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화
[보유자금:10,000,000,000]
내가 보유한 자금을 보고 있자니 밥을 먹고 있지 않아도 배가 부른 기분이었다.
은행 자금에 비하면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적은 금액이기는 했다.
하지만 이게 내 개인 자금이란 어떠할까.
그렇다면 말이 달라진다.
은행의 돈은 내 멋대로 뽑아 사용할 수가 없다.
공과 사를 구분해야 하는 것처럼, 은행의 돈을 사용할 때도 은행을 위해 사용해야 하지 개인을 위해 사용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내 개인 통장이라면 말이 달라진다.
이 돈은 엄연히 내 개인적인 사비로서 내가 어디에 쓰든 누구도 뭐라하지 못하는 돈이다.
그러니 기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금이야 백억이지 이 백억도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늘어난다.
발포스와 계약했다.
내게 피해를 준 것을 전부 보상하겠다고.
그 결과 발포스는 내게 매일 백억씩, 총 2조를 내게 줘야 했다.
200일 동안 내게 하루도 빠짐없이 줘야 한다.
나로서는 기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기분이 많이 좋아보이십니다?”
“기분이 좋지 않은 게 이상하죠. 코인을 벌었는데.”
“그건··· 맞는 말이네요.”
나와 혈전을 벌였지만 얻을 수 있는 건 없었던 발포스가 지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그 돈으로 뭐하실 겁니까?”
“모을 건데요.”
“네?”
“네.”
“안 쓰고 모은다고요?”
“무슨 문제 있습니까?”
“아니, 그건 아닌데··· 하지만 기껏 벌어서 안 쓰면 좀 그렇지 않나요?”
“네. 안 그렇습니다.”
어깨를 으쓱이며 한 내 말에 그가 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이 돈을 많이 벌었다고 그 당일에 막 쓴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큰 오산이었다.
오히려 돈을 벌었기에 그걸 어떻게 쓸지 모르고 모은다.
코인을 사용하는데 기간 제한이 있는 것도 아니고, 뭐하러 쓰잘데기 없는 곳에 자신의 소중한 돈을 쓰겠는가.
미래를 위해서라도 모으는 게 낫지.
내가 지금 당장 필요한 게 있는 것도 아니고 급하게 코인을 사용할 이유는 없었다.
굳이 내 코인을 쓰지 않아도 공적인 일이라면 차원 은행의 코인을 사용하면 된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소리를 줄이지 않은 유리벽을 통해 바깥의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인 건지 정확히 모르겠는데, 어렴풋이 들리는 바로는 마치 싸우는 것처럼 고성이 오갔다.
“그런데 저긴 왜 이렇게 시끄러운 거죠?”
“음··· 글쌔요.”
내 물음에 발포스가 자신도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 모습에 한숨이 나왔다.
그에게 가르쳐야 할 게 산더미라는 걸 다시한 번 체감했다.
“제가 위험할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아무리 경비원이 있다고 해도, 무슨 상황인지는 알아보고 와야 맞지 않겠습니까?”
“아, 네.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그제야 발포스가 후다닥, 은행장실을 나간다.
그에게 어느 정도 설명을 해주기는 했는데, 이상하게도 불안해져 유리벽의 블라인드를 줄였다.
“거기, 무슨 일이지?”
발포스가 소란이 일어난 곳을 향해 다가가며 인상을 썼다.
-넌 또 뭐···! 헉, 발포스님이 여기에는 왜?
갑작스럽게 끼어든 발포스에 화를 내려던 고객이 그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겁을 먹었다.
성좌들 사이에서 악명이 자자한 건 사실인지 발포스를 알아본 고객들이 뒷걸음질 쳐 뒤로 물러나 사태를 관망했다.
“뭔데 이렇게 시끄러워?”
발포스가 사납게 고객을 노려본다.
그것을 보며 나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리 진상짓을 부린다고 해도 고객이다.
고객에게 인상을 쓰는 건 나로서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내게 직접적으로 피해를 준 것도 아닌 만큼 그의 행동이 과했지만, 나는 나서지 않았다.
일단은 그가 어떻게 대처하는지를 지켜봤다.
그의 문제점을 제대로 확인해야 내가 고쳐도 제대로 고쳐줄 거 아닌가.
“아, 별거 아닙니다.”
최동수가 자리에서 일어나 발포스를 말린다.
그의 얼굴에는 사무적인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미소를 잃지 않는 그 행동은 은행 일을 하면서 필요한 것이었고, 내 맘에 쏙 드는 행동이기도 했다.
“별거 아니라고?”
