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2화
뜨거운 열기가 내 속을 달궜다.
어찌나 뜨거운지 속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눈이 타는 것과는 다른 의미에서 최악이었다.
내장이 쪼그라들고, 뜨겁던 열기가 돌연 사라지더니 뼛속까지 시린 냉기가 몸을 가득 채웠다.
아프고 따갑고 춤고 뜨겁다.
냉기와 열기는 번갈아가며 내 몸을 괴롭혔다.
영원할 것 같은 찰나의 시간이 끝나고 직접 느끼지 않으면 믿기지 않을 정도의 상쾌함이 밀려왔다.
방금 전 느꼈던 고통의 흔적마저 사라질 정도의 상쾌함이었다.
“후욱··· 후욱···.”
숨을 거칠 게 몰아쉬며 수그렸던 허리를 폈다.
상쾌함마저 사라졌을 때 묘하게 몸이 더 개운해진 느낌이었다.
내게 강제로 먹였다는 분노마저 사라질 정도로 몸의 변화는 극적이었다.
“지금 제가 먹은 게 뭡니까?”
“일시적으로 격을 높여주는 물약입니다. 많이 고통스러우셨을 겁니다. 한 단계씩 천천히 올라는 것도 아니고, 한 번에 수십 계단을 오른 거니. 하지만 은행장님을 살리기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그가 먼저 변명을 나열했다.
내 눈치를 보는 그를 가만히 바라봤다.
어떻게 할까. 솔직히 끔찍한 고통에 휩싸였을 때는 그를 원망했다.
왜 그딴 걸 먹여서 나를 이렇게까지 고통스럽게 하는 거냐고.
그런데 물약을 통해 내 몸이 변화되고 느낄 수 있었다.
그의 말처럼 내가 그 물약을 마시지 않았으면, 정말로 죽었을 수도 있었을 거라고.
‘내가 미쳤다고 저걸 맨눈으로 보려고 했으니.’
물약을 마시고 나서야 옥좌의 존재가 어떤 존재인지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신.
인간들이 말하던 신을 직접 마주하면 이런 느낌일 거라고.
발포스나 다른 성좌들은 쩌리로 느껴질 정도의 존재감이었다.
내가 한 행동은 아무런 보호구도 없이, 우주선이나 그런 거 없이 맨몸으로 태양에 가까이 다가가려 한 것과도 같았다.
바로 죽지나 않으면 다행인, 그나마 내가 버틸 수 있었던 건 엘릭서를 먹었기 때문이다.
엘릭서가 바로바로 재생시켜줬기에 내가 아주 조금이나마 버틸 수 있는 거였다.
어떻게 보면 엘릭서의 재생력조차 버티지 못할 정도의 힘을 가진 존재라고 해야 할까.
어쨌든 No. 72는 나를 살리기 위해서 그랬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나를 죽이려 한 것도 아니고, 나를 위해서 한 건데 용서를 할 것도 없었다.
오히려 내가 고마워해야지.
“아닙니다. 전 괜찮으니 고개를 드세요.”
No. 72의 어깨를 토닥이며 옥좌를 향해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물약의 효과일까, 전처럼 눈이 뜨겁지 않았다.
오히려 신비로운 감각이 나를 간질였다.
평소에 내가 느끼지 못한 것들을 보고 듣고 느끼게 되었다.
‘이게 격이란 건가.’
어째서 만나는 성좌마다 ‘격격격’하는 건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최고 관리자가 내게 준 건 일시적으로 격을 상승시키는 물약.
그것도 한 단계도 아니고, 무려 잠깐이지만 최고 관리자를 마주 볼 수 있을 정도의 높은 격이 되게 만드는 물약이었다.
아무런 기초도, 초석도 다지지 않은 몸으로 그러한 것을 감당하려 했으니, 죽지 않으면 다행이라 느껴질 정도였다.
그 정도로 고통을 느끼는 것으로 끝낸 것만으로도 감사히 여겨야 하려나.
-흠··· 이제야 좀 제대로 된 대화를 할 수 있겠군.
내가 몸을 둘러보고 있으니, 최고 관리자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나를 바라본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최고 관리자의 말을 듣지 못한 건지, 아니면 무시하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No. 72는 내 몸을 살피는데 여념이 없었다.
“괜찮습니다. 괜찮으니 크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미 한 번 괜찮다고 말한 것 같은데, 그래도 부족했는지 그는 몇 번이고 확인을 하고 또 확인한 끝에야 안심했다.
