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2화
뜨거운 유황불이 나를 감싼다.
숨이 턱, 하고 막혀 멍하니 있을 때 그가 내게 말을 걸어온다.
“은행장님?”
그 목소리와 함께 내가 보고 있던 환상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내가 지금 본 환상은 뭘까.
전에 발포스가 보여줬던 그 모습과는 달랐다.
그때보다 좀 더 왜소했고, 슬픔이 가득했다.
내가 한동안 그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발포스가 다가와 내 어깨를 건드렸다.
“괜찮으십니까?”
괜찮냐는 그 물음에 나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내가 본 것은 그 정도로 내게 큰 영향을 끼쳤다.
단순히 한 존재를 본 것뿐인데.
이번에는 뭐 때문에 이런 걸 보게 된 걸까.
‘격이 반신으로 올랐기 때문인가···.’
발포스를 통해 그런 환상을 볼 만한 이유는 그것밖에 없었다.
“별거 아닙니다. 그래서 이러면 되는 겁니까?”
어지러워진 머리를 진정시키려 시계를 만졌다.
차가운 메탈의 감촉이 소란스러운 마음을 가라앉혔다.
“네. 반신이기는 하지만··· 지금은 그 정도면 충분할 겁니다.”
발포스가 고개를 끄덕인다.
손으로 턱을 감싸 쥐며 내 몸을 살피던 그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격이 딸려서 좀 그랬는데, 이제 좀 낫네”라고 그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작게 중얼거린 것 같은데, 반신으로 격이 올라가면서 신체 능력도 같이 상승했는지 그의 목소리가 선명히 들려왔다.
‘시력도 좀 좋아진 것 같은데···.’
청각뿐만이 아니었다.
인지를 하기 전에는 몰랐지만, 인지를 하고 나니 신체가 극적이지는 않지만 조금은 변했다는 걸 느꼈다.
평범했다면 볼 수 없는 것들이 보였고, 평범했다 들을 수 없는 것들, 느낄 수 없는 것들, 맛볼 수 없는 것들과 같은··· 예전에는 그 갑갑한 감각으로 어떻게 살았는지 모를 정도로 감각이 예민해지고 변화했다.
단순히 격을 올린 것만으로도 이 정도면 코인을 소모하는 게 아깝지 않았다.
‘여기서 더 격을 올리고 싶어도 못 올리지.’
격을 올리기 위해서는 단순히 코인만 필요한 게 아니었다.
내가 보유하고 있는 코인의 양에 따라 올릴 수 있는 격도 달라진다.
지금은 내가 올릴 수 있는 한계까지 올린 게 반신이고.
‘그런데 9단계나 올렸는데 반신까지밖에 올리지 못한 거면··· 다른 사람들은 엄청 오래 걸리겠네.’
나야 코인을 벌 수 있는 수단이 엄청나서 한번에 올리는 게 가능하지, 다른 이들이라면 지금도 격을 올리는 걸 모르고 있을 거다.
아, 회귀자라면 다르겠네. 얼마나 살다가 회귀를 했는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그라면 격에 대해서 알 것 같다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최초의 인간 왕이라는 타이틀도 얻었는데, 격이라고 못 올릴까.
“슬슬 시간이 다 됐네요. 돌아가죠.”
“알겠습니다.”
시스템 중심지로의 이관이 끝났다.
내 앞에 있는 건 시스템에게 받은 건물 하나.
나는 그것을 바라보다가 손을 뻗었다.
[차원 은행 지점 건설하기 위한 비용··· 0코인입니다.]
잠시 에러가 난 듯 뜸을 들이던 메시지가 힘겹게 새로이 메시지를 토해냈다.
지점의 내부 구조를 어떻게 할 것인지 설정하라는 메시지에 나는 전에 있었던 은행의 모습을 참고했다.
본래였다면 내 자금에서 코인이 나갔겠지만, 여기까지 시스템이 지원해준다고 한다.
나는 마음 놓고 차에 옵션들을 추가하는 것처럼 지점에 많은 시설을 추가했다.
확장과 더불어 네 개의 창구, 지점장실, 직원 숙식실 등등···.
사치란 사치는 전부 부렸다. 거기다 무한히 제공되는 음식 창고까지.
비록 차원 은행 밖으로 가져나가는 건 안 되지만, 안에서만큼은 코인 소모 없이 풍족하게 먹을 수 있다.
‘이 정도면··· 내가 없어도 되겠지.’
