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9화
마계 슬라임으로 이루어진 언덕이 있었다.
3층 높이는 되어 보일 정도로 큰 언덕.
한정우는 마계 슬라임 언덕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거렸다.
분명, 발포스는 마계 슬라임이 마계에서만 살아가는 생물이라고 했었다.
소환을 한다고 해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닌 존재.
한 마리 한 마리가 소환하기 힘든 생물이라고 했는데.
“하... 이건 예상 밖이네요.”
발포스조차 저 모습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헛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그래, 누구 마계 슬라임을 소환할 수 있을 거라 예상할 수 있을까.
마계 슬라임은 아주 조금이지만, 발포스의 손을 녹여버릴 정도로 강력한 생물이었다.
지금 당장 지구의 힘으로는 마계 슬라임 하나 제대로 상대하기 힘들 텐데.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던 걸까.’
한정우는 자신이 냉정하게 지구의 상황을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인간의 잠재력은 결코 무시하지 않지만, 한계란 건 분명히 존재하는 법이었다.
강해질 수 있는 한계가 있는 거고 그 한계를 넘어서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재미있네요. 하긴 은행장님과 같은 분도 배출해낸 곳인데.”
발포스의 말에 한정우는 옅게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닌 것 같다.
한정우도 당장 은행장이기 전에는 대한민국의 평범한 인간이지 않았던가.
그런 그가 시스템과 계약하고 대마신을 부리고 있는데.
어쩌면 그보다 더한 존재도 있을 수 있었다.
한정우만 하더라도 차원 은행장이라는 직업을 얻었는데.
다른 사람이라고 더 좋은 직업을 얻지 못할 게 있을까.
‘나보다 더 좋은 직업을 얻는 게 가능할지 의문이 들기는 하지만.’
한정우는 어떻게 보면 생산직이라고 볼 수 있었다.
생산직의 탑티어.
아니, 거의 신급이라고 해도 부족하지 않을 정도의 직업.
그렇다 보니 비전투 직업에 한해서 한정우는 자신보다 더 대단한 직업이 있을 거란 예상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반대로 전투직을 놓고 보면 한정우보다 대단한 직업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당장 차원은행이 된 초반만 하더라도 회귀자를 만나지 않았던가.
다짜고짜 인간의 왕이 된 회귀자를 본다면, 전투 부분에 있어서 탁월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있을 확률은 엄청 높았다.
“그런 사람이 있으면 좀 고용하면 재미있겠네.”
한정우가 이곳에 온 이유는 지구에 있는 차원 은행을 성장시키기 위해서였다.
더 많은 고객을 받고, 더 많은 차원 은행을 만들려고.
지구의 인구 절반이 죽어도 억대가 넘어갔기에.
그들 중 일부를 받아들인다고 해도 차원 은행이 벌 수 있는 건 무척이나 많았다.
한 사람이 10코인 씩, 1억명이 벌어들인다면 무려 10억 코인이나 버는 것이었다.
1억명만 해도 그 정도인데, 2억명이면 십억명이면?
10코인도 최소 기준이었다.
그보다 더 잘버는 사람도 분명 존재할 것이다.
‘지구에 사는 사람들에게 차원 은행은 메리트가 너무 좋아.’
현재, 지구는 마석으로 코인을 거래하고 있었다.
마석 수수료까지 엄청나게 때먹히면서까지 거래를 하고 있었다.
자본주의에 살아가던 사람들은 그 수수료가 무척이나 아까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들에게 수수료가 훨씬 싸고 간편하게 거래할 수 있는 차원 은행이 들어선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차원 은행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기존에 있던 차원 은행은 어떻게 되었지? 차원 은행 옮기면서 사라졌던 걸로 기억하는데.’
생각해 보니까.
지구의 차원 은행 수입이 줄어들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차원 은행은 두 차례 이사를 했다.
처음에는 시스템으로 인해 생겨난 마을에서, 두 번째는 마을 깊숙한 곳으로.
마지막은 시스템 안에.
