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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원 은행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55화 (55/113)
  • 제55화

    No. 72는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발포스를 떨어뜨려 준다고 하지를 않나, 이제는 팔찌까지 채우는 그의 행동에 당황스러워졌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그리고 이 팔찌는 뭐란 말인가.

    “음. 잘 어울리는군요.”

    혼란스러움에 빠져 있을 때, 그는 그런 내 심정을 알지 못한 채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게 뭡니까?”

    내 물음에 그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대답 대신 발포스를 가리켰다.

    “끄으윽. 젠자앙!”

    그 자리에 산양의 뿔을 단 거구의 남자가 있었다.

    그리고 그 남자의 목에는 내가 차고 있는 팔찌를 닮은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은행장님께서는 발포스님을 계속 데리고 있으시겠다고 하셨죠.”

    내가 멍하니 발포스를 바라보고 있을 때 No. 72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발포스님은 적이 많습니다. 그 적중에는 저승대왕 헬라께서도 포함되어 있으시죠.”

    저승대왕이라면, 그 시스템에 빚진 저승왕을 말하는 건가.

    그녀의 이름을 이렇게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아니 그건 그렇고 설마 그녀까지 발포스를 적대할 줄이야.

    ‘그래서 나한테 지켜달라고 했던 건가?’

    저승에 간다는 소리에 발포스가 자신을 지켜달라고 말했었다.

    그 강한 힘을 가졌던 발포스가.

    그 말은 저승왕이 발포스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고, 그러한 강자를 적으로 돌리고 있었다면 그가 지켜달라는 요구를 한 것도 이해되었다.

    ‘그런데 강한 거 맞아? 명색이 마신인데, 너무 이리저리 까이잖아.’

    저승대왕이야 저승을 관장하는 존재니 그렇다쳐도, 10번대의 관리자도 아니고 72번대의 관리자에게 당하는 건 의아했다.

    관리자가 강한 건지 그가 약한 건지.

    나는 되도록 전자였으면 한다.

    마신이 약하다는 건 상상이 잘 되지 않을뿐더러, 그가 보였던 위엄 넘치던 모습은 그가 약하다는 게 상상이 되지 않았다.

    “솔직하게 말해서 저는 은행장님께서 발포스님을 데리고 있는 건 반대지만···.”

    발포스를 흘깃 바라본 그가 가볍게 혀를 찼다.

    “은행장님에게 강요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죠. 저는 은행장님이 죽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그게 앞으로 은행장님을 위험해서 구해드릴 겁니다.”

    “이게 말입니까?”

    “네.”

    No. 72가 방긋 미소를 짓는다.

    이게 뭐길래 나를 지켜줄 수 있다는 걸까.

    “마신 발포스님께서 그토록 많은 적을 두셨음에도 아직까지 무사한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아니요.”

    판타지와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한 내가 그걸 어떻게 알겠는가.

    그는 간단하다며 자신의 심장이 있는 부근을 가리켰다.

    “마신 발포스님은 죽지 않습니다. 정확히는 죽을 수 없다는 게 맞죠. 약점이 없으니까요.”

    신이니까 죽지 않는 게 당연한 거 아니냐고 물으려 할 때 그가 말을 이었다.

    “신이라고 해서 죽지 않는 건 아닙니다. 신도 죽습니다. 비록 그게 무척이나 힘들긴 하지만, 신이라고 해서 불멸의 존재가 아닙니다. 아니, 차원 어디에도 불멸의 존재는 없습니다. 그저 죽일 수 있는 방법이 희박하고, 강력한 권능을 가지고 있어 죽지 않을 수 있는 거죠.”

    아, 그렇구나. 그런데 그게 발포스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신도 죽는다는데, 어째서 발포스는 죽지 않는다는 걸까.

    “발포스님은 그들과는 조금 다른데··· 이건 나중에 천천히 알아보시길 바랍니다. 제가 거기까지 말해드릴 수가 없어서요.”

    아니 이렇게 끊는다고?

    그럴 거면 아예 말을 하지를 말던가.

    “하여튼 마신 발포스님은 죽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지간한 신과는 급을 달리하는 힘도 가지고 있죠.”

    “아, 네.”

    “아,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습니다. 그런 존재가 왜 이리 허무하게 당하냐는 듯한 표정이네요.”

    “···.”

    “그것에 대한 대답은 이미 은행장님께서 알고 계십니다.”

    내가 뭘 알고 있다고?

    알기는 무슨, 지금도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데.

