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3화
한정우는 신룡과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신룡이 있는 차원이자, ‘용계’라고도 불리는 이 세계는.
무척이나 아름다운 곳이었다.
무릉도원(武陵桃源).
그곳이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그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언덕 하나하나가 지구에 있는 산보다 거대했다.
언덕에는 자색의 구름들로 뒤덮여 있었다.
지구의 70%가 물로 뒤덮여 있는 것과 다르게.
용계는 땅이 70% 이상이었다.
그렇다고 바다가 작은 건 아니었다.
용계 자체의 크기부터가 지구의 배는 될 정도로 거대한 세계였다.
세계가 크기 때문일까, 용계에 거주하는 주민들의 크기 또한 엄청났다.
발밑으로 지나가는 거대한 생명체가 보였다.
단단한 껍질들로 몸이 뒤덮인 생명체들 수백이 달려가고 있었다.
저게 무엇인지 물어보니, 발포스는 별거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곤충입니다.”
“...저게 말입니까?”
“예.”
발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어째서 이곳의 곤충들이 이리도 거대한 것인지 설명을 해줬다.
“용계는 자연의 기운이 가득한 곳입니다. 가득하다 못해 넘쳐날 정도죠.”
“자연의 기운이라면...”
“간단하게 말해서 마나입니다. 그 왜, 게임을 해보셨으면 알 겁니다.”
“네. 알고 있습니다.”
한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게임 이야기를 꺼내지 않아도, ‘마나’라는 단어는 그에게 익숙한 이름이었다.
차원 은행장으로서 많은 사람을 만났고, 마나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마나는 사물의 본질을 이루는 것.
녹스가 살아생전에 사용하던 힘이기도 했다.
지금도 사용하고 있고.
“용계는 마나의 농도가 무척이나 짙습니다. 만약 은행장님이 반신이 되시지 않았다면, 숨시기조차 힘들었겠죠. 음... 엘릭서를 마셨으니 그건 아닌가. 하여튼, 용계는 마나로 가득찬 그런 곳입니다.”
“그러니까. 풍선에 물이 가득 차 있는 그런 상태라는 거죠?”
“오. 좋은 표현이네요. 맞습니다. 마나가 너무 많아서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넘실 거리고 있죠.”
“그렇군요.”
“그렇다 보니 생물들은 짙은 마나 속에서 살기 위해 진화를 해야 했습니다. 마나를 더 많이 받아들일 수 있게. 이런 환경에서도 살아갈 수 있게.”
이해했다.
마나를 계속해서 받아들이고, 살기 위해서 진화를 하다보니.
불가피하게 덩치가 커졌다는 것도.
그리고 용계에 평범한 인간이 들어오면 얼마 버티지 못하고 죽는다는 것도.
“나쁘지 않네요.”
“그렇죠. 저도 이곳을 정복하려고 했을 정도니까.”
발포스의 나지막한 말에 신룡이 몸을 움찔 떨었다.
정복.
용계는 무수히 많은 차원 중에서도 상위 차원에 위치한 세계였다.
가진 무력이 매우 강한.
하지만 상대는 발포스였다.
천계조차 그라는 존재 하나를 막기 힘들 정도로, 강력한 괴물.
천계에도 물론 발포스만큼이나 강한 존재가 있기는 했지만.
가진 힘에 비해 제약이 적은 발포스와는 다르게, 그녀는 제약이 무척이나 많았다.
그래서 섣불리 움직일 수 없다. 그녀가 나서지 않으면 그를 막기란 힘들었다.
거기에 그를 따르는 부하들조차 괴물들 뿐이니.
정복하겠다고 나서면, 용계는 얼마 버티지 못하고 정복당했으리라.
“안 건드렸네요?”
“하려고는 했는데... 하필이면 시스템이 먼저 건드렸더라고요. 시스템에게 소유권이 넘어가서... 아무리 저라고 해도 시스템을 상대하는 건 좀 버거우니까요.”
“아. 그렇군요.”
시스템이라면 아무리 발포스라고 해도 건드리기 힘들겠지.
어떻게 된 상황인지 대략적으로 이해되었다.
간단하게 말해서 용계는 시스템에 팔려나간 덕분에 구사일생을 할 수 있었던 거였다.
“운이 좋았군요.”
“그렇죠.”
