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4화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할까.
어떻게 말해야 가장 알맞게 말한 걸까.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No. 72는 내가 대답해줄 때까지 얼마든지 기다려줄 것처럼 느긋하게 나를 바라봤다.
오히려 그래서 더 부담스러웠다.
차라리 질책을 하지, 내가 무슨 변명을 하든 전부 들어줄 것처럼 구는 그 모습이 더 마주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그냥 솔직하게 말했다.
내가 저승에서 그에게 했던 말을 빼고, 만남의 광장에 돌아와서 있었던 일들을 말했다.
내 말을 듣던 No. 72가 고개를 돌려 발포스를 바라봤다.
발포스를 바라보는 그의 고운 미간이 옅게 찌푸려졌다.
그것만으로도 발포스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번 일은 은행장님이 실수하셨네요.”
“음···.”
“직원도 잘 골라보고 뽑으셨어야죠. 그래야 이런 일도 안 일어나는데.”
“···?”
나를 질책하는 줄 알았는데, 그 질책의 종류가 조금 달랐다.
나를 탓하는 건 같은데 잘 들어보면 발포스를 돌려 깠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멍청하지 않고서야 그 말뜻을 모르지 않을 터.
아니나 다를까, 그 당사자인 발포스가 책상을 내리치며 화를 냈다.
“지금 나를 무시하는 건가?”
“네.”
“···뭐?”
“발포스님께서는 생각이 없으셔도 너무 없으셨습니다.”
“하, 이게 미쳤나···.”
발포스의 눈에서 불꽃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유황 냄새가 가득해지기 시작하면서 순식간에 주변 온도가 확 올라갔다.
그의 몸에서 불길이 치솟기 시작하고.
촤아악-
하늘에서 냉수가 쏟아졌다.
무려 마신의 불이다. 아무리 많은 양의 물이라고 해도 절대 꺼지지 않아야 정상인데.
“으아아아아아악!”
발포스가 물에 흠뻑 젖어 괴로워했다.
의자에서 넘어지더니 온몸을 박박 긁으며 땅을 뒹굴었다.
No. 72가 그런 그를 방긋 웃으며 바라본다.
“아무리 화가 난다고 해도 여기서 불장난을 하시면 안 됩니다.”
무척이나 상냥한 말투에 날카로움이 숨겨져 있었다.
그의 말에 온몸으로 땅을 뒹굴며 신음을 토해내던 발포스가 벌떡 일어나 No. 72를 손가락질했다.
“이 미친놈이 그렇다고 성수를 뿌려?!”
“좋지 않습니까? 성수는 마음을 안정시키고 몸을 정화해줍니다.”
“마신을 정화시켜서 뭐 어쩌겠다는 거냐!”
“그리고 그거 아주 비싼 겁니다. 무료 천신께서 직접 만드신 것이거든요. 한 방울에 무려 천만 코인이나 하는 겁니다.”
“뭐? 이런 씨앙!”
발포스가 몸에 혐오스러운 벌레라도 달라붙은 얼굴로 몸을 이리저리 털어낸다.
급기야는 황급히 만들어낸 불길로 자신의 몸을 태웠다.
그 모습을 No. 72가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생각했다.
No 72에게는 어지간해서는 개기지 말자고.
그 위압감 넘치던 마신이 제대로 반격도 못하는데, 힘없는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왜 이렇게 땀을 흘리십니까?”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의 말에 나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시스템과 계약을 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때 시스템을 배척했다면 지금쯤···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는다.
“그건 그렇고, 이번에는 조금 위험했습니다. 만약 거기에서 발포스님이 격을 계속 드러내고 있었으면 그때는 제가 이렇게 나설 수가 없게 될 뻔했거든요. 발포스님이 격을 드러낸 게 잘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빠르게 격을 회수해주신 덕분에 제 선에서 마무리를 지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가 나 잘했지?하는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나는 그런 그에게 마냥 잘했다고 할 수가 없었다.
No. 72가 가볍게 말하기는 했지만, 그걸 잘 들어보면 이 일이 겉잡을 수 없이 커질 뻔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리고 No. 72보다 더한 관리자가 나타났거나, 지금처럼 평화로이 해결되지는 않았을 거란 말이기도 했다.
