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1화
새하얀 발포스의 손을 타고 흘러내리는 노란색 물줄기.
나는 그 손을 가만히 바라봤다.
술이 손을 가득 적시고 있는데도 그는 아무런 느낌도 없는지 술잔에 든 술을 마저 비어냈다.
금이 간 접시의 균열이 점점 커졌다.
발포스는 나를 잠시 바라봤다가 접시를 향해 손을 저었다.
콰르르- 땅에 쏟아졌던 술들이 솟구치더니 접시에 모여 들었다.
붉은색 불투명한 막이 술이 접시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막았다.
그 상태에서 발포스가 말을 이었다.
“은행장님께서는 현재 엄청난 속도로 코인을 버시고 계십니다. 저 오만하고 엉덩이 무거운 시스템이 직접 움직일 정도로요.”
“원래였으면 당신은 이미 망가졌어야 정상입니다. 그러지 않은 건, 당신이 가진 은행장이 가진 힘 덕분이고. 시스템이 직접 나서 당신에게 개입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당신이 멀쩡할 수 있는 거죠. 그리고 최근에 엘릭서를 마시지 않았습니까. 그로 인해 그릇이 좀 더 넓어진 거죠. 외부적으로든 내부적으로든 어찌어찌 보호를 받고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코인은 많을수록 좋지만, 그렇다고 너무 많다고 좋은 건 아닙니다. 감당할 수 있는 게 있으니까요.”
그러면서 그가 손을 뒤집어 손바닥을 하늘에 보이게 했다.
그의 손 위로 환상이 나타났다.
여러 종족의 직업인들. 그들은 각자의 방법으로 엄청난 속도로 코인을 벌어들여 모두의 부러움을 샀다.
하지만 그 끝이 좋지 못했다.
질투에 눈이 먼 친척에게, 동료에게 죽임을 당하고. 그 자신이 미쳐 무작정 코인을 벌어들이려고만 한다.
더 많은 코인을 벌기 위해 금기에까지 손을 뻗어 망하는 등···.
하나같이 끔찍한 결말을 보였다.
나는 그 환상을 가만히 바라봤다.
어째서 그는 내게 이런 환상을 보여주는 걸까.
내가 저렇게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다.
“대부라고 불리는 이들의 특징을 아십니까?”
모른다. 아니, 아는 게 있다면 그들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위치에 있다는 것 정도.
“그들은 신에 버금가거나 뛰어넘는 격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아무리 많은 코인이라도 감당할 수 있는 거죠.”
“코인은 본질. 대상의 내용물입니다. 한데 껍질은 요만한데 내용물은 이만하면 어떻게 될까요.”
그가 주먹을 쥐며 흔들었다.
그리고 퍼엉- 소리를 내며 손을 쫘악, 펼쳤다.
“죽는 거죠. 뭐···.”
그는 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설명했다.
그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나는 손을 들어 그의 입을 막았다.
“그래서 격을 올리려면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그것만 말하세요.”
자기 딴에는 다르게 말한다고 하는데, 내 입장에서는 같은 말을 예만 바꿔서 말하는 거였다.
한두 번이야 이해를 하지, 그게 세 번을 넘어가면 선을 넘는 거였다.
아무리 지금 남는 게 시간이라고 하지만,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듣고 싶지는 않다.
“아, 네.”
그가 뻘쭘해졌는지 볼을 긁적인다.
그것도 잠시 그가 자리에 도로 앉으며 말을 이었다.
“격을 올리는 법은 간단합니다. 깨달음. 그것이면 격은 자연스럽게 올라갑니다.”
무협지에서나 나올 법한 단어에 나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삭막한 현대 사회에서 살아온 나였다.
무협은커녕 ‘무’에도 근접하지 못한 내가 깨달음을 어떻게 얻는다는 말인가.
그리고 깨달음이란 게 실제로 있는 건지 의문도 들었다.
사람들은 평소에도 종종 해답을 찾는다.
오른손이 다치면 왼손을 쓰면 된다는 것처럼.
하지만 그러한 것까지 깨달음에 들어간다고 할 수는 없다.
내가 생각하는 깨달음과 발포스가 말하는 깨달음은 그 종류가 달라보였다.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군요. 이해합니다. 솔직하게 말해서 이 깨달음이란 건 실제로 얻는 게 무척이나 어렵죠. 무림계의 놈들이나 하는 방법이지, 깨달음을 얻어 격을 올리는 건 구시대적인 방법입니다.”
“다른 방법이 있다는 거군요.”
“코인을 사용하면 됩니다.”
코인?
