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8화
웬 황소가 씩씩거리고 있었다.
정장을 입은 팔뚝과 어깨의 근육이 부풀어 올라, 그 옷이 금방이라도 찢어질 듯 위태롭게 버티고 있었다.
‘또 무슨 미친 짓을 저지르려고.’
발포스가 호승심을 불태우고 있었다.
카셀린을 바라보는 그의 눈이 뜨거웠고, 내 눈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그의 상체에서 붉은색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얼핏 유황 냄새도 나는 것 같다.
“어디를 보는 거···!”
내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카셀린의 몸이 굳어졌다.
미소를 짓던 그녀의 입꼬리가 내려가고 얼굴이 딱딱해졌다.
“당신이 왜 여기 있습니까?”
그녀는 봐서는 안 될 것을 본 듯한 얼굴이었다.
부정적인 그녀의 반응과는 다르게 발포스는 마냥 좋아 보였다.
둘이 아는 사이인 걸까.
이제 나는 안중에도 없는 듯 그녀가 내게 등을 돌렸다.
“이렇게 보니 반갑군.”
발포스가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나는 의자를 뒤로 당겨 그녀와 그의 행동을 지켜봤다.
“저는 하나도 반갑지 않습니다.”
그녀의 고운 눈살이 찌푸려졌다.
발포스가 자신을 반겨주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한 분위기였다.
“도대체 당신이 왜 여기 있는 거죠? 당신과 이곳은 차원의 거리도 멀지 않습니까.”
“다 이유가 있으니까 그렇겠지.”
카셀린이 한숨을 내셨다.
“정말 모르겠군요. 당신 같은 신이 어째서 이곳에 있는 건지.”
그녀가 이해할 수 없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면서 나를 힐끔 바라본다.
진상에게 걸린 알바생을 보는 듯한 시선이라 살짝 당황스러워졌다.
그녀가 나와 발포스의 사이를 오해하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시스템에게도 막나갔으면 발포스에게는 정중하네?’
그녀가 존대를 하는 건 조금 충격적이었다.
그녀에 대한 첫인상은 무자비한 살인자였다.
다짜고짜 나이트 일행을 쳐죽이고, 내게는 갑인 마냥 행동했던 그녀였다.
그랬던 그녀가 지금은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고 있었다.
오히려 발포스를 대하는 데에 조심스러워 보였다.
“싸움밖에 모르는 당신이, 이렇게 코인을 저축하는 취미가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음?”
그녀의 이어지는 말에 발포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자신을 그런 게 아니라며 그가 카셀린에게 말했다.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오해요? 무슨 오해를 말하는 거죠? 아, 저축이 아닌 협박이라도 하러 오신 겁니까? 하긴, 당신이라면 그러고도 남겠군요.”
그녀의 힐난에 발포스가 목을 긁적였다.
“아니, 아무리 나라고 해도 그런 미친 짓은 하지 않아. 시스템이랑 관련이 없으면 모를까, 시스템과 아주 밀접한 관계에 있는 자를 건들일 리가 없지.”
뭐야, 그럼 내가 시스템과 계약을 하지 않으면 그녀의 말대로 협박이라도 하려고 했다는 말인가.
내가 반사적으로 그를 노려보니, 나를 힐끔 바라본 그가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협박을 할 생각도 없었다.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흥미가 있었기 때문이지, 탐욕 때문이 아니야.”
“아, 예. 알겠습니다. 그런데 오해를 하고 있다는 건 무슨 소리입니까?”
“아, 그거··· 간단해. 나는 지금 고객으로 온 게 아닌, 직원이다.”
“···?”
대수롭지 않은 그의 말에 카셀린의 반응이 늦어졌다.
자신이 잘못들은 게 아닌지 의심하는 얼굴로 그녀가 눈을 깜빡였다.
발포스를 노려보던 그녀가 나를 돌아본다.
복잡한 심경이 담긴 그녀의 표정에는 내가 설명해주기를 바라는 심정이 가득했다.
나는 말을 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이기만 했다.
이것만으로도 발포스의 말이 사실이라는 걸 유추할 수 있다.
애초에 그가 거짓말을 하면 나는 조용히 있을 생각이 없다.
굳이 감추고 있을 필요도 없을뿐더러, 발포스가 내 직원인 건 팩트였으니까.
“···미친.”
많이 놀란 건지 그녀가 눈을 부릅뜨며 욕을 입에 담았다.
그녀가 손을 뻗어 내 어깨를 붙잡았다.
콰악-
강한 힘이 내 어깨를 압박한다.
우득하고 불길한 소리가 나면서 끔찍한 통증이 찾아온다.