물론, 시스템에 들어갈 때에는 기존에 있던 차원 은행을 남겨 놓기는 했다.
문제는, 그곳에 있는 차원 은행은 지구인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지구인은 들어가는 게 불가능하다시피 한 위치에 있었다.
그렇다 보니 지구에 있는 차원 은행에 고객이 늘어나는게 더 이상하다.
‘차원 은행... 위치를 좀 옮겨야겠어. 나중에 한 번 찾아가 봐야지.’
한정우는 앞으로의 일정을 생각하며 걸음을 옮겼다.
언덕으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 한정우를 따라서 발포스가 따라나섰다.
치익.
한정우의 발길이 닿는 부분에서 연기가 치솟았다.
치익, 치익.
발밑에서 연기가 치솟았지만, 한정우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그가 마계슬라임 속에서 아무렇지 않게 걸을 수 있는 이유는, 미지의 힘이 한정우의 몸을 보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반지, 상당히 괜찮네요.”
“그렇죠? 예전에 받은 건데, 이게 계속 성장하는 거라서요. 제 몸 하나는 잘 지켜주더군요.”
“흠... 한 번 살펴봐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죠.”
발포스의 말에 한정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한정우의 검지 손가락에 끼어져 있는 해골 모양의 반지.
그 반지는 과거 녹스에게 받은 언데드가 깃든 반지였다.
처음에는 적당한 힘을 가지고 있는 반지였지만.
한정우와 함께 하면서 계속해서 성장했고, 이제는 어지간한 위협에도 한정우를 지켜줄 수 있었다.
발포스가 있고 반지가 있다 보니, 한정우가 위험해질 만한 일은 없었다.
“호오. 이 정도면 상당히 강력한 언데드가 깃들어 있네요. 아니, 이걸 언데드라고 해야 할까 모르겠네요. 분명 시작은 언데드였을 텐데, 지금은 신성이 깃들어 있습니다.”
“신성이요?”
“네. 시스템의 힘도 어느 정도 느껴지고요.”
발포스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한정우는 문득 최근에 있었던 일 하나를 떠올리고는 바로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최근에 시스템에서 준 사슬을 일부 흡수했었습니다. 그때, 금색의 기운이 깃들더라고요.”
“아. 그렇군요. 어쩐지. 아무리 싸울수록 강해진 데스나이트라고 해도 이렇게까지 성장할 수는 없죠. 이건 성장을 넘어선 진화니까요.”
“...”
“그런데 시스템의 사슬을 먹었다면 이해가 되네요. 세상의 근원으로 이루어진 사슬이니까. 종을 뛰어넘어 진화하는 것도 가능한 일입니다.”
“좋은 일이란 거죠?”
“당연하죠. 이 정도면, 백위권 내에 있는 관리자는 힘들어도 천위권에 속한 시스템 정도는 충분히 이길 수 있습니다. 잘하면 백위권에 있는 관리자도 상대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발포스의 말에 한정우는 크게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시스템의 관리자가 어떠한 존재인가.
그들 하나하나가 막강한 힘을 가진 존재들이었다.
천 위권에 있는 관리자라고 하더라도 지구에서는 바로 일인자의 자리를 꿰찰 수 있었다.
천의 관리자만 해도 그런데 백위권 내에 있는 관리자까지 상대할 수 있을 거라니.
천과 백의 힘은 몇 배나 차이가 났다.
천의 관리자 열명이 있어야 백의 관리자 하나를 겨우 상대할 수 있겠지.
“제가 없더라도 은행장님을 위협할 수 있는 존재는 없을 겁니다.”
“그렇군요.”
“그래도 대단하기는 하네요. 데스나이트는 성장의 한계가 분명히 있는 몬스터인데. 확실히 은행장님의 곁에 있으면 재미있는 일이 많이 일어나네요.”
발포스의 말에 한정우가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이건 한정우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반지가 시스템의 사슬을 소량이라도 먹을 수 있을 거라고 누가 상상할 수 있을까.