    “은행장님도 한번 경험해 보시지 않았습니까. 강력한 성좌가 자신의 격을 드러낼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음···.”

    그거라면··· 확실히 있다.

    카셀린이 자신의 격을 드러냈다가 시스템의 제지를 받는 것을.

    그리고 발포스도 자신을 드러냈다가 시스템의 경고를 받았다.

    “신은 강합니다. 어떤 신은 충분히 하나의 차원을 붕괴할 정도로 강하기도 하죠. 그렇다면 그런 강력한 힘을 가진 신들이 아무런 제약 없이 돌아다닐 수 있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오래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미 답은 정해져 있었다. 세상에 혼란이 찾아온다.

    “모든 신이 악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악신이 없는 것도 아니죠.차원을 붕괴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신에게 제약이 없으면 세상은 혼란에 빠질 겁니다.”

    “네. 그럴 것 같네요.”

    “시스템은 세상의 이치이자 질서이며 중재자이기도 합니다. 최초의 신들과 시스템은 서약··· 아, 말이 길어지는군요. 요약하자면 신들은 자신의 영역을 나오게 되면 본래 지니고 있던 힘이 대부분 제한됩니다. 아무리 강한 신이라 하더라도 제약에서 벗어날 수 없죠. 그리고 시스템의 구역에 들어오면 더욱 제한되어, 본래 힘을 거의 사용할 수 없게 되죠.”

    “그 말은 곧 지금 발포스의 상태가 엄청나게 약회되어 있다··· 그렇게 들으면 되는 겁니까?”

    “정확합니다. 지금 발포스님은 본인의 영역에 있을 때와 비교한다면 성인과 갓난아기의 차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반대로 저희는 시스템 구역 내에서라면 힘이 몇 배나 증폭됩니다. 특히 이곳은 제 영역. 이곳에서는 마신 발포스님께서 힘의 10분의 1을 되찾지 않은 이상 저를 이기시긴 힘듭니다. 저는 넘버 100안에 드는 존재니까요.”

    미친.

    그 말에 나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No. 72의 뒷말은 들리지 않았다. 그저 발포스가 엄청난 제약을 받고 있다는 말만 들렸다.

    내가 만남의 광장에서 봤던 모습이 그가 가진 모든 힘을 드러낸 게 아니라는 거잖아.

    그럼 도대체 본 힘은 얼마나 강한 걸까.

    “그래도 가끔 가진 힘이 워낙 강해 시스템의 제약을 풀어버리는 경우도 있긴 한데··· 그것에 대한 부작용이 심해 대부분 신들은 그런 무모한 짓을 하지 않죠.”

    “부작용이라 하면···?”

    “간단합니다. 가뜩이나 줄어든 힘에서 절반 가까이를 또 잃게 됩니다. 비록 영구적인 게 아니라 금방 힘이 돌아오기는 하지만요. 그리고 가지고 있는 격, 그러니까 코인을 일부 손실하기도 합니다. 그 코인은 저희 시스템에게 오는 게 아니라 아예 소멸해버리죠. 발포스 님 같은 경우에는 음··· 대략 2조 정도를 잃으셨겠네요.”

    “···!”

    계속 이어지는 No. 72의 말에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2조라니. 겨우 몇초 격을 드러낸 것뿐인데 2조를 잃는다니.

    내 전재산을 다 털어도 채울 수 없는 막대한 금액에 잠시 사고가 정지했다.

    도대체 얼마나 무모하고 멍청한 존재이길래 그런 손해적인 행동을 한단 말인가.

    “이야기가 산으로 갔네요. 하여튼 그만큼 발포스님은 강합니다.”

    “···그런데 그것과 이 팔찌가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겁니까?”

    그가 바로 설명을 해주겠다며 발포스를 향해 손짓했다.

    거구의 발포스가 허공에 붕 떠오르더니 내 앞에 쿵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이 빌어먹을 자식! 내게 뭘 채운 거냐!”

    발포스가 No. 72를 향해 위협적으로 주먹을 휘둘렀다.

    그 손에 용암과 비슷한 온도의 불이 서려있었다.

    No. 72는 그 위협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내며 내게 말했다.

    “팔찌를 만지면서 무릎을 꿇으라고 말해보시겠습니까?”

    “어··· 무릎을 꿇어.”

    No. 72의 말을 따라하기 무섭게 주먹을 마구 휘두르던 발포스가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요란하게 무릎을 꿇었다.

    “뭐, 뭐야!”

