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3화
No. 72가 나를 빤히 바라본다.
“당신은 진짜···.”
조금은 질렸다는 눈이었다. 어떻게 그렇게까지 뜯어먹을 수 있냐는 눈이었고, 최고 관리자를 상대로 이렇게까지 뜯어먹을 수 있다는 것에 감탄하는 얼굴이었다.
질림과 감탄이 공존하는 얼굴.
“이 정도면 충분하네요.”
태연하게 말하고 있기는 하지만 올라가는 입꼬리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충분하다 못해 넘쳐날 정도였다.
최고 관리자에게 예상보다 많이 받아냈다.
한번 움직인 대가로 받은 거라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크흠.
받은 내가 이럴 진데, 그걸 준 당사자는 어떻겠는가.
내색은 안 해도 속이 조금 쓰릴 것이다.
생각 이상의 지출이었을 테니까.
특히, 이 시설 무료 이용권이 컸다.
차원 은행 직원 한정이기는 하지만, 시스템의 시설 중에는 코인으로도 이용하지 못하는 게 있단 걸 생각하면 그 값어치는 엄청나다.
“그래서 저를 부르신 이유가 뭡니까?”
받을 만큼 받았으니, 이제는 일을 할 차례였다.
최고 관리자가 나를 불렀으면 그 이유가 있을 터, 나는 자세를 정돈하며 그를 바라봤다.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그리고 상의를 해야 할 것도 있고.
“저와 상의를 말입니까?”
그처럼 대단한 존재가 나와 상의를 할 정도로 중요한 일이 있었던가.
감이 잡히지 않는다.
그가 나를 불러서까지 해야 할 일이 있는지.
-은행장이란 직업을 얻은 지 한 달 정도 지났다고 들었다.
“네. 맞습니다.”
-허, 설마 했는데. 이렇게 직접 들으니 또 느낌이 다르군. 한 달 동안 그 정도의 성장을 보인 이는 극히 드문데.
감탄인지, 경악인지 모를 얼굴을 하며 그가 짧게 박수를 쳤다.
나는 그를 바라보며 의문을 품었다.
겨우 그걸 물으려고 날 부른 건지.
그렇다면 조금 실망할 것 같다.
나는 손해 보기는커녕 이득을 보기는 했지만, 겨우 그 질문을 하고자 그 정도의 대가를 내게 제공했단 건 그가 낭비벽이 심하다는 걸 알려줬다.
내게 그런 거라면 상관이 없지만, 다른 이들에게도 그럴 거라고 생각하니 조금 아까웠다.
그런 걸 조금이라도 아껴 차원 은행을 더 많이 이용하면 얼마나 좋을까.
-얘기가 산으로 갔군. 하려던 얘기는 이게 아닌데.
그렇지. 본론은 따로 있겠지.
겨우 그런 사적인 대화를 하고자 나를 불렀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내가 알기로 현재 차원 은행은 직원을 포함해서, 그곳과 관련된 모든 비용, 이용하는 고객들조차 세금을 내지 않는다고 들었다.
“음···.”
그 말에 나는 곰곰이 고민했다.
내가 세금을 냈던 적이 있던가. 그저 코인을 벌겠다는 집념하에 다른 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의 말처럼 세금을 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빚마저 차원 은행을 짓기 무섭게 면제되었으니, 건물을 건설하는 것과 같은 시스템을 이용하는 게 아니라면 내가 추가로 코인을 낸 적은 없다.
‘어, 그러고 보니 진짜 그렇네?’
현대에서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은행을 이용할 때에 항상 세금을 내야 했다.
그런데 차원 은행은 그렇지 않았다.
고객이 수수료를 내기는 하는데, 그렇다고 은행이 시스템에 세금을 내지는 않는다.
그로 인해서 마석을 이용하던 이들이 대폭 줄어들었다.
마석을 이용하면 거의 2, 30%를 잃게 되는 반면. 차원 은행을 이용하면 정해진 코인만 내면 된다.
그러니 당연히 마석과 관련된 품목에서 소비량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내가 세금을 낸다면 모를까, 세금을 내는 것도 아니니. 그만큼 시스템도 수입이 줄어들겠지.’