“네. 그저 작은 충돌이 있었을 뿐입니다.”
“흠···.”
“그리고 문제가 있었다면 저기 녹스님께서 가만히 있을 리가 없죠.”
최동수가 발포스를 진정시킨다. 그가 가리킨 방향을 바라본 발포스가 녹스와 눈이 마주치더니 틀린 말은 아니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확실하게 말해라.”
“정말 별거 아닌데, 그저 코인을 빌려달라고 하시길래 안 된다고 그 얘기를 했을 뿐입니다.”
최동수가 자신이 해결할 수 있다며 발포스를 말린다.
발포스는 그 말에 방금 전까지 최동수와 말싸움을 버리던 고객을 노려봤다.
두꺼비의 얼굴을 한 수인.
두꺼비 고객은 발포스의 눈빛에 정전기라도 일어난 듯 몸을 파르르, 떨었다.
“네놈 ###종족이군.”
-네, 넷! 그렇습니다!
두꺼비 수인이 기합이 바짝 들어가 소리쳤다.
‘무슨 종족? 뭐 이렇게 잘 들리지가 않아?’
소리 차단을 풀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정 부분의 내용들이 들리지 않았다.
내게는 허락되지 않은 단어라도 되는 것처럼.
그게 좀 이상하긴 했다.
의사소통이라는 특성이 있는 내게 들을 수 없는 말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저승에서도 그랬지.’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이 많았다.
노이즈라도 낀 것처럼 그 부분만 막혀 있었다.
절대 내가 들으면 안 되는 것 같았기에 의아하기는 했다.
하지만 내가 묻는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도 아니기에 넘어갔었는데.
이건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욕심이 많은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군.”
-그, 그게···.
“욕심이 과하면 화를 불러일으키는 법. 네놈으로 인해 내 고용주께서 기분이 나빠지셨다.”
음, 나? 아닌데. 전혀 아닌데.
기분이 나쁘기는커녕, 돈을 빌린다는 그를 어떻게 할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음···.
두꺼비 고객이 눈을 데구르르 굴린다.
그의 눈동자가 내가 있는 은행장실로 향했다.
안에서는 밖이 보이지만, 밖에서는 안이 보이지 않는 구조여서 그런지 두꺼비 고객은 내가 있는 곳을 잡아내지 못했다.
“네 잘못은 죽음으로 갚아라.”
-히익!
이 미친놈이 또 지랄이야!
“돌겠네, 진짜.”
더 지켜볼 수가 없었다.
저대로 뒀다가는 그대로 고객을 잃을 게 뻔히 보였다.
“입을 다물어.”
시계를 만지며 명령했다.
“읍, 읍!”
입이 딱 달라붙은 그가 당혹스러운 얼굴로 나를 돌아봤다.
나는 그를 무시한 채 시스템을 띄었다.
[‘대출’의 대한 지식을 ‘최동수’에게 전수하셨습니다.]
그 메시지가 떠오르기 무섭게 최동수가 발작을 일으켰다.
“끄아아으으윽!”
그래도 한 번 경험해본 고통이라고 비명을 지르다 입술을 꽉 깨문채 소리를 지르려는 걸 참아냈다.
그러면서 내가 있는 곳을 원망이 가득 담긴 눈으로 노려봤다.
“후욱, 후욱···!”
그가 거칠 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두 손으로 얼굴을 두 차례 쓸어내리더니,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고객님.”
-예, 예!
그의 부름에 두꺼비 고객이 경기를 일으키며 돌아본다.
-죄송합니다! 죽을 죄를 지었···!
“빌려드리겠습니다.”
머리를 땅에 박을 것처럼 숙이는 그에게 최동수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말에 두꺼비 고객이 허리를 숙인 자세 그대로 굳어졌다.
그것도 잠시 아주 느릿하게 고개를 든 두꺼비 고객이 멍하니 최동수를 바라봤다.
-지금 뭐라고···?
“이런 우연이 있다는 게 황당하기는 하지만, 이번에 신상 상품이 나왔습니다.”
최동수가 본격적으로 영업을 시작하려 했다.
“그런데 발포스님께서는 언제까지 그곳에 있을 겁니까?”
그가 말을 하다 말고 발포스를 돌아봤다.
성좌를 수도 없이 만나서 그런지, 발포스가 죽인다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대수롭지 않게 말을 걸었다.
“돌아와.”
발포스가 무어란 반응하기도 전에 내가 그에게 명령했다.
두꺼비 고객을 노려보며 분이 풀리지 않는 얼굴을 한 그가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뻣뻣한 움직임으로 은행장실로 돌아왔다.