“가시죠. 소환사라면 저 안에 있을 겁니다.”
“언덕 안 말인가요?”
“네. 저게 잘 보면 일반 언덕으로 보일 텐데. 자세히 보면 하나의 집이라는 걸 알 수 있을 겁니다.”
발포스가 언덕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그의 말대로 눈을 가늘게 뜨며 자세히 살피니, 확실히 집의 형태가 보였다.
“여기 있는 소환사도 어지간히 정신 나간 놈이네요. 마계 슬라임으로 집을 만들 생각을 다하고.”
“그래도 안전하기는 하겠네요.”
“안전하죠. 마계슬라임의 산성은 드래곤의 비늘도 녹일 수 있을 정도니까요. 아마 이 근처에 있는 생명체 중, 저 집을 건드릴 수 있는 것들은 없을 겁니다.”
발포스의 말에 한정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대로 마계 슬라임으로 이루어진 집을 건들 수 있는 존재는 많지 않을 것 같다.
발포스조차 마계 슬라임 집을 보며 눈살을 찌푸리지 않는가.
물론, 그는 위험해서가 아니라, 마계 슬라임에게 닿기 싫어하는 게 더 큰 것 같지만.
“입구는 어디 있습니까.”
“여기입니다.”
한정우의 물음에 발포스는 마계 슬라임들 사이를 사리켰다.
자세히 보니 미세하게 틈이 보였다.
문이 하나 열릴 수 있는 크기의 틈.
발포스는 망설이지 않고 그 사이로 손을 밀어넣었다.
키에에엑!
치이익!
마계 슬라임이 괴성을 지르며 그를 공격한다.
촉수가 발포스를 뒤덮었고.
화르르륵!
한순가에 재가 되어 사라졌다.
“어딜 한낱 미물 따위가.”
단 한번의 공격이었지만, 마계 슬라임은 발포스를 건드릴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 이후로 두 사람을 공격하려는 듯한 기색이 완전히 사라졌다.
끼익.
문이 열렸다.
“...”
마계 슬라임으로 이루어진 문의 안쪽은 온통 어둠으로 뒤덮여져 있었다.
마치 블랙홀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
“들어가시죠. 그 무엇도 은행장님은 해하지 못합니다.”
“네. 가죠.”
발포스의 말에 한정우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 발자국.
그가 발을 뻗어 문 안으로 들이밀었고.
한순간에 문 안쪽으로 빨려들어갔다.
끼이익. 쿵.
한정우와 발포스가 안으로 들어가고.
마계 슬라임 문이 저절로 닫히더니, 언제 열렸냐는 듯이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꿈틀꿈틀.
마계 슬라임의 촉수가 움직이면서 조금씩, 아주 조금씩 자리를 이동한다.
*
“여기는...”
한정우는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과거, 흔하게 볼 수 있는 거실의 풍경이 보였다.
소파와 책상.
그 옆으로 기다란 탁자가 있고 의자가 네 개 놓여져 있었다.
한정우의 옆에 있던 발포스가 주위를 스윽, 살펴보더니 입을 열었다.
“아공간이군요.”
“아공간이요?”
“네. 가끔 슬라임 중에 그런 개체가 있습니다. 속에 아공간을 품고 있는. 이곳은 마계 슬라임의 아공간이 합치고 합쳐져 만들어진 공간인 것 같네요.”
그의 설명에 한정우는 눈을 깜빡거렸다.
아공간이라면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이차원의 공간.
그래서 그럴까.
마계 슬라임 특유의 악취가 더 이상 나지 않았다.
“마계 슬라임의 아공간에 집을 차려놓은 인간이라. 재미있군요.”
발포스가 중얼거리듯이 말할 때였다.
“제 집에 손님이 찾아올 줄은 몰랐네요.”
뒤에서 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한정우는 볼 수 있었다.
한 사내가 두 손에 그릇을 하나 들고 있는 모습을.
그는 한정우와 발포스를 보며 헛웃음을 흘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