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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원 은행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108화 (108/113)

제108화

저벅저벅.

한정우는 쉬지 않고 걷고 있었다.

그의 뒤로 발포스가 조용히 따라왔다.

‘허허벌판이네.’

벌써 일주일 째 걷고 있었다.

중간에 잠을 자고 밥을 먹거나 잠깐 잠깐 쉴 때를 제외하고는 계속해서 걸음을 옮기는 중이다.

꽤 오랫동안 걸었건만.

어떻게 된 게 보이는 거라고는 부서진 건물의 잔해가 전부였다.

아, 또 보이는 게 있구나.

대격변으로 인해 생겨난 미지의 식물들.

땅을 뚫고 튀어나온 뿌리의 굵기가 5t 트럭보다 더 컸다.

그와 같은 것들이 길 곳곳에 널려 있었다.

그래서 일주일 동안은 걷는 게 질리지 않았다.

구경할 게 워낙 많기도 하고.

‘지구를 걷는 것도 너무 오랜만이라서.’

그냥, 이렇게 여유롭게 걷는 게 좋았다.

차원 은행에 있을 때에는 거의 쉬지 않고 일했으니까.

비록, 지금은 그가 없을 때 직원들이 갈려나가고 있기는 하지만.

한정우에게도 이런 여유로운 시간이 필요했다.

지금이 그런 시간이었다.

그래서 일주일 동안 걷는 내내 불만도 조금 없이 걸을 수 있었던 거겠지.

‘하지만, 이건 너무 없는데.’

그것도 정도가 있는 거지.

여유가 좋고 쉬는 게 좋다고 해도 그렇지.

산책도 오래하면 재미가 없는 법이었다.

더군다나 그는 단순히 산책을 하는 게 아니었다.

서울로 향하고 있는 것이었다.

비록, 발포스가 인간들에게 위치를 듣고 방향을 제대로 갈 수 있게 인도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럼에도 일주일동안 사람의 머리카락조차 발견할 수 없으면 조금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사기 당한 건가.”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도 들 정도였다.

그는 발포스를 슬쩍 돌아보았다.

발포스는 묵묵히 한정우와 함께 걸어가고 있었다.

한정우의 시선에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실 말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니요. 없습니다.”

순간적으로 그에게 사육장을 운영하는 인간들을 족치고 오라 할까 고민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은 건.

한정우가 보고 있지 않은 상태의 발포스는 어떤 행동을 벌일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막말로 그들을 전부 죽여버리면 무슨 의미란 말인가.

기껏 포션까지 판 의미가 없다.

“발포스.”

“네.”

“근처에 보이는 거 없습니까? 당신이라면 저 멀리 있는 곳까지 볼 수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음...”

한정우의 말에 발포스는 미간을 좁히며 주변을 살펴보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근처에 살아 있는 존재가 있기는 합니다.”

“그래요?”

“네.”

발포스의 말에 한정우의 얼굴에 반가움이 서렸다.

살아 있는 인간이 아닌, 살아 있는 존재라고 말하는 게 조금 걸리기는 했지만.

그런 걸 신경 쓸 이유가 뭐 있을까.

설령 위험한 존재라고 해도 한정우에게는 아무런 위험도 줄 수 없었다.

바로 옆에 발포스가 있을뿐더러, 그가 손가락에 걸친 반지에는 강력한 존재가 담겨 있었다.

반지에 담긴 존재를 소환한다면 한국 하나는 충분히 지울 수 있으리라.

“그쪽으로 가죠.”

“...네. 안내하겠습니다.”

잠시 멈칫거리던 발포스는 별다른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무엇을 봤는지 모르겠지만, 그 무엇도 한정우에게 위해가 될 수 없었으니까.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발포스의 입장에서는 한정우를 막을 명분이 없었다.

애초에 막을 생각도 없었다.

한정우는 그의 주인이었고, 주인의 앞을 막을 수 있는 일꾼이 어디 있을까.

발포스가 앞으로 나아가고 한정우는 그의 뒤를 천천히 따라갔다.

“얼마나 걸립니까?”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걸어서 한 시간이면 충분히 도착할 겁니다.”

