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9화
“스읍... 하아...”
포탈에서 나온 한정우는 깊게 숨을 내쉬며 천천히 눈을 떴다.
가장 먼저 보이는 건 무너진 건물의 잔해 사이로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고블린의 모습이었다.
키에엑?
키엑!
갑작스럽게 등장한 한정우의 모습에 고블린들이 당황한 듯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인간으로 보이는 존재 두 명이 나타났으니 놀라지 않는 게 더 이상하겠지.
키에에엑!
당황도 잠시 고블린들은 괴성을 지르며 한정우에게 달려들었다.
화르륵.
그와 동시에 뒤에서 후끈한 열기가 느껴지더니 고블린들이 잿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감히 미물 따위가...!”
발포스가 손에서 용암을 뚝뚝 떨어뜨리며 눈을 부라리라고 있었다.
그 모습에 헛웃음을 흘린 한정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걸음을 옮겼다.
‘여기가 어디지?’
잔해 속을 걸으며 한정우는 자신이 온 곳이 어디인지 파악하기 위해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그가 타고 온 포탈은 지구에 보내주는 것이지, 정확하게 어느 나라, 어느 지역에 보내줄지 정해지지 않았다.
랜덤으로 떨어졌기에 그가 도착한 곳이 한국이 아닐 수도 있었다.
미국이 될 수도 있고 일본이 될 수도 있었다.
혹은 헝가리나 러시아일 수도 있겠지.
“...한국이네.”
그런 고민도 잠시.
무너진 건물 속 보이는 잔해들을 보며 한정우는 자신이 도착한 나라가 어디인지 알 수 있었다.
[영덕 슈퍼.]
한글이 적힌 간판이 보였다.
하나의 건물만이 아니라, 곳곳에 한국어가 널려 있었다.
하늘신께서 노하셨으니.
우매한 인간들은 두려워하라.
멸망이 찾아왔다.
바닥과 형태를 겨우 유지하고 있는 벽에 붉은색으로 여러 글씨가 써져 있었다.
대격변이 일어나면서 생겨난 사이비 종교들.
그들은 곳곳에 자신들의 흔적을 남겨 놓았다.
“은행장님. 저희 쪽으로 다가오는 놈들이 있습니다.”
“몬스터인가요?”
“몬스터...는 아닌 것 같습니다. 은행장님과 같은 언어를 쓰고 있네요.”
한정우는 인지하지 못하는 먼 거리에 있는 존재들에 대해 말하는 발포스의 말에 한정우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무리 세상이 멸망했다고 해도 살아 있는 사람이 없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인간은 적응에 있어서 탁월한 모습을 보여주는 생물이었으니까.
“어떻게 할까요?”
“내버려두세요. 그들도 저희의 고객이 되어줄 수 있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한정우의 말에 발포스의 손안에서 이글거리던 용암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그의 모습을 지켜보던 한정우는 고개를 돌려 발포스가 말한 방향을 바라보았다.
부아아앙!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정말로 익숙한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여럿의 사람이 바이크를 타고 달려오는 소리.
“끼얏호!”
“으랴, 으랴!”
점점 가까워지는 그들의 모습에 한정우의 표정이 묘해졌다.
‘폭주족?’
그 단어가 딱 맞아떨어지는 모습의 사람들이었다.
가죽 자켓을 입고 괴상하게 튜닝한 바이크를 타고 달리는 모습은 황당함에 웃음마저 나오게 만들었다.
창피하지도 않은 걸까.
“이쪽이야!”
“이쪽에 모여 있었어!”
그들은 매우 빠르게 달려오더니 한정우를 보고는 멈칫거렸다.
“어?”
“여기 생존자 있는데?”
“와. 우리 구역에서 이렇게 대놓고 돌아다니는 놈들은 또 처음 보네.”
한정우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던 그들이 자리에 멈춰서며 그를 바라보았다.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시선들에 한정우는 그들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니들 뭐냐?”
“어디서 온 거야?”
“먼지 하나 묻지 않은 거 보니까, 다른 지역에서 온 거 같은데. 어디 길드냐?”
“정장 입은 게 딱 그 조폭 새끼들 같지 않아?”
