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차원 은행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71화 (71/113)

제71화

No. 72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나는 그런 그를 빤히 바라봤다.

‘많이 어려운 건가.’

5조에 버금가는 부탁을 수락해야 한다는 건, 아무리 최고 관리자의 허락을 받고 온 그라고 해도 어려운 일인 것 같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던 그가 돌연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역시 은행장님이시군요. 그렇게 말하실 것 같았습니다.”

뭔가 내 예상과는 다른 반응이었다.

싫어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그는 기뻐 보였다.

내가 그 말을 하기를 기다렸다는 것처럼, 밝아진 얼굴의 그를 보며 나는 황당해졌다.

자신들이 손해를 볼 수 있는 일인데, 그게 그렇게도 좋은 걸까.

그의 반응이 너무 뜻밖이라 나도 모르게 그가 업무에 미쳐 자신의 직장을 증오하고 있다는 착각까지 들 정도였다.

“그렇죠. 비록 대부분의 일이 코인으로 돌아가기는 하지만, 코인으로 되지 않는 일도 있는 법이죠.”

내 대답이 무척이나 마음에 든다는 듯이 박수를 치기까지 한다.

나는 그저 그게 더 이익이 될 것 같아 말했던 건데, 이런 격한 반응을 받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아니, 그건 그렇고 어떻게 손해 보는 일에 저리도 기뻐할 수가 있는 거지?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이었다.

나라면 그처럼 반응을 하지 못했을 거다.

“저희가 해드릴 수 있는 건 무척이나 많이 있습니다. 우선 가장 대표적으로는 차원 은행의 지점을 무료로 건설해드릴 수 있고, 또 시스템의 시설을 평생 무료로 이용하게 해드릴 수도 있습니다. 그 외에도···!”

그는 내가 할 수 있는 걸 설명하는 게 무척이나 신나 보였다.

마치 내가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 느낌이었다.

방금전 나를 코인을 선택하게끔 말하던 것과는 정반대되는 모습.

“···! 어떻습니까. 이 중에 한 가지를 고르실 수 있고, 만약 다른 걸 원하신다면 언제든 말해주시길 바랍니다.”

5분가량을 쉬지 않고 말한 그가 숨이 찾는게 호흡이 거칠어졌다.

그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무엇이든 말해달라며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잠시 고민했다.

분명 그의 선택지 중에는 끌리는 것들이 몇 개 있었다.

원할 때에 관리자를 부려 먹을 수 있는 관리자 10회 이용권이나, 시스템 평생 홍보권과 같은 것들.

종종 써먹을 수 있는 유용한 것들이 있었는데, 워낙 그 종류가 많아 되려 선택하기가 힘들어졌다.

마치 진수성찬이 펼쳐져 있는 뷔페에 온 것 같은 느낌이랄까.

다만 뷔페와는 다른 건 여기서는 한 가지 음식만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어? 굳이 한 가지만 선택할 필요가 있나? 5조에 맞춰서 선택하면 되는 거잖아.’

생각해 보니 그중에 딱 하나만을 선택할 이유가 없었다.

5조에 맞춰 여러 가지를 고르면 되는 거 아닌가.

한 가지를 선택하라고 말을 하기는 했지만, 융통성이란 게 있는 거였다.

상황이란 언제든 바뀔 수 있는 거였고, 우리에게는 협상이라는 좋은 방안이 있었다.

“아까 5조에 맞춰 주시겠다고 하셨죠?”

“네? 아, 네. 그렇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부탁을 들어주시겠다고 하셨고요.”

“네···.”

그의 눈이 가늘어진다.

내가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꺼내는지 알 것 같다는 얼굴로 그가 말한다.

“부탁의 수를 늘려달라는 건가요?”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렇습니다.”

부정할 필요가 없었다.

눈치가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밖에 없다.

특히 관리자와 같은 누군가를 상대하는 직업을 가진 직장인이라면 더더욱 빠르게 알아차리지.

“그건 좀 어려울 것 같습니다. 부탁의 개수는 정해져 있으니까요.”

“그것도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5조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겠다면서, 정작 내가 할 수 있는 건 적으면.”

“음··· 하지만 부탁에 따라 그 가치 또한 달라지니까요.”

쉽게 물러날 수 없다며 그가 난처한 얼굴을 했다.

내가 잘 선택했다며 좋아하던 것과는 다른 반응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 짧은 시간에 세 번이나 감정 변화를 보였다.

