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3화
한정우는 자신의 앞에서 열변을 토하고 있는 정미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도와주겠다는 말을 들어서일까.
정미나는 그동안의 울분을 제대로 토해내고 있었다.
‘그런데 언제 끝나지?’
다만, 그 울분을 들어주는 입장에서는 지루하기 짝이 없는 시간이었다.
더 많은 고객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에 들어주고 있기는 하지만.
‘이건 좀 너무 오래 걸리네.’
한정우는 팔짱을 낀 채 팔뚝을 툭툭 두드리며 그녀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10분의 시간이 더 지나고.
“그래서 제가 그때...”
“잠시만요.”
“...네?”
“잠시만 멈춰보세요.”
한정우의 말에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를 바라보았다.
마치, 한창 절정을 달리고 있는데 왜 맥을 끊냐는 듯한 얼굴.
그 표정에 한정우는 옅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결론이 뭡니까?”
“...?”
“아까부터 서론만 너무 길던데. 저한테 원하는 게 뭔지 확실하게 말해주시죠.”
이십 분이 넘게 그녀의 말을 들어준 것만으로도 한정우는 자신이 가져야 할 인내심을 전부 보여주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내심이 없었다면 이렇게까지 들어주지 않았겠지.
“고객님께 죄송한 말이지만, 제게는 그렇게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저도 엄연히 스케쥴이 있는 바쁜 사람이거든요.”
“아...”
“간략하게 제가 무엇을 해주기를 원하는지만 알려주셨으면 좋겠네요.”
사연을 들을 정도로 시간이 넘넘한 사람이 아니라.
한정우의 말에 정미나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가수원동에 저를 퇴출한 길드가 있어요. 그 사람들한테 복수하고 싶어요.”
“그렇군요. 그러면 어떤 형식의 복수를 원하시나요?”
“복수... 저는...”
“간단하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당신이 원하는 형태의 복수가 무엇인지. 설령 전멸을 원한다고 해도 들어드릴 수 있습니다.”
한정우의 시선이 바로 옆에 있는 발포스에게 향했다.
그 하나만 있어도 지구에 있는 전 인류를 멸망시킬 수 있다.
당장 지옥에 있는 불만 불러와도 현세에 지옥이 강림하는 건 결코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 누가 대마신을 죽일 수 있을까.
아무리 시스템을 얻고 강해지고 있는 인간들이라고 해도.
지금 당장 대마신을 상대할 수 있는 인간은 없었다.
인간의 잠재력은 무시하지 않지만, 결코 범접할 수 없는 격이라는 게 이는 법이었다.
발포스는 시스템에서도 알아주는 최강자.
그를 막기 위해서는 시스템에서도 최소 3위 이상의 관리자가 나서야 한다.
“전멸이 아닌 다른 방법을 원하신다면 그것도 해드릴 수 있습니다. 물론 아주 사아소한 대가는 받겠지만요.”
“잠시만, 잠시만 생각할 시간을 주실 수 있나요?”
“물론이죠.”
한정우의 사무적인 미소에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꾹 다물었다.
이번에는 제발 좀 빠르게 결정되었으면 좋을 텐데.
한 사람에게 너무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것도 손해였다.
적당히 1분 내로 결정해주면 좋을 것 같은데.
하지만, 한정우의 생각과 다르게 그녀의 고민은 꽤 오래 이어졌다.
벌써 10분은 훌쩍 넘긴 느낌.
슬슬 한정우도 인내심의 한계를 느낄 때였다.
“죽이는 건... 하고 싶지 않아요. 그러면 같은 사람이 될 것 같아서요.”
“그렇군요. 그럼 어떤 게 좋으신가요?”
“저는 제가 느꼈던 고통만큼 그들이 고통을 느꼈으면 좋겠어요.”
“흠... 어려운 주문이네요. 근데 대충 무슨 느낌인지 알겠습니다.”
한정우가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그녀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대충 후회하게 만들면 되겠네.’