“나쁘지 않네요.”

발포스의 말에 한정우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더 빨리 움직였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발포스를 따라 걷던 한정우는 바로 앞에 펼쳐진 광경에 멈칫거렸다.

“발포스.”

“네.”

“당신이 말한 생명체란 게... 저겁니까?”

한정우가 손을 뻗어 한 방향을 가리켰다.

그의 손을 따라 고개를 돌린 발포스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저걸 보고 온 게 맞다고.

발포스는 확신을 담아 말하고 있었고, 한정우는 그 모습을 보며 묘한 기분을 느꼈다.

한정우는 인간을 만나고자 한 것이었다.

말이 통하는 상대를 만나서 은행의 고객으로 만들고자 하는 생각이었다.

지구에도 차원 은행을 퍼뜨릴 생각이었고 그러기 위해서 사람이 많은 곳으로 향해야 한다.

보통 도시 같은 경우에는 그 위치를 알기 위해서는 인간을 만나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한정우의 앞에 있는 건 인간이었다.

아니, 저걸 살아 있는 생명체라고 해야 하는 걸까.

꿈틀꿈틀.

기괴하게 생긴 무언가가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심장 박동을 하듯 몸통에 달린 촉수들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불쾌함을 느끼게 만드는 모습.

그렇다고 한정우는 화를 낼 수가 없었다.

‘생명체를 찾으라 했다고 진짜 ’생명체‘만 찾았네.’

발포스는 한정우의 명령을 따른 게 전부였으니까.

어쩐지 순간적으로 멈칫거리더라니.

한정우는 한숨을 푹 내쉬며 다시 입을 열었다.

“발포스.”

“네.”

“저게 뭡니까.”

“살아 있는 생명체입니다.”

“그러니까. 그 살아 있는 생명체의 정체가 뭐냐고 묻는 겁니다.”

한정우의 물음에 발포스는 꿈틀거리는 생명체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그건, 하나의 형체를 하고 있지 않았다.

둥글기도 했고 각지기도 했으며, 온갖 모양을 가지고 있었다.

판타지 소설을 많이 본 한정우라고 해도 도저히 유추할 수 없는 모습.

차원 은행을 통해 많은 고객을 만나기도 했지만, 저렇게 생긴 고객은 만나 본 적이 없었다.

“슬라임입니다.”

“...네?”

“슬라임이요.”

“뭐라고요?”

“슬라임입니다.”

“...그러니까. 저게 지금 슬라임이라고요?”

“네. 슬라임입니다.”

확신을 담아 말하는 발포스의 모습에 한정우는 사고가 잠시 정지하는 걸 느낄 수밖에 없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생김새를 가진 저 생명체가 슬라임이라고?

꿈틀거리는 걸 보면 그런 것 같기는 한데.

“발포스. 제가 슬라임을 보지 못한 게 아닙니다. 제 고객 중에도 슬라임이 있죠.”

“네. 알고 있습니다.”

“그 고객님은 절대 저렇게 생기지 않았어요. 그래서 저게 슬라임이라는 게 이해가 되지 않네요.”

“그럴 수 있습니다. 저건 마계 슬라임이니까요.”

“마계 슬라임이요?”

“네. 그것도 마계 심도에 있는 슬라임입니다. 온갖 부정을 먹고 자라는 놈들이라 생김새도 저렇게 불쾌하게 생겼죠.”

발포스가 손을 뻗어 마계슬라임을 움켜잡았다.

키에에엑!

그의 손에 붙잡힌 마계슬라임이 괴성을 내지르며 몸부림쳤다.

치이익!

마계슬라임을 잡은 발포스의 손에서 새하얀 연기가 피어오르며 살이 타는 냄새가 났다.

키에에엑!

계속해서 꿈틀거리던 슬라임이 촉수를 휘둘러 발포스의 팔을 히감았다.

촉수에 닿은 부위 역시 매케한 연기를 내는 게 보였다.

그 모습을 보며 한정우는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이놈들의 몸은 마계의 불과 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네요.”

“어떤게요?”

“마계슬라임은 마계에서도 심도라고 불리는 아주 깊은 곳에 있는 놈들입니다. 어지간해서 그곳을 나오지 않을뿐더러.”

