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7화
97화
특급 관리자는 자신의 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며 헛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시스템의 관리자들 사이에서도 아름답기로 소문이 난 용계가 망가져 있었다.
높디 높은 산맥은 통째로 소멸하였고 오색구름의 하늘에는 균열이 생겨나 있었다.
마나의 밀도가 높은 땅은 쩍쩍 갈라져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 자체가 신기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음...”
다른 무엇보다 허공에 떠 있는 한 존재를 보며 그는 말문을 잃어버렸다.
망가지다 못해 박살나버린 세상의 가운데 발포스가 금색의 사슬에 묶여 있었다.
‘제약의 사슬.’
시스템과 계약을 한 이들이 금기를 어겼을 때 나타나는 사슬.
저 사슬은 시스템과 함께 탄생한 최고 관리자가 직접 공들여 만든 제약의 사슬로, 아무리 강한 힘을 가진 존재라도 쉽게 부술 수 없었다.
‘발포스가 강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최고 관리자의 힘을 이길 수는 없지.’
특급 관리자는 최고 관리자에 비빌 수 있는 강자를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태초의 존재.
최고 관리자는 그러한 존재였다.
발포스가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결국 시스템에 속해 있는 존재였다.
한계가 분명하다는 사실.
유일하게 비빌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그건 아마...
“제 얼굴에 뭐 묻었습니까?”
“아니요. 아닙니다.”
한정우의 말에 특급 관리자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제가 무엇을 해주길 원하십니까?”
“아까 말했던 것 같은데. 발포스를 묶고 있는 저 사슬을 치워주세요.”
“제약의 사슬 말인가요?”
“네.”
“하지만, 저건 금기를 어긴 죄인들을 묶는 사슬이라...”
“그래서 안 됩니까?”
“...네?”
“안 되냐고 물었습니다.”
한정우의 목소리가 살짝 낮아졌다.
특급 관리자는 한정우의 미소가 매우 섬뜩하게 느껴졌다.
마치, 해결 못하면 안 된다며 압박을 보내는 듯한 모습.
“...안 되는 건 아닙니다.”
특급 관리자는 보이지 않게 주먹을 꽉 쥐며 입을 열었다.
미소를 유지한 채, 그는 발포스를 묶고 있는 제약의 사슬을 살폈다.
‘1급 제약의 사슬.’
최고 관리자의 뼈로 만들어진 사슬.
덕분에 그 강도는 상상을 초월했고 부술 수 있는 힘이 존재하지 않았다.
“바로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두 자리 숫자의 머무르던 그였다면, 저 사슬을 절대 풀 수가 없었겠지만.
‘특급 관리자가 된 지금은 다르지.’
두 자리 숫자였을 때보다 특급 관리자가 된 지금의 권한이 훨씬 강해졌다.
1급 제약의 사슬이라도 마음대로 풀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결국 이것도 은행장의 관리자가 되었기 때문이지만.’
최고 관리자가 직접 승인해준 권한.
그 권한은 결국 한정우의 관리자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그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제약 해제.
특급 관리자가 시스템을 만져 발포스를 묶던 제약의 사슬을 풀었다.
“킁.”
발포스가 방금까지 제약의 사슬이 묶고 있던 손목을 매만졌다.
그는 본래 자신을 묶고 있던 제약의 사슬을 힘으로 부수려고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과거에 부쉈던 낮은 등급의 제약의 사슬과는 차원이 다른 힘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최고 관리자의 뼈로 만든 거라 그런지 확실히 단단하네.’
온힘을 다했다고 해서 그 뼈를 부술 수 있었을까.
차라리 1위부터 100위의 관리자들을 상대해 이기는 게 더 쉬울 것 같았다.
“수고했습니다. 이만 돌아가도 좋아요.”
“정말 이게 끝인가요?”
“네. 이 이상 할 건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특급 관리자는 황당해하면서도 더 말을 꺼내지 않았다.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빛 무리와 함께 한순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흠...”