    발포스가 당황하며 몸부림쳤지만, 어찌된 일이지 그의 두 무릎은 꼼짝을 하지 않았다.

    No. 72는 그것을 보며 잘 작동이 된다고 중얼거리더니 내게 몇 가지 행동을 더 시켜보라고 했다.

    황당함 속에서 그가 시키는 대로 하니, 발포스가 내 명령대로 움직이는 걸 볼 수 있었다.

    “보시는 대로 그 팔찌는 발포스님께 명령을 내릴 수 있게 해주는 구속구입니다. 쉽게 말하면 발포스님께서는 지금 노예 인장이 찍힌 목줄을 차고 있는 겁니다.”

    진짜, 오늘은 여러 의미로 크게 놀란다.

    검둥이가 마신이란 것을 알게 되고, No. 72가 엄청난 힘을 갖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고.

    이제는 마신을 노예로 부리는 목줄까지 가지고 있으니 이걸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

    “원래였다면 발포스님께 이걸 채우는 건 불가능했겠지만, 힘을 대부분 잃은 지금이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그리고 보통 구속구도 아니고 천신의 깃털과 글레이프니르의 일부를 섞어 만든 구속구인데, 힘을 제약한 마신을 구속하는 정도는 해야죠. 만약 불가능했다면 이걸 만든 대장장이 신과 요정들에게 찾아가 변상을 하라고 할 생각이었습니다만··· 그럴 필요가 없어졌네요. 제대로 작동을 하니.”

    이 목줄을 만든 재료조차 평범하지 않았다.

    천신의 깃털도 깃털이지만 글레이프니르라면 나도 조금은 알았다.

    북유럽 신화에서 신들조차 두려워하던 펜리르를 구속했다는 전설의 밧줄이었으니까.

    ‘그런데 이걸 왜 내게 준 거지?’

    재료에 대해서 듣고 나니 더욱 의심스러워졌다.

    도대체 내게 뭘 원하길래 이런 걸 준단 말인가.

    설마 이걸 준 대가로 은행 자체를 달라는 건 아니겠지.

    만약 그렇다면 강제로 준 게 아니냐며 따질 생각이다.

    “그 구속구에는 여러 기능들이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명령을 하는 것부터 멀리 있는 마신을 불러 오거나, 사용자 대신 공격을 받게 하는 것까지. 어지간한 방패보다 성능이 좋은 방어구죠.”

    환하게 웃는 그를 마냥 좋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무슨 의도로 이러는지 알 수 없을뿐더러 시스템은 이익에 움직이는 존재라 더욱 조심스러워졌다.

    “이걸 제게 준 이유가 뭡니까?”

    “보상입니다.”

    “네?”

    “시스템이 은행장님께 드리는 보상입니다.”

    “보상··· 말입니까? 어째서죠? 저는 보상을 받을 만한 걸 하지 않았는데.”

    내가 그들에게 무언가를 준 게 있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받기만 했는데 왠 보상이란 말인가.

    내가 눈살을 찌푸리니, 그가 오해하지 말라며 설명해 줬다.

    “본래 상점 주인들은 개업하고 반년 동안은 저희 시스템의 보호를 받습니다. 평범한 상점의 주인조차 무료로 보호를 받는데, 저희와 사업 동업자이신 은행장님이시라면 그보다 더하면 더해지 덜할 수는 없죠.”

    “그게 왜···?”

    “저희 시스템과 계약을 치르신 다음 날 생명의 위협을 받으셨다고 보고를 받았습니다. 그것 말고도 여러번 위기가 있었다는 것도. 저희가 진작에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 그러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사죄의 뜻으로 보상을 하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그 보상으로 구속구를 드리게 되었네요.”

    “···.”

    그렇게 말한다면 이해가 되기는 하는데.

    고개를 끄덕이다 문득 든 생각에 그에게 물었다.

    “그럼 이 보상을 받기 전에 무슨 보상을 주려고 한 건지 물어도 됩니까?”

    “아, 간단합니다. 우선 코인 1조와 포탈 10회 무료 이용권, 은행 무료 건설권을 드리려고 했습니다.”

    “···.”

    그 말에 주섬주섬 팔찌를 빼려고 하는 내 귓가에 악마의 속삭임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참고로 그거 한번 착용하면 귀속되는 물건입니다.”

    “그 말은···?”

    “보상은 그걸로 대체되었고 바꿀 수도 없다는 거죠.”

    이성의 끈이 뚝 끓기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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