“그러니까 말하지 않았습니까. 5조 내에서 고르겠다고.”

“아니··· 그걸 그렇게 말하신다고 해서 하아···.”

그가 한숨을 내쉰다.

그런 그를 빤히 바라보다 볼을 긁적였다.

반응을 보니 쉽게 수락을 해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럼 방법을 다르게 하죠.”

앞에 벽이 있다고 그것을 굳이 넘거나 부술 필요는 없다.

“최고 관리자란 분을 만나 뵙고 직접 얘기를 나눌 수밖에.”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빙 둘러가는 방법도 있었다.

어떻게 보면 그게 더 효율적일 수도 있었다.

벽을 부수려 두들기다가 그 벽이 철벽과 같은 맨손으로 절대 부술 수 없는 벽임을 알게 될 때도 있다.

벽을 넘어보려고 하지만, 그 벽이 수백 미터는 되는 엄청난 높이를 자랑하는 벽일 때도 있다.

절대 혼자서, 맨몸으로 이길 수 없는 존재를 상대하다 좌절하기 보다는,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다른 길로 가는 게 맞다.

오히려 그게 더 빠른 길일 수도 있고.

‘아무런 권한을 받아왔다고 해도, 결국 최종결정권자는 최고 관리자니, 당사자와 협상하는 게 가장 빠른 방법이다.’

내 말에 No. 72가 눈을 깜빡인다.

“어··· 확실히 나쁘지 않아. 어차피 최고 관리자님을 만나러 가야 하니, 직접 그분과 대화를 하게 하는 것도··· 하지만 내게 맡기셨잖아. 아니지, 이런 일은 내가 쉬이 감당하려 하면 안 돼.”

그가 작게 중얼거린다.

나는 그의 선택을 기다렸다. 그가 무슨 선택을 하든 나는 내 뜻을 밀고 나가면 된다.

급한 건 내가 아니고 그들이다.

나야 지금 당장 돌아가도 상관없다.

나를 부른 건 그들이었으니까.

“좋습니다. 은행장님께서 하신 말대로 하겠습니다.”

“제가 한 말이라면?”

“최고 관리자를 보러 가시죠. 아무래도 이번 사항은 제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에게 허락된 건 한 가지의 부탁 혹은 5조에 해당하는 대가를 주는 것.

딱 그 두 가지였다.

그 이상은 그의 개인적인 권한으로 해결할 수 없었다.

직원이 할 수 있는 건 적으니까.

“지금 만나러 가는 겁니까?”

“예. 아, 혹시 힘드십니까? 그럼 편한 날짜를 말해주시면···.”

“왜 이렇게 급하십니까. 좀 여유를 가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내 말에 그가 부산스럽게 움직이던 걸 멈춘다.

눈을 깜빡거리며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크게 심호흡을 했다.

“···제가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했군요.”

이런 큰일은 처음이라며 그가 눈을 감고 들뜬 가슴을 가라 앉혔다.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심호흡하는 그의 볼에 홍조가 띄어 있었다.

나는 그가 진정할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대략 2분 정도가 지날 무렵 그가 입을 열었다.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바쁘신 분을 불러놓고서 민폐만 끼쳤네요.”

“아닙니다.”

“그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지금 최고 관리자를 만나러 가셔도 좋고, 힘드시다면 가능한 시간대를 알려주시면 그때 모시러 가겠습니다.”

한결 여유로워진 목소리로 그가 나를 바라본다.

나는 잠시 고민했다.

발포스가 많이 당황하고 있을 게 보였다.

갑작스럽게 사라진 나로 인해 그가 날뛰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어쩌면 관리자들에게 쳐들어갈 수도 있는데···.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런 것까지 일일이 걱정할 정도로 그는 어리지 않았다.

그리고 나를 끌고 온 게 관리자인 만큼, 그 정도는 관리자들이 알아서 처리하겠지 하고 생각했다.

“지금 가죠.”

“아,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애초에 당신과 만나서 할 이야기도 있었는데. 이왕 이렇게 된 거 오늘 다 해결하죠.”

때마침 영업 시간이 끝나기도 했다.

정확히는 내가 일을 할 시간이 지난거지만.

“그렇군요.”

No. 72가 고개를 끄덕인다.

알겠다며 그가 바로 움직이자고 한다.