특급 관리자가 사라지고 한정우는 의자에서 일어나 주위를 살펴보았다.
“관광지로 사용하려고 했는데... 이러면 좀 힘들겠네요.”
카세린과 발포스가 만들어낸 참상은 어마어마했다.
특히 마지막에 발포스가 본신의 힘을 드러내면서 용계 곳곳에 균열이 생겨났다.
“그거라면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회복할 테니까요.”
“그런가요?”
“네. 용계처럼 마나의 밀집도가 높은 곳은 차원의 근원이 망가지지 않은 이상 반드시 회복할 수 있습니다.”
다행히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시간.
차원이 회복하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했고 한정우에게는 기다릴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
“당장은 관광지로 쓰려는 생각은 멈춰야겠네요. 저승도 있으니까... 음.”
그래도 용계를 샀는데 이대로 돌아가는 것도 무척이나 아쉬웠다.
이득을 얻을 수 있는 게 뭐가 있을지 고민하던 한정우는 자신의 눈치를 보고 있는 신룡을 발견할 수 있었다.
“용계에도 생명체가 살아간다고했죠?”
“네. 많은 생명체가 있죠.”
“그 생명체들 중 지성이 있고 코인을 벌고 사용할 수 있는 존재도 있나요?”
“물론이죠. 당장 용들만 해도 그 수가 상당할 테고. 드워프와 같은 토착민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그건 무슨 일로?”
의문을 보이는 발포스의 모습에 한정우는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관광지로 사용할 수 없으면, 다른 방법으로 돈을 벌면 되는 거였다.
“신룡이 이 차원의 관리자라고 했던 것 같은데. 맞나요? 아니면, 거짓말하지 말고 솔직하게 말하세요.”
한정우의 말에 신룡이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이곳에서 생명체가 가장 많이 지나다니는 장소로 안내하세요.”
“그곳은 왜...?”
“곧 알게 될 겁니다.”
한정우의 미소에 신룡의 눈이 불안하게 떨렸다.
“아. 발포스. 저 용도 챙겨오세요. 그래도 우리 VIP 고객님인데, 함부로 방치할 수는 없죠.”
“네! 바로 옮기겠습니다.”
발포스가 쓰러진 카세린에게 다가가 그녀를 어깨에 짊어졌다.
그 모습을 힐끔 바라본 한정우는 신룡에게 고개짓을 했다.
한정우의 신호에 잠시 머뭇거리던 신룡이 이내 눈을 질끈 감고는 손을 휘저었다.
“...여기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한정우의 앞에 나타난 푸른색 포탈.
신룡의 말에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포탈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옆에 발포스가 있는 지금 신룡이 수작을 부릴 걱정은 하지 않을 수 있었다.
“오... 괜찮네요.”
포탈을 타고 이동한 장소를 둘러보며 한정우가 감탄을 흘렸다.
하늘에 용들이 돌아다니고 있었고 땅에는 여러 생명체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한정우가 있는 곳은 그들 모두를 내려다볼 수 있는 사원처럼 생긴 건물의 앞이였다.
“이거, 뭐하는 곳입니까.”
“...제 사원입니다.”
“당신의 사원이라고요?”
“네.”
“아까 보니까, 레어가 따로 있던데. 여기 필요 없죠?”
“그게...”
“필요 없는 걸로 알겠습니다. 어차피 제 땅이잖아요.”
한정우는 용계 자체를 사들였다.
그렇기에 그에게는 땅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여기면...”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한정우는 시스템 창을 열었다.
[은행장 소유의 땅을 발견하였습니다.]
[100,000,000코인을 사용하여 은행을 건설하실 수 있습니다.]
한국과 시스템 창과 다르게 용계에서 새로운 은행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무려 1억 코인이나 들었다.
예전 같았으면 감히 꿈도 꿀 수 없는 금액이었지만.
