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8화
녹스는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이게 그렇게 심각한 일입니까?”
“내 입장에서는···.”
녹스가 멍하니 반지가 끼워진 내 손을 살펴봤다.
흥미로운 연구 대상을 발견이라도 한 듯한 모습이었다.
분노는 사라지고 연구 소재를 찾은 학자의 모습이 되어 그가 달라붙었다.
“이런 일도 있을 줄이야. 나와 같은 흑마법사도 아닌데, 링크를 끊을 수가 있는 건가. 직업 때문?”
그가 혼란에 빠진 얼굴로 중얼거린다.
그의 중얼거림 속에서 나는 그가 준 이 반지가 온전히 내 것이 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분노와 호기심이 뒤섞인 눈으로 내 손을 살폈다.
“하필이면 그녀를···.”
그가 크게 반응하는 이유는 다른 무엇도 아닌, 반지에 담긴 데스나이트 때문이었다.
그가 데리고 있는 가신들 중 가장 강한 건 아니지만, 만능에 가까운 건 그녀 하나뿐이었다.
검으로서 대륙 최강이었고, 마법과 오러를 동시에 다룰 수 없다는 편견을 깨뜨린 마검사였다.
그렇다고 마법의 성취가 낮은 건 아니었다.
대마법사에 근접한 7써클 마법사.
인간으로서 갈 수 있는 경지가 9써클인 걸 생각하면 그녀는 엄청난 올랐다는 걸 알 수 있다.
더군다나 그녀는 대륙에서도 극소수만이 존재하는 마스터의 단계까지 오른 존재였으니.
그 시절 그녀는 녹스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었던 1인자였다.
마법과 무예를 동시에 다루는 강자는 드문만큼, 녹스가 그녀를 아까니는 마음도 컸다.
그런 걸 나는 아무렇지 않게 빼앗아간 게 되었다.
나도 당황스러운데 그 당사자는 어떠하겠는가.
그리고 한편으로 이해가 되기도 했다.
그녀는 나와 함께 다니면서 짧은 시간 동안 무수히 많은 일들을 겪었다.
그중에는 저승에 가 죽을 뻔한 일과, 최고 관리자를 통해 그를 만나고 있는 동안 짧은 시간이나마 내 격이 비약적으로 상승하는 일도 있었다.
최고 관리자와 있을 때는 그녀를 숨기지 않았다면 분명 최고 관리자의 기세를 버티지 못했을 거다.
‘그때네.’
최고 관리자를 만났을 때 녹스와의 연결이 끊어진 게 분명했다.
그게 아니라면 설명이 되지 않았다.
저승에서 다녀올 때도 녹스는 반지를 보고 별 말하지 않았으니까.
“뭐야, 이거··· 어째서 나보다 더한 격이 느껴지는 거지?”
반지를 살피던 녹스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자신으로서는 범접할 수 없는 격이 반지와 연결되어 있던 것이다.
‘그런데 이건 아무리 봐도···.’
녹스의 눈이 나를 살폈다.
반지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아니지. 그럴 리가 없지.”
그가 고개를 휘저었다.
나는 그가 왜 그러는지 몰라 고개를 기울였다.
그것도 잠시 장시간 뻗었던 팔에 경련이 올려고 하다.
힘들다.
“이제 충분히 보신 것 같네요.”
내가 손을 빼자 그가 황급히 내 손을 붙잡으려 했다.
그런 그를 발포스가 막아선다.
발포스에 가로 막힌 그가 내게 다가오지도 못한 채 그저 나를 원망 섞인 눈으로 노려봤다.
그를 무시했다.
충분히 보여준 것 같은데 그는 해결 방법을 찾기는커녕 감탄하기 바빴다.
내가 아무리 보여주고 있어도 그는 결국 방법을 찾아낼 수 없다.
“너무 시간을 끌었군요.”
고개를 돌려 백예린을 바라본다.
그녀는 아직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는지 멍하니 나와 녹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예린 씨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네, 네?”
“저는 예린 씨를 데리고 갈 생각입니다. 최동수 씨와 녹스 씨는 이곳에 남을 거고요. 아, 물론 새로 가르쳐주실 분도 구해줄 생각입니다.”
“아···.”
그녀가 고개를 돌려 녹스를 바라본다.