나는 신음을 흘리며 발포스를 불렀다.
“그 이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발포스가 그녀의 손을 붙잡아 내게서 떨어뜨렸다.
-괜찮으신가요?
반지의 그녀가 자신의 힘으로 막을 수 없었다며 사과를 해온다.
반지에서 흘러나온 보라색 연기가 콧속으로 들어온다.
그러자 통증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보라색 연기가 마취 효과를 준 것이다.
뿌득, 꾸드득.
어깨에서 뼈가 재조립되는 소리가 들려오며, 소름끼치는 느낌이 전해져왔다.
아프지는 않아 그나마 다행이었다.
‘엘릭서를 마시길 잘했네.’
저승왕에게 받아 마신 엘릭서의 효과를 톡톡히 보는 순간이었다.
엘릭서를 마시지 않았다면 부러진 어깨에 한동안 고생을 했겠지.
통증이 가라앉으니 속에서 뜨거운 열기가 솟구친다.
내가 동네북도 아니고, 별것도 아닌 일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게 최악이었다.
한숨을 내쉬며 시계를 매만졌다.
차가운 메탈의 느낌이 뜨겁게 달아오른 머리를 차갑게 식혀준다.
“카셀린씨.”
나지막한 내 부름에 그녀가 발포스에게 붙잡힌 손을 풀며 나를 바라본다.
그녀의 눈에는 원망이 가득했다.
발포스를 직원으로 고용한 걸 탓하는 것 같은데, 나로서는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내가 그를 고용하는데 코인을 보태 주기라도 했나, 아니면 아주 작은 도움을 주기라도 했나.
그런 거 없이 다짜고짜 화부터 내는 그녀의 행동은 짜증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아, 진짜. 성좌란 놈들이 어떻게 된 게 정상적이지 않은 건지.’
짧게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지금 당신의 행동이 얼마나 무례한 건지 알고는 있으십니까?”
내 말에 그녀가 인상을 쓴다.
그녀의 몸에서 형용할 수 없는 불길한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전이었다면 그녀에게 이렇게 말하는 걸 상상할 수도 없었다.
자칫 잘못하면 내가 죽을 수도 있는데 어찌 반항할 수 있을까.
그녀는 그 엘더 리치를 가볍게 밟아버린 강자였다.
‘그때와 지금은 많은 게 달라졌다.’
차원 은행의 규모도 규모지만, 가장 큰 건 내게 경호원이 생겼다는 것이다.
그것도 시스템의 관리자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경계할 정도의 힘을 가진 마신이 내 경호원이었다.
그녀가 발포스에게 보인 행동을 보면, 그가 결코 그녀보다 약하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오히려 그녀보다 더 강할 수도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녀의 존대는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처음에는 그럴 수 있다고 이해하고 넘겼습니다. 차원 은행 자체가 처음일뿐더러, 살아온 생이 다르니까요. 그래서 제게 반말을 하든 강압적으로 행동하든 그냥 넘겼습니다.”
발포스를 믿었다.
그리고 발포스를 부리는 나를 믿었다.
내 손목에는 발포스에게 죽으라고까지 명령을 할 수 있게 도와주는 족쇄가 있었다.
이게 있는 이상, 발포스가 죽지 않은 이상 나는 안전하다.
‘교육은 시켜야겠지만.’
지금처럼 내 몸에 손을 함부로 대지 못하게 얘기를 할 거다.
“그런데 이건 아니지 않습니까. 당신의 눈에 제가 하찮아 보일지 몰라도, 저는 무리를 이끄는 장입니다. 시스템이 관심을 가진 기업의 주인입니다.”
“···.”
“처음에는 몰라서 그럴지 몰라도, 이제는 당신도 아시지 않습니까. 전에 당신이 그러지 않았습니까. 제가 시스템과 계약을 한 게 신기하다고. 그 계약의 의미를 모르지 않으실 텐데, 제게 이렇게 함부로 대하시면 안 되죠.”
“너···.”
그녀가 나를 노려보며 눈매를 좁혔다.
“그리고 자꾸 너너 하시는데. 그것도 좀 고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를 높여 달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아주 조금 존중해달라는 겁니다.”
“뭘 믿고 이렇게 하는 거지? 그래, 마신은 강하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신이 언제까지고 네 옆에 붙어 있을 것 같아?”
카셀린이 으르렁거린다.
나이트 일행이 죽었던 때의 기억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몸을 움찔 떨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 기억에 사로잡힐 수는 없다.
나는 나를 지킬 수단이 있다.
정 안되면 호출기를 사용해 이 자리를 피하면 그만이었다.
