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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원 은행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67화 (67/113)
  • 제67화

    내 앞에 앉은 그녀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입을 꾹 다문 채 나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처음에는 조용히 기다렸다.

    오자마자 자신이 원하는 것을 빨리빨리 해달라고 닦달하는 고객이 있다면, 반대로 느긋하다 못해 한숨이 나올 정도로 느린 사람이 있다.

    앞에 있는 여자는 후자에 속했다.

    “···.”

    “···.”

    그런데 이건 말이 없어도 너무 없는 거 같은데.

    처음 앉은 그 자세 그대로를 유지한 채 그녀는 가만히 있었다.

    이따금 내쉬는 숨이 없었다면 그녀가 동상이라해도 무방할 정도로 움직임이 없었다.

    ‘뭔데···.’

    처음 3분 정도야 이해를 할 수 있다.

    하기 곤란한 내용이 있거나, 아니면 낯을 가려 말을 쉽게 못 거는 경우도 있으니까.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

    그것도 정도가 있는 거지. 지금처럼 내가 묻는 말에도 대답을 하지 않는 건 좀 아니었다.

    다리를 꼬고 앉은 채 나를 노려보는 걸 봐서는 낯을 가리는 것 같지도 않았다.

    뭐가 그리도 마음에 들지 않는 건지, 그녀는 인상을 팍 쓰며 나를 훑어보기만 했다.

    “음···.”

    5분까지는 기다려주려고 했다.

    미스릴 등급의 고객은 쉽게 나타나지 않으니까.

    ‘그렇다고 나를 적대하는 사람까지 기다려주기는 싫은데.’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는데 그녀는 나를 보기 무섭게 적의를 보이고 있었다.

    나와 안면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

    “제 얼굴에 무슨 문제 있습니까?”

    “···.”

    “아까부터 제 얼굴만 바라보시는데.”

    “···.”

    여전히 말이 없는 그녀에 슬슬 인내심에 한계가 오려고 했다.

    벌써 10분째다.

    10분째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무리 높은 등급의 고객이라고 해도 그렇지.

    “음··· 제게 용건이 없으시다면 돌아가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

    “···.”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말이 없다라.

    정말 그냥 나를 노려보기 위해서 찾아온 건가.

    도대체 왜 온 건지 의문이 든다.

    나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때 발포스를 돌아봤다.

    “고객께서 나가시겠다고 하시네요. 배웅해주세요.”

    “아, 잠시만.”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고객이 입을 열었다.

    나를 향해 줄곧 보이던 적의가 사라지고, 그녀가 머리를 흔들었다.

    “미안하군. 방금까지 전투를 치르고 와서, 나도 모르게 불쾌한 행동을 했어.”

    “···아닙니다.”

    나를 언제 봤다고 반말인지.

    나는 속으로 혀를 차며 사무적인 미소를 지었다.

    진상 중에 반말을 하는 진상이 없는 것도 아니고, 저런 건 흔하니 크게 반응할 것도 없다.

    ‘그래도 언젠가는 균형을 잡을 필요가 있지. 차원 은행은 앞으로도 더 커질 테고, 나는 그 기업의 장이니까.’

    그때는 내게 보이는 이런 무례함을 받아줄 수가 없다.

    “그런데 우리 어디서 본 적이 있지 않나? 묘하게 낯이 익은데.”

    이게 무슨 헛소리지. 본 적이 있기는 또 뭐가 있어.

    이거 수작질 아니야?

    가끔 그런 고객들이 있었다. 돈이 필요해 찾아와서 아는 척을 해오는.

    은행 일을 하다 보면 종종 그런 적이 있었다.

    아는 사이니까, 좀 어떻게 혜택을 줄 수 없냐고 하는 사람들.

    심지어 예전 초등학교나 중학교 동창들이 찾아오는 경우도 있었다.

    최근에는 그런 적이 드물었지만, 예전에는 그런 경우가 많았다.

    내가 하도 거절을 하고 안 된다고 해서 그 횟수가 줄어들었지.

    이렇게 생각해 보니 그것도 다 추억이다.

    동창이라 하면서 찾아와 도와달라니.

    웃음이 나온다.

    “아니요. 처음 봅니다. 애초에 고객님과 저는 거주하는 차원이 다르고요.”

    “그렇지···.”

    그녀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면서도 눈을 게슴츠레 뜨며 나를 훑어봤다.

    “어떤 걸 도와드릴까요. 적금을 드실 겁니까? 아니면 거래를 도와드릴까요?”

