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6화
벙쪄 있는 최동수를 바라보던 나는 내가 말을 과격하게 했다는 걸 깨달았다.
죽이는 것도라니.
그가 죽여달라고 해서 내가 그들을 죽일 수 있을까.
내 손으로는 죽이기 힘들지 모른다.
하지만 발포스라면 가능하겠지.
실제로 그가 죽이는 것도 봤으니까.
하지만 그가 내가 살인을 명령할 정도로 내게 중요한 사람일까.
‘모르겠네.’
나와 오래 알고 지냈다는 것, 그리고 의외로 일을 잘한다는 것.
그게 내가 아는 그의 모습이었다.
딱 평범한 직장인의 모습.
특출난 것 없는 그를 위해 내가 소모적인 일을 해야 하는 건지 순간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의문도 잠시, 나는 고개를 저어 상념을 털어냈다.
‘그는 지점장이 되어야 하니, 자잘한 문제들은 미리 처리하는 게 좋다.’
지점장으로 만들었는데 지금과 같은 일이 일어나면 곤란해진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지금이라도 문제를 해결해야지.
그래야 나중에 딴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최동수를 지점장으로 맡기면 그 이후로는 내가 이곳에 내려올 일도 별로 없을 테니까.
‘그렇게 되면 윌리엄과는 어떻게 해야 하려나.’
내가 시스템 중심지에 본점을 내게 되면 어쩔 수 없이 그와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그와 자주 만나는 건 아니기는 하지만, 그는 은근히 신경에 거슬리는 존재였다.
그가 시간을 거슬러 회귀를 한 것만으로도 그는 경계의 대상이었다.
회귀를 하면서 그는 본인만이 알 수 있는 미래의 정보를 가지고 있을 거다.
그중에는 분명 차원 은행과 관련된 정보도 있을 터.
미래에 내게 위험이 될 수도 있는 인물을 곱게 내버려 두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러니 그에 대해서도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해야 한다.
당장은 그가 내게 해를 끼칠 것 같지는 않지만,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니 장담할 수 없다.
“그래서 아직도 말해주지 않을 겁니까?”
나는 꽤 오랜 시간을 그가 말하기를 기다려줬다.
시간이 지나 최동수는 겨우 안정을 찾았다.
그런데 이 정도로 경기를 일으키는 걸 보면 결코 가벼운 사이가 아닌 것 같은데.
도대체 사람을 얼마나 괴롭혔으면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걸까.
“이제 좀 진정이 되셨습니까?”
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가 마른침을 삼킨다. 나는 아공간에서 생수를 하나 꺼내 그에게 건네줬다.
그가 500ml를 원샷했다.
그제야 갈증이 해소된 듯 그가 한숨을 내셨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며 묻는다.
“저를 한심하게 쳐다보지 않으실 거죠?”
한심하게 쳐다보지 않을 거냐고?
그렇게 묻는 걸 보니, 분명 뭔가 큰 게 있는 건 확실하다.
그것도 그에게 말하는 것만으로도 치욕을 줄만한 사건이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직접 본 것도 아니고, 이미 지나간 일을 놀리고 하찮아하지 않는다.
그래야 할 이유도 없을뿐더러, 그런 것에 시간을 쏟을 이유도 없었다.
내가 원하는 건 단 하나. 그가 가진 문제를 해결하는 것.
그가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크게 숨을 내쉬며 입을 연다.
*
세 시간.
거의 그 정도에 가까운 시간 동안 그의 말이 이어졌다.
중간에 나갔다가 돌아온 녹스와 백예린, 노예들로 인해 은행장실로 자리를 옮겨 이야기를 이어 들었다.
최동수가 말해준 그의 삶은 결코 평안하지 못했다.
그는 태생부터가 소심했다고 한다.
작은 체구와 소심한 성격.
그 두 가지만으로도 그는 일진들에게 타켓이 되었다고 한다.
괴롭힘, 끝없는 괴롭힘.
그는 자살까지 생각할 정도로 괴롭힘을 받았다고 한다.
그 결과 그들의 얼굴만 봐도 경기를 일으킨다고 하는데.
‘나한테 하는 거 보면 소심한 것 같지는 않은데.’
오히려 평범하게 보고 있었는데. 이렇게 들어보니 그게 아니었다.
몬스터들을 피해 여기까지 도망쳐온 것만 해도 대단하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니까, 당신이 나가려 할 때 저놈들이 들어왔다는 거죠?”
“네.”
최동수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서 제가 뭘 해주기를 원하십니까?”
