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5화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돼.’
발포스의 옆에서 이리저리 눈치를 살피며 신룡이 속으로 불평을 내비쳤다.
평화로이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갑작스럽게 찾아와 자신을 핍박하는 은행장 일행이 원망스러웠다.
그리고 같은 용족이면서 은행장의 편에 선 전 관리자이자 현 은행원인 메켄도 원망스럽다.
그가 용계에 대해 말하지만 않았어도, 은행장의 밑에 들어가지만 않았어도 일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테니까.
아니, 다 떠나서 한정우가 은행장이라는 것도.
시스템과 동업자라는 것도.
발포스를 부하로 부리고 다니는 것도.
그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다 못해 발포스가 없었더라면 이렇게까지 비굴하지 않았을 테니까.
‘하다못해 카셀린이 있었더라면.’
마음에 드는 놈이 나타났다며 사라진 그녀가 원망스러웠다.
적어도 그녀가 이곳에 남아 있었더라면 발포스로 인해 머리를 굽히지 않아도 되었을 테니까.
신룡인 그보다 월등이 강력한 그녀는, 발포스와 맞먹는 힘을 가지고 있기에.
아무리 대마신이라고 하더라도 그녀와 싸우기를 꺼려할 수밖에 없었다.
발포스만 견제할 수 있다면, 용계 곳곳에 있는 드래곤의 수장들을 불러낼 수 있고.
전력 차이를 뒤엎을 수 있다.
카셀린이 없는 지금, 그들을 부른다고 해서 발포스의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을 알기에.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이 정도 되었으면 낌새를 느꼈겠지.’
드래곤 수장들은 결코 멍청하지 않았다.
수장이란 이명을 땅따먹기로 따낸 게 아니었다.
각 드래곤들 중 가장 뛰어난 자질을 가졌고, 현명하며 강력한 힘을 가진 이만이 수장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이라면 신룡인 자신을 찾아온 이들에 대해 알아챌 수 있다.
발포스의 기운은 숨길래야 숨길 수 없는 불길한 기운이었기에.
느끼지 못하는 게 더 이상했다.
‘카셀린을 찾아온다면 좋겠지만.’
그게 가장 베스트겠지만, 크게 기대를 하지 않았다.
카셀린이 어디로 간 줄 알고 불러오겠는가.
설령 위치를 안다고 해도 그녀가 멀리 있으면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지금 그가 바랄 수 있는 건 하나였다.
부디 시스템이 이상한 선택을 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
그런 그의 바람은.
“다녀왔습니다. 생각보다 사는 게 쉽더군요.”
“그런가요? 시스템이 어지간히도 은행장님이 마음에 들었나 보네요.”
“그런 것 같더군요. 불필요한 절차들을 바로바로 쳐내주는 걸 보니까.”
돌아온 한정우의 말에 좌절되었다.
관리자를 개인적으로 찾아간다는 것도 놀랍기는 했지만.
떠난지 불과 삼십분만에 돌아온 것도 놀라웠다.
차라리 아무런 성과라도 없다면 모를까.
용계를 사들였다고 한다.
“...정말로 용계를 샀다고?”
“네.”
“미친...!”
담담한 한정우의 대답에 신룡은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차원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살 수 있는 거였나.
그는 자신이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상식이 무너지는 걸 느꼈다.
용계는 시스템에 소속되어 있었고, 시스템은 자신이 가진 것을 쉽게 내놓지 않았다.
사람 하나, 물품 하나라면 모를까.
장기적으로 봤을 때 가지고 있는 게 큰 이득을 줄 수 있는 차원을 함부로 파는 그런 곳이 아니었다.
코인에 대한 집착이 얼마나 심했으면 그들을 지켜보는 이들이 전부 시스템을 보고 상인집단체라고 말을 할까.
악덕 상인보다 더 심하게 코인에 집착을 하는 게 바로 차원 은행이었다.
그런 곳이 차원을 포기했다는 말이었으니, 어찌보면 신룡의 반응은 정상적이라 볼 수 있었다.
다만 한정우와 시스템의 관계를 모르기에 나올 수 있는 반응이기도 했다.