그가 돌아오기 무섭게 내게 따지려고 했다.
“거기 가만히 앉아있으세요.”
나는 그에게 말을 꺼낼 기회도 주지 않았다.
바로 구석에 쭈그려 앉게 한 채 밖을 내다봤다.
오랜만에 최동수가 영업을 하는 것을 본다.
그는 대출을 어떻게 소개할까.
적금때처럼 기지를 발휘할지, 아니면 그저 그럴지 궁금했다.
“코인이 필요하다고 하셨죠?”
-그, 그렇다.
“고객님께서는 참 운이 좋으시네요. 뒤에 있는 분들도요. 타이밍 좋게 이번에 ‘대출’이라는 상품이 나왔거든요.”
-대출? 그게 뭐지?
“간단하게 말해서 은행에서 코인을 빌려주는 겁니다.”
-그게 진짠가!
“네. 진짜입니다. 아, 그렇지. 다이아 이상의 고객분들께서는 저기 은행장실로 가시면 됩니다. 전이야 은행장님이 외근을 가셔서 제가 상담해드렸지만, 지금은 은행장님이 돌아오셨으니 그럴 이유가 없죠.”
-아, 그렇지. 내가 다이아라는 걸 까먹고 있었군.
-아주, 센스가 좋아. 그럼 나는 은행장실로 가지.
어, 이게 아닌데.
나는 최동수가 일을 하려는 걸 보려고 했지, 이렇게 갑자기 일복이 터지는 걸 원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고객을 받지 않을수도 없는 노릇.
일이 없는 것보다는 일이 많은 게 나았기에, 나는 쉰다는 개념을 머릿속에서 지운 채 발포스에게 말했다.
“지금부터 고객이 안으로 들어올 겁니다. 발포스님께서는 적당히 잘 안내해주시면 됩니다. 가장 중요한 건 제가 고객을 상대하고 있을 때 옆에 서서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는 겁니다. 마네킹처럼··· 마네킹을 모르려나. 그러면 나무처럼 가만히 서 있으시면 됩니다.”
“답답할 것 같습니다만···.”
“그게 경호원의 본분입니다.”
“그리고 정말 위급할 때가 아니라면 먼저 나서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만약 이번에도 먼저 나서면 그때는 바로 시스템에 넘겨버릴 겁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시스템의 밑에 들어가는 건 죽는 것보다 싫었는지 그가 질색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똑똑똑.
내가 몇 번이고 그에게 당부를 할 때 백예린이 문을 두드렸다.
“들여보내세요.”
백예린이 문을 열어 고객을 하나 안으로 들여보냈다.
점액질투성이인 그 고객은 꿈틀거리며 다가와 내 앞에 쭈그려 앉았다.
“어떤 걸 도와드릴까요.”
-대출을 할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점액질 고객이 꾸르륵거리며 말을 했다.
“아, 코인이 필요하신가 보군요. 그렇다면 아주 잘 찾아오셨습니다. 때마침 오늘 대출을 시작해서 작은 이벤트를 열고 있었거든요.”
-이벤트 말입니까?
“네. 이벤트요. 단, 모두가 아닌 다이아 이상의 고객 100분에게만 드리는 이벤트죠.”
내가 미소를 지으니, 점액질 고객의 몸에서 촉수가 생겨났다.
그 촉수가 얼굴로 추정되는 곳으로 향하더니 턱을 쓰다듬는 것처럼 문댔다.
“정말 타이밍이 좋으셨습니다. 저희는 코인을 빌려주는 대신 아주 소소한 대가를 받습니다. 하루에 1%의 이자를 받는 거죠.”
-1%? 하루에 1%라··· 많다고도 할 수 없지만, 적다고도 할 수 없는 양이군요.
“네. 그렇죠. 적은 양의 코인을 빌린다면 크게 상관없지만, 고객님처럼 대량의 코인을 빌리시게 될 거라면 하루 1%가 부담이 되실 수도 있습니다.”
-음···.
“하지만 저희도 먹고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다. 아무런 대가 없이 코인을 빌려주면 그 누가 코인을 갚으려 하겠습니까.”
-그건 그렇군요···.
“그맇고 제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이벤트가 있다고요. 제가 큰 손해를 감수해야 할 정도로 파격적인 이벤트죠.”
-도대체 그 이벤트가 뭐길래···?
“무려 이자를 0.5%까지 줄여드리는 겁니다.”
-···?
의문에 찬 점액질 고객을 바라보며 나는 두 손을 앞으로 내밀며 깍지를 꼈다.
내 영업은 이제부터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