아무래도 허락도 맡지 않고 마구잡이로 먹인 게 마음에 걸린 듯 했다.
“음··· 의도치 않게 좋지 않은 모습을 보였네요.”
주변을 둘러본 나는 눈살을 찌푸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 몸에서 나온 게 확실해 보이는 오물들이 바닥을 더럽히고 있었다.
내가 들어오기 전만 해도 황금색으로 가득한 엄청 깨끗한 곳이었다.
티끌의 먼지조차 없던 곳에 내 오물로 더렵혀지니 민망함과 미안한 마음이 물밑들이 밀려왔다.
그런 내 생각을 읽은 걸까.
“괜찮습니다. 은행장님이 아닌 다른 이라고 하더라도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전혀 위로가 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눈앞에서 오물을 치워주는 건 감사했다.
내가 치워야 하나, 어떻게 치워야 할지 걱정이 되었으니까.
그런 걱정을 깔끔하게 해결해줬으니 감사할 수밖에.
-이제 내게 집중해주겠나? 자꾸 그렇게 나를 무시하면 조금 서운할 것 같군.
그제야 나는 최고 관리자에게 시선을 돌릴 수가 있었다.
그를 똑바로 바라볼 수가 있다.
더 이상 눈부시지도 않았고, 눈이 타지도 않았다.
숨이 차지도 않았고, 그가 마냥 범접할 수 없는 존재로 느껴지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와 협상을 하는 게 가능할지가 의심이 되었는데, 물약을 마시고 나서 평정심을 유지할 수가 있었다.
“죄송합니다. 고객님을 상대로 추태를 부렸군요.”
-고객? 고개이라··· 하하. 그렇지. 나도 고객이기는 하지. 어쨌든 차원 은행에 등록한 건 맞으니까.
최고 관리자가 마음에 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그런 그를 바라보며 옷을 정돈하다 말았다.
‘옷이··· 더러워졌어.’
몸에서 나온 탁기들로 옷이 거무죽죽하게 더럽혀져 있었다.
눈을 찡그리게 할 정도로 악취가 나기까지 했다.
물에 몸을 푹 담그고 씻은 뒤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싶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럴 수가 없으니.
‘제 몸을 좀 깨끗하게 해주시겠습니까? 옷도 같이요.’
-아, 알겠어요.
반지의 그녀가 괴로운 목소리로 대답하며 마법을 사용한다.
몸과 옷을 더럽히던 오물들이 한순간에 사라진다.
‘많이 괴로운가요?’
-조금 그렇네요.
목소리만 들어보면 절대 조금이 아닌데.
아마 최고 관리자에게 나온 빛 때문이겠지.
나는 반지를 풀어 주머니에 집어 넣었다.
그제야 그녀가 살았다는 듯이 안도의 한숨을 내셨다.
그녀도 나를 챙기느라 고생했으니 잠깐이라도 쉬는 시간이 있어야지.
지금은 그녀의 힘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몸의 오물을 제거한 것만으로도 그녀는 자신의 할 일을 다했다.
“그럼··· 저를 부르신 이유가 뭔지 물어도 됩니까?”
-아, 간단하네. 궁금한 게 있기도 하고, 하고 싶은 얘기도 있어서.
“그렇군요. 저도 때마침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잘 되었군요.”
-내게 할 말이 있다고?
“네.”
-호오··· 그게 뭐지?
No. 72도 있는데 굳이 자신에게까지 와서 물을려고 하는 게 신기했는지 그가 눈을 반짝인다.
담당자에게 말을 하면 왠만한 일은 다 해결될 텐데 굳이 자신에게까지 가져올 정도면 가벼운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최고 관리자의 얼굴에는 호기심으로 가득했다.
“별거 아닙니다. 그저 저희에게 주신다는 그 대가, 그것에 대해서 새로 협상을 해야 할 것 같아서요.”
-대가? 대가라면··· 아, 그거 말하는 건가. 5조 내에서 원하는 부탁 한 가지를 들어준다는 거.
“네. 맞습니다. 그 제안이 좋기는 한데, 솔직히 지금 당장 코인이 급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부탁 한 가지만 하기에는 수지가 맞지 않은 것 같아서요.”
-흠···.
“그래도 장을 움직이는 건데, 겨우 그걸로 퉁치시는 건 아니시겠죠?”
최고 관리자가 손을 들어 턱을 쓸어내린다.
그가 계속 말해보라며 손짓한다.
-그래서 원하는 게 뭐지?
“부탁 두 개.”
