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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원 은행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98화 (98/113)

제98화

‘지금 이 새끼가 뭐라고 하는 거지?’

한정우의 말을 들은 카세린의 얼굴에 황당함이 가득 깃들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한정우가 데리고 다니는 발포스와 죽이네 마네 하며 싸웠는데.

이제와서 자신과 계약하자고 하는 한정우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애초에 제정신이기는 한 걸까.

“당신에게 손해가 되지는 않을 겁니다. 그건 약속할 수 있습니다.”

그녀의 시선에도 한정우는 그저 사무적인 미소만을 유지한 채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카세린은 자신의 머리를 짓누르고 있는 발포스의 손을 쳐냈다.

움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카세린을 제압하기 위해 발포스가 움직였고.

“괜찮습니다.”

한정우는 손을 들어 그를 말렸다.

“우리 VIP께서 그렇게 생각 없으신 분은 아닙니다.”

그녀는 자신이 발포스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한정우를 인질로 잡을 수도 없었다.

그에게는 관리자를 불러낼 수 있는 힘이 있었고 발포스가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다.

허튼 수작을 부린다는 사실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카세린 씨. 저는 당신이 코인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

“제 제안을 받아들이면, 카세린 씨가 원하는 그 이상의 코인을 만질 수 있게 될 겁니다.”

한정우의 말에 카세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내가 널 뭘 믿고 그래야 하지? 날 죽이려고 했던 놈인데.”

“저랑 계약하지 않으면 죽으실 테니까요.”

“뭐...?”

“저를 죽이려고 했던 존재인데. 그런 존재를 제가 가만히 둘 이유가 없잖아요.”

한정우의 미소를 본 그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녀는 한정우가 빈말을 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

“하... 그렇게 안 봤는데. 상당히 약은 놈이구나.”

헛웃음을 흘리는 그녀의 모습에 한정우는 어깨를 으쓱였다.

“살아가려면 뭘 못할까요.”

“...”

“제가 제안하는 건 간단합니다. 카세린 씨가 제 밑에서 일해주셨으면 합니다.”

“내가 네 밑에 들어가서 좋을 게 뭐가 있지?”

“코인을 많이 만질 수 있죠.”

“나는 이미 코인이 많아.”

퉁명스럽게 말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한정우는 흐음, 하고 턱을 매만졌다.

카세린에게 코인이 많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이미 그녀의 계좌가 차원 은행과 연결되어 있지 않은가.

그녀가 가진 재산이 차원 은행 자금의 5분의 1을 담당한다고 볼 수 있었다.

심지어 그녀가 가진 현물들을 코인화 한다면 그 이상의 코인이 들어오겠지.

그 부분만 생각한다면 카세린이 한정우와 함께할 이유는 없었다.

“그래도 해야 할 겁니다.”

“...뭐?”

“아까도 말했잖아요. 저는 저를 건드린 놈을 가만둘 생각이 없다고.”

말은 정중하게 하고 있지만, 그 말 속에 담긴 내용은 정중하지 않았다.

한정우는 이제 선택하라며 발포스에게 손짓했다.

그의 신호에 발포스의 양 손에 용암이 깃들었다.

“하... 정말 최악이구나.”

카세린이 내릴 수 있는 결정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죽고자 하는 게 아니라면 한정우의 제안을 받아들여야 했다.

“나와 무슨 계약을 하자고 하는 거지?”

“별 건 아니고. 카세린 씨가 용계의 지부장이 되어주셨으면 합니다.”

“...뭐?”

“지부장이요. 용계를 담당해주시면 됩니다.”

한정우의 말에 카세린의 눈동자가 지진을 일으켰다.

지금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

‘애초에 내가 용계까지 담당할 수는 없지. 다시 지구에 갈 생각이고.’

한정우는 한곳에 정체될 수 없는 존재였다.

각 차원마다 그를 대신하여 은행을 맡아줄 직원이 필요했다.

그렇다고 어중간한 존재를 직원으로 부릴 수도 없었기 때문에.