마신 발포스의 철없는 행동으로 인해 내가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는 생각에 화가 나기도 하고, 소름이 돋기도 했다.
발포스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No. 72가 말을 이었다.
“은행장님이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발포스님을 계속 데리고 있으실 겁니까?”
“···?”
그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표정은 그대로였는데, 그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기세가 무거워졌다.
“네놈 지금 무슨 말을···!”
“저는 은행장님과 얘기를 하고 싶어서요.”
화를 내려는 발포스를 향해 No. 72가 손을 내밀었다.
쿠우우웅!
하늘에서 금색 철창이 생겨나더니, 그대로 발포스를 덮쳤다.
내가 보기에도 ‘나 성스러워요’하고 말하는 것 같은 철창이었다.
철창에 갇힌 발포스가 당황하며 철창을 잡았다.
파지지지직!
“끄아아아악!”
금빛 스파크가 튀기며 그가 비명을 지르며 철창에서 떨어졌다.
“아무리 발포스님이라고 해도 그걸 부수기는 힘들 겁니다. 천신님과 대장장이의 신께서 공들여 만든 거거든요. 그거 하나 가격이 차원 하나를 사들일 수 있는 가격과 맞먹습니다. 그러니 거기에 가만히 계세요.”
No. 72의 돌발 행동에 나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소리를 지르는 발포스를 향해 검지를 내밀더니 위로 들었다.
···! ···!
그러자 발포스가 있는 쪽에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마치 그쪽만 강제 음소거가 된 것처럼 조용한 가운데, 열정적으로 움직이며 입을 벙긋거리는 발포스를 보고 나서야 그가 아직도 소리를 지르고 있지만 내게 들리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제야 제대로 된 대화를 할 수 있겠군요.”
그 모든 일을 한순간에 행한 No. 72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내게로 몸을 당기며 말했다.
“자, 이제 편하게 말하셔도 됩니다. 저쪽의 소리가 여기서 들리지 않는 것처럼, 이곳에 소리도 저쪽에 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니 안심하고 하고 싶은 말을 하셔도 됩니다.”
“말하라고 하셔도 뭘 말하는 건지···.”
“저는 은행장님이 자의로 발포스님을 받아들여주셨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받아들여주셨다고 해도 그건 정체를 숨겼던 거겠죠.”
정확하다.
나는 발포스를 힘이 있는 검둥이로 생각했지, 설마 마신일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걸 꿰뚫어 볼 줄이야.
괜히 관리자가 아닌 가 싶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그의 생각이 당연하기도 했다.
그 어떤 정신 나간 놈이, 그것도 신생 기업이 마신을 받아들이는 간 큰 행동을 하겠는가.
마신 자체만 두고도 위험성이 많았다.
어디로 튈지 모르고, 말을 들을지도 의문이었다.
그럼에도 받아들인다면 그건 그의 강한 힘이 그런 것들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은행장님께서 이제 막 탄생하신 거나 다름없으셔서 모르실 수도 있는데, 발포스님은 마신입니다. 그것도 악식들 사이에서도 기피하는 최악의 신입니다.”
“음···.”
“악신은 기본적으로 적이 많습니다. 악행을 행하니 적이 많을 수밖에 없죠. 그중 가장 많은 적을 보유한 악신은 열 개가 넘는 차원을 적으로 두고 있죠.”
“···.”
“그외에도 악신들을 평균적으로 차원 한 개 정도를 적으로 두고 있습니다. 악신이란 게 탄생 조건이 차원 하나를 적으로 돌린 신이기 때문인 것도 있지만, 간단하게 말하면 그 정도로 악신은 평가가 좋지 않습니다.”
그래, 악신이 얼마나 나쁜지 알겠다.
그런데 그게 마신과 무슨 상관이라는 말인가.
마신도 그 정도로 적이 많다라는 걸 말하는 거라면 그건 진작에 예상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마신인데, 그것도 관리자들이 경계하는 마신이 적이 없는 게 더 이상하지.
그런데 이어지는 No. 72의 말은 내 예상을 가볍게 찢었다.
“마신 발포스님은 전 차원에 존재하는 모든 악신을 합쳐도 부족할 정도의 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
순간 생각이 정지했다.