그의 말을 끝까지 들은 나는 다리를 꼬며 물었다.
그가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 알겠다.
그리고 어째서 그들에게 아무 말도 못하고 쩔쩔매고 있는지도 이해했다.
하지만 아무리 과거에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해도, 아직까지 과거에 파묻혀 있는 건 곤란했다.
이제는 과거에서 나올 때였다.
내가 언제까지 그를 챙겨줄 수 없는 일이고, 무엇보다 지점장이 되면 저놈들과 비슷한 부류를 자주 만나게 될 텐데.
그때마다 이런 반응을 보인다면 내가 그를 믿을 수가 없다.
그래서 그가 알아서 과거를 끊어버리기를 바랬다.
남이 도와주는 건 한계가 있고 지금은 그가 자신의 힘으로 일어설 때였다.
‘물론 내 도움이 필요하기는 하겠지.’
다만 그가 어떻게 하면 좋을지, 그리고 저들을 상대로 겁을 먹지 않으면 좋겠다.
가장 좋은 건 노예로 부리는 거겠지만, 그는 의외로 그 면에 있어서는 깐깐했다.
내가 노예를 만드는 걸 보고, 사람이 사람을 부리면 안 된다는 말을 들었다.
뭐, 혼자 중얼거리는 걸 들은 거라 흘려넘겼다.
“저, 저는···.”
그의 눈이 흔들린다.
그리고 발포스를 힐끔 바라봤다.
발포스는 남자들의 머리를 톡톡 건드리며 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인육을 먹은 지 꽤 오래 된 것 같은데···.”
입맛을 다시는 그의 모습에 최동수의 얼굴이 창백하게 물들었다.
발포스의 정체를 아는 그는, 발포스가 충분히 그런 짓을 벌일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돌려보내주고 싶습니다.”
“어째서죠?”
나는 그의 대답에 얼굴이 일그러지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내가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다.
아니, 그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노예로 부리라거나 죽이라는 건 바라지도 않는다.
하다못해 무슨 벌이라도 내려 달라고 할 줄 알았는데, 가진 물품을 다 빼앗는 다는 것 같은 것도 있는데.
그런 것도 아니고 그냥 돌려보내달라고?
어이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이건 어떻게 보면 다시 돌아오지 않을 복수의 기회였다.
그가 그동안 당해왔던 괴롭힘에 대한 복수.
그런데 그런 것조차 하지 않는다니.
“지금 그냥 돌려 보내달라는 겁니까?”
“네.”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정말 그걸 원합니까?”
“네.”
한숨이 나온다.
어떻게 사람이 저럴 수가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병신입니까?”
“예?”
“자신을 괴롭히고, 세상이 멸망하고 나서도 따라와 괴롭히는 놈들을 뭐가 좋다고 그냥 돌려보냅니까?”
“그, 그건···.”
“당신이 왜 괴롭힘을 당하는지 알겠군요. 자신을 그렇게 만든 놈들에게 복수할 기회인데··· 하, 그딴 반응을 보이니 괴롭힘을 당하는 겁니다. 하다못해 제게 두 번 다시 자신을 건드리지 못하게 해달라고 말했으면 좋았을 겁니다. 아니, 그게 아니더라도 그들에게 찾아가 뭐, 난 너희들을 용서한다. 그런 말이라도 지껄였으면 마음 좋은 호구 그 정도로 봤을 겁니다. 그런데 이건 뭐.”
신랄한 내 말에 그의 얼굴이 붉어진다.
그래, 이런 내 모습을 보며 사람들이 너무 과한 반응이 아니냐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들에게 ‘아니다’라고 말할 자신이 있었다.
예전처럼 나라가 있는 세상이라면 이해할 수 있다.
법이 있기는 하지만, 정말 심각한 범죄가 아닌 이상 그들은 다시 나올 수 있으니까.
그리고 그를 찾아올 수 있으니까.
‘지금도 그러면 그건 병신이지. 등신조차 못 되는 놈이야.’
세상이 무너졌다.
몬스터와 던전 등이 생겨난 이 세상은 공권력이 없는 무법지대였다.
경찰이 있는 그 시대처럼 몸을 훤히 드러내고 돌아다닐 수 있는 그런 세상이 아니었다.
약육강식.
약자는 강자에게 잡아먹히는 그런 세상이 되었다.
그런 세상에서 적을 남겨두는 건 그야말로 멍청한 짓이었다.
그래, 그가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면 모른다.
절대 그들과 다시 마주칠 수 없는 곳으로 가면 또 모른다.
‘그는 이곳에 남아 있어야 한다. 그리고 만남의 광장으로 나가는 날도 있겠지.’