“정식으로 저는 용계를 샀습니다. 용계에 대한 모든 권한이 제게 있다는 걸 알아주셨으면 좋겠네요.”
“...그.”
“아, 참고로 이의제기는 받지 않아요. 저는 정당하게 산 거니까요. 불만 있으시면 불만 있는대로 사는 걸 추천드립니다.”
신룡은 입술을 꽉 깨물며 한정우를 바라봤다.
불만? 당연히 많았다.
이런 식으로 남 밑에 들어가는 건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것과 별개로, 그가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었다.
당장 발포스를 어떻게 할 수 있지 않은 이상, 그는 한정우의 털끝 하나라도 건드릴 수 없겠지.
‘시스템이 이렇게 빨리 허락했다는 건... 분명 두 사이에 뭔가 있다는 거야.’
그래, 그렇지 않고서야 시스템의 행동은 이해할 수 없다.
뭐가 되었든 신룡이 할 수 있는 건 없다.
이제 그가 해야 할 건, 부디 새로운 차원의 주인이 과한 요구를 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자, 그럼 이제 제대로 사업 이야기를 해보죠.”
한정우의 말이 신룡을 잡념에서 일깨웠다.
줄곧 절망하여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신룡이 고개를 들어 한정우를 올려다봤다.
“...사업 말인가요?”
“네. 사업이요.”
한정우가 다리를 꼬았다. 그가 앉은 뼈의자가 삐그덕 거리는 소리를 냈다.
“제가 원하는 걸 별 거 없습니다. 당신들의 육...”
한정우의 말이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그는 말을 멈추고 황급히 하늘을 올려다봤다.
치이익. 어느새 땅을 녹여버릴 정도로 뜨거운 불꽃을 두르며, 발포스가 한정우의 앞에 섰다.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낸 발포스의 시선이 하늘로 향했다.
“아...”
신룡이 기쁨과 탄식이 공존하는 신음을 토해냈다.
그도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대한 날개를 펼친 여인이 하늘에 모습을 드러냈다.
왼쪽은 황금색이, 오른쪽은 붉은색으로 둘러 쌓인 날개들.
“카, 카셀린!”
신룡이 비명과도 같은 목소리로 그녀를 향해 소리쳤다.
카셀린, 매우 익숙한 이름이라 한정우는 눈살을 찌푸렸다.
매우 강렬한 인상을 남겨준 존재가 하나 있었다.
“...!”
누구였는지 기억하려던 그가 불현듯 떠오른 기억에 눈을 크게 떴다.
카셀린, 어찌 그 이름을 잊을 수 있을까.
한정우에게 죽음이란 두려움을 안겨주었던 존재인데.
그의 일꾼들을 무참히 죽인 성좌인데.
한정우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자신을 지키고 선 발포스의 등을 두드리며 앞으로 나섰다.
“위험합니다.”
“괜찮아요.”
발포스의 만류에도 그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하늘을 향해, 허공에 떠 있는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네요.”
“...”
“고객님.”
한정우가 사무적인 미소를 지은 채 그녀를 불렀다.
카셀린, 비록 그녀와의 첫 만남은 좋지 못했지만 그녀가 자신의 고객임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아직 무언가를 하지 않았는데 다짜고짜 적대감을 보일 수는 없다.
특히 그녀의 이명에는 황금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만큼, 한정우에게 중요한 고객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었다.
‘어쩌면 내 VIP가 될 수도 있으니까.’
한정우는 자신에게 코인을 안겨줄 이에게 다짜고짜 적대감을 보일 정도로 감정적이지 않았다.
공은 공이고 사는 사다.
그는 공과사를 철저하게 구분할 수 있었다.
“너...”
카셀린이 한정우를 알아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의 눈이 한정우를 빠르게 훑어봤다.
“허... 믿을 수 없군.”
그녀의 목소리에는 놀람이라는 감정이 서려 있었다.
자신이 본 것을 믿기 힘들다는 듯이 그녀는 눈을 좁히며 한정우를 응시했다.
“...내가 아는 은행장이 맞나?”
“네. 맞습니다.”