어떻게 가는 거냐고 묻는 내 말에 자신의 손을 붙잡고 가만히 있어 달라고 말한다.

그의 말대로 손을 붙잡으니, 무언가가 나를 잡아당기는 느낌이 들었다.

물속에 들어가 밑에서 나를 잡아당기는 느낌.

“허억···!”

짧고 강렬한 느낌이 사라지고 나는 격하게 숨을 몰아셨다.

내 몸의 자아를 잃는다는 게 이런 거구나 하고 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아까부터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누군가가 나를 바라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흐음···.

천둥같이 우렁찬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나는 말문이 막혔다.

거대한 옥좌가 있었다.

주먹만 한 금색의 동전들이 층층이 쌓여 만들어진 것 같은 옥좌였다.

그 옥좌에 한 존재가 앉아 있었다.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었지만, 허리 위로는 윤곽만 보일 뿐.

휘황찬란한 빛으로 인해 자세히 볼 수가 없었다.

띠링, 띠링띠링띠링.

메시가 떠오르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그것을 볼 수가 없었다.

옥좌를, 옥좌에 앉은 존재를 본 것만으로도 눈이 타들어갔기 때문이다.

아프다. 따갑다.

눈이 터질 것 같은 고통 속에서도 나는 고개를 내릴 수가 없었다.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는 안 된다며, 그런 행동은 불결한 행동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은행장님!

“이런···!”

반지에서 보라색 연기가 뿜어져 나온다.

그 연기는 내 눈을 가리려 솟구치다, 옥좌에서 뿜어져 나온 빛에 그대로 흩어졌다.

-꺄아아아악!

비명을 지른다.

불에 데인 것처럼 그녀가 끔찍한 비명을 질렀다.

뒤늦게 하나의 손이 내 눈을 가렸다.

그제야 나는 눈을 감을 수가 있었다.

비명이 울려 퍼지는 반지를 붙잡고 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저승왕이 준 엘릭서의 효과를 톡톡히 본다.

더 이상 빛으로 인해 눈이 타지 않으니, 타들어간 살점들이 떨어지고 새로이 살이 돋아났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눈이, 조금씩 트이기 시작했다.

-허어··· 이 느낌은 아무리 봐도 미물 그 이하인데. 그 많은 코인을 가지고도 격을 올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건가?

옥좌에서 당혹 어린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놈의 격격격. 그것이 뭐라고 저리도 당황하는 것일까.

그것이 뭐라고 내게 이렇게까지 고통을 주는 걸까.

“괜찮으십니까?”

빛으로부터 나를 보호하던 No. 72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이럴 줄 알았으면 발포스를 데리고 올 걸 그랬다.

그가 있었으면 좀 편했을 텐데.

“은행장님께서 격을 올리지 않으셨다는 걸 잊고 있었습니다. 제 불찰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가 내게 사과를 한다.

자신의 잘못이라는 그의 말에 나는 아니라고 부정하지 못했다.

아직도 내 눈을 태우던 고통이 생생하게 기억났다.

그가 내게 설명을 안 해준 것도 사실이었다.

그게 뭔지 미리 알려주고 대처를 할 수 있게 해주었다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는 제대로 대화를 하지도 못하겠군. 음···.

옥좌의 존재가 팔걸이를 두드리더니 손가락을 튕겼다.

-이건 우리 측의 실수이니, 그만한 보상을 해야겠지.

“창시자시여, 이건···!”

No. 72가 경악한다.

도대체 뭐 때문에 저렇게 놀라는 걸까.

내 눈은 No. 72로 인해 가려져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저렇게 놀라는 걸 보니, 무슨 일이 있기는 하다는 건데.

-그걸 그에게 주어라. 그걸 마시면 당장 대화를 할 수는 있을 테니.

“하지만 이건···.”

-괜찮다. 영구적인 것도 아니고, 일시적으로 빌려주는 것이니까.

“창시자께서 그렇다고 하신다면···.”

No. 72가 마른 침을 삼키며 옥좌의 존재에게 무언가를 받았다.

그는 그것을 바로 내 손에 쥐어주었다.

그건 무지개색의 액체가 담긴 투명한 유리병이었다.

“그걸 마시십시오.”

그가 내 손에 쥐어진 병의 병마개를 따더니, 돌연 내 입에 주둥이를 물리고 들어올렸다.

주륵.

병에 담겨 있던 액체가 입으로 흘러 들어온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