‘대체적으로 용들은 코인이 많으니까.’
한정우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은행을 건설했다.
빈 공간에 흐릿하게 건물의 형태가 생겨났다.
[차원은행의 완공까지 3일 남았습니다.]
3일이면 기다리지 못할 것도 없었다.
한정우는 차원 은행에서 시선을 때고 신룡에게 다가갔다.
“한 가지 물어볼게요.”
“...?”
“살고 싶습니까, 죽고 싶습니까?”
지금 그걸 질문이라고 하는 걸까.
한정우를 바라보는 신룡의 표정에 황당함이 깃들었다.
“당연히 살고 싶습니다.”
“그러면 가입하세요.”
“...네?”
“처음부터 저를 공격한 당신을 살려줄 생각이 없지만, 제 고객님이라면 다르죠.”
“아...”
“선택하시면 됩니다. 제 고객이 될 것인지 죽을 것인지.”
신룡은 진심이냐는 듯이 한정우를 바라보았다.
그 황망한 시선에도 한정우의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발포스.”
“네. 은행장님.”
“신룡정도되면 그 부산말의 가격도 좋겠죠?”
“수만년을 산 신룡이라면, 수집하고자 하는 이들도 많을 겁니다. 비싼 값을 주고라도 사려고 하겠죠.”
발포스의 설명이 이어질수록 신룡의 얼굴도 점점 창백해졌다.
한정우가 진심이란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게 된 그에게 선택이란 애초에 정해져 있었다.
“...하겠습니다.”
“잘 생각했습니다.”
새롭게 생긴 고객을 향해 한정우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
카세린은 고통 속에서 천천히 눈을 떴다.
용암에 몸이 녹아내리고 단단한 주먹에 뼈가 부서졌다.
끔찍한 고통 속에서 카세린은 결국 의식을 잃었었다.
“허억...!”
뒤늦게 정신을 차린 그녀가 황급히 상체를 일으켰다.
반사적으로 발포스를 찾아 움직이는 그녀의 눈이 주변을 둘러보고는 마구 흔들렸다.
“...이게 무슨.”
처음 보는 건물이 보였다.
그 건물 앞으로 용들과 드워프, 엘프 등이 줄을 서고 있었다.
“발포스!”
그녀는 줄의 질서를 지키게 만드는 발포스를 발견하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카세린을 돌아보는 발포스의 표정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심드렁하게 그녀를 바라보더니 자신이 하던 일에 집중했다.
“네놈!”
자신이 무시당했다는 생각에 카세린은 바로 그에게 달려들었다.
콰아아앙!
발포스가 가볍게 휘두른 손길에 머리부터 땅에 처박혔다.
압도적인 힘의 차이.
발포스는 더 이상 카세린을 상대로 봐줄 생각이 없었다.
예전에야 제약의 사슬 때문에라도 힘을 아꼈지만, 한정우가 제약을 해결해줄 이후로 힘을 아낄 이유가 없었다.
본신의 힘을 사용할 수 있는 그에게 카세린은 상대조차 되지 못했다.
“무슨 일입니까?”
밖에서 들려온 소란에 차원 은행에서 나온 한정우는 카세린의 목을 붙잡고 있는 발포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 한정우의 눈이 가느다래졌다.
“깨어나면 정중히 모시라고 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죄송합니다. 갑자기 달려드는 바람에 무력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흠... 다음부터 조심해주세요.”
“네. 명심하겠습니다.”
발포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한정우는 걸음을 옮겨 카세린에게 다가갔다.
한정우를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에 경계심이 가득 했다.
“이거, 참. 저희 VIP께서 꼴이 말이 아니군요.”
“...”
“그렇다고 풀어주면 또 달려들 게 뻔하고.”
카세린을 바라보며 한정우는 잠시 고민했다.
그것도 잠시.
“카세린 씨.”
“...왜?”
“저와 계약하나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녀에게 말을 거는 한성태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