한정우는 머리가 똑똑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녀가 말하는 복수의 대상에게 마음이 있지도 않았다.
그런 그가 정미나의 복수를 해주겠다고 한 이유는 단 하나.
‘대가를 받아내야 하니까.’
한정우는 그들에게서 대가를 받을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는.
‘고객이 되든, 그냥 대가를 뽑아내든 둘 중 하나지.’
같은 인간이었지만, 굳이 따지고 보면 한정우와 그들은 달랐다.
한정우는 반신이었고 그들이 아무리 강해진다고 해도 신격을 얻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신격이라는 결국 그만한 코인이 필요한 것이었으니까.
억 단위의 코인을 벌지 않는 이상 격을 올리기는 힘들지.
‘격을 올리는 조건이 코인만 있는 것도 아니고.’
지금 당장 억단위의 코인을 벌 수 있는 인간도 없었다.
그 정도 벌려면 앞으로 최소 1년 이상은 더 걸리겠지.
코인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벌리는 것도 아니고.
‘아닌가. 지금쯤이면 억 정도는 벌어놓은 사람이 있기는 하겠네.’
자본주의의 맛을 알고 있는 현대 사람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안내하시죠. 길은 아실 거 아닙니까.”
“네... 바로 안내해드릴게요.”
그녀의 말에 한정우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새로운 고객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기분이 좋아졌다.
*
“오늘은 얼마나 들어왔을까요?”
사내가 있었다.
회장실이라고 적힌 방, 소파에 앉아 있는 한 사람.
그는 자신의 앞에 앉은 사람들을 향해 웃으며 말하고 있었다.
“저희 2팀은 이번에 600코인 정도 들어왔습니다. 여기 마석입니다.”
“오. 좋네요. 지난 달 450코인이지 않았어요?”
“이번에 힘 좀 썼습니다. 밑에 있는 놈들 쪼이니 잘 벌어오더라고요.”
“하하하. 잘하셨습니다. 그래요. 원래 인간이란 족속들이 한계가 없죠.”
“네. 맞습니다. 대표님. 뭐든지 하려고 하면 못하는 게 없어요. 제가 그걸 대표님 오시고 배우지 않았습니까.”
하하하하.
2팀 팀장의 말에 대표와 함께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웃음을 흘렸다.
그것도 잠시, 순차적으로 각각의 팀들이 달의 수입을 입에 담았다.
현금이 아닌 코인으로 통용이 되는 세상.
코인을 대신해서 마석으로 코인을 주고받는 지금.
그들의 앞 탁자 위에는 무수히 많은 마석이 쌓여 있었다.
그것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아. 이럴 게 아니라, 다 같이 일터를 살펴보죠.”
“일터 말인가요?”
“네. 격려 차원에서 어깨도 두드려주고. 무슨 느낌인지 아시죠?”
“물론입니다.”
어쩌 모를 수 있을까.
대표의 말인데.
결코, 모를 수가 없었다.
몰라도 알아야 하는 게 직장이니까.
심지어 지금 그들이 함께 하는 곳은 어중간한 마음가짐으로 있을 수 없는 곳이었다.
“자. 그럼 내려가 보죠.”
“네!”
힘차게 외친 팀장들이 한정우를 따라 밑으로 내려갔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건물 지하에 있는 사육장.
키에에엑!
죽여, 죽이라고!
문을 열고 계단으로 내려가기 무섭게 밑에서부터 괴성이 들려왔다.
몬스터들의 울음소리.
사람들의 다급한 목소리.
사방에서 비명이 들려왔고 그 가운데 원형 경기장 같은 것이 하나 있었다.
그 안에는 소의 머리를 달고 있는 거인과 인간들이 대치하고 있었다.
음모오오오!
쿠우웅!
미노타우로스.
그 몬스터가 인간들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한 손에는 거대한 몽둥이를 들고 인간들의 몸을 분쇄했다.
“죽여!”
“고작 그거 밖에 안 돼? 내가 너한테 얼마를 걸었는데!”