뭐, 이렇게 하기 전에 굳이 내가 은행에 있지 않아도 차원 은행은 잘 돌아갔다.
애초에 은행 시스템 자체가 굳이 뭔가를 필요로 하지 않아도 잘 굴러갔다.
그저 코인을 보내거나 받고 적금하는 것 같은, 그런 것들 뿐인데 내가 필요로 할 리가 없다.
내가 필요할 때는 지점 자체에 문제가 생길 때였다.
예를 들어, 어떤 정신 나간 놈이 지점을 무너뜨리려 한다거나, 인수하려고 하는 것 같은.
후자는 시스템적으로 불가능한 일이기에 그리 신경이 쓰이지 않지만, 전자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시스템의 눈치를 보지 않고, 그저 막무가내로 달려드는 이들.
불멸의 전사 같은 인간들 말이다. 아, 인간이 아니고 신이구나.
“지금쯤이면 돌아와야 되는데··· 이 인간들이 빠졌네, 빠졌어.”
차원 은행 안에서 만남의 광장에 놀러 간 직원들을 기다렸다.
내가 내보낸 거긴 한데, 시간이 한참이나 지날 때까지 돌아오지 않을 줄은 몰랐다.
새로 만들어진 은행 지점 안, 대기석에 앉아 직원들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와···.”
“원래 이렇게 넓었나?”
직원들과 노예들이 차원 은행에 들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전보다 두 배는 커진 은행의 규모에 놀란 얼굴들이다.
대기석도 8개에서 16개로 늘어났다.
창구의 모양도 고객이 직원을 위협하지 못하고 막도 생겨나 있었다.
어디까지 위협을 막아낼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심리적인 안정을 줄 수 있다.
“어떤가요. 괜찮죠?”
나는 최동수를 돌아보며 물었다.
앞으로 이 은행의 주인은 그였다.
정확히는 그는 사장이고 내가 회장이다.
어쨌든 그는 나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터치할 수 없는 위치에 올라선 것이다.
이 정도면 나는 그에게 충분한 대우를 해줬다고 볼 수 있다.
그는 평소에 내게 다소 건방진 행동을 했지만, 나는 쿨하게 그것을 잊기로 했다.
최초의 지점장으로서 그가 해줄 게 많은 데 그런 사소한 일 가지고 일일이 신경 쓸 정도로 나는 마음이 얇지 않았다.
“···.”
최동수는 내 과한 친절에 감동을 받은 건지 내 질문에 대답도 못하고 멍하니 있었다.
감격에 젖은 그를 방해하기 싫어 고개를 돌려 노예가 된 이들을 바라봤다.
그들은 최동수 일행과 같이 나갔음에도 아무것도 얻지 못한 모습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그들에게 코인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최동수나 백예린 등이 그들에게 코인을 사용할 이유도 없다.
그들은 노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나고 자란 최동수나 백예린은 모르겠지만, 녹스는 노예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다.
마음 약한 백예린이 그들을 위해 코인을 쓰려고 해도 그가 알아서 다 막았을 거다.
피폐한 얼굴의 노예들. 그들에게는 이름도 필요 없다.
그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당신들은 여기서 고객들을 정리하고, 구분하면 됩니다. 간단하죠? 아, 그리고 만약에라도 이 사람들이 위협을 받으면 당신들이 막아야 합니다. 어떻게든 제지하세요. 할 수 있죠?”
앞으로 고객들이 들어오게 될 입구 옆을 가리켰다.
노예들은 저곳에서, 그리고 창구 옆에서 고객들을 조율하게 될 거다.
경비원과 같지만, 보수 없는 경비원이다.
그들은 최동수처럼 대답하지 않았다.
서로의 눈치를 보며 망설이는 기색에 눈살을 찌푸렸다. 지들이 뭐 은행을 맡는 것도 아니고, 시키는 것만 잘하라는 건데 그것도 대답하기 힘든 걸까.
애초에 그들에게는 대답할 그런 자격이 있는 것도 아니다.
시키면 해야 하는 게 그들의 위치다.
나는 그들을 훑어봤다가 녹스를 돌아보며 말했다.
“녹스 씨가 이들을 가르치시면 됩니다. 제대로 말을 따르지 않으면 마음대로 처벌을 내리시고요. 아, 그렇다고 못 움직일 정도는 안 됩니다.”
녹스에게 말하니, 그가 나를 힐끔 바라보는 것도 잠시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면서 백예린을 바라보며 아쉬운 눈초리를 보였다.