먹을 걸 사기 위해서, 옷을 사기 위해서 등등.
자신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그는 차원 은행을 나가야 했다.
개인적인 용무를 보기 위해서 혼자 움직일 수 있다.
‘저놈들이 무슨 해코지를 할 줄 알고.’
놈들을 이대로 돌려보내면, 반드시 돌아온다.
녹스가 있을 때에는 어떻게 건드리지 못하겠지만, 그가 혼자 있을 때는 다르다.
그를 납치해 갈 수도 있다.
협박을 해 코인을 뜯어낼 수가 있다.
물론 자신이 가진 힘을 잘 사용해 해결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 모습을 보면 알아서 코인을 바치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하다못해 백예린이 그보다 더 용기 있을 거다.
그녀는 타인을 위해서 몬스터와 싸우기라도 했지, 최동수는 그런 게 없었다.
하긴 그와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다.
몬스터들을 피해 차원 은행으로 도망쳤고 맞서 싸울 용기를 보이지 않았다.
고객들을 만났을 때도 제대로 말조차 못했다.
그렇게 소심해서 어떻게 일을 할 수 있는 건지.
그래, 전에는 일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저런 모습을 보고 어떻게 믿고 맡기겠는가.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저들을 어떻게 하기를 원합니까?”
“도, 돌···.”
“저를 실망시키지 말았으면 좋겠군요.”
내가 너무한 거 아니냐고 말할 수 있는데, 나는 그를 위해서 이러는 게 아니다.
절대 나를 위해서 이러는 게 아니었다.
단순히 귀찮고 짜증났으면 이럴 바에는 내가 직접 저들을 처리했겠지.
나는 그저 그가 이 세상에 좀 더 적응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내 밑에서 일하는 사람이 삥 뜯기는 건 내가 죽기 전에는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된다.
차라리 상대를 삥 뜯으면 뜯었지, 당하는 입장에 있어서는 안 된다.
나는 최동수를 빤히 바라봤다.
어서 대답하라고 재촉하며.
“그, 그···.”
최동수가 눈을 데구르르 굴렸다.
도움을 청하고 싶었지만, 이곳에는 그에게 도움을 줄 사람이 없었다.
은행장실에는 나와 그, 머저리들, 발포스 뿐이었다.
설령 녹스나 백예린이 안에 들어온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녹스는 분명 저놈들을 다 죽이라고 할 게 분명했고, 백예린은 죽이라는 말은 안 해도 절대 곱게 보내지는 않을 거다.
“이게 그렇게 어렵습니까? 그냥 한 마디만 하면 되지 않습니까. 처리해달라고.”
“죽이실 거잖아요.”
“그건 제 마음이죠.”
“···.”
“이상하네요. 제게 하는 것처럼 말해도 충분할 텐데.”
내게는 악을 쓰고 바락바락 대들면서 이럴 때는 약한 척을 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제가 너무 편하게 대해준 걸까요. 내가 당신을 굴리면 되겠습니까? 일부로 참고 있었는데··· 어떻게 할까요?”
“처, 처리해주세요!”
얼굴이 창백해진 그가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소리치듯이 말한다.
내 마음에 쏙 들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 정도면 장족의 발전이다.
내가 이렇게 타이르기(?) 전에는 정말로 한심한 모습을 보였으니까.
이 정도만 해도 만족할 수 있다.
“그럼 저들은 제가 알아서 처리하죠. 아, 맞다. 그리고 당신에게 할 말이 있었는데.”
“···?”
최동수가 나를 조심스럽게 바라본다.
나는 그를 바라보며 시계를 매만졌다.
정확히는 시계로 변한 족쇄다.
족쇄에는 여러 가지 기능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내 속마음을 발포스에게 전할 수 있는 거였다.
‘저놈들을 당신이 데려가서 마음대로 처리하세요.’
발포스가 고개를 번쩍 들더니 나를 돌아본다.
그의 얼굴이 ‘그거 진짜야?’하고 묻는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구워삶든, 잡아먹든 마음대로 하세요. 아, 대신 흔적이 남아서는 안 됩니다.’
그의 얼굴이 밝아진다.
순간 주위가 환해졌다고 느낄 정도였다.
그는 남자들을 묶은 줄을 붙잡더니 균열을 열어 그 속으로 들어간다.
최동수는 그 장면을 보지 못한 듯 했다.
나는 목 스트레칭을 하며 최동수를 향해 말을 이었다.
“동수씨는 저를 대신해서 이 은행을 맡아주셔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