한정우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에게 카셀린의 얼굴이 더욱 믿기 어렵다는 듯이 변했다.
“도대체 그 짧은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던 거지? 이건 사람이 변했다는 수준이 아니잖아. 그냥 다른 사람이 됐어.”
“그냥, 뭐 여러 일이 있었습니다.”
한정우는 그렇게 대답을 하며 볼을 긁적였다.
그리고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데, 카셀린 씨가 여기에는 왜 오신 거죠?”
“뭐?”
“이곳은 이제 제 것입니다. 제가 시스템에게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사들인 곳이죠.”
“너, 지금...”
카셀린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걸 보며 한정우는 말을 이었다.
“저는 카셀린 씨를 초대한 적이 없는데. 이상하네요. 차원이 빚을 져서 파산한 것도 아니고, 엄연히 주인이 있는 곳인데. 시스템의 말에 따르면 주인에게 허락을 받지 않은 이상 차원에 간섭할 수 없다고 하던데...”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리던 그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렇군요. 시스템도 섣불리 건드리지 못할 정도로 강하면 차원의 틈새를 비틀 수 있다고 했었죠. 카셀린 씨도 강하신 분이니, 충분히 그럴 수 있겠네요.”
“...”
“하지만, 그래도 이건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비록 카셀린 씨가 제 고객이신 건 맞지만. 그래도 선이 있다는 걸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돌아가주시겠습니까?”
한정우는 침착하고 차분하게 자신의 의사를 전달했다.
카셀린은 그런 그를 무표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런 표정 변화 없는 그녀를 보며, 한정우는 오싹함을 느꼈다.
그녀의 무표정한 얼굴과는 다르게, 그녀를 감싸고 있던 공기는 달랐다.
카셀린의 주위로 공기가 일렁이더니, 황금빛 번개를 만들어냈다.
금방이라도 번개가 자신을 덮칠 것 같은 상황에도, 한정우는 아무렇지 않게 그를 바라봤다.
“음... 카셀린 씨?”
“너... 이제 보니 상당히 건방진 아이였구나. 감히 누구 앞에서 용계의 주인을 자칭하는 거지?”
“무슨 문제있습니까? 저는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하. 예전과 달라졌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건 단순히 달라진 정도가 아니야. 그냥 미친 거였어.”
그녀가 자조적인 미소를 짓더니 으드득, 이를 갈았다.
한정우는 그녀의 반응에 억울함을 느꼈다.
그는 거짓말을 한 게 없었다.
시스템에게 정당한 대가를 지불해 용계를 사들인 건 사실이었다.
그 어디에도 거짓말은 섞여 있지 않았다.
그런데도 카셀린은 한정우를 미친놈 취급했다.
“...말이 과하시네요. 저는 최대한 정중하게 나오고 있는데.”
한정우는 작게 읊조리며 손을 들어 얼굴을 쓸어내렸다.
번개가 생성되면서 하늘이 어두워지기 시작하더니, 먹구름이 생성되었다.
카셀린은 흉포한 번개들을 늘어놓으며 한정우를 위협했다.
‘이건... 좀 짜증나네.’
무섭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한정우는 격이 높은 존재를 만나왔고, 그중에는 시스템의 최고 관리자도 포함되어있다.
최고 관리자를 만나면서 느꼈던 것을 생각하면 카셀린의 기세는 별거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격부터가 달랐으니까.
그런 존재와 사업 얘기까지 한 그가, 그보다 낮은 격의 존재에게 겁을 먹는 건 쉽지 않았다.
당장 자기 자신을 지킬 수간이 없다면 모를까.
“...발포스.”
그의 옆에서는 전 차원을 통틀어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최강의 경호원이 있다.
그리고 그가 아니더라도 예전에 또 다른 성좌에게 받은 방어 수단도 하나 있다.
겁을 먹어야 할 상황이 아니다.
“일단 저것들부터 치워주시겠습니까?”
한정우는 등 뒤가 점점 뜨거워지는 걸 느끼며 말을 이었다.
“상당히 거슬리네요. 못하겠다는 말은 듣지 않겠습니다.”
“네.”
듬직한 목소리와 함께 하늘에서 괴성이 울려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