한정우가 신룡을 힐끔 바라보며 말했다.
그 시선에 신룡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그도 알고 있을 것이다. 지금의 대화를 통해서.
그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용계는 발포스에게 밝힐 뻔했다는 걸.
“좋네요.”
용계를 전부 돌아본 한정우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척이나 아름다운 곳이었고, 신비로운 곳이었다.
현대인들에게 있어 용계는 환상 그 자체인 곳이었다.
‘저승이나, 시스템의 탑만큼 대단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 매력이 있어.’
한정우는 용계를 둘러보며 여러 가지 사업을 구상했다.
그리고 한 가지 결론에 이르렀다.
“여기 생각보다 괜찮아요. 제가 가지고 싶을 만큼.”
“아...!”
옆에서 탄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애타는 눈빛이 느껴졌지만, 한정우는 가벼이 무시했다.
“흠... 이 정도면 관광지로 딱인데...... 시스템에게 넘어간 거면.”
답이 없으려나.
박강훈은 시계를 만지작거렸다.
만약 시스템에게 넘어가지 않았더라면, 용계를 차지할 수 있는 방법은 많았다.
당장 발포스라는 무력을 동원하거나, 혹은 사들이면 된다.
예전이라면 모를까.
시스템의 중심부와 저승 등등에서 은행을 설립한 그의 재산은 지금도 수직상승하고 있는 중이었으니까.
“이 정도 차원이면 가격이 얼마나 됩니까?”
“음... 글쌔요. 제가 살던 차원이 천이백만조였으니까. 거기보다 급이 낮은 여기는 한 백 조? 그 정도 하지 않을까 싶네요.”
“그렇군요. 생각보다 싸네요.”
“그렇죠?”
한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평범한 현대인으로서 꿈도 꿀 수 없는 생각이었지만.
한정우는 평범한 인간이었다. 애초에 이제는 마냥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몸이 되었다.
반신. 그는 반신이 되었으니까.
그리고 백 조라는 금액도 터무니없는 금액이었다.
당장 1조만 있어도 지구에 살아남은 사람들 중 절반을 1년 동안이나 고용할 수 있는 금액이었다.
단순 계산으로도 백 조는 수천만명의 사람을 백 년이나 고용할 수 있는 금액이었다.
결코 적다고 할 수 없는 금액이었지만.
‘차원을 사들인다는 건, 곧 그 차원에 거주하는 생명에 대한 권리를 얻을 수 있는 거지. 그걸 생각하면 그리 비싸다고 할 수도 없어.’
당장 신룡만 해도 고용하기 위해서는 몇 억을 써야 했다.
그런데 이 용계에는 신룡만큼은 아니더라도 그에 근접한 생명체들이 몇 있었고.
수 억 개의 생명이 살아가고 있었다.
백 조만 사용한다면, 용계에 있는 모든 생명체들을 수족처럼 부릴 수 있다는 거였다.
‘괜찮네.’
한정우는 빠르게 계산을 맞췄다. 용계는 사들이면 이득이었다.
하다못해 이들을 사용할 수 있는 권한만 얻어도 본전은 충분히 뽑을 수 있으리라.
“관리자를 만나고 오겠습니다. 그들이라면 자세히 알려줄 수 있겠죠.”
“아. 그러시겠습니까.”
“네. 그럼 잠시 여기 좀 맡기겠습니다. 혹시라도 눈독을 들일 놈들이 있으니까.”
“네. 철저히 감시하고 있겠습니다!”
발포스가 차렷 자세를 하며 대답했다.
잠깐 자리를 비운다고 해서 다른 누군가가 찾아올 것 같지는 않았다.
한정우가 이런 말을 한 건.
그래, 신룡에 대한 경고였다. 발포스가 감시를 하고 있으니 혹시라도 이상한 생각을 하지 말라고.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가겠습니다.”
한정우는 힐끗, 신룡을 훑어봤다가 돌을 사용해 관리자에게로 향했다.
우웅, 우우웅.
빛이 몸을 감쌌다. 청소기가 돌아가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며.
시야에 들어오는 게 바뀌었다.
“오셨습니까. 은행장님.”
모습을 드러내기 무섭게 관리자가 머리를 숙이는 게 보였다.
그의 금빛 머리카락이 흩날린다.
“네. 안녕하세요.”
한정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옮겼다.