    미스릴 등급이면 코인을 빌려주는 것도 다시 생각해줄 수 있다.

    미스릴이 되기 위해서 1억 코인을 거래해야 하고, 그 정도 거래했으면 어느 정도 신뢰가 쌓인 거다.

    “적금을 들려고.”

    “아, 그렇군요. 좋은 생각입니다. 적금은 단기적으로 보면 몰라도, 장기적으로 볼 때 확실하게 코인을 벌어들일 수 있는 수단이죠.”

    그녀가 알고 있다며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그녀에게 적금에 대해 간단히 설명했다.

    “고객님의 이름이···.”

    “라티나우스.”

    “아. 라티나우스 씨군요. 네. 고객님께서는 최소 오천 코인에서 최대 천만 코인까지 매달 적금을 넣으실 수 있습니다. 금액을 정해주시면 그에 맞춰 도와드리겠습니다.”

    “음··· 천만 코인까지라···.”

    그녀가 잠시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백만 코인으로 하지. 매달 백만 코인으로.”

    “그 이상으로 하셔도 되는데, 백만 코인으로 하면 되겠습니까?”

    “어. 어차피 그 이상 코인을 넣을 저력도 되지 못해서.”

    흘리듯 내뱉은 그녀의 말에 나는 의아해했다.

    한달에 백만 코인을 움직이는 게 최선이라니, 미스릴이 되기 위해서 1억 코인을 움직여야 한다는 걸 떠올리면 이상한 이야기였다.

    한달에 오천만 코인을 움직여야 가능한 건데.

    ‘뭐,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지.’

    몇천 코인 하지 않은 게 어디인가.

    나는 더 신경 쓰지 않고 그녀가 원하는 대로 진행했다.

    “2년 만기이고 기한은 추가로 더 늘릴 수 있습니다.”

    “어.”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고, 나는 그녀의 계좌를 연결한 적금 하나를 만들었다.

    ‘뭐야, 생각보다 코인이 적잖아.’

    그러는 중에 그녀의 계좌에 들어 있는 코인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잔액:45,214,458]

    사천 오백만 코인.

    마냥 많다고 할 수도 적다고도 할 수 없는 금액이었다.

    그녀가 미스릴 등급이라는 걸 떠올리면 적다고 봐야겠지.

    미스릴은 계좌로 보호받을 수 있는 금액이 최대 100억이다.

    그걸 떠올리면 간에 기별도 가지 않는 금액이었다.

    ‘부자라고 전부 은행에 돈을 집어넣지는 않으니까.’

    분할로 돈을 넣는 부자가 있는 한 편, 해외 계좌를 이용하는 부자도 있다.

    아무리 시스템에 은행이 나 하나뿐이라지만, 나를 온전히 믿고 맡길 수는 없는 거겠지.

    그게 아니라면··· 뭐, 뭐가 됐든 내가 관심을 가질 일은 아니었다.

    은행에 피해를 입히는 일이 아니라면 고객에게 많은 신경을 쓸 필요는 없다.

    내가 적금 계좌를 만들기 무섭게, 그녀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음··· 바로 빠져나가는구나.”

    그녀가 빠져나간 코인을 확인했는지 작게 침음을 흘렸다.

    그녀는 잠시 허공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네. 말하세요.”

    “여기는 원래 찾아오는 게 지랄 맞나?”

    “네?”

    뜬금없는 그녀의 말에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건 또 무슨 소리인지.

    “아니, 그렇잖아. 이곳에 오기 위해서는 시스템의 포탈을 이용해야 한다고. 그런데 그 위치도 위치지만, 금액이 너무 커. 내가 이곳을 들낙거리는 것으로 벌써 수천만 코인이 깨졌어.”

    그녀의 불평에 나는 시계를 만졌다.

    그녀의 불만이 뭔지 알았다.

    다른 차원에 있는 거주민들이 차원 은행에 오기 위해서는 포탈을 이용해야 했다.

    그런데 그 비용이 만만치 않은 것 같다.

    “그래, 차원을 이동하는 거니 코인이 소모되는 건 이해할 수 있어. 하지만 이곳에 올 때마다 심사를 하는 건 너무하잖아. 계좌를 갖고 있는 것만으로도 부족하다니. 그것 때문에 내가 시간을 얼마나 잡아먹었는지 알아?”

    듣고 있자니 상당히 어이없었다.

    그들이 포탈을 이용하는 건 결코 내 잘못이 아니었다.

    나는 다른 차원에서 고객이 찾아올 거란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어떻게 찾아오는 건지도 최근에야 알았다.

