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2화
“그래서 내게는 무슨 볼 일이지?”
신룡이 한정우에게 말했다.
마신의 눈치가 보이기는 했지만, 앞에 있는 한정우는 인간이었다.
신의 잔향이 느껴지기는 했다.
반신에게서나 느껴지는 향기.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인간인 것도 사실이라는 건데.
그는 신룡이었다.
모든 용의 신.
관리자들도 그에게 함부로 굴지 못한다.
천계의 신들도 그에게는 적대적으로 굴지 않는다.
용 하나가 마왕, 혹은 마신과 근접한 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하지만 앞에 있는 마신은 달랐다.
“이 새끼, 안 되겠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어.”
발포스가 신룡을 향해 손을 뻗었다.
유황이 주르륵 흘러내리는 거대한 손이 신룡의 머리를 붙잡아 땅에 내리꽂았다.
“커헉!”
신룡이 신음을 내뱉었다.
손에 붙잡힌 그의 머리가 녹아들었다.
“이분이 누구인데... 감히 네깟놈이 함부로 말을 놓을 수 있는 그런 분이 아니다.”
발포스가 신룡의 머리를 짓밟았다.
마신이라고 해도 신룡인 그에게 이럴 수는 없었다.
애초에 신룡은 어지간한 신들보다 강했다.
100번 대의 관리자와 맞먹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무서울 게 없었지만.
‘하필이면 이놈이 와서!’
발포스는 달랐다. 마신 중에서도 마신.
악신들조차 그에게 머리를 굽혔다.
관리자들은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경계했다.
무력만 놓고 보면 한 자리 관리자와 맞먹었다.
격 자체가 달랐다. 그렇기에 신룡은 무기력하게 당할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인간한테, 말을 놓는 게 그렇게 잘못이야?’
신룡은 이 상황 자체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다짜고짜 찾아온 인간과 마신, 그리고 용인 관리자.
용인이 하는 말은 가관이었다.
관리자를 때려치고 한다는 게 차원 은행의 은행원이란다.
그것만 해도 기겁할 일인데.
“죄, 죄송합니다. 제발 살려만 주세요.”
대마신 발포스가 같이 왔다. 은행장이라는 반신과 함께.
대마신은 그를 억압했다. 신룡은 그를 보기 무섭게 몸을 굽혔는데.
그런데 그 이유가 겨우 하찮은 반신 때문이라는 게 더 서럽게 만들었다.
‘도대체 저 놈이 뭐라고!’
신룡은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려 한 곳을 바라봤다.
그가 바라보는 곳에는 뼈로 만들어진 의자에 앉아 있는 반신이 있었다.
한정우라고 했던가.
그는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샴페인 잔에 샴페인을 담아 마시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작은 식탁이 있었고, 그 위로 노릇하게 구워진 고기가 한 접시 놓여져 있었다.
“뭘 봅니까?”
고기를 우적우적 씹으며 자신을 바라보며 말하는 그의 모습에 신룡은 말을 잃어버렸다.
누구는 유황에 머리가 녹아들고 있는데, 그 앞에서 고기를 먹고 있는 모습이라니.
“아, 제가 밥을 안 먹고 와서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배고파서 먹는 거니 이해달란다.
미친놈이다.
신룡은 바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자신을 은행장이라고 소개한 저놈은 상종을 하지 말아야 하는 미친놈이라고.
세상 그 어떤 종족이 생명이 죽어가고 있는 광경 앞에서 고기를 뜯어 먹을 수 있겠는가.
잔인했다. 두려웠다.
신룡은 눈동자를 굴리다 한정우와 눈이 마주쳤다.
그와 눈이 마주친 신룡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신룡을 바라보는 한정우의 눈빛에는 아무런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
그는 무표정했다. 신룡을 한심하게도, 불쌍하게도 바라보지 않았다.
발포스의 발밑에 깔려있던 신룡은 그런 한정우의 눈빛에 공포를 느꼈다.
인간의 눈빛이 아니었다.
인간이라면 저런 눈빛을 가질 수 없었다.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것이 맞다는 말인가.'
불안함이 느껴졌다. 인간이라고 마냥 무시했던 놈이, 알고 보니 그의 목숨 줄을 쥐고 있는 사신이라고.
"그만하면 된 것 같은데."