그가 올 것을 미리 예상하고 있었는지, 관리자의 옆으로 다과상이 차려져 있었다.
한정우는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고 앉았다.
“...”
관리자는 한정우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그가 먼저 제안하기도 전에 자리를 앉는 건 처음이었다.
나쁜 변화는 아니었다. 좋은 변화였다.
한정우는 무려 시스템의 창조자와 면담을 나눈 사이였다.
최고 관리자라고도 불리는 그와 동업자가 된 인물이었다.
특급 관리자가 되었다고 해도, 위치로 보면 한정우가 훨씬 위에 있었다.
그런 걸 따졌을 때, 한정우가 누군가의 명령에 움직이지 않는 건 당연했다.
“은행장님과 이렇게 면담하는 것이 무척 오랜만인 것 같네요.”
“바빠서요. 그리고 오랜만이라고 할 것은 없는 게, 불과 며칠 전에도 만나지 않았습니까.”
한정우의 말에 그가 부드러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최고 관리자와 만났을 때. 그때를 떠올렸다.
자리에 앉았던 관리자가 다시 일어났다.
그리고 한정우를 향해 머리를 숙였다.
“그때는 사정상 감사 인사를 드리지 못한 것 같네요. 감사합니다.”
“...제가 감사를 받을만한 일을 했던가요.”
한정우가 팔짱을 끼며 관리자를 바라봤다.
그의 고개가 살짝 기울어졌다.
관리자는 그의 반응에 여전히 미소를 유지하며 말했다.
“은행장님 덕분에 제 직급이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직급 말입니까.”
“네. 제 본래 직급은 72위. 하지만 현재 저는 특급이라는 기존에 있던 직급과는 별개의 직급을 얻게 되었죠.”
“그 72위라는 거... 아니, 그 번호가 그렇게 큰 의미가 있는 겁니까?”
“물론이죠. 저희는 순위가 낮아질수록 차원에 간섭할 수 있는 영향력도 달라집니다. 당장 72위였을 때 71위의 말을 거스를 수가 없었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죠. 그가 명령을 하면 저는 바로 수행해야 했습니다.”
“의외로 깐깐한 가 봅니다.”
“물론 저희들끼리 명령을 하는 일은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당장 저희는 창조주, 최고 관리자의 명령을 수행하는 사람들이니까요.”
“흠...”
“하지만 그럼에도 지휘체계는 확실하게 있죠.”
“특급 관리자가 되었다는 건, 뭐가 달라지는 게 있습니까?”
“음... 간단하게 예를 들어서 저는 자치권을 얻었다고 보면 됩니다. 저는 순위와 관계 없이 최고 관리자를 제외한 모든 관리자와 동등한 위치에 있을 수 있게 된 겁니다. 그리고 1위를 거치지 않고 바로 최고 관리자와 면담을 할 수 있게 되는 특권을 얻게 된 겁니다. 모두 은행장님 덕분이죠.”
대충 이해는 했다.
그리고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네요.”
한정우는 자신의 위치에 대해 인지하고 있었다.
최고 관리자가 직접 모든 관리자 앞에서 보증했다.
은행장인 그가 최고 관리자와 동등한 위치에 있다라고.
한정우는 현재 그런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다.
물론 그라고 해서 부담을 느끼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반신이 되면서 가치관 자체가 바뀌었다.
‘내가 은행장이라는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인데. 굳이 그것 때문에 위축될 이유가 있을까.’
앞으로도 많은 일들이 일어날 것이다.
최고 관리자를 만나는 건 그가 원하기만 해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굳이 부담을 가질 필요가 있을까.
그냥 누리면 되는 거였다.
“그러니까, 지금 제가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거네요.”
“네? 아... 네. 그렇습니다.”
다 떠나서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그럼 그 감사한 마음으로 인해 제가 뭐라도 해주고 싶겠군요.”
“어... 그렇지 않을까요?”
관리자가 당황하는 게 보였다.
한정우는 그런 그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왜 그렇게 보시나요?”
“좋아서요.”
받을 수 있는 게 있다는 거였으니까.
관리자는 한정우의 미소를 봤다.
그리고 그 미소가 매우 자본주의적 미소라고 생각했다.
“그럼 우리 진지하게 이야기를 해볼까요.”
왠지 잘못 걸렸다는 생각이, 관리자의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