그리고, 그 원형 경기장 주위로 가면을 쓴 사람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사육장이라 불리는 경기장에 찾아온 고객들.
세상이 변하면서 자신만의 쾌락을 즐기기 위해 찾아온 이들이었다.
그들은 사람과 몬스터가 싸우는 걸 보며 즐겼고 그들에게 돈을 걸어 도박을 즐겼다.
“잘 되고 있네요. 아 저쪽에는 워울프를 한 마리 더 풉시다. 그래도 꼴에 전사라고 이기고 있는 게 마음에 안 드네요.”
“네. 대표님!”
대표의 말에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전사의 앞에 새로운 몬스터가 등장했다.
“죽여라!”
“그래. 아까처럼 죽이라 말이야! 목을 잘라!”
그 모습을 보며 사람들이 크게 열광하고 있었다.
까득.
그들의 모습을 보는 전사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그것도 잠시.
한숨을 푹 내쉰 그가 자세를 잡았다.
당장 화가 나고 억울해도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은 자신의 앞에 놓인 몬스터를 죽일 뿐이었다.
살아야 하니까.
“강타!”
전사가 스킬을 사용하며 워울프에게 달려들었다.
워울프가 전사의 공격을 피하며 목을 노렸다.
죽고 죽이는 싸움.
그 싸움의 끝에는 전사가 서 있을 수 있었다.
팔이 하나 잘려나간 전사가 대검에 몸을 기댄 채 숨을 헐떡였다.
그런 그의 밑에 머리가 잘린 워울프가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었다.
“나쁘지 않네요. 이따가 마석 수거하고. 적당히 죽지 않게만 치료하세요.”
“네. 잘린 팔은 어떻게 할까요?”
“버려요. 말도 너무 오래 쓰면 좋지 않은 법이에요.”
대표의 말에 팀장 하나가 바쁘게 움직였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대표가 걸음을 옮겼다.
“아. 그런데, 그 사람은 어떻게 됐습니까?”
“그 사람이라면. 정미나 팀... 아니, 배신자말입니까?”
“네. 슬슬 찾을 때도 된 것 같은데. 언제쯤 찾아낼 수 있을까요?”
“수색대가 흔적을 찾았다고 했으니 곧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저번에도 곧이라고 했는데. 최대한 빨리 찾아내는 게 좋을 겁니다. 아. 그렇지. 이번주 내로 찾아내세요. 그때 VIP도 오신다고 하셨으니.”
“네. 알겠습니다.”
팀장들이 고개를 끄덕이고 대표는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도착한 마지막 사육장.
그곳은 다른 사육장과 다르게 텅 비어 있었다.
“빨리 찾아내면 좋겠네요. 새로운 사업의 시작이 그녀가 되어야 하니까.”
사육장을 바라보는 대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
“와...”
옆에서 감탄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정우는 자신의 옆에서 멍하니 발포스를 바라보는 정미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바, 발포스님은 직업이 어떻게 되시는 건가요?”
“직업은 왜 물으십니까?”
“저렇게 강한 분은 처음 봐서요. 저 정도면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게 더 신기할 정도인데.”
“아...”
하긴, 발포스의 저 모습을 보면 놀라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맨손으로 늑대의 목을 찢고 손가락으로 오우거의 심장을 뽑아내는 존재인데.
인간들이 아무리 강해졌다고 해도 저런 모습을 보여주기는 힘들었다.
“정미나 고개님.”
“네, 네?”
“세상에는 알아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 것을 알게 되면 대가를 치르게 되지요.”
“아...”
“그래도 알고 싶으십니까?”
“아, 아니요! 아니에요.”
황급히 고개를 젓는 그녀의 모습에 한정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옮겼다.
벌써 이틀 째 움직이는 중.
슬슬 정미나가 말한 장소가 보이고 있었다.
6층 높이의 건물.
그 밖에서 경비를 서는 사람들까지.
그들을 바라보는 한정우의 표정에 사무적인 미소가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