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2화
세상이 이렇게 되고 사람들은 두 부류로 나뉘었다.
무리를 지어 행동하는 이들과 어딘가에 속하지 않고 혼자 움직이는 이들.
남자들은 전자에 속했다.
세상이 멸망하기 무섭게 뭉치긴 시작한 이들.
‘거의 기생충 같은 놈들이네.’
할 줄 아는 거라고는 가진 덩치를 앞세워 남들을 협박하는 게 저분이 쓰레기 같은 놈들.
내 호출에 달려온 녹스의 마법을 통해서 그들이 근 한 달 동안 얼마 쓰레기 같았는지 들었다.
‘직업이 깡패 두 명에 사기꾼 하나. 진짜 끼리끼리 모였군.’
이런 조합도 만나기 쉽지 않은 조합이었다.
하긴 이런 놈들이니 더 끼리끼리 모이는 건가.
“이놈들은 이제 어떻게 할까요?”
넋을 잃은 채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 남자를 가리키며 발포스가 어서 명령을 해달라는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죽이는 건 안 됩니다.”
“음···.”
단호한 내 말에 실망했는지 그가 시무룩한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그렇게 불쌍한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고 해서 결정을 번복할 생각은 없었다.
그들을 죽이기에는 시기도 좋지 못했고 장소도 좋지 못했다.
차원 은행내에서라면 모를까, 이렇게 모두가 보는 길거리에서 그들을 죽일 수는 없었다.
솔직하게 지금도 시선을 너무 끌기는 했다.
오죽했으면 관리자들 몇이 찾아와 우리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겠는가.
우리가 무슨 실수라도 하길 바라는 눈으로 우리를 노려봤다.
“일단 데리고 들어가죠.”
그렇다고 이놈들을 곱게 보내줄 생각도 없었다.
그들을 데리고 가면 어디라도 쓸 데가 있겠지.
하다못해 노예로라도 쓰면 된다.
예전 그 나이트 일행에게 하지 못했던 노예 시스템을.
노예를 만드는 조건은 상대가 의욕을 잃고 굴복하는 것.
그들은 이미 반쯤 이성이 나간 상태이기에 그들을 굴복시키는 건 어렵지 않았다.
“데리고 오세요. 이제 돌아갑시다.”
관리자들은 지켜만 볼뿐 내가 남자들을 데리고 가는 걸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관리자가 말리지 않은 이상 걸리는 건 없었기에 마음 놓고 그들을 데리고 갔다.
아니, 데리고 가려고 했다.
“거기, 동작 그만!”
앞을 가로막는 다수의 사람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남자들을 끌고 가려는 우리 앞을 가로막은 사람들 가운데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물이 많이 빠진 금발을 한 남자였다.
비열하고 여유로운 미소를 지은 채 그가 나를 바라봤다.
“지금 이게 무슨 짓이지?”
다짜고짜 반말을 해오는 그의 모습에 발포스의 눈썹이 꿈틀거리는 게 보였다.
백예린과 녹스가 그들을 노려봤다.
최동수는 자신이 안전하면 상관없다는 듯이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발포스와 녹스의 힘을 믿고 있기 때문에 보일 수 있는 모습이기도 했다.
“저것들은 뭡니까?”
“이 세계의 원주민들로 보이는군요.”
“원주민이라··· 그런데 제가 지금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지금 은행장 일행에게 시비를 거는 게 맞습니까?”
“네. 맞는 것 같습니다.”
뒤에서 관리자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직도 돌아가지 않은 거였나.
그들은 내 앞을 가로막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안타깝다는 듯이 혀를 찼다.
“보는 눈이 없는 놈들이군요.”
“다 제 팔자죠. 그렇다고 우리가 나설 이유도 없고.”
“우리도 슬슬 돌아가죠. 보니까, 오늘은 조용히 돌아갈 생각인 것 같은데.”
그들이 우리를 감시하기 위해 찾아온 이유는 발포스 때문이다.
그가 또 격을 드러내 만남의 광장에 피해를 입히지 않을까 하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그것 외에 그들이 우리를 감시할 이유는 없었다.
그런데 저놈들은 뭘까.
“아는 분입니까?”
최동수와 백예린을 돌아보며 물었다.
나는 저들을 본 기억이 없었고, 녹스와 발포스는 지구 소속이 아니다.
그러니 저들이 우리를 찾아온 건 백예린이나 최동수 때문이리라.
“아니요.”