“아. 그렇네. 이 바닥에서 정장 입고 돌아다니는 새끼들은 그놈들밖에 없잖아.”
“그런데 그 새끼들이 여기에는 무슨 볼일이야?”
한정우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는데, 그들은 자신들끼리 마구 떠들어대고 있었다.
이내 어느 길드의 사람이라고 확정까지 짓는 그들을 보며 웃음을 찾는 게 더 힘들었다.
“야. 너. 뭐냐고?”
“아까부터 왜 말이 없어?”
“말 못하냐? 벙어리 새낀가. 답답하게 구네.”
뒤에서 발포스가 움찔, 하며 움직이려는 듯한 기색이 느껴졌다.
한정우는 손짓으로 그의 행동을 말리며 입을 열었다.
“차원 은행에서 나왔습니다.”
“차원 은행?”
“그런 길드가 있었나?”
“이번에 새로 생긴 거 아니야?”
“그런데 이름이 왜 그 따위야.”
한정우는 한 마디 했을 뿐인데 돌아오는 말은 무척이나 많았다.
‘내가 너무 다른 차원들만 신경 쓰기는 했네. 이렇게까지 영향력 없는 걸 보면.’
그들의 반응을 살피며 한정우는 옅게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생각해 보면, 지구의 사람들이 차원 은행에 대해 모르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처음 차원 은행이 생겼던 것도 던전 속이었고 이후에도 인간들이 찾아오기 힘든 곳에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윌리엄은 어떻게 됐지? 인간 최초의 왕이라고 했으니, 지금쯤이면 꽤 성장했을 텐데.’
한정우는 과거 지구에 있을 때 만났던 한 사람의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윌리엄.
인간 최초의 왕이라고 불리며, 미국의 땅 절반을 차지했던 인간.
왕이라는 칭호답게 그 밑에 있는 사람들도 무척이나 많았다.
회귀자이기도 해서 빠른 속도로 성장했을 터.
‘그놈이 있는데 아직까지도 지구의 은행이 성장하지 못했다... 나중에 제대로 확인해 봐야겠네.’
한정우는 나중에 윌리엄을 찾아가야겠다 생각하며, 지금의 일에 집중하고자 다시 입을 열었다.
“저희는 차원 은행에서 나왔습니다.”
“거기가 뭐하는 곳인데?”
“그러니까. 뭐 코인이라도 빌려주나?”
“물론이죠.”
“...뭐?”
“코인이라면 얼마든지 빌려드릴 수 있습니다. 물론, 계좌를 만들어야 하겠지만... 충분히 가능합니다.”
한정우의 차분한 목소리에 그들이 당황한 듯 서로를 바라보았다.
돈을 빌려줄 수 있다는 게 그렇게까지 충격이었던 걸까.
한정우가 그들의 대답을 가만히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야. 코인을 빌려줄 수 있다고 하는데.”
“떼먹으면 어쩌려고 저러는 거야?”
“코인이 뭐 얼마나 많길래 빌려줄 수 있다고 하는 거지?”
“지가 뭐 진짜 은행이라도 되는 줄 아나.”
그들의 숙덕거리는 모습에 한정우는 옅게 웃음을 흘렸다.
‘진짜 은행 맞는데.’
애초에 소개부터 차원 은행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한정우는 결코 거짓말하지 않았다.
고객에게 거짓말해서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야. 큰형님한테 데려가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러니까. 큰형님이 코인 많아 보이는 놈들 데려오라고 했잖아.”
“그럼 일단 데리고 가자. 야, 너 먼저 가서 큰형님한테 말해드려봐.”
“알았어. 먼저 가 있을 테니까. 살살 꼬셔서 데리고 와.”
다 들리는데.
한정우는 그들의 대화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은행장님. 계속 이렇게 지켜보고 계실 겁니까?”
“네. 일단 지켜보죠.”
“하지만...”
“혹시 모르지 않습니까. 이들이 제 고객이 될지. 그리고 발포스, 당신이 있는데 무슨 걱정입니까.”
“아... 그렇죠. 제가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자꾸만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어떻게든 막아내려는 발포스의 모습에 한정우는 옅게 웃음을 흘렸다.