아직도 백예린에게서 미련을 떨치지 못한 것이다.
솔직한 말로 백예린을 놓고 가도 되기는 하지만···.
‘그래도 나 혼자 가기에는 좀 그러니··· 어쩔 수 없지.’
나라를 옮기는 것도 아니고, 차원을 옮기는 거였다.
나 혼자 가기에는 조금 불안한 면도 없지 않아 있었다.
전부 다른 종족이 있는 그곳에 동향 사람 한 명 정도는 데려갈 수 있잖아.
그렇다고 내가 그녀를 막 부려먹을 것도 아니고, 오히려 이쪽이 그녀에게 더 나을 수도 있다.
혹시 모르잖아. 최동수처럼 그녀에게 트라우마를 안겨준 가해자들이 있을지.
그러니 그런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그녀는 나를 따라오는 게 맞다.
애초에 내가 그녀를 데려온 것도 그녀의 재능이 나를 보조해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90%는 그냥 나 혼자 가기 싫어서 그런 거긴 하지만, 10%는 그녀를 위해서다.
음··· 그럴 거다.
“이 정도면 얼추 정리가 끝난 것 같네요.”
주위를 둘러봤다.
윌리엄이 보낸 사람들은 처음에는 놀란 얼굴을 했다가도, 본래 그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저 모습으로 고객을 상대나 할 수 있을지 처음에는 걱정이 되었지만, 하는 걸 보고 나서 고객들에게만큼은 공적인 미소를 짓는 걸 보고 그러려니 넘어갔다.
일만 잘하면 된다. 그 외에는 그들이 뭘 하든 차원 은행에만 피해를 주지 않으면 신경도 쓰지 않는다.
“동수 씨, 저기가 앞으로 당신의 영역이 될 지점장실입니다. 한번 구경해보시죠.”
겨우 상념에서 나온 듯한 그에게 나는 은행 지점을 살펴보게 했다.
그가 죽을 때까지, 혹은 그가 더 이상 은행에 나오지 못할 특별한 일이 생기기 전까지는 오직 그의 구역이다.
미리미리 살펴보고 준비하는 게 좋다.
내 말에 그는 인간에게 조종을 당하는 인공지능처럼 멍하니 움직였다.
지점장실에 들어가 봤다가 숙식실을 살펴보는 그를 뒤로 한 채 백예린에게 말을 걸었다.
“그럼 저희도 움직이죠. 해야 할 게 많습니다.”
그녀를 향해 뻗는 내 손을 녹스가 가로 막았다.
“벌써 갑니까?”
감정 조절을 했는지 다시 존댓말을 쓴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강렬했다.
나는 그 눈빛을 담담하게 받아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가야죠. 그리고 벌써는 아니지 않을까요. 거의 하루 정도를 그냥 넘겼는데. 이제 다시 일해야죠.”
“꼭 데려가셔야 합니까?”
“그건 전에 이야기가 끝난 것 같습니다.”
“···그럼 저도 데려가세요.”
“녹스 씨는 이곳을 지켜야죠. 자꾸 그러시면 최동수 지점장께서 슬퍼하십니다.”
내 말에 녹스가 최동수를 슬쩍 바라봤다.
그를 바라보는 녹스의 눈에는 그다지 별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
돌을 보는 듯한 눈빛에 둘이 친해지려면 멀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겁니다. 더 이상 반론을 받지 않겠어요.”
그를 옆으로 밀어냈다.
그리고 백예린에게 움직이자고 손짓했다.
그녀는 녹스를 보며 망설이다 나를 따라왔다. 녹스가 나를 막아보려 했지만, 내 신호에 움직인 발포스로 인해 저지되었다.
“그럼 최동수 지점장님.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지금처럼만 해주시면 됩니다. 나머지는 알아서 하시고, 못해도 내일부터는 정상 영업을 시작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일을 할 수나 있을 까 싶었지만, 어차피 그가 안 해도 내가 입구를 열어버릴 거다.
그가 지점장이기는 해도, 최종 결정권은 내게 있으니까.
시끄러운 뒷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버리며 지점을 나왔다.
“그럼 저희는 저희 집으로 가죠.”
차원 은행은 직장이라 집이라 표현하는 게 다소 이상하기는 하지만··· 뭐, 어떤가.
그곳에서 자고 먹는 건 사실인데.
네- 라고 대답하는 그녀와 함께 포탈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