    내가 포탈의 비용을 정하는 것도 아니고, 그걸 내게 따진다고 해서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건 관리자와 얘기를 해봐야겠네. 안 그래도 다시 방문할려고 했는데.’

    내가 입을 꾹 다물고 있으니 그녀가 쉬지 않고 불평을 토해냈다.

    묵묵하던 첫인상과는 다르게 수다스러운 그녀의 모습에 눈살이 찌푸려진다.

    “아, 예. 그렇군요. 많이 불편하셨겠군요.”

    “네가 생각해도 그렇지? 내가···.”

    “네. 그래서 더 용건이 있으십니까?”

    “···음?”

    그녀가 말을 멈추고 나를 바라본다.

    나는 여전히 사무적인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를 빤히 바라보던 그녀가 고개를 쭉 내밀어 나를 살피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건··· 완전 닮았는데. 중간에 말 끊는 것까지, 재수 없는 미소하고.”

    “볼일이 없으시다면 그만 돌아가시겠습니까?”

    더 이상 그녀의 말을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코인과 관련된 내용이라면 모를까, 순전히 자기 말만 하는 건 별로 듣고 싶지 않았다.

    “으음··· 알았어. 볼일은 끝났으니까.”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더 할 말이 없다는 듯 바로 문을 향해 걸어갔다.

    문을 열고 나가던 그녀가 돌연 내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아무리 봐도 그 녀석이랑 닮았단 말이지···.”

    그 말을 끝으로 그녀가 자리를 떠났다.

    나는 그녀가 차원 상점 출입구를 통해 사라지는 것을 확인했다.

    “하아···.”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내셨다.

    고객 하나를 상대했을 뿐인데 머리가 지끈거렸다.

    내가 요즘 해이해진 모양이다.

    전에는 이런 진상들은 아무렇지 않게 상대했었는데.

    “도대체 그 녀석이 누구길래, 자꾸 나와 연관시키는 거야.”

    그녀는 나와 같은 인간이었다.

    하지만 다른 차원에 사는 인간이었다.

    ‘하긴 그렇게 많은 차원이 있는데 나와 닮은 사람이 없는 게 더 이상한 건가.’

    모르겠다.

    굳이 신경 쓸 일도 아니고. 고개를 흔들어 상념을 털어낼 때였다.

    똑똑똑.

    녹스가 문을 두드렸다.

    그의 뒤로 익숙한 얼굴의 여자가 보였다.

    “들여보내세요.”

    문이 열리고 녹스를 지나쳐 그녀가 들어온다.

    그녀는 안으로 들어오면서 은행장실을 스윽, 둘러봤다.

    신기해하는 눈초리였다. 마치, 이곳이 이렇게 빨리 발전될 줄은 몰랐다는 얼굴.

    눈을 반짝이며 그녀가 내가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다가와 내 앞에 앉았다.

    “오랜만이야.”

    “네. 오랜만이군요.”

    차원 은행이 만들어지고 처음 방문했던 성좌.

    카셀린이 다시 찾아왔다.

    그때 이후로 또 방문이 없어 그녀가 있었다는 걸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런데 그 잠깐 사이에 많이 바뀌었네. 이건 뭐··· 고블린이 오크가 된 격인데.”

    칭찬인가? 칭찬이겠지.

    나는 그녀의 말을 최대한 좋게 해석해서 들었다.

    “이 정도면 규모면 내가 어느 정도 편하게 있어도···.”

    파지지직-

    뭔가를 하려 했는지 그녀의 몸에 스파크가 강렬하게 튀기기 시작했다.

    그에 그녀가 똥을 씹은 듯한 표정이 되었다.

    “뭐야. 하나도 바뀐 게 없잖아. 전이랑 똑같아.”

    그녀가 이상하다는 듯이 나를 살펴본다.

    그리고 은행장실을 돌아본다.

    “느껴지는 건 하급 성좌급인데, 정작 그 당사자는 한낱 미물 수준이라···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데.”

    이런 일이 가능하냐며 그녀가 내 얼굴을 샅샅이 살핀다.

    뜬금없는 그녀의 말에 나는 가만히 있었다.

    이미 한 차례 그녀의 성격을 경험했기에, 그녀를 건드리는 건 별로 좋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니지. 이제는 다르잖아. 내 옆에는 마신이 있는데.’

    이래서 트라우마가 문제다. 한번 뇌리에 각인이 되면 이렇게 별일이 없어도 걱정을 하게 된다.

    나는 부담스러운 그녀의 시선을 피해 발포스를 돌아봤다.

    “오, 오오···!”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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