아무리 그녀가 대단하다고 해도 관리자의 공간까지 따라오지는 못할 거다.
“당신의 말대로 발포스가 24시간 내내 제 옆에 붙어 있지 않을 수도 있겠죠. 그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굳이 발포스가 아니더라도 제게 방법이 있습니다.”
“방법?”
“저는 당신을 블랙리스트에 올릴 수 있습니다.”
“···!”
상당히 반응이 큰데.
다행히 시스템에도 블랙리스트라는 단어를 사용하나 보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거 한마디 했다고 저렇게 놀랄 리가 없지.
블랙리스트란 간단하다.
차원은행 전체가 그녀를 요주의인물로 낙인찍는 것이다.
처음에는 감시를 당하는 것으로 그칠지 몰라도, 그게 계속되면 나중에는 그녀가 차원 은행에 들어올 수 없게 된다.
솔직히 내가 말하고도 이게 통할지 고민했다.
내가 차원 전역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면 모를까, 나는 이제 커가고 있는 중이었다.
성장 속도가 빠르다고는 해도 그게 카셀린이 경계할 정도는 아니었다.
내 말에 코웃음을 쳐도 이상하지 않았다.
“지금 나를 블랙리스트에 올리겠다고?”
“네. 그러니 행동에 조심을 가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카셀린이 입을 다물었다.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 그녀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 반응이 나는 조금 신기했다.
그녀는 성좌다.
내가 아는 성좌란 자존심이 강하다.
불멸의 전사를 대하던 모습이나 시스템을 대하는 모습을 떠올리면 그녀가 시스템에 속한 이들 중에서 상위권에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시스템을 손아귀로 부숴뜨리기까지 했던 그녀에게 나는 지금, 당신을 받아주지 않을 거라고 협박을 하고 있는 거였다.
‘그런데 의외로 조용하단 말이지.’
미치지 않고서야 자신에게 그딴 망발을 뱉을 수 있냐며 날뛸 줄 알았다.
아니면 이딴 곳에 다시 올 필요가 없다고 소리라도 칠 줄 알았다.
“···내가 흥분해서 그만 실수를 범했군.”
순순히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당황했다.
이렇게 쉽게 굽힐 거라고는 생각못했다.
애써 태연함을 유지한 채 그녀에게 말했다.
“괜찮습니다. 지금이라도 조심해주시면 됩니다.”
“알겠··· 알겠습니다.”
그녀가 자신이 말해놓고도 뭔가 어색하다는 듯이 제 입을 만진다.
존댓말까지 사용해줄 거라는 생각은 못했는데, 오히려 이러면 내가 부담스러워진다.
“그렇게까지는 안 해주셔도 됩니다.”
“아니··· 아닙니다. 은행장께서 하신 말은 틀린 말이 아니죠. 지금부터라도 이렇게 하는 게 맞습니다. 그간에 무례를 용서해주시겠습니까?”
“어, 아. 예.”
나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까지 해줄 것을 바라지는 않았다.
화를 내지나 않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한순간에 분위기 자체가 바뀌어버리니 오히려 내가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용서해주신다니 다행이군요. 그러면 블랙리스트에 올리는 건 다시 생각하시는 겁니까?”
“아···.”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올려지는 게 그렇게 두려운 걸까.
이건 뭐, 거의 벌을 면할 수 있단 소리를 들은 죄수의 모습이지 않은가.
이 말이 이렇게까지 효과가 클 줄이야.
‘그렇다고 모든 고객에게 통하지는 않겠지. 이건 그녀가 시스템을 너무 잘 알기에 벌어졌다고 볼 수 있으니까.’
그녀가 저런다고 다른 고객에게도 통할 거란 생각은 금물이었다.
이건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나는 속으로 생각을 정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아직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건 그렇고 일단 자리에 앉으시죠.”
“네?”
“저를 찾아오셨다는 건 처리할 일이 있다는 걸 텐데, 그냥 돌아가실 겁니까?”
“···.”
“카셀린씨?”
“아, 네.”
카셀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도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발포스에게 옆으로 비켜 달라고 손짓했다.
“너··· 와, 대박이네.”
그런 나를 보며 발포스가 황당해한다.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그가 옆으로 비켜섰다.
그러면서 몸을 숙여 내게 속삭인다.
“넌, 진짜 최고다.”
“예?”
“아니야. 아무것도.”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뒤로 물러난다.
나는 그를 잠시 바라보다 고개를 돌려 카셀린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자, 그러면 어떤 걸 도와드릴까요. 코인을 보내실 분이 있으십니까? 아니면 적금을 드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