지금 당장은 크게 경각심을 가지지 않아도 될··· 20조에 가까운 금액이면 충분히 경각심을 가질 만한 일이던가?
어쨌든 그들이 차원 은행에 경계심을 가지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다.
오히려 한 달이나 기다려준 게 의아할 정도로 차원 은행은 단, 시간에 많은 코인을 벌었다.
그들의 대처가 마냥 늦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빠르다고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설마 이제와서 세금을 내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
내라고 한다고 해서 낼 생각은 전혀 없기는 했지만, 사람 일은 전혀 모르는 거니까.
이제부터라도 내라고 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원하시는 게 뭡니까? 설마 이제라도 세금을 내라고 하시는 겁니까?”
-어? 아니, 아니지. 내 말이 좀 이상했나 보군. 나는 황금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를 정도로 멍청하지 않아. 처음부터 받았으면 모를까, 그렇지 않았는데 이제서 세금을 내라고 하는 것도 이상하지.
다행히 그 정도로 염치가 없지는 않았다.
정말 다행이었다.
그랬으면 꽤 오랫동안 말로 혈전을 버려야 했을 테니까.
그러지 않아도 되니 귀찮음을 덜었다.
“그렇다면 뭐가 궁금하신 거죠?”
-궁금한 건 직접 만난 것으로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
“···?”
진짜 그냥 내가 누구인지 보고 싶었다는 거였나.
뭔, 그런 소모적인 행동이 다 있는지.
정말 그것뿐이라면 내가 원하는 것을 말하면 되는 건가.
부탁과는 다른, 사업적인 이야기를.
-아, 그건 있군.
내가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최고 관리자가 입을 열었다.
-‘나’와 사업을 해보지 않겠나?
사업이라는 말은 이해했는데, 어째서 ‘나’라는 단어에 강조를 준 거지.
저건 마치 시스템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자신하고 거래를 하자는 말이 아닌가.
시스템의 책임자인 최고 관리자가 할 말은 아닌 것 같다.
애초에 그와 내가 할 만한 사업이 있던가.
시스템 자체라면 있다.
시스템과는 사업 거리를 찾는다면 많다.
예를 들어 시스템에게 귀속된 빚을 차원 은행이 전담해서 담당한다던가, 세금과 관련돼서 차원 은행과 협력을 한다든가 등등.
물론 내가 좀 더 이득이기는 한데, 장기적으로 볼 때는 시스템에게도 이득인 일이었다.
마석으로 받는 것보다는 코인으로 받는 게 그들에게도 더 나을 테니까.
우리는 그 통로가 되어주는 대신 통행세를 조금 받으면 그만이다.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코인을 벌어들일 수 있겠지.
그런데 그런 것을 떠나 개인적으로 사업을 하자니.
의아하면서도 묘하게 기대가 되었다.
최고 관리자니 그만큼 스케일도 크겠지.
“무슨 사업을 말하는 겁니까?”
-자네도 알거라고 생각하네. 나는 수천만 개의 차원들의 균형을 잡는 시스템의 창시자이자 최고 관리자. 그곳에서 나오는 모든 코인은 모두 나를 통하지. 하지만 네가 등장한 이후로 조금 균형이 어긋나 버렸다.
“···?”
-나라는 하나의 길옆으로 새로운 길이 생겨난 것이다. 차원 은행이라는 길이.
“음···.”
불만을 토로하는 걸까.
그의 말을 듣던 나는 그의 말에 반박하기 위해 생각을 정리했다.
그런데, 그런 행동이 무색할 말이 들려왔다.
-나쁘지 않아. 오히려 감사하지. 아무리 오래 해오던 일이라도, 모든 코인을 관리하는 건 쉽지 않으니까.
내가 걱정할 만한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들은 것만 생각해 보면 오히려 나보다 네가 코인과 관련해서 더 탁월한 능력을 지니고 있더군.
“창시자시여?”
No. 72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그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는 얼굴.
놀란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대체로 권력을 지닌 이들은 자존감이 높다.
그래서 자신이 남보다 못하는 게 있다는 쉬이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을 뽐내는 걸 좋아하지.
그런 걸 생각하면 최고 관리자의 말은 충격적이었다.
