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차원 은행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91화 (91/113)
  • 제91화

    신룡이 머리를 숙였다.

    윌리엄에게 들은 것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윌리엄은 용종이 너무 오만하기에 거래가 힘들 수도 있다고 했다.

    그런데 한정우가 보는 신룡은 심하게 덜덜 떨고 있었다.

    발포스의 눈치를 살살 보며, 자신이 뭘 잘못하지는 않았을까 고민하는 얼굴이었다.

    수염 난 뱀의 머리인데도 불구하고 감정이 고대로 읽히는 게 신기했다.

    메켄도 그렇고, 의외로 용종들이 단순하지는 않을까 싶다.

    “발포스... 제가 목도 그렇고, 다리도 아픈데.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할까요.”

    발포스에게 물었는데, 답은 다른 곳에서 들려왔다.

    [무엄하다! 어디 감히 하찮은 반신 나부랭이가, 대마신에게 말을 거는 것이냐!]

    한정우가 신룡을 슬쩍 바라보며 이마를 만졌다.

    신룡이란 놈이 어째서 이렇게까지 상황 파악을 못하는지 한심하기 따름이다.

    그가 대마신이라고 부르는 발포스와 함께 온 게 한정우였다.

    특히 발포스는 한정우의 말에 따라 행동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누가봐도 한정우가 갑이고 발포스가 을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그런 한정우에게 저런 태도라니.

    멍청하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이다. 눈치가 아예 없어야 있을 수 없는 일이지.

    “메켄, 이대로라면 당신이 걱정했던 일이 일어날 수도 있겠군요.”

    한정우의 말에 메켄이 히익하고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한정우가 말하는 ‘걱정했던 일’이 무엇인지 오래 고민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제 입술을 핥으며 입맛을 다시는 발포스만 봐도 모를 수가 없었다.

    메켄은 두려움에 떨었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끔찍한 참상이 벌써부터 보이는 듯했다.

    “시, 신룡이여!”

    [음? 뭐야. 네가 왜 여기 있는 거지?]

    메켄을 발견한 신룡이 눈살을 찌푸린다.

    어째서 한정우와 함께 온 것인지, 그리고 관리자로서 있어야 할 그가 이런 곳에서 한가하게 뭘 하고 있는지 의문이 담긴 얼굴이었다.

    메켄은 용종들 사이에서도 유명한 인물이었다.

    용이면서 최초로 관리작 된.

    그리고 용종들의 세계를 담당하게 된 그는 여러모로 용종들의 눈에 들 수밖에 없었다.

    기본적으로 용들은 오만했다. 자신들이 인정하지 않은 이가 자신들의 위에 있다는 걸 심히 거슬려하는 이들이었다.

    메켄이 같은 용종이었기에 망정이었지, 그렇지 않았다면 용들은 시스템이 자신들을 무시했다는 생각에 찾아온 관리자를 무시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결국에는 상위 랭킹의 관리자에게 두들겨 맞고 관리를 받아야 했겠지.

    그만큼 그들은 어리석고 눈치가 없었다.

    그럼에도 그들이 상위 포식자로서 있을 수 있던 이유는 용들이란 존재가 태생부터가 타 종족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그들에게 위기가 찾아왔다.

    그것도 차원 전체가 멸망하고, 거부할 수 있는 멸망도 아니다.

    죽으라면 죽을 수밖에 없는.

    대마신 발포스의 존재가 그러한 것이다.

    시스템조차 경계하며 각 차원 신들조차 두려워하는.

    심지어 시스템의 힘으로도 죽일 수 없는 그는, 대적할 자가 없다고 볼 수 있다.

    만약 그가 조금만 더 성정이 포악하고, 전쟁을 좋아했던 이라면.

    지금의 세계는.

    전 차원들은 그 수가 절반으로 줄어들었을 테고, 지금도 전쟁으로 인해 두려움에 떨었겠지.

    하지만 참으로 다행히도 지금의 발포스는 그런 성정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아니, 적어도 은행장인 한정우가 살아 있는 이상 그가 그럴 일은 없었다.

    ‘은행장님의 심기를 거슬러서는 안 돼.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된다고.’

    대마신이 은행장을 따르고 있는 이상, 아니 그걸 떠나서 은행장에게는 절대 대들어서는 안 된다.

    지금도 마신을 이끄는 그가, 더욱 강해질 그 미래에는 시스템조차 함부로 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런 인물과 대립하게 된다고 생각하니,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절대 그렇게 만들 수는 없다.

