웃으며 유를 바라보았다.

    활용처를 알게 되니, 유가 매우 빛나는 보물처럼 느껴졌다.

    “유.”

    “응?”

    “당신은 꼭 이곳에만 있어야 하는 건 아니죠?”

    “응.”

    “그럼 저와 일해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일.”

    “네. 대신 당신에게 여러 소환수를 소화할 수 있게 도와드리겠습니다.”

    “할게.”

    유는 거절하지 않았다.

    빠르게 수락을 하였고 그 말에 한정우의 미소도 더욱 짙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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