"아, 그런가요? 저는 좀 더 해도 될 것 같은데. 본래 용이란 놈들이 태생이 오만하기 짝이 없는 놈들이라. 초장부터 제대로 밟아야 편합니다.
발포스는 신룡의 머리를 밟고 있는 발에 힘을 꾸욱 줬다.
“끄어어억!”
머리에서 느껴지는 압박에 신룡이 비명을 질렀다.
용의 몸이 아니라서 통증이 더 컸다.
발포스는 신룡의 비명에도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얼굴로 한정우를 가만히 바라봤다.
그가 명령만 한다면, 바로 머리를 뭉게버리겠다는 의지가 가득했다.
그 의지를 느낀 신룡이 다급하게 말을 꺼냈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앞에 위대하신 분을 보고 못 알아봤습니다!”
신룡의 다급한 외침에, 그의 머리를 누르는 힘이 약해졌다.
‘이거구나!’
신룡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면서도, 묘한 불쾌함을 느꼈다.
인간을 내려다봤다는 이유로, 마신은 그를 겁박했다.
반대로 저 인간을 높여주는 말을 하면 풀어줬다.
정답은 하나였다. 저 인간, 아니 은행장 앞에서 몸을 낮추는 것.
‘내가 이 나이 먹고 이래야 싶지만... 살기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지.’
신룡은 한정우의 앞에서 몸을 낮췄다.
살기 위해서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만년을 넘게 살아온 신룡이었지만, 그럼에도 그는 더 오래 살고 싶었다.
죽음이라는 건 오래 살아도 달갑지 않은 것이었다.
그렇기에 매일 불로불사약이라고 불리는 영약을 먹는 게 아니던가.
용의 수명인 만 년을 넘었음에도 여지껏 살아온 이유는 있는 거였다.
그는 눈치가 느렸지만, 상황 파악을 하면 수긍을 하는 게 빨랐다.
살기 위한 발악.
한정우는 신룡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불만이 가득한 모습이었다.
말로는 살려달라고 빌고 있지만, 눈빛에는 아직 꺾이지 않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굴욕. 신룡은 비참함을 속으로 삼킨 채 겨우 자신의 처지를 순응하고 있었다.
순응하려 하고 있었다.
‘딱히 상관은 없나.’
당장이라도 일어나 자신의 목을 뜯어버릴 것 같은 눈빛에도.
한정우는 그러려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신룡이 아무리 살기를 품고, 의지를 가지면 뭐할까.
발포스를 뚫고 다가오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렇기에 한정우는 최대한 편안하게 마음을 먹고 있었다.
‘이런 거에 일일이 반응하는 것도 이제 지치니까.’
너무 많은 일이었다. 신룡과 비교도 되지 않는 거물들을 만났다.
그리고 최근에는 시스템의 주인이자 창시자를 만나지 않았는가.
발포스조차 몸을 굽혀야 하는 이가 호의를 보이고 있는 와중에.
겨우 신룡 따위에게 겁을 집어먹을 이유는 조금도 없었다.
“그럼 이제 대화를 할 마음이 좀 생겼습니까?”
담담한 한정우의 말에 신룡이 잠시 멍하니 있다.
“은행장님께서 말하시는데 입을 닥치고 있는 겁니까?”
발포스의 말에 신룡이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신룡은 자신의 머리를 금방이라도 녹여버릴 것 같은 발포스의 손을 바라봤다.
검붉은 색의 액체가 뚝뚝 떨어지는 그 모습은 그에게 두려움을 안겨줬다.
발포스의 손에서 떨어지는 액체는 지면을 단숨에 녹여버렸다.
타들어 가는 냄새와 유황 냄새가 같이 났다.
발포스가 사는 세계의 최악의 불.
영혼을 불태운다는 지옥불만큼이나 지독한 열기를 자랑하는 그 불덩이에.
신룡은 제대로 된 사고를 돌릴 수가 없었다.
“내... 아니, 제게 바라시는 게 무엇입니까.”
한정우에게 말을 하는 신룡의 목소리가 심히 떨렸다.
그는 최대한 빨리 이 시간이 지나가기를 바랬다.
재앙.
그래 이건 재앙이었다. 신룡인 그조차 막을 수 없는 끔찍한.
힘을 쓸 수 없는 재앙이 찾아왔다면, 그 재앙이 떠나가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다.