    “시, 신룡이시여. 제발, 제발 닥쳐주십시오!”

    비명을 지르듯 소리치는 메켄의 말에 신룡이 어이없다는 듯이 그를 바라봤다.

    아무리 같은 용종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격이라는 게 있고 계급이라는 게 있는 거였다.

    메켄이 비록 관리자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신룡에게 함부로 대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신룡은 관리자로 따지면 500위권 내에 있다.

    발포스는 10위권이지만...

    어쨌든 천 단위에서 노는 메켄이 어쩔 수 있는 위치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한다는 건.

    ‘시발, 이렇게 해서라도 신룡이 깨달을 수 있으면 다행이지.’

    부디 자신의 처지를 알았으면 해서였다.

    아니, 다 떠나서 은행장이 어떤 인물인지 조금이라도 느꼈으면 했다.

    [네놈이 죽고 싶은가 보구나. 어디 감히. 아무리 네놈이 시스템의 관리자라고 해도, 그게 나한테서 너를 지켜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아니요. 그럴 리가 있습니까. 그리고, 저는 이제 관리자가 아닙니다.”

    [뭐?]

    메켄의 말에 신룡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관리자가 어떤 위치인가.

    비록 랭킹에 따라 그 힘도 영향력도 다르지만, 시스템의 비호 아래 있다는 건 똑같았다.

    시스템은 모든 차원을 통합하고 관리하는 존재.

    시스템에 소속된 차원에 거주한 이상 시스템의 말에 거역할 수 없다.

    시스템에게 거역한다는 건 곧, 자신의 거처를 버린다는 것과 같았다.

    시스템에게 찍혀 지내던 차원에서 떠나야 한다면, 그건 곧 시스템이 관리하는 그 어떤 차원에도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과 같았다.

    세계에는, 우주에는 무수히 많은 차원이 있고.

    하루에도 수백개의 차원들이 생겨나며 사라진다.

    그렇게 따지면 전 차원과 시스템의 차원을 비교할 수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스템이 보유한 차원들의 양은 엄청나고.

    질적으로 보면 새로 생겨난 차원들을 시스템에 속한 차원들에 비교할 수 없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차원들을 시스템에 속할 터.

    결국에는 시스템의 눈에 벗어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지금 관리자를 그만두었다고? 그나마 할 줄 아는 게, 그나마 낫다고 생각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게 그것이었는데.]

    그것을 관두다니, 네놈이 미쳤냐며 신룡이 어처구니없어한다.

    [그럼 네놈이 어디에 갔다는 거지? 시스템에서 나올 정도로 좋은 곳이 있다는 것이냐?]

    “네. 있습니다. 시스템과 비교해도 꿀리지 않을 곳이.”

    바로 옆에 있다며, 메켄이 두 손을 들어 한정우를 가리켰다.

    극진한 대우.

    신룡이 눈을 게슴츠레 뜨며 한정우를 내려다봤다.

    “지금 누굴 내려다보는 거지?”

    발포스의 살벌한 목소리와 함께 허공에서 균열이 일어나 거대한 손이 나타났다.

    콰드득.

    그 손이 신룡의 목을 붙잡아 땅에 내리꽂았다.

    땅에 머리가 쳐밖힌 신룡이 비명을 지른다.

    어째서 잘못한 게 없는 자신에게 이러는 것이냐며.

    “네가 감히 내려다볼 분이 아니다.”

    유황 냄새가 난다. 뜨거운 열기가 휘몰아치는 가운데, 발포스가 불러낸 본체의 손에서 용암이 흘러나온다.

    키에에에엑!

    발포스의 용암은 지옥의 불도 버텨낼 수 있는 신룡의 비늘을 아무렇지 않게 녹여버렸다.

    용암은 비늘을 녹이다 못해 그 속살까지 불태워 신룡이 비명을 내지르게 한다.

    [제발, 제발 용서를!!]

    신룡의 울부짖음에도, 간청에도 발포스는 신룡을 잡은 손에 힘을 빼지 않았다.

    이대로 신룡이 죽어도 상관없다는, 오히려 원하는 눈초리였다.

    “됐습니다. 그만하셔도 좋습니다, 발포스.”

    “하지만 이런 놈들은 본보기를 삼아야...”

    “제가 그만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네.”

    발포스가 물러난다. 신룡을 괴롭게 하며 목을 억누르던 거대한 손 또한 사라졌다.