녹스와 5초 동안 눈을 마주친 그녀가 조금은 서글픈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 내게 고개를 돌려 말한다.
“저는 은행장님께 은혜를 받은 몸. 은행장님이 원하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그녀의 말에 녹스가 낙담하고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처럼 나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그녀는 지금처럼 제대로 먹고 자는 삶을 살 수 없었을 것이다.
그녀의 재능을 생각해 보면 죽지는 않겠지만, 당장 편한 삶을 살 수 없는 건 사실이었다.
“들으셨죠. 장본인도 그렇다고 하네요.”
“···.”
녹스가 입을 다문다. 더 할말이 없다는 듯이, 내게서 몸을 돌리며 알아서 하라고 한다.
“그럼 우선 직급부터 올려볼까요.”
나는 차원 은행을 열었다.
[최동수 ‘은행원’을 4계급 진급 ‘지점장’으로 임명하시겠습니까?]
[지점장의 월급은 2,500,000 코인입니다.]
[지점장은 반년에 한 번 지점 한 달 수익의 0.1%를 지급받습니다.]
월급부터가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했다.
거기에 보너스 개념으로 한 달 수익의 0.1%를 얻을 수 있다.
반 년에 한 번 얻는 것치고는 무척 적은 금액이 아니냐고 말할 수 있지만, 차원 은행이 만들어지고 나서 벌어들인 금액을 떠올리면 결코 그런 말을 할 수가 없다.
20조에 가까운 코인을 한 달만에 벌었다.
오고 가는 금액 전부를 따지면 더할 것이다.
한 달에 0.1%라고 했으니, 20억 넘게 받을 수 있다.
그렇게 따지면 연봉은 40억이 넘는다.
월급이 이백 오시만 코인이라 반년을 곱해도 천오백 만에 불과한데, 보너스만 20억이니.
사기에 가까운 꿈에 직업이라고 볼 수 있다.
예전의 은행이라고 해도 지점장이 이 정도의, 그것도 신입이 이 정도로 많은 돈을 버는 건 꿈도 꿀 수 없는 일이다.
아, 주식이 대박나면 모른다.
그렇다고 일을 많이 하는 것도 아니었다.
8시에서 10까지.
점심 시간을 제외하고 13시간동안 일을 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많은 직장인에게 물으면 백 명 중에 구십구명은 서로 자기가 하겠다고 난리를 칠 것이다.
“아···.”
하지만 그런 내 생각과는 다르게 최동수는 탄식을 뱉어냈다.
그토록 꺼려하던 것을 얻은 사람처럼, 그는 나라 잃은 표정이 되어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아, 안 돼. 또, 또 그 끔찍한 고통이···. 아픈 건 싫어. 내 의사와 상관없이···.”
그가 작게 무어라 중얼거리는 걸 무시했다.
잠깐 들어보니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불평을 내뱉는 것에 불과했다.
나는 그의 불평을 느긋하게 들어주고 있을 정도로 편한 성격이 되지 못했다.
“그럼 지금부터 반나절 동안은 밖에 나가 있으세요. 바로 이관할 생각이니.”
“어디에 가있으라고.”
“주점에 가서 술을 마시든, 쇼핑을 하던 원하는 것을 하시면 됩니다.”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녹스를 살폈다.
이곳에서 나와 발포스를 제외하고 가장 많은 코인을 가지고 있는 코인 보유자.
하지만 그가 다른 이들에게 자신의 코인을 사용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들을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 지금의 모습이 별반 달라지지가 않았다.
아마 음식을 사먹었거나, 구경 같은 것만 했겠지.
“하지만···.”
녹스나 백예린과는 다르게 최동수는 망설인다.
나는 그가 보유한 코인이 그리 많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백예린이야 녹스가 어련히 알아서 챙기겠지만, 최동수는 다르다.
혼자 알아서 움직여야 할 거다.
백예린이 챙겨준다면 모를까. 그의 자존심상 그것을 받아들일 것 같지도 않았다.
“아, 코인이 필요한가요?”
“···.”
그는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입술을 깨물며 주먹을 파르르, 떨 뿐이었다.
자신의 입으로 자신이 거지라고 말하기에는 자존심이 상한 것 같다.
참 보잘 것 없는 게 자존심을 지키는 것이 줄도 모르고.