발포스가 고개를 돌려 주위를 스윽, 둘러봤다.

“이런 곳에 나타나서는 안 되는 생물이죠. 이 마계슬라임은 오직 마계에서만 살아가는 청소부거든요.”

“...”

“그래서 이상합니다. 이놈들이 여기 있다는 건, 누군가 얘네를 소환하지 않고서야 불가능하단 건데. 애초에 마계슬라임을 소환할 수 있는 인간이 있는 것도 놀랍네요. 이놈들은 쉽게 소환되는 놈들이 아닌데.”

발포스의 말을 듣고 있으니, 한정우도 조금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계에서도 그 깊숙한 곳에 있느 놈들이 현세에 강림하는 건 불가능한 일에 한없이 가까웠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마계슬라임은 지구에 떡하니 나타나 불쾌한 촉수를 움직이며 마구 꿈틀거리고 있었다.

“소환사가 있으면 마계슬라임을 소환하는 게 가능합니까?”

“가능은 합니다. 마계슬라임을 알고 그와 관련된 매개체가 있으면 바로 소환할 수 있죠. 그런데 이놈들을 아는 건 불가능에 가까울뿐더러, 매개체도 구하기 힘든데. 신기하네요.”

신기하다는 듯이 중얼거리는 그의 모습에 한정우는 턱을 매만졌다.

마계슬라임이 소환되려면 소환사가 필요한 데, 이곳에 마계슬라임이 있었다.

그 말은, 이 근처에 마계슬라임을 소환한 소환사가 있다는 거 아닐까.

“그럼 어떻게 소환했는지는 당사자에게 물으면 되겠군요. 그렇지 않나요, 발포스?”

“네? 음... 뭐. 그렇죠.”

한정우의 말에 잠시 멈칫거리던 발포스가 이내, 맞는 말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환사를 찾아 걸음을 옮기려던 한정우는 아직까지도 들려오는 마계슬라임의 울음소리에 멈칫거렸다.

“그건 어떻게 할 수 없습니까?”

“이거요?”

“네. 많이 거슬리는군요.”

생김새만으로도 불쾌함이 느껴지는 마계슬라임의 울음소리는 고막을 찢어버릴 것 같은 이상한 소리를 냈다.

처음에야 신기해서 지켜보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이제는 그 울음소리를 더 듣고 싶지 않았다.

퍼엉!

한정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발포스의 손에 마계슬라임을 터뜨렸다.

“이게 핵입니다.”

마계슬라임의 잔해만이 남은 그의 손에 둥그런 검붉은 구슬이 하나 들려 있었다.

“이게 부숴지지 않으면 마계슬라임은 죽지 않죠.”

파사삭.

발포스는 설명과 함께 구슬을 가루로 만들어버렸다.

끼에에엑!

구슬이 부서지는 것과 동시에 영혼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결국 죽게 슬라임의 것이리라.

“그럼 소환사를 찾으러 가죠. 할 수 있죠?”

“물론입니다.”

한정우의 물음에 발포스는 당연하다며 자신 있게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을 보며 한정우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래, 다른 이들은 몰라도 발포스를 데리고 다니는 이유는 하나다.

믿음직스럽고 가장 능력이 좋으니까.

비서로도, 경호원으로도.

그 무엇으로도 발포스는 탁월한 성능을 보이는 존재였다.

“저쪽입니다. 마계슬라임의 사념이 길을 알려주는 군요.”

“좋네요. 바로 가죠.”

봐라.

지금도 명령을 내리고 얼마 안 있어 바로 소환사를 찾아낼 방법을 만들지 않는가.

한정우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발포스를 따라 이동했다.

그렇게 걷고 이동한 끝에, 한 장소에 도착할 수 있어.

“...”

그 장소에 펼쳐진 광경을 보며 한정우는 말문을 잃어버렸다.

“이건... 이거 나름대로 장관이네요.”

옆에 있던 발포스조차 묘한 얼굴로 웃음을 흘렸다.

그들의 앞에 언덕이 하나 있었다.

마계 슬라임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언덕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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