그런 방법이 있었구나.
하긴 코인을 뭐든 할 수 있는 세상인데, 하다못해 영혼조차도 코인으로 살 수 있다.
비록 그 절차가 복잡하고 힘들기는 하지만.
그 정도로 코인의 사용처는 무궁무진했다.
“수긍이 빠르군요.”
“제가 지금까지 겪은 게 있는데, 수긍하지 않는 게 이상하죠.”
“아. 하긴, 당신이라면··· 그렇겠군요.”
내가 겪은 일이 워낙 다양하고 컸기 때문에 이해하는 얼굴이었다.
있을 거라 생각도 안 했던 저승에 찾아가 사업을 하고, 차원들의 조율자인 시스템과 동업자가 되기까지 했으니.
그에게 물어보면서도 어느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다.
당장에 내가 격을 올릴 수 있는 방법은 코인을 사용하는 것밖에 없었으니까.
“그래서, 어떻게 하면 됩니까.”
“이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코인을 사용하시면 됩니다.”
“그 코인을 사용하는 방법을 묻는 겁니다.”
그가 아···! 하고 손바닥에 주먹을 내리치더니 내게 상태창을 열라고 한다.
그의 말에 나는 바로 실행했다.
처음 봤을 때와 별반 달라지지 않은··· 조금 달라진 내용의 상태창이 보였다.
<상태창>
이름:한정우(!) / 직업:은행장
고유 특성
은행 건설(+) / 의사소통(+) / 경비원 고용(+) / 은행원 고용(+) / 경호원 고용(+)
보유 자금: 20,540,000,000
처음 열었을 때는 ‘+’가 없었다. 그리고 보유 자금 또한 억을 넘지 못한다.
그런데 지금은 발포스에게 주기적으로 받는 금액이 있어서 그런지 이백 억이 넘는 코인이 들어 있었다.
“어, 제 이름 옆에 느낌표가 떠 있네요.”
‘+’는 그 특성에 대한 설명을 요약해놓은 거였다.
그걸 누르면 사라진 설명이 나온다.
그런데 그것과는 다르게 내 이름 옆에 느낌표가 표시되어 있었다.
그것 역시 전에 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내가 그것을 물으니, 발포스가 맞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은행장님께서 격을 올려야 한다는 걸 알려주는 겁니다. 격을 상승할 때가 아니라면 그게 떠오르지 않죠.”
“아, 그렇군요.”
그의 말을 들으며 느낌표를 눌렀다.
그러자 그동안 가려졌던 메시지들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격의 상승 조건인 보유 자금 100,000,000코인을 넘었습니다. 격을 상승시켜주십시오.]
[격의 상승 조건인 보유 자금 1,000,000,000코인을 넘었습니다. 격을 상승···.
[격의···.
나 자신에 대한 격을 올리라는 것.
그리고.
[격의 상승 조건인 차원 은행의 자금이 1,000,000,000코인을 넘었습니다. 격을 상승···.
[격의 상승···.
차원 은행으로 인해 본래 이뤄졌어야 할 격의 상승까지, 메시지는 나를 재촉하듯 계속해서 떠올랐다.
“···상당히 많네요.”
“그게 정상입니다. 제 입장에서는 지금까지 은행장님께서 격을 올리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는 게 더 신기할 정도였습니다.”
발포스의 말에 나는 볼을 긁적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내가 생각해도 그랬다.
그가 보여준 환상이 실제라면, 아니 실제이겠지.
하여튼 그 환상대로라면 나는 벌써 미치거나 망가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코인을 모아 들였다.
솔직히 코인을 많이 모은 걸로 그런 상황이 펼쳐진다는 게 이해가 되지는 않지만··· 관리자들도 그렇고 발포스도 그렇고 정확한 설명보다는 그저 위험하다고만 말을 해서.
그래도 나보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그들이 내게 거짓말을 할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래도 동업자이고 고용주인데, 내가 잘못되면 그들에게도 손해였다.
그리고 이번에 최고 관리자를 통해서 격이 차이가 나면 어떻게 되는지도 알게 되었다.
마주하는 것 자체가 힘들어진다.
시선 한 번에 죽을 수도 있었다. 어쩌면 내가 차원 은행을 운행하면서 여러 위협을 받은 건 내가 격이 낮아 벌어진 일일 수도 있다.
한 마디로 말해 나를 낮잡아 본 거다.
[격을 상승하시겠습니까?]
[9단계에 걸쳐 격을 상승시킬 수 있습니다.]
[격의 상승을 위한 비용 4,000,000,000코인이 소모됩니다.]