“뭐... 별 거 없습니다. 거래를 하고 싶습니다.”
“...거래 말입니까?”
“네.”
한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신룡이 눈을 데구르르 굴렸다.
거래.
물품과 물품을 나누거나, 화폐로 물건 등을 사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신룡인 그에게 일어난 일들이 전부 그 거래 하나 때문이란다.
차라리 처음부터 거래를 하고 싶다는 말을 해줬다면 좋을 텐데.
‘...했었나?’
했던 것 같기도 하다. 미물이란 생각에 무시했던 것 같다.
“어떤 거래를 말하시는 건지. 저희가 드릴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전부 드리겠습니다!”
신룡은 오래 고민하지 않고 말했다.
어떤 것을 주제로 거래를 한다는 건지 모르지만.
신룡의 머릿속에는 당장 이 상황을 피하고 싶다는 생각만이 가득했다.
옆에 발포스가 서 있는 것만으로도 그는 정상적으로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평소에 하지 않을 실수를 했다.
입에 담아서는 안 될 말을 했다.
“‘전부’ 말입니까?”
한정우를 살피던 신룡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전부’라는 단어를 강조하는 그의 입가가 비스듬이 올라가고 있었다.
비릿한 미소.
신룡은 일이 잘못 돌아간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꼈다.
잘못 말했다는 강한 느낌. 급히 말을 정정하려던 그는.
“그렇군요. ‘전부’란 말이죠. 발포스, 들었죠. 전부 준답니다.”
“네. 들었습니다. 이제야 자신의 상황을 이해한 것 같네요.”
고개를 끄덕이며 한정우와 대화를 나누는 발포스의 모습에 좌절해야 했다.
전부를 준다는 말을 꺼내서는 안 되는 거였다.
그랬더라면 저 악마들에게 꼬투리를 잡히지 않았을 텐데.
“제가 원하는 건 별 거 없습니다. 아마, 신룡 씨께도 크게 부담이 되지 않을 겁니다. 아마도요.”
‘아마도’라는 말이 원래 이렇게 무서운 말이었던가.
신룡은 오싹함에 온몸이 파르르 떨리는 걸 느꼈다.
바로 옆에 뜨거운 유황불이 있는데, 이상하게 섬뜩함이 느껴졌다.
순간적으로 춥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잘못 걸렸구나.’
인간이라고 무시하면 안 되는 거였는데.
그랬더라면 적어도 이런 비참한 대우를 받지는 않았으리라.
“제, 제가 원하시는 게 무엇입니까.”
“용들을 원합니다. 정확히는 용이라는 자원을 말이죠.”
“자, 자원...!”
이어지는 한정우의 말에 신룡을 결국 입에 거품을 물어야 했다.
용에게서 자원을 얻고 싶다는 말은.
결국 그들을 죽이겠다는 것과 별반 다를 게 없는 말이었다.
‘아... 이대로 죽는구나. 한많은 용생이었다.’
신룡의 의식이 흐려졌다. 차라리 이대로 기절을 했으면 더 좋았을 것을.
“정신을 잃으면 안 되죠. 발포스, 깨우세요.”
잔인한 말이 들려왔다. 한정우는 기절하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이 발포스에게 명령했다.
“이게 미쳤나. 어디 감히 은행장님께서 말을 꺼내시지도 않았는데 기절을 하고 있어!”
발포스가 신룡의 머리통을 붙잡았다.
그의 손이 점점 붉어지며, 신룡의 머리에서 연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신룡의 온몸이 순식간에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발포스의 손이 붉어지다 못해 불을 뿜어낼 쯤.
“끄아아아악!”
신룡이 비명을 지르며 정신을 차렸다.
“도, 도대체 저한테 왜 이러시는 겁니까.”
정신을 잃는 것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음에, 신룡은 결국 눈물을 보였다.
억울했다. 그는 그저 동굴에 누워 평온하게 잠을 자던 게 전부였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찾아온 은행장이라는 인간 때문에 기껏 누리고 있던 평화가 깨져 버렸다.
도대체 무슨 원한이 있다고 이러는 거란 말인가.
신룡의 억울함 가득한 목소리에 한정우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아직 거래가 끝나지 않았잖아요.”
한정우는 신룡을 향해 방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