-···.
“5조를 넘지 않는 선에서 부탁 두 개는 들어주실 수 있습니까?”
최고 관리자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5조를 꽉 채울 수 있도록 부탁의 제한을 없애달라고 할 생각이었지만, 직접 만나고 나니 그 생각이 완전히 사라졌다.
저런 존재 앞에서 과한 욕심을 부리는 좋지 않았다.
괜히 심기를 건드려 사이가 나빠질 바에는 적당히 챙기고 빠지는 게 나았다.
-흠, 부탁 두 개라···.
그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고민이 되었는지 한동안 나를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금색의 눈동자가 내 표정을 살핀다.
그러더니 돌연 웃음을 터뜨린다.
-하하하하. 발포스 그놈을 밑에 두고 부린다길래 간이 크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보니 또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아닌가, 내게 이런 말을 하는 걸 보면 배포가 큰 것 같기도 하고. 애매하군.
긍정적인 반응인지 애매했다.
웃는 걸 보면 좋은 것 같은데, 그 내용은 조금 헷갈리게 만들었다.
-부탁 두 개라고 했나?
“네.”
-겨우 그 정도로 만족할 수 있겠나? 무려 전 차원을 통틀어 유일한 차원 은행의 은행장께서.
“음···.”
-나는 만족하지 못하겠군. 장차 내 동업자가 될 수도 있는 자에게 겨우 그 정도 대우만을 해주는 건 있을 수 없지. 필요한 게 뭐지? 필요한 게 있다면 전부 말해도 좋다. 듣고 수용 가능하다면 전부 들어주겠다.
오.
최고 관리자라고 해서 좀 더 까다로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오히려 좀 더 유쾌하고 터프한 것 같다.
“창시자시여!”
옆에서 No. 72가 경악한 것 같기는 한데 나한테는 상관 없는 일이었다.
내게 훨씬 이득인 일인데 그것을 마다할 이유가 없지.
“그래 주신다면 감사하죠.”
나는 바로 내가 원하는 것들을 생각했다.
뭐가 좋을까. 어떤 걸 받으면 잘 받았다고 소문이 날까.
“우선 저희 차원 은행을 무료로 계속 홍보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그건 어렵지 않지.
“그리고, 시스템의 시설들도 무료로 이용할 수 있게 해주시고, 지점을 낼 수 있게 지원을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또 직원을 뽑을 수 있게···.”
여섯 가지.
나는 그에게 여섯 개의 부탁을 했다.
더 많이 할 수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염치가 있으니까.
그 정도만 받아도 내게는 충분히 이득이었다.
한 번 움직인 것 치고는 엄청난 이득이었다.
-음···.
처음에는 쿨하게 요구를 들어주려 하던 최고 관리자도 부탁이 늘어갈수록 말수가 줄어들었다.
내가 이 정도로 아무렇지 않게 부탁을 할 것이라고 예측하지 못한 얼굴이다.
나는 그를 바라보며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덧붙였다.
“설마 최고 관리자이자 저희 은행의 VIP께서 한입으로 두 말하지는 않으시겠죠.”
-흠··· 그렇지. 내가 말한 게 있으니. 하지만 그중에는 조금 수정해야 할 게 있군.
최고 관리자가 확실하게 들어주겠지만, 몇 가지는 조건을 수정하자고 한다.
내가 손해볼 건 없었기에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수정에 수정을 거듭한 나는 총 여섯 가지를 얻을 수가 있었다.
내가 얻어낸 여섯 개의 혜택을 이러했다.
「첫 번째, 10년간 무상 홍보.
두 번째, 차원 은행 직원들을 제한으로 시스템 시설 이용권 제공. 단, 은행 직원들은 그 직급에 따라 이용할 수 있는 시설의 등급과 제한이 달라진다.
세 번째, 차원 은행 고객중 다이아 등급 이상의 고객들을 기준으로 포탈 무료 이용권 제공. 단 5년을 기준으로 등급의 기준이 상승하며, 20년 후에는 가격 조정과 함께 VIP 등급만 무료 이용권 제공.
네 번째, 시스템의 중심, 모든 차원 거주민들이 오고 가는 관리자들의 탑에 지점 무료 건설권 제공. 단, 엄중히 선별된 관리자들을 직원으로 고용할 것.
다섯 번째, 은행장 전용 포탈을 제공한다. 그 포탈은 최고 관리자와 직통으로 연결되어 있다.
여섯 번째, 차원 은행 직원 빚 면제권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