“저는 충분히 좋은 제안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용계의 지부장을 맡으면, 용계에서 벌어지는 모든 코인이 당신의 손에 떨어지는 거니까요.”

“...”

물론 그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녀의 손을 거쳐서 한정우에게 올 거니까.

“너를 죽이려고 했던 내게 지부장을 맡아달라?”

“네.”

“어째서?”

“제가 크게 피해를 입은 것도 아니고. 유능한 존재를 직원으로 부리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요.”

그의 말이 모순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었다.

카세린은 은행의 일을 해본 적이 없었던 존재였으니까.

‘애초에 크게 상관없으니까. 지부장이 되었다고 해서 해야 할 이이 많은 것도 아니고.’

지부장의 일이라고 해봤자 고객을 영업하는 것 말고 다른 게 있을까.

심지어 그 엽업조차 직원을 고용해 부려먹으면 된다.

‘이것만큼 매우 편하고 좋은 직장은 없지.’

한정우는 팔짱을 낀 채 카세린의 대답을 기다렸다.

“아. 물론 간단하게 제약은 있을 겁니다. 별 건 아니고. 저를 주인으로 모신다는 계약을 해야죠.”

“...!”

“죽는 것보다는 낫잖아요. 이것도 어디까지나 당신이 수작을 부리는 걸 방지하려는 용도일 뿐입니다.”

“...안 한다고 하면 나를 죽이겠지.”

그녀의 물음에 한정우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카세린은 대답을 들은 사람차럼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겠다.”

“좋아요. 앞으로 잘 부탁드리죠.”

한정우가 방긋 웃으며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

“자. 그럼 카세린 지부장님? 잘 해봅시다.”

한정우의 말에 카세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 차원은행의 정보를 전해들은 그녀는 체념한 듯한 모습이었다.

솔직하게 말해서 한정우의 제안이 그녀에게 나쁜 건 아니었다.

안 그래도 정착할 곳은 찾고 있던 그녀에게 차원 은행은 안정적인 직장이 되어줄 수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녀가 원하는 그 이상의 코인을 만질 수 있게 만들어줄 수도 있었다.

용계에는 무수히 많은 존재가 있었고, 카세린이라고 해서 그들 모두에게 코인을 빼앗는 건 불가능했으니까.

“그럼 저는 가보죠. 이제 용계는 카세린 지부장님에게 달려 있는 겁니다.”

“...네.”

“저는 팍팍한 사장이 아닙니다. 인센티브도 잘 챙겨주니까요.”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카세린의 상황 적응력은 매우 빨랐다.

평소 쓰지도 않던 존댓말을 사용하며 한정우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웃음을 흘린 한정우는 발포스가 만들어낸 포탈 속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도착한 차원 은행의 본사.

지구의 만남의 광장에서 시스템의 탑 중앙으로 옮긴 차원 은행.

‘내가 요즘 지구를 제대로 신경 쓰지 않기는 했나 보네.’

은행장실 소파에 앉은 한정우는 지구에 있는 은행의 성과를 훑어보며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차원 은행 – 지구.]

-현 고객 수: 4,512.

-현 코인 보유량: 554.362.534

지구의 인구수는 60억명이 넘는다.

아무리 대격변으로 인해 많은 인간들이 죽었다고는 하지만.

그럼에도 지구에는 여전히 억 대가 넘는 생존자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몬스터들을 사냥하면서 코인을 벌어들이고 있었다.

‘인간들의 잠재력을 무시할 수 없지.’

대격변 때는 별 볼일 없는 생명체였을지 몰라도, 지구의 생명체의 잠재력은 엄청나다.

적응력부터 시작해서 자금에 대한 욕망은 시스템의 관리자도 놀라게 만들 정도였다.

당장 한정우만 하더라도 세상이 자본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 바로 앞에서 보지 않았던가.

‘...하긴. 밖으로 영업을 돌 수 있는 존재가 없으니까.’