    손이 걷히고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던 것들이 사라졌음에도 신룡은 섣불리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리고 한정우의, 발포스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도대체 저 반신이 무어기에 대마신이 쩔쩔맨단 말인가.

    자신이 잘못판단 한 걸까.

    너무 오래 잤기에 판단이 흐려진 것 같다.

    “이제 좀 대화할 상태가 된 것 같군요.”

    한정우가 걸음을 옮겨 신룡에게 가까이 다가간다.

    신룡이 비록 머리를 숙였다고는 하지만, 그 머리 크기 자체가 3층 높이만 해 결국 고개를 한껏 치켜들어야했다.

    고개를 들어 신룡을 바라보다 한정우는 목이 욱신거려 제 목을 주무르며 말했다.

    “그런데 제가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는 거죠? 알기로는 용들은 폴리모트란 것을 할 수 있다고 들었는데.”

    시선을 맞추면 좋겠다는 한정우의 말에 신룡이 눈치를 보더니 무어라 중얼거렸다.

    신룡이 입을 다물기 무섭게 환한 빛이 신룡을 휘감았다.

    빛의 구체는 점점 작아지며, 급기야 한정우와 비슷한 크기로 변했다.

    “오, 이제야 좀 낫군요.”

    빛이 걷히고 그 자리에 백발의 미남자가 서있었다.

    찬란한 옥색 빛깔 도포를 두르고 있어서인지 무척이나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겼다.

    “제가 무슨 볼일이 있으시길래...”

    신룡이 눈치를 본다. 이제야 자신과 한정의 위치가 어떠한지 알게 된 것이다.

    “제 소개가 너무 늦었군요. 저는 차원 은행의 은행장이라고 합니다.”

    “...차원 은행?”

    난생 처음 들어본다는 얼굴이었다.

    그 모습에도 한정우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차원 은행이 시스템처럼 수백개의 지점을 보유하거나, 유명세를 떨친 게 아니었다.

    이제 겨우 두 개의 지점, 그리고 일년도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벌써부터 차원 은행의 소식이 널리 알려졌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러니 그의 반응도 이상하지 않은 것.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네. 저희 차원 은행에 대해서는 여기, 제 직원인 메켄이 알려줄 겁니다.”

    “직원...?”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

    하지만, 이해를 할 수 없음에도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발포스가 두려워 그저 말하는 것에 집중하기 바빴다.

    발포스는 한정우의 뒤에서 신룡을 노려봤다.

    아주 조금이라도 허튼 수작을 한다면 바로 사지를 찢어발길 것처럼.

    “저희 차원 은행은...”

    메켄은 덜덜 떨면서도 신룡에게 차원 은행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했다.

    신룡이 이해할 때까지, 몇 번이고.

    한정우는 멀지 않은 곳에서 데스나이트가 만들어준 뼈로 된 의자에 앉아 가만히 지켜봤다.

    그렇게 한 시간 가까이 흘렀을 때.

    “...이해되었다.”

    신룡이 더 이상의 설명은 불필요하다며 고개를 흔들었다.

    은행에 대한 것을 이해시켜주는 것이 그렇게 오래 걸릴 일이었던 건가.

    어쩌면 이쪽에는 은행이란 개념이 없었을 수도 있다.

    뭐, 뭐가 되었든 크게 상관은 없는 일이다.

    “자, 그럼 제가 뭐 때문에 온 것인지 말해드리겠습니다.”

    신룡의 앞으로 의자를 당겨 앉으며 말했다.

    “아, 굳이 제가 의자를 구해줄 필요는 없겠죠? 그 정도 능력은 있을 것 같은데.”

    “물론... 입니다.”

    반말을 하려던 그가 발포스의 눈치를 보더니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그러더니 손가락을 튕겨 의자를 하나 불러냈다.

    금과 보석으로 치장된 휘황찬란해서 의자보다는 옥좌에 가까웠다.

    한정우가 앉은 의자와는 너무나도 비교가 되는.

    한정우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지만.

    “네깟 놈이 의자는 무슨 의자라고.”

    콰득.

    발포스가 신룡이 앉으려는 의자를 발로 차 부서뜨린다.

    신룡은 앉지도 일어서지도 않은 어정쩡한 자세로 발포스를 멍하니 돌아봤다.

    “바닥에 앉아라.”

    “...네.”

    신룡이 고개를 숙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