“처음 보는 사람들입니다.”
백예린과 최동수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 나와 아는 사람인 건가.
은행원으로서 일할 때 내가 상대를 했던 고객들 중 하나였나?
아니, 그럴 리가 없다.
내 고객이었다면 저렇게 살기를 보일 리가 없다.
그렇다면 다른 이유라는 건데.
‘아, 이놈들 동료인가?’
발포스의 손에 붙잡혀 있는 남자들에게 시선이 닿았다.
그들은 제 동료들의 등장에도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못했다는 게 더 정확했다.
그들의 정신은 아직도 녹스에게 붙잡혀 있는 상태였으니까.
“저희에게 무슨 볼일이 있으십니까?”
나는 사무적인 미소를 지으며 옅은 금발의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그건 내가 할 말인데.”
금발의 남자가 고개짓으로 발포스가 붙잡고 있는 남자들을 가리켰다.
“우리 식구에게 무슨 볼일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 손을 놓아주는 게 서로에게 좋을 것 같은데.”
금발의 남자 말에 나는 팔짱을 꼈다.
그리고 발포스에게 남자들을 놓아주라고 말했다.
발포스는 순순히 남자들을 놓아주고 내 뒤에서 금발의 남자와 그 일행들을 주시했다.
“자, 놓아주었습니다.”
“생각보다 눈치가 빠른 놈이라 좋네. 눈치가 없었으면 괜히 힘을 뺐을 테니까.”
눈치··· 눈치라.
그 말을 내게 쓰는 건 맞지 않다.
오히려 나보다는 그의 눈치를 더 길러야 한다.
관리자들의 눈초리에도, 사람들의 수근거림에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그의 모습은 정말 눈치 없는 사람의 본이나 다름 없었다.
얼마나 눈치가 없으면 자신들이 위험한 상황이란 걸 모를까.
‘우리가 이 남자를 제압했음에도 다친 사람이 없다는 것만 봐도 이상하다는 걸 느낄 텐데.’
그런 쪽으로는 생각도 못한 얼굴이다.
아니면 그쪽을 아예 배제하고 있거나.
‘쪽수를 믿고 있는 것일 수도 있겠네.’
자신들의 수가 우리보다 배는 많다는 이유로, 혹은 우리들에게 제압당한 남자들이 그들 사이에서 그리 강한 사람이 아닐 수도 있었다.
전자건 후자던 뭐가 됐든 그의 행동이 멍청하다는 건 변하지 않았다.
“저놈들 데리고 와. 멍청한 놈들. 돌아가면 제대로 굴려야겠어.”
내가 가만히 그들을 지켜보고 있으니, 금발의 남자가 뒤에 있는 사람 몇 명에게 명령했다.
“네···!”
그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우리를 향해 달려온다.
그리고 남자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발포스.”
내가 이름을 부르기 무섭게 등 뒤에서 뜨거운 열기가 쏟아졌다.
화르르륵.
유황 냄새가 사방에 퍼져나가며, 뜨거운 열기를 뿜어내는 불이 우리와 그들 사이를 갈라놓았다.
나는 슬쩍, 뒤에 있는 관리자들을 살펴봤다.
“···.”
관리자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입을 꽉 다물고 있었다.
그저 묵묵히 입을 다문 채 지켜만 보고 있는 걸 보니, 이 정도 가지고는 나서지 않을 건가 보다.
나서도 상관이 없기는 하다.
코인으로 배상을 하면 되니까.
“지금 이게 뭐하는 짓이지?”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불을 뽑아낸 것에 놀란 것인지, 살짝 얼굴이 창백해진 금발의 남자가 나를 노려봤다.
그래도 놀라 도망치지 않는 걸 보면 이 정도에는 어느 정도 익숙해진 듯 했다.
하긴, 한 달이란 시간이 길지는 않아도 몬스터를 상대하면서 자신들의 능력을 파악하기에는 적당한 시간이니.
그들 중에도 불을 뿜어내는 것과 비슷한 부류의 능력을 가진 이들도 있을 거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이언트 스파이더 같은 몬스터들을 피해 여기까지 올 수 있을 리는 없으니까.
“그건 제가 하고 싶은 말이군요. 지금 뭘 하려고 하신 거죠?”
“뭐?”
금발의 남자가 미간을 찌푸린다.
“그건 내가 할 말인데. 지금 이게 뭐하는 거지?”
그렇게 말하면서 금발의 남자가 뒤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손짓했다.