대마신이라고 불리는 사내가 너무 쉬운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아아앙!
그때 한 사람이 바이크를 타고 사라졌다.
그 소리에 한성태는 고개를 돌려 폭주족들을 바라보았다.
“코인을 빌려줄 수 있다고 했지?”
“물론이죠.”
“그 코인을 빌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뭐 담보라도 받아야 하나? 사무실? 그곳에 가야 하려나?”
“그건 아니고 계좌를 만드시면 됩니다.”
“...계좌?”
고개를 갸웃거리는 폭주족 1의 모습에 한성태는 대답 대신 손을 움직였다.
띠링.
귓가에 울리는 알림음.
“...!”
앞에서 폭주족 1이 놀라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아마, 폭주족 1의 시야에 이런 메시지가 떠오르겠지.
[계좌를 개설하시겠습니까?]
처음 은행을 만들었을 때는 상대의 이름을 알아야 계좌를 개설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격이 오르고 차원 은행에 들어온 코인도 많아진 지금은 다르다.
자신의 주위에 사람이 있다면, 은행장의 권한으로 계좌를 개설할 수 있게 할 수 있었다.
“이, 이게 뭐야?”
“보는 그대로입니다. 원한다면 바로 계좌를 만들 수 있는데, 만드시겠습니까.”
“음...”
“일반 은행으로 봐도 됩니다. 계좌가 있는 사람들끼리 거래가 가능하고, 그 계좌를 통해 코인도 빌릴 수 있습니다. 기존에 있던 은행이랑 다를 게 없죠.”
“...진짜 은행이야?”
“물론이죠. 어떻게 제 고객이 되시겠습니까?”
폭주족 1은 바로 결정하지 못했다.
잔뜩 망설이며, 계좌를 개설할지 말지를 고민했다.
한정우는 그를 재촉하지 않았다.
조용히 차분하게 그가 계좌를 개설할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정말로 코인을 빌릴 수 있어?”
“물론이죠. 당연히 빌릴 수 있습니다.”
“흠...”
잠시 고민하던 폭주족 1이, 이내 결심을 했는지 손을 움직였다.
[강대철이 계좌를 개설하였습니다.]
[강대철의 현재 계좌의 등급은 석탄입니다.]
이름이 강대철이었구나.
한정우는 강대철이 계약하면서 들어온 코인을 확인했다.
[강대철님의 계좌 잔액: 1,200코인.]
2,000코인도 넘지 못하는 매우 적은 양의 코인.
하지만, 한정우는 그리 실망하지 않았다.
한 사람이 두 사람이 되고, 두 사람이 열 사람이 되면.
2,000코인도 많아질 수 있다.
‘티클 모아 태산이지.’
아주 적은 양의 코인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조차 코인이었다.
“저희 차원 은행의 고객님이 되신 걸 환영합니다.”
“...이제 바로 코인을 빌릴 수 있나?”
“물론이죠.”
다짜고짜 대출부터 이야기하는 모습에 한정우의 눈꺼플이 들썩거렸다.
그것도 잠시 그는 속마음을 조금도 내색하지 않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바로 대출해죠. 급하게 쓸 곳이 필요해.”
“네. 얼마가 필요하시죠?”
“얼마까지 가능한데?”
그 말에 한정우는 석탄에게 빌려줄 수 있는 코인의 금액을 살폈다.
“오만 코인까지 가능합니다.”
“오, 오만 코인?!”
“네.”
“당장 빌릴 게!”
“그전에 필수적으로 들어야 하는 내용이...”
“필요없으니까, 당장 빌려달라고! 빌려줄 수 있다며!”
크게 소리치는 그 모습에 한정우는 볼을 긁적였다.
눈까지 충혈되어 말하는 강대철의 모습에서는 숨길 수 없는 다급함마저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상관없겠지.’
빌려줘도 갚지 않으려고 하겠지만, 크게 상관은 없었다.
한정우에게는 빌린 돈을 가져올 수 있는 강제 집행의 권한이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고객님.”
사무적인 미소를 지으며 한정우는 한국의 첫 고객을 상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