내가 잘못들은 게 아닐까 의심을 하기도 했다.
“악신이 얼마나 있길래···?”
“제가 개인적으로 아는 악신들만 해도 칠백 명? 어쩌면 그보다 더 많을 수도 있겠네요. 시스템에 등록되어 있는 악신들은 음··· 대략 제가 알고 있는 것에 10배 정도? 아니, 그보다 많은가?”
이걸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 걸까.
칠백에 10배라면 칠천이라는 건데, 어쩌면 그보다 더 많을 수도 있다는 건 최소 만 명이라 생각을 해야 겠지.
세상에 그렇게 신이 많은지 의아하기도 했지만, 지구만 해도 수십 명이 넘는 신화들이 있다는 걸 생각하며 그리 이상할 것도 없었다.
시스템에 귀속된 차원들이 한 두 개도 아니고, 억에 가깝다고 한다.
오히려 그 정도면 신이 적다고 볼 수 있었다.
차원 하나에 하나의 신이 있다고 쳐도 1억에 가까우니까.
물론 모든 차원이 신이 있는 것도 신이 적거나 많은 것도 아니었다.
신이 없는 무소속 차원도 있고, 최소 대여섯에서 많으면 수십, 수백의 신을 보유한 차원도 있었다.
그건 차원의 규모에 따라 달라진다.
아니,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발포스에게 그렇게 신이 많습니까?”
“발포스님을··· 그냥 이름으로 부른다고? 나도 이름으로 불리지 않았는데···.”
“···?”
“네, 많습니다. 저희도 놀랄 정도로요.”
뭐지, 무슨 말을 한 것 같은데.
No. 72가 착각이라며 말을 돌린다.
이상하기는 했지만, 본인이 그렇다고 하는데 내가 뭐 어떻게 하겠는가.
거기에 대고 꼬치꼬치 캐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어떻습니까. 부담스럽지 않습니까? 은행장님께서 저희의 거래처이시니 특별히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마신 발포스님을 데리고 있을 생각이 없다고 말만 하시면 됩니다. 그렇게만 하신다면 저희가 직접 발포스를 은행장님에게서 때어놓겠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다가가지 못하게 보호도 해드리겠습니다. 어떻게 도움을 받으시겠습니까?”
“···.”
파격적인 혜택이었다.
두 번다시 오지 않을 기회인 게 분명했고, 마신 발포스를 처리할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이기도 했다.
좋은 기회인데, 오히려 너무 파격적이라 경계심이 생겨났다.
어째서 그런 제안을 하는 걸까.
시스템은 장사치다.
그들을 상대한 시간은 짧았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그들의 성향을 어느 정도 파악했다.
그들은 절대 자신의 이득이 없는 일에는 나서지 않는다.
절대적으로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확신이 들어야 움직인다.
그런 시스템의 관리자가 무료라며 저런 제안을 해온다.
당연히 그 제안 사이에 숨겨진 무언가가 있을 거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대가 없는 호의란 없다는 말이 있듯이, 그가 한 제안을 받아들이면 나중에 내가 그들에게 무엇을 해줘야 할지 모른다.
나는 괜히 약점을 잡히기 싫었다.
차라리 코인이라도 요구했다면 편한 마음으로 수락했을 텐데.
“괜찮습니다. 시작이 좋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지금은 제 직원입니다. 본인이 나가기를 원하지 않는 이상 저를 그를 품고 있을 겁니다.”
“···그렇게 말하실 것 같았습니다. 그러니 저승왕도 도와준 거겠죠.”
“···예?”
저승왕은 내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서 코인을 빌려준 건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의아심을 품기도 전에 그가 움직였다.
기이이잉-
그의 손이 닿은 철창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 안에 있던 발포스가 소리는 달리지 않지만, 마구 발광하는 게 느껴졌다.
“원래 이러면 안 되지만, 은행장님이 죽는 건 싫으니···.”
철창이 작아지기 시작했다.
안에 있던 발포스의 몸이 작아지는 철창에 따라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지며 괴성을 질렀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콰드득-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철창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앞으로 이게 당신을 지켜줄 겁니다.”
No. 72가 묵색의 팔찌를 내 손목에 채웠다.