로브를 뒤집어쓴 인물들이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와 그의 양 옆으로 섰다.
“눈치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보니 눈치가 전혀 없군. 나는 이딴 사소한 일에 힘을 빼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지금 저 미친놈이 뭐라고 지껄이고 있는 걸까.
저 말 같지도 않은 말을 계속 들어야 하는 걸까.
다짜고짜 나타나서 하는 말이 겨우 저딴 거라니.
하다못해 남자들을 이렇게 만든 이유를 묻거나,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었다면 이렇게 어이없지는 않았을 거다.
저놈은 그딴 거 없이 그저 내가 잘못했다는 듯이 행동하고 있었다.
그게 참, 짜증이 났다.
“발포스. 내가 언제까지 저 개소리를 들어야 하는 거지?”
머리가 짜증으로 가득차서인지 존댓말도 나오지 않았다.
내가 반말을 하고 있는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발포스는 아무렇지 않은 듯이, 아니 오히려 만족스러운 얼굴로 웃고 있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기사가 주군의 명령을 받은 것처럼 발포스가 앞으로 한발자국 걸어나갔다.
그의 몸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실드!”
로브를 뒤집어쓴 이들이 황급히 손을 앞으로 뻗으며 소리쳤다.
그들의 몸 위로 반투명한 푸른색의 막이 생겨났다.
한 겹, 두 겹. 무려 네 겹이나 되는 보호막이 그들을 보호했다.
발포스는 그 보호막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주먹을 휘둘렀다.
콰장창!
단 한 방에 보호막 전체가 부서졌다.
보호막이 부서지는 것도 부족해서 보호막을 만들어냈던 로브의 사람들이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쓰러졌다.
“뭐, 뭐야!”
금발의 남자가 당황하며 황급히 뒤로 물러나려고 한다.
발포스는 그를 놓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발포스의 손이 그의 목을 붙잡았을 때.
퍼어어엉!
돌연 흰색의 연기가 가득 피어오르더니, 발포스가 허공에 대고 헛손질을 했다.
“···.”
발포스가 제자리에 멈춰섰다.
그리고 한 곳을 노려봤다.
-위험합니다.
반지의 그녀가 내게 경고를 해온다.
반지에서 보라색 연기가 피어오르며 내 주위를 감싸듯이 맴돌았다.
나는 그 반지를 힐끔 바라보다가, 발포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는 갑작스레 생겨난 연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날뛸 거라 여겼던 내 생각과는 다르게, 제자리에 멈춰서서 한 곳을 노려보고 있었다.
시야를 가리던 연기가 걷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연기 속에 가라졌던 풍경들이 보였다.
“뭔데···?”
사람들이 쓰러져 있었다.
정확히는 금발의 남자 일행들만 길거리에 쓰러져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쯧, 어째서 저놈이 여기에 나타난 거지?”
관리자 하나가 혀를 차며 급히 움직이는 게 보였다.
그는 길거리에 있던 사람들을 쫓아내고, 나와 금발의 남자 무리를 포함한 일정 반경을 감싸는 초록색의 막을 만들어냈다.
안에서의 일들이 밖으로 새나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시간을 거슬러 돌아온 자입니다. 경계를 풀면 안 됩니다.”
“도대체 저놈이 왜 여기에 있는 거죠? 아니, 애초에 시간을 거스른 이들은 저희의 영역에 들어오지 못하지 않습니까.”
“글쌔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높은 분들과 무슨 일이 있었겠죠. 그게 아니라면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관리자들의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데 그 내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말은 들리는 데 내게는 허용되지 않아 생각하는 걸 금지한 듯한 느낌이었다.
“네놈···.”
발포스가 드물게 경계를 하고 있었다.
유황 냄새가 나는 뜨거운 숨결을 토해내며 앞을 노려봤다.
그의 등이 피부가 갈라지며 불길이 휘감고 있는 박쥐 날개가 튀어나왔다.
“저를 너무 경계하시는 거 아닙니까, 발포스씨?”
연기가 완전히 걷히며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남자는 발포스를 향해 반가운 미소를 띄우더니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가만히 바라보던 나와 눈이 마주쳤다.
처음 보는 남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내 착각이 아니라면 그의 눈에는 그리움의 강점이 담겨 있었다.
그가 입을 열었다.
천천히, 내게 말뜻이 온전히 전해지기를 바라는 것처럼 한 자 한 자 발음했다.
-드디어 찾았다. 개새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