자존심이 밥 먹여주는 것도 아니고, 굽힐 때는 적당히 굽힐 줄 알아야지.
“아직 월급 때가 아니기는 하지만···.”
그는 일주일 전에 월급을 받았다.
1,000코인.
사람들이 몬스터를 사냥해 벌어들이는 코인이 2, 3코인에 불과하단 걸 생각하면 결코 적은 금액은 아니다.
하지만 그의 씀씀이가 어떤지 모르니 마냥 적다고 할 수 없다.
상점의 물품 중에는 천 코인 정도는 우습게 생각할 것들이 많았으니까.
하다못해 마석마저 최하급이 최소 100코인이다.
마음 먹고 쓰면 1시간도 버티지 못하고 코인이 동이 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알기에 최동수도 망설이고 있는 것이다.
주점에 들어가 싼 음식을 시켜 주구장차 쳐박혀 있는 것도 방법이지만, 인간은 욕망의 생물.
남들이 하는 것을 자기도 하고 싶어하고, 더 좋은 것을 갖고 하고 싶어한다.
그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백예린이나 녹스는 즐기는데 자신은 그러지 못하면 엄청 슬프겠지.
그래서 차원 은행을 나가지 않는 것도 있었다.
적어도 보지 않으면 그런 생각이 덜 들테니까.
그걸 생각하면 기특하긴 하다.
코인의 중요성을 알고 섣불리 쓰지 않으려 하는 거니까.
아끼고 아끼려는 거니까.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차원 은행을 이관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나가 있어야 했다.
안에 있어도 되기는 하지만, 그렇게 되면 그들은 나와 함께 시스템의 중심지에 가게 된다.
돌아가기 위해서 시간을 낭비하게 된다.
더군다나 내 은행이 위치할 곳은 시스템의 주요 고객만이 들어올 수 있는 곳이기에 절차 또한 은근히 복잡하다.
그러니 애초에 그런 것을 방지하고자 한다.
“가불을 해드릴 수는 있습니다.”
최동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를 바라본다.
가불, 그건 꽃 속에 감춰진 가시와 같았다.
당장은 좋겠지만, 그 이후가 문제다.
가불을 하고 나면 그 다음달에는 월급을 받을 수 없으니까.
그렇기에 어떻게든 자급자족하여 살아가야 한다.
“가불, 가불···.”
그가 가불이란 단어를 곱씹으며 고민한다.
그게 마냥 좋은 게 아니란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의 말을 들어보면 마냥 그것 때문에 고민하는 건 아닌 것 같다.
“은행장이 이유 없이 저런 제안을 할 리가 없는데··· 도대체 뭐지, 받아들이면 내가 무슨 손해를 보는 거지?”
그는 내가 제안했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참 어리석게도, 쓸데 없는 곳에 진을 빼고 있었다.
겨우 그런 것에까지 수작을 부릴 생각은 전혀 없다.
아니, 적어도 내 사람에게는 나쁘지 않은 대우를 해줄 생각이었다.
비록 지식 주입이라는 고문과도 같은 일을 하기는 하지만, 그건 잠깐에 불과했다.
그 이후에는 오히려 피가 되고 살이 되어 도움을 준다.
나는 도움을 주면 줬지, 절대 그에게 해가 되는 일은 하지 않는다.
적어도 내 사람일 때는 그렇다.
“그렇게 고민하실 거 없습니다. 다음 달에 받을 것을 미리 앞당기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니까요. 그리고 그런 고민을 할 입장이 아닌 것 같은데. 가불을 받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내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하니 어째서인지 그가 분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나는 좋게 말한 것 같은데 그에게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마치 모욕이라도 받은 것처럼 그가 몸을 파르르 떨었다.
그의 과한 반응에 볼을 긁적이고 있으니, 그가 힘겹게 말했다.
“···가, 불을 받겠습니다.”
“좋은 생각입니다. 진작 결정하시지.”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차원 은행을 열었다.
그리고 최동수에게 코인을 보내주려고 할 때였다.
[숨겨진 기능 ‘가불’이 생성되었습니다.]
[최동수 ‘지점장’에게 2,500,000코인을 가불합니다.]
[최동수 ‘지점장’은 다음 달 월급을 받지 못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