그는 모든 종족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존재였다.
그런 존재가 자신을 낮춘 것이다.
오죽했으면 No. 72가 놀랐겠는가.
-이건 그렇게 놀랄 일이 아니다. 말을 안 할 뿐이지. 모두가 생각은 하고 있을 테니까. 그리고 은행장이 살던 차원이 시스템에 귀속되귀 전에 하던 일도 돈과 관련되었다지?
“네.”
-그런데, 그건 좀 신기하군. 솔직히 자네와 같은 일을 한 자가 아예 없던 건 아니었다. 은행이란 건 없었지만, 전매소나 돈을 관리하는 기관이 있던 차원들이 여러 개 있었지. 하지만 그 어디에도 은행장처럼 코인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직업은 없었단 말이지.
“···.”
-내가 만든 시스템이기는 하지만, 각자의 잠재력은 다르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격의 본질과 가까운 직업은 나를 제외하고는 없었는데.
나를 바라보는 최고 관리자의 눈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반짝인다.
-나타난 타이밍도 참, 애매해. 때마침 시스템에 과부하가 걸리던 참이었거든. 이걸 우연이라고 해야 할지, 운명이라고 해야 할지.
그가 나지막이 웃는다.
그 웃음이 자못 소름끼쳐 팔에 닭살이 돋아났다.
나는 애써 그 느낌을 무시하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원하시는 게 뭡니까?”
-나와 사업. 정확히는 네가 나 대신 내가 하던 일을 도맡아주면 좋겠다.
이제 더 이상 놀라기도 힘들다.
최고 관리자의 뒤를 이어 일을 하라는 건, 나를 후계자로 지명하겠다는 건가.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애매하게 말하기는 했지만, 일을 이어받으라고 했지, 전부를 이어받으라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그게 그 소리 같기는 하지만, 그가 한 말들을 조합해 보면 그가 뭘 원하는지 어느 정도 알 것 같았다.
“시스템으로 통하는 코인의 필터가 되어 달라는 거군요.”
-아, 그렇지. 정확히 이해했어.
역시 젊어서 그런지 이해력이 좋다며 그가 손뼉을 쳤다.
‘이건 독이 든 사과다.’
나는 마냥 좋아라하며 제안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겉으로만 보면 절대 거절해서는 안 되는 제안이었다.
평생에 걸쳐 한 번 들어올까 말까한 제안.
이걸 거절하면 두고두고 후회하게 될 수도 있다.
그 정도로 그의 제안은 혁명적이었다.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면 나는 공식적으로 시스템에 통하는 모든 코인을 만질 수 있게 된다.
하지만 그게 그 정도로 좋은 거냐 묻는다면 나는 아니라고 할 거다.
‘좋은 게 있다면 당연히 나쁜 것도 있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그걸 내게 양보할 리가 없다.’
힘들어서 양보한다? 그건 핑계에 불과하다.
정말 힘들 뿐이라면 자신의 밑에서 일하는 직원에게 맡기면 그만이다.
그런데 굳이 남이나 다름 없는 내게 넘긴다는 건 무슨 문제가 있다는 거였다.
‘냄새가 나, 아주 지독한 냄새가.’
뭘까. 그 정도로 좋은 수입원을 굳이 내게 넘기는 이유가 뭐지.
진상을 상대하기 힘들어서?
아니 그건 이유가 되지 못한다.
무려 시스템의 최고 관리자에게 진상 짓을 할 정도로 간 큰 놈이 얼마나 있겠는가.
‘그렇다고 시스템에 검은 돈이 있을 리도 없고.’
코인이 불법적으로 유통될 수가 있을까.
사람 일은 가늠해서는 안 된다고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0%에 수렵했다.
다른 이유가 있다.
그런데 그 이유가 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만약 코인이 아닌, 지폐가 사용되는 현대에서라면 짚이는 게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는 그게 아니다.
코인은 불법 유통이 불가능하다시피 할 정도로 힘들다.
그렇다면 마석과 관련된 일인가.
‘나한테 필터가 되어달라고 했다.’
그 말은 나쁜 것들은 죄다 걸러달라는 건데.
아, 설마··· 그건가?
확실히 그거라면 이해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