사십 억 코인이 한순간에 소모되었다.
뒤늦게 발포스의 말이 들렸다.
“아, 그런데 한번에 격을 올리면 무척 고통스러워니까, 한 단계씩···.”
그걸 왜 지금 말해!
최고 관리자로 인해 격이 상승으로 인한 고통을 체험한 적이 있던 나는 곧 밀려올 고통에 대비하기 위해 눈을 질끈 감으며 주먹을 있는 힘껏 쥐었다.
꾸드득- 근육이 뒤틀린다. 뼈가 부러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얼음이 둥둥 띈 얼음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마신 것처럼 속에서 차가운 냉기가 느껴지더니, 이내 그 냉기가 뜨거운 국밥을 먹은 것처럼 뜨뜻하게 뎁혀졌다.
그게 끝이었다.
내가 예상했던 고통은 아주 조금도 찾아오지 않았다.
근육이 뒤틀리는 소리와는 다르게, 느껴지는 건 전문 안마사에게 안마를 받는 듯한 느낌이었고, 뒤틀린 뼈를 교정받는 기분이었다.
아프긴 아픈데, 막 미칠 것처럼 아픈 건 아니었다.
그에 질끈 감았던 눈을 뜨니 [격이 상승하였습니다.], [숨겨진 기능, ‘종족’이 생겨났습니다.], [종족이 ‘인간’에서 ‘반신’으로 바뀌었습니다.] 이란 메시지가 떠올랐다.
뭐지, 정말로 이게 끝인 건가?
발포스의 말처럼 막 아픈 게 없었다.
아프지 않게 끝난 건 다행인데, 뭔가 왠지 모를 허무함이 밀려왔다.
내가 아무런 말도 없이 멍하니 있자, 발포스가 나를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말을 걸었다.
“그, 그렇게 아픈가? 말을 하지 못할 만큼? 괜찮습니까?”
나는 아무런 말없이 그를 바라봤다가 시선을 돌려 상태창을 다시 열었다.
바뀐 건 없었다.
사십 억이 나간 것과 종족이 바뀐 것 외에는.
[인간 → 반신으로 변경되었습니다.]
한 번의 손짓에 나는 반신이 되었다.
신이라하면 전지전능의 불멸과 영생을 뜻하는데.
그런 것치고는 몸의 변화가 크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굳이 찾는다면 전보다 조금 활력이 넘친다는 것 정도다.
지금의 기분이라면 사흘 밤낮을 자지 않고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게 전부였다.
막, 몸이 거대해지거나, 날 수 있거나,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는 것 같은··· 그런 극적인 변화는 없었다.
‘기대한 건 아니지만··· 조금은 아쉽네.’
그래도 반신이 되었다고 했으니, 아주 작은 변화라도 있을 것 같았는데.
실질적으로 느껴지는 게 없다. 애꿎은 데에다가 코인을 쓴 게 아닐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은행장님? 괜찮으십니까?”
발포스가 내 얼굴에 자기의 얼굴을 들이밀었다.
나는 손을 들어 그의 얼굴을 밀어냈다.
그리고 이상한 걸 발견했다.
전이었으면 방금 같은 상황에 놀라야 정산인데, 지금의 나는 그의 행동에도 크게 놀라지 않았다. 그저 그의 숨결이 너무 뜨거워 불편할 뿐이었다.
“괜찮습니다. 당신이 말한 것처럼 끔찍하게 아픈 건 없네요.”
“음··· 그건 이상한데.”
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 몸을 살폈다.
그러다 살짝 놀란 눈이 되어 내게 물었다.
“혹시 최근에 격을 올린 일이 있었습니까? 이건, 나와 버금가는 격의 흔적인데···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아.”
내게 묻는 건지 혼잣말을 하는 건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그가 작게 중얼거렸다.
나는 그에게 최고 관리자와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말해줬다.
그제야 그가 조금은 허탈한 표정이 되었다.
“이미 갔던 길을 다시 가는 거란 거군. 그래서 고통이 없던 거야. 이미 토대를 만들어 놨으니, 그 이후의 일은 쉬운 거지. 그건 그렇고, 그도 참 무책임한 일을 했어. 그러다 죽었으면 어떡하려고.”
혀를 차는 그를 바라보다가 나는 묘한 감각에 휩싸였다.
내 착각인지 모르겠는데, 이상하게 그의 모습 너머로 한 악마의 모습이 보였다.
산양의 뿔을 한 악마.
피눈물을 흘리는 그 악마가 돌연 고개를 돌리더니 나와 눈을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