지구에 있는 은행의 직원은 많지 않았다.

그곳에 있는 직원 대부분이 본사로 옮겨졌기 때문이었다.

노예도 마찬가지.

“지구는 좀 어떻습니까?”

“지구 말입니까?”

“네. 제가 제대로 신경 쓰고 있지 못해서 조금 걱정이 되네요. 운영은 잘 됩니까?”

“...음.”

한정우의 물음에 발포스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지구에 권속을 두고 있어서 바로바로 상황을 알 수 있을 텐데, 왜 대답을 망설이고 있는 걸까.

“솔직하게 말해서 은행을 찾는 고객이 많지 않다고 합니다.”

“숫자로 하면?”

“하루에 두 명도 방문하지 않을 때가 있다고 하더군요.”

툭툭.

발포스의 말을 들은 한정우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대격변이 일어나기 전.

지구에 있던 은행은 고객이 비는 곳이 없었다.

하다못해 시골에 있는 은행조차 하루에 한, 두 명 이상은 꾸준히 찾았다.

은행이란 그런 존재였다.

사람이 살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와 관련된 은행에는 사람이 찾아오는 건 매우 당연한 일이었다.

“그건 좀 문제겠네요. 아니, 애초에 처음부터 전체적으로 문제가 많았죠.”

지금까지는 시스템의 도움으로 어떻게든 차원 은행을 운영하고 있었다.

하지만, 주먹구구식으로 운영하는 일에 문제가 없을 수가 없었다.

‘이 시스템부터 뜯어고쳐야지.’

한정우는 은행장이었다.

그렇기에 기존에 있던 은행의 체계를 바꿀 수가 있었다.

지금의 체계는 구멍도 많았고 문제도 많았다.

당장 고객의 등급을 정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은행을 운영하는 그 모든 것들이.

‘이건... 천천히 고쳐야지. 급하게 해서 좋을 건 없으니까.’

예전, 지구의 은행이 운영하던 체계를 적용한다면 많이 좋아지겠지.

‘간편화하는 것도 필요하고.’

해야 할 일이 무척이나 많았다.

“아... 아예 그냥, 은행 일을 하던 사람을 고용해야 하나.”

지구에 있는 전직 세무사나 은행원을 데리고 오면 무척이나 편해질 것 같은데.

‘지구로 가야 할 이유가 더 생겼네.’

지구의 은행 활성화부터 시작해서 시스템의 수정까지.

앞으로 해야 할 일들에 한정우는 벌써부터 한숨이 나오는 듯했다.

‘나중에 최고 관리자와 미팅도 해야겠고.’

협력 관계인 시스템을 잘 이용한다면 한정우의 차원 은행은 더욱 성공할 수 있으리라.

“발포스. 지금부터 지구에 가려고 합니다.”

“네. 은행장님.”

“그곳에 가면 쉽게 힘을 드러내면 안 됩니다. 제가 허락하기 전까지 가만히 있어야 합니다.”

“그렇습니까?”

“네. 제가 따로 지시하지 않는 이상, 가만히 있으세요. 아, 예외적인 경우는 있습니다. 제가 위험에 처한 상황일 때. 그때는 힘을 써도 좋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한정우가 발포스에게 제약을 거는 이유는 하나였다.

지구의 인간들이 발포스의 힘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하기 때문이었다.

발포스는 파괴룡이라고 불리는 카세린을 압도적으로 찍어누른 존재였다.

그런 존재가 격을 드러낸다면 평범한 인간은 그 자체만으로도 심장이 멎을 수 있었다.

몬스터를 잡으면서 성장한다고는 하지만, 반신의 격조차 없으면 감당하는 일 자체가 불가능했다.

‘생각해 보면 내가 엄청 운이 좋았네.’

발포스를 거둔 게 얼마나 운이 좋았던 것인지 한정우는 다시 한 번 알 수 있었다.

“자. 그럼 지구에 가봅시다.”

발포